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 김용섭: 삶은 늘 우리를 배반한다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1. 12. 1.
삶은 늘 우리를 배반한다 - 강유원.김용섭 지음/미토 |
서문
1. 구석기... 있는 그대로의 자연
2. 신석기... 추상적 법칙의 발견
3. 이집트... 거대 농경문명과 영원한 예술
4. 그리스... 고전주의 예술의 완성, 예술가의 고향
5. 헬레니즘... 분열된 세계, 이질적인 것들의 혼합
6. 로마... 활짝 열린 실용주의
7. 비잔틴... 소박한 신앙의 화려한 표출
8. 로마네스트... 성과 속의 완전한 통합 위에 선 예술
9. 고딕... 어지러운 세상, 쇠퇴하는 믿음, 무한히 덧붙이기
10. 르네상스... 고전주의 짧게 끝나버린 이상주의와 천재의 시대
11. 매너리즘... 근대의 혼란, 예술가의 고뇌와 절망
12. 바로크... 부르주아 계급의 환호성
13. 로코코... 몰락하는 귀족들의 마지막 치장
14.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혁명의 열정, 그러나 사라진 희망
15. 인상주의... 순간의 감각
서문
예술이란 단어가 들어간 문장은 대체로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환상적인 미에 대한 찬미와 천박한 수준에 대한 경멸을 동시에 갖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애호는 그 뒤편에 현실에 대한 소홀이라는 그림자를 갖는다. 예술을 따르자니 현실 여건이 안되고, 현실을 따르자니 예술이 안쓰럽다. 사랑과 같은 것이다. 예술과 현실은 결합될 수 없어 보이지만 예술가와 사업가 커플은 행복한 한 쌍으로 보인다. 예술은 돈으로 만들어진 여가를 먹고 자란다는 편견을 받아들인다면 말이다.
예술과 시대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한쌍처럼 보인다. 예술은 시대를 넘어선다고 한다. 예술가는 시대가 어찌 돌아가든지, 자기 하고 싶은 짓을 한다고 한다. 시대는 예술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저 너희들끼리 잘 먹고 잘 살라고 내버려 둔다고 한다. 과연 그럴까? 예술기들은 그렇게 살까? '예술처럼 살고 싶다', '예술을 즐기며 살고 싶다' ━발설한 순간 낯간지러워지는 말들이다. 현실이 예술에 등을 돌리고 있다 해도 아주 잠시라도 그런 순간을 가지고 싶은 게 많은 이들의 소망이다. 계산기로 답이 나오는 현실에서 삶은, 예술이 아닌데도 우리가 의도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내면의 생각을 저만치 비켜나 있다. 삶에게 마치 무슨 자체 의지라도 있는 듯하다.
삶이 늘 우리를 배반하는 현실에서 예술을 즐기는 낯간지러운 시간을 좀 가졌다 해서 우리가 그리 잘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예술작품을 들여다보는 순간만큼은 예술을 즐길 수 있었다. 얼마 안 있어 현실로 돌아오긴 했지만 우리는 예술 전문가가 아니다. 우리는 현실에서 밥벌이를 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삶과 현실과 시대에게 늘 배반당하면서 그걸 어쩌지 못하고 예술가처럼 밀쳐내지도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는 예술작품을 읽어도 그 안에서 현실을 보았고, 시대를 보았다. 그것을 적어놓은 것이 이 책이다.
책을 쓰기 위해 공부를 먼저 해야 했다. 공부는 두 사람만이 한 것이 아니라, 출판사에 다니면서 홍보일을 하는 박상미, 건설회사에 다니면서 조경설계를 하는 박성혜, 잡지사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하는 진달래가 스터디 모임에 가담했다. 이 회사원들은 평소에 갈무리해 둔 해박한 지식과 뛰어난 감수성으로써 이 책의 출간에 기여했다. 김용섭은 좌장으로서 그 모임을 이끌었으며, 강유원은 열심히 참여하는지를 점검했다.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미토 출판사의 편집자 이상근은 적절
하고도 올바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지은이들 적음
039 고전주의자들은 대체로 세계를 이해 가능한 것으로 본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운동을 완전히 추상화시켜서 영원불변의 상으로 파악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고전주의의 태도가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 이것이다. 뮈론의 작품은 플라톤의 철학과 합치하는 지점이 있기도 하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플라톤은 완전한 진리를 파악하기 윈해 대상의 감각과 운동을 추상화시킨다. 그리하여 그는 고정불변의 이데아에 이른다.
어쩌면 고전주의란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땅히 있어야 할 세계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에서는 아주 드물게 이러한 환상이 실현된 적이 있다. 기원전 5세기와 4세기 경의 그리스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그것은 완성을 보여주었지만 환상이라 할 정도로 짧은 시기였으며, 그러기 때문에 늘 예술가들은 돌아갈 수 없는 이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
047 헬레니즘의 철학은 예술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인다. 예술은 일종의 격정을 가지고 있다. 현실 상황에 즉물적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렇지만 철학은 삶의 조용한 안식을 찾아 내면으로 도피한다. 똑같은 시대 상황 속에서 예술과 철학의 반응이 이처럼 양극을 달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철학이 한 시대를 가장 잘 표상한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아니, 어쩌면 둘 다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하나는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다른 하나는 눈 앞의 현실에서 등을 돌린다. 둘 다 차분한 되새김도 숙고하는 반성도 아니다.
