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켈리: 로마 제국 ━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5

 

로마 제국 - 크리스토퍼 켈리 지음, 이지은 옮김/교유서가

제1장 정복
제2장 황제의 권력
제3장 공모
제4장 역사 전쟁
제5장 사자에게 던져진 기독교도들
제6장 로마인의 삶과 죽음
제7장 다시 찾은 로마

연표/ 참고문헌/ 역자 후기/ 도판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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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정복
23 기원전 2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이같은 빠른 성장은 대략 한 세기 후에 제정이 확립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로 독재가 자유를 또는 전제가 독립을 대체했다고 보는 것은 속단일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이래 황제들 치하에서도 로마의 정치는 줄곧 제국의 전리품을 놓고 경쟁하는 몇몇 특권적 가문들이 지배했다. 제정의 성립으로 인해 바뀐 것은 이러한 경쟁을 규제하는 방법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부유한 속주 출신자가 자신들의 부를 바탕으로 제국 전역으로 확대되는 귀족사회로의 진입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로 변모한 것 다시 말해 일개 군사령관이 황제로 성공적으로 변모한 것은 로마 정치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단절되었다기 보다는 오히려 경쟁이 심한 과두정하에서 달성된 치열한 싸움 끝에 권력이 재편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로마 혁명'은 공화정 체제 속에서 제국을 세운 것이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 이후에 새로운 영토의 획득을 엄격하게 제한한 조치 역시 그리 놀랄 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브리타니아와 다키아(오늘날의 루마니아 일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치러진 전투들은 황제들이 직접 지휘했다. 다른사람들이 군대 지휘권을갖는 사태는 철저히 통제되었다. 잠재적 경쟁자들, 심지어 황실 내부의 경쟁자들도 엄중한 경계 대상이 되었다. 이런 조치는 몸으로 익힌 위기관리의 철칙이었다. 기원전 1세기의 처참한 내전이 있는 그대로 보여주듯이, 지중해 정복으로 얻은 눈부신 전리품들 때문에 심지어 킨키나투스마저도 농사일로 돌아가기를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제2장 황제의 권력
51 서기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브리타니아 침공을 기념하는 칸과 네로 황제 재위 초기인 54년 아르메니아에서의 승전을 기념하는 칸 사이에는 날개를 단 승리의 여신이 새겨져 있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처럼 로마의 황제들도 벌거벗은남성 영웅의 모습으로묘사되었다. 건장한 풍채에 망토를 인상적으로 휘날리고 있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육지와 바다의 의인화된 상이 경의를 표하고 있고, 다부진 체격의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패배한 브리타니아의 머리채를 잡아 머리를 뒤로 젖힌 채 곧 치명타를 가할 태세로 의기양양하게 서 있다.

이는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장면들이다. 거기에서는 로마의 승리를 기념하면서 이를 전통적인 신화와 고대 신들이 정해놓은 우주 질서의 일부로 파악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황제를 시간이나 공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신과 같은 존재로 여김으로써, 로마의 속주사람들은 자신들의 예속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일찍이 로마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과거를 로마 지배하의 현재라는 시간과 연결할 수 있었다. 아프로디시아스에서는 제국 지배의 가장 잔혹한 일면인 정복마저도 그리스 세계의 전통적인 종교 체계에 통합되었다. 무자비한 정복 활동은 그리스 신화와 로마의 역사, 아프로디시아스 시와 로마 시, 그리고 올림포스 신들과 벌거벗은 로마 황제들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그 잔인함이 약화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각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한층 더 발전하는 로마지배를 찬미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제국 찬미의 세계상에서는 아프로디시아스가 브리타니아와는 달리 무기력하게 황제의 발에 짓밟히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58 황제 숭배를 열렬히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황제를 숭배하고 (그들이 사망한 후에는) 신격화하는 행위는 로마제국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 에페소스, 아프로디시아스, 미틸레네, 갈리아 어디에서든, 황제 숭배는 개인과 공동체를 단일한 제국의 중심과 연결할 수 있었다. 전통적인 신들과 지역의 오랜 신앙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서 되풀이된 황제 숭배라는 의례의 틀 안에서 통합되었다. 또한 이로써 황제라는 절대 권력을 이해하는 언어를 제공할 수 있었다. 에페소스의 살루타리스와 같은 부유한 사람들이나 공동체 안의 최고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른 인간에게 순종의 표시로 머리를 숙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사회적 굴욕을 무릅쓰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신으로서의 황제를 숭배하는 것은 지방의 고위층에게 스스로의 체면을 잃지 않고도 열등한 지위를 수긍할 만한 방법을 제공했다. 실제로 공적 ·사적인 영예를 둘러싼 경쟁에서 신관직을 수행하고, 축제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 신전 건립을 후원하는 사람들은 초인간적인 황제와의 특별한 관계를 과시함으로써, 자신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한충 더 강화하고, 공동체 안에서 자신들의 우월한 지위를 더욱 높일 수 있었다.


