라티오의 책들 | 철학 고전 강의 — 35

 

⟪철학 고전 강의 - 사유하는 유한자 존재하는 무한자⟫, 제39강

❦ 진리의 기준들
❧ 플라톤
- 눈에 보이지 않는 형상
- 수학적 비례
❧ 데카르트
- 진리의 궁극적 기준은 신
- 신을 아는 자기의식
❧ 칸트
- 과학적 진리와 도덕적 진리
- 서로 질적으로 다른 진리들을 매개하는 판단력
❧ 헤겔
- 역사 속에서 진리에 이른 주체로서의 인간
- 신의 입장에 올라섬

 

2021.05.04 철학 고전 강의 — 35

지난 시간에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라는 책이 무엇을 다루고 있는가, 인간의 정신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가, 이애 대해 정신의 여러 측면을 다루고 있다고 말했다. 오늘은 ⟪철학 고전 강의⟫ 제39강 진리의 역사성, 진리주체론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헤겔은 무엇을 진리라고 하는가. 헤겔은 근대철학의 출발점이 데카르트의 자기 자신을 아는 앎, 즉 데카르트의 코기토, 자기의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헤겔은 결국 내가 데카르트와 크게 다르지 않게 내가 아는 것이 진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철학자니까, 데카르트도 그랬지만, 무작정 내가 아는 것이 진리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내가 아는게 진리의 기준이다. 그런데 철학자니까 그렇게 말하면 너무 뻔뻔하니까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을지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고민을 해봐야 했다. 그런 고민의 산물에 대해서는 40강에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다시 말해서 헤겔이 얘기하는 것이 진리주체론인데 진리주체론이라는 것은 내가 진리다, 내 말을 믿으라고 하는 것이 진리주체론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얘기하려면 정말 자기자신이 말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자신있게 말하려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나를 진리의 주체로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검토를 해야 한다. 그것이 40강에 있는 얘기이다.

헤겔은 내가 진리다, 내가 아는 것이 진리다 라고 말한다. 그것이 진리주체론이다. 그러한 주장을 하려면 어떤 정도의 수준과 어떤 정도의 앎을 거쳐야, 내가 어떤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가야 진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도 얘기해야 한다. 왜 이 사람은 그러한 주장을 했을까를 39강에서 살펴본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공부를 제일 잘한다고 말했다고 해보자. 그러면 어떤 정도의 수준까지 올라가야 하는가. 누가 세상에서 제일 부자인가. 돈은 셀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정도는 되어야 내가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기준은 없다. 수없이 많은 경험을 해야 한다. 헤겔은 신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적 입장에 올라서면 진리 입장에 올라서는 것이다. 도대체 헤겔이 말하는 진리주체론이라는 것이 왜 나왔는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철학사를 통해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기준이 어떻게 변했나. 즉 진리의 기준은 그때그때 시대에 따라 또는 철학자들에 따라 달라졌다 그것은 우리는 '진리의 역사성'이라는 주제 아래 묶는다. 플라톤에서 보면 《국가》 제1권에서 트라쉬마코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이렇게 얘기한다.  내가 틀렸다고 하는 것의 근거가 무엇인가. 트라쉬마코스가 같은 사람은 강한 자의 올바름은 강한자의 편익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올바름은 진리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자면 올바름은 강한자의 편익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민주정치에서는 수가 많은 사람이 강한 자이다. 그래서 그것이 진리라고 말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그게 아니라 진리는 따로 있는데 그것이 형상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플라톤주의이다. 벌써 진리의 기준이 다르다. 많은 사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진리라고 여기지 않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은 민주정 국가니까 정치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는 다수결, 그리고 다수의 의견을 결집한 정당, 정당이 민주정에서는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본인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형상이 진리의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데카르트에게는 진리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데카르트에서는 내가 진리의 기준이 될 수도 있겠다고 얘기한다. 그 다음에 칸트에서는 확실한 진리라는 것은 없는데 그래도 진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학의 진리이다. 경험 데이터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서 누구나 다 동의할 수 있는 절차를 거쳐 기준을 세운 것이 진리이다. 그런데 칸트는 고민을 하는 것이다. 도덕은 어떻게 할 것인가. 도덕도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올바름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과학적 진리는 아닌데 우리 인간이라는 존재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일종의 도덕적 진리라는 것이 있다. 그 도덕적 진리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는 것이 칸트의 문제제기였다. 그러다보니까 진리가 둘로 나뉘어져 버렸다. 《순수이성비판》에서 말한 것과 같은 자연과학적 진리와 《실천이성비판》에서 말한 것과 같은 도덕적 진리가 나뉜다. 이 둘은 전혀 종류가 다르다. 가령 플라톤 같은 경우 애초에 자연과학적 진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이 사람은 급했던 것이다.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이상한 것을 가지고 올바름이라고 믿고 난리를 부리니까 그렇다. 칸트는 자연과학적 진리와 도적적 진리가 있으니까 사람이 이율배반에 빠지게 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이쪽 입장을 들면 저쪽이 거짓이 되고, 저쪽 입장을 들면 이쪽이 거짓이 된다. 이를 이율배반이라고 한다. 한쪽 올바르면 다른 쪽이 반드시 틀리는 것.  그러면 고민이 된다. 그래서 《판단력 비판》을 썼다는 말이다.

그런데 헤겔에 와서는 신이 진리이다. 그렇다고 해서 신을 어떻게 하겠는가. 말하지 않았는데 딱 깔고 있는 것는 헤겔이 숨겨놓은 전제가 있다. 그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신의 현현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신의 현현이기때문에 신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헤겔은 인간이 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그런 신적 인식에 이르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의 기준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작정 신적 인식에 이를 수는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신적 인식에 이를 수 있는가. 자기 자신의 삶, 그리고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를 온전히 충실하게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역사성이다. 즉 자기가 영위하는 삶과 또 인류의 삶, 세계사, 이 둘을 충실하게 자기 머릿속에 인식으로서 간직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진리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바로 진리의 역사성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는 것인가. 역사책을 많이 읽으면 되는가. 모르겠다. 헤겔이 말하는 진리, 그리고 어떤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진리의 기준이 될만한 인간인가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물론 내가 진리다 이러면 굉장히 위험하다. 나만 진리라는 태도로 곧바로 이어져 가기 쉽다. 그게 당파성이 되기도 쉽다. 그것은 늘 주의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자기가 진리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철학의 역사 속에서 드러났던 진리론 들과 대조하면서 늘 음미해보는 태도가 반드시 필요한다. 그것이 있어야만 편견과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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