057 사람들이 로마를 기억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예술작품으로써 로마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공공건축물도 예술 작품에 속한다면 가능할 테지만. 로마 제국은—어떤 이는 공화정 시대의 로마를 더 그리워하기도 하지만―오늘날의 서양문명의 저변에 스며든 모든 관행과 법률의 기반을 놓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그것을 뚜렷한 형태로 만들었다. 사람들의 삶에 스며든 것이 그러한 장치들이라면 로마는 더할 나위 없이 큰 기여를 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삶과 예술이 서로 다른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
068 그리스문화가 비잔틴 성립의 주요 요소 중의 하나라고는 하지만, 비잔틴 제국의 중심 기둥은 기독교 신앙이다. 신앙은 인간이 가장 소박한 형태의 삶을 살아갈 때의 모습이다. 중세의 스콜라 철학과 같은 신앙에 대한 고도의 사변적 통찰이 있기도 하지만 참다운 신앙은 그러한 정교한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신과 대면해서 자신의 내면을 신에게 온전히 바치고 신의 말씀을 곧이 곧대로 따르기만 하면 될 뿐이다. 이것이 소박한 신앙이다.
077 기도하는 자, 노동하는 자, 다스리는 자 — 이것은 항상 관철된 것은 아니었지만 중세 전반을 설명할 때 사용되는 전형적인 계층 구분이다. 기도하는 성직자들은 사회 구성원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어내고, 다스리는 자들은 성직자들로부터 신의 뜻을 위임받아 세속세계를 통치하였다 . 노동하는 자들은 구원의 복음을 충실히 믿으며 일상을 영위했다. 로마네스크 성당 건축을 시도한 이들은 분명 기도하는 자들이었을 것이고, 그들이 이른바 '아트 디렉터'였을 것이며,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올린 자들은 구원을 의심치 않는 노동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명료한 상황에서 예술 의욕을 거론하는 것은 무리가 아닐 수 없겠다.
086 고딕은 근본적으로 회의주의의 양식이다. 신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과연 신의 세계로 가는 통로는 있는 것일까, 라고 물었을 때 고딕 시대의 사람들은 예전 사람들보다 더 힘있고 강하게 '그렇다'고 말했지만 그것은 멀어져 기는 신의 세계에 대한 부르짖음에 가까웠다. 경험적 진리가 종교적 진리를 압도하기 시작하고 있었고, 이 경험적 진리를 종교적 진리 속으로 끌어들이려고 노력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범신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귀결된다.
096 세계는 항상 불확실하고 진리는 발견되지 않으며, 삶은 불안 속에서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현재와 과거의 일상이다. 그러한 일상의 반대물로서 또는 이상으로서 나타나는 고전주의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숙명을 지니고 있다. 르네상스 고전주의도 여기서 비켜날 수 없다. 그리스 고전주의와 마찬가지로.
105 매너리즘은 이 확신과 자신감을 상실하면서 꿈과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양식이며, 이는 이탈리아 반도뿐만 아니라 전 유럽적인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매너리즘은 독자적 예술 양식으로서 구축되었다기 보다는 시대의 끝자락에 매달린 분열된 의식들의 반사물로서 규정해야 할지도 모른다. 눈 앞에 펼쳐지는 현실 세계가 혼란스럽고 불투명하면 인간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신에 무분별한 광신으로 달려가든지 아니면 완전한 허무주의로 빠져들든지. 예술가들은 대략 그 중간에 서 있다. 중간, 그것이 더 고통스러운 것이다.
115 바로크의 세계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유한함을 인정하면서도 사유의 무한성이라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움직인다. 바로크 회화 속에는 '진리를 잡기 위해서 운동하는 나', 즉 데카르트적 자아가 있으며 그 운동이 모아지는 빛나는 중심에서 삶의 활력이 흘러나온다. 이것이 바로 근대 부르주아 계급이 자신의 실체를 천천히 드러내는 예술의 방식이다.
125 로코코는 분명 바로크 양식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로코코는 귀족의 양식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자기 중심적 태도가 지속된다는 점에서 바로크의 후기 양식으로 이해되지만 사실상 그것은 전적으로 18세기라는, 17세기와는 사뭇 다른 시대의 산물이다. 그것은 귀족의 시대가 아닌 부르주아 계급이 완전한 지배력을 향해가는 시대의 산물이며 종교가 그간 누려왔던 호소력을 잃어버리는 시대의 양식이다. 이러한 몰락으로 인해 17세기 바로크 양식이 가지고 있었던 장엄하고 격정적인 느낌은 사라지고 우아하고 친근한 느낌으로 변화하게 된다. 바로크 화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격정적이며 진지했던 양식은 티에폴로나 와토, 부셰처럼 가볍고 우아하며 밝은 색채로 변화한다.
137 낭만주의는 혁명 이후의 예술 양식이면서 18세기 로코코의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는다. 즉 귀족이 자신의 시대가 갔음을 알고 화사하고 따뜻한 환상 속에 스스로 빠져들어 갔듯이 새로운 시대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혁명 이후의 세계가 합리적이지도 행복하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그것으로부터 고개를 돌리거나 현실의 악몽은 꿈 속에서도 이어진다는 절망적인 시대 인식 속에서 몸부림치기 시작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낭만주의는 합리성에게 배반당한 이들의 예술이다. 뼈저린 배반을 겪은 그들은 절대자를 희구하면서 열정과 의지를 인간의 본질로 간주했다.
151 인상주의는 양식적인 측면에서나 그 정신적 배경에서나 구석기 예술과 신석기 예술의 사이의 단절만큼이나 기존 예술과는 전적으로 다른 양식이었다. 이 당시 사진이라는 것이 나타나 도시의 풍경, 사람들의 삶을 포착하였듯이 인상주의자들도 도시의 풍경 사람들의 삶을 포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사진은 그 양식적 한계 속에서 예술로서의 지위보다는 기록 도구로서의 기능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했으나, 인상주의 예술은 그 이상을 이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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