제3장 공모
87 로마 제국의 성공 열쇠는 지방 엘리트층에 있었다. 정복 초기의 정신적 충격을 견뎌내고, 조직적인 저항은 가망이 없다고 단념해버린 사람들은 지배 권력과 적절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분명 이득을 챙겼다. 실제로, 많은 속주민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지역에서 기존 과두지배자 그룹이 경쟁자 없이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을 강화한 것에서 로마의 지배를 실감했다. 프루사와 스미르나 같은 도시에서는 소수의 부유한 가문들이 제국측의 분명한 동의에 기초해서 도시의 운영을 독점하고 있었다. 크리소스톰이 강조했듯이, 도시의 내부 분쟁으로 인한 공공질서의 붕괴를 방치해 그러한 지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었다. 마찬가지로, 서부 속주에서도 로마 정부의 효율성은 지방 유력자들과의 긴밀한 관계 유지에 달려있었다.

106 좀처럼 실행되진 않았지만 속주의 저항이 감지되면 로마는 보복에 나설 것이라는 공포가 제국의 도시들 위에 먹구름처럼 걸려 있었다. 지방 엘리트층이 현지에서 얼마나 교묘하게 도시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든지 간에 그들의 특권적인 지위는 바로 로마 통치의 매개자 역할을 하려는 지속적인 의지에 달려 있었다. 로마의 보복에 직면한 경우에는 지역에서의 지위, 심지어 로마시민권조차 거의 소용이 없었다.


제4장 역사 전쟁
136 역사는 어쩔 수 없이 제국에 희생된다. 하드리아누스가 자신의 흔적을 다른 어디보다도 깊이 새겨놓은 아테네에서는 황제의 자선 행위를 기념하는 멋진 아치문이 올림피에이온 신전 근처에 세워졌다. 그 서측 전면에 새겨진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보인다 "여기는 지난날 테세우스의 도시였던 아테네이다." 이해가 더딘 사람을 위해서 반대편의 비문이 요점을 다시 말해준다. "이곳은 테세우스의 도시가 아니라, 하드리아누스의 도시이다." 하드리아누스가 세운 다른 기념물들처럼 이 아치문과 거기에 새겨진 비문은 그리스의 역사에 대한 열정적인 지지로 받이들일 수 있다. 페리클레스가 활약하고 판헬레니온 동맹의 본부가 들어서 있던 이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로마 황제는 스스로 아테네의 최초 창건자와 짝을 이루어 자신의 '대비 열전'을 암시하는 재치를 보이는 것이다. 혹은 자신을 테세우스라는 최초의 창건지에 견줌으로써, 현재와 과거의 아테네에 대한 제국의 지배를 단호하게 선언하려 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제5장 사자에게 던져진 기독교도들
151 기독교도들은 끌려나와 야유를 받고 살해되는, (사회가) 바라지 않는 자들로 이루어진 또하나의 집단일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도들에게 고통과 죽음이 따르는 순교는 결코 냉혹한 적에게 무릎을 꿇은 패배가 아니었다. 순교는 승리였다. 로마인들이 자신을 과시하고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그 장소에서 되풀이된 순교는 로마인들에 대한 극적이고 공공연한 저항의 몸짓이었다. 제국 도처에 거주하는 기독교도들에게 순교는 신앙의 의미 있는 확인이며, 로마의 체제를 경멸하는 자신들의 신념을 강력하게 표명하는 것이었다.

160 전통적 종교를 믿고 있던 로마인들은 기독교도들을 매도하거나 처형하거나 혹은 단순히 무시했는데, 이는 로마인들이 이 새로운 종교의 핵심 가운데 하나를 놓쳤음을 말해준다(혹은 그들은 그런 일에 관여할 여유가 없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기독교도들을 범죄자나 강도, 불량배 대하듯 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기독교라는 새로운 조류가 가지고 있는 예외적인 특징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다. 기독교는 (분명히) 하나의 종교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경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였다. 로마인들이 이상하고 이국풍이지만 부인할 수 없이 오랜 전통을 지닌 미신이라고 여긴 유대교처럼 기독교 역시 신의 말씀이라고 믿어진 일련의 신성한 텍스트에 근거하는 종교였다. 경전에 의거하고 있다는 이 사실이야말로 기독교를 돋보이게 하는 특징이었다.

166 그러나 그들이 기독교도들을 범죄자처럼 본 것은 기독교의 핵심을 놓친 것으로,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언어, 서적, 즉 말씀=성경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려버렸다. 또한 그럼으로써 자신의 신앙만이 옳다고 독선적으로 확신하는 종파의 성장을 막지 못했다.


제6장 로마인의 삶과 죽음
188 가혹하게 높은 사망률은 로마 여성의 출산 능력에 상당한 부담을 안겼다. 안정된 인구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균해서 (생리학적으로 임신이 기능한 나이인) 월경 개시기에 도달한 여성 1명이 딸 1명을 낳고, 그 딸도 월경 개시기까지 성장하는 것이 전제된다. 유아기 사망률이 높은 사회에서 이같은 냉정한 인구학적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정상 출산 인구의 수는 급격히 증가한다. 안정된 인구수를 유지하기 위해서 평균해서(여기서도 유용한 확률 지표로서 '서형 제3레벨'을사용하면) 여성 1명이 딸 2.5명, 즉 아들까지 쳐서 적어도 5의 아이를 낳지 않으면 인구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다.

191 아마 자녀의 3분의 1이 사춘기에 이르기도 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절반 이상이 25세 이전에 이미 아버지를 여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평균해서 10세의 아이들 가운데 조부모가 한 명이라도 생존해 있을 가능성은 50 퍼센트였다. 20세 인구 가운데 친할아버지가 생존해 있는 경우는 1퍼센트도 안되었다.

198 로마 제국에서 소규모 자작농들은 침묵하는 다수파였다. 그들은 비문을 남긴 경우가 없고, 그들을 기리는 묘비도 거의 없었다. 나무로 허름하게 지은 농가는 대부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현존하는 문학작품에서도 세련된 도회지에서 어리둥절한 모습의 촌뜨기로 웃음거리나 될 뿐, 그들 농민이 정식으로 등장한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부는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마 안 되는 벌이는 소작료나 세금으로 징수되어, 평시에도 변경에 주둔하는 군대를 지원했고, 제국의 행정적 · 문화적 일체성을 칭출하는 도시간 네트워크의 비용을 감당했다.


제7장 다시 찾은 로마
236 대부분의 경우, 현대에 재현된 고대는━인도에서의 영국제국주의에 관한 논쟁이나 1930년대의 대규모도시 판타지들과 같은―그러한 재현을 장려하는 사회들의 복잡성과 관심사들을 드러내는 의미심장한 해설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고대 로마에 대한 이러한 묘사들의 '정확성'(그들이 주장하는 진짜 실체가 무엇이든 간에)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글래디에이터〉의 상업적인 성공은 고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역시 지극히 현대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시의적절하게 상기시킨다. 이러한 시각들은 우리 자신의 주된 관심사와 문제점들을 아낌없이 보여주며, 우리들 자신이 열망하고 염려하는 것들을 비춰준다. 빅토리아 시대와 파시즘의 전례들처럼, 21세기의 로마는 과거보다는 현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폭로한다. 우리의 꿈과 두려움에 토가를 입힌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은 로마 제국에 대해 별로 흥미롭지 않은―어떤 면에서는 별로 재미있지도 않은―아주 짧은 안내서를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