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역사 고전 강의 — 55 / 제34강(2)

 

⟪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제34강(2)

“그들은 근대 세계의 주인공인 부르주아계급의 등장 과정과 업적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첫 문장,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
— ⟪공산당 선언⟫의 텍스트 구조, 사회경제사적 방법론, 역사의 주체로서의 계급

 

2022.02.05 역사 고전 강의 — 55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함께 쓴 1848년 혁명의 선언서, ⟪공산당 선언⟫을 우리가 읽기 시작했는데, 34강부터였다. 지난 번에는 ⟪공산당 선언⟫과 관련된 자잘한 이야기들을 많이 했던 것 같다. 발문에서 두번째 문장을 읽어보겠다. "그들은 근대 세계의 주인공인 부르주아계급의 등장 과정과 업적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이 문헌은 묘사로 가득 찬 듯하지만 미래의 전망을 세우기는 마찬가지다. 다가올 세상의 주인공이 신의 섭리나 인류 일반이 아닌 프롤레타리아계급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근대 세계의 주인공인 부르주아계급의 등장 과정과 업적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그냥 단순한 문장이다. 그런데 엥겔스는 아닌 것 같은데, 마르크스의 학문의 방법론이라는 것이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과정, 형성사,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어떤 것이 성취되었는가를 묘사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 즉 발생사, 어디가 그 기원이고 그것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귀결되었는가를 설명하는 것, 이것이 발생사이다. 발생사를 탐색해보는 것이 역사이다. 그래서 발생사적 방법론, 현재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어떤 사태가 있는데 그 사태의 기원이 무엇이고 그것에 다른 것들이 결합이 되어서 그 기원으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과정 그 전체를 설명하려는 시도, 이것을 형성사적 방법론 또는 발생론적 설명으로 이야기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특히 두 사람의 방법론을 가지고 변증법적 방법 또는 유물변증법이라고 말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변증법이라는 말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사실 변증법이라는 말은 정확하게 무엇을 가리키는지가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있어서 변증법이다, 유물론적 역사이해다 라는 말이 나오면 우선 발생론적 설명 또는 형성사에 대한 고찰을 그 사람들이 변증법이라는 말로 지칭하고 있다는 것을 유념하면 좋다. 변증법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가토 신로 교수가 쓴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강의》에 보면 초월적 존재에 대한 탐구를, 그것을 초월적 존재, 인간의 능력을 벗어나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해서 사유하는 방법을 변증법적 사유라고 하기도 한다. 변증법이라는 단어는 사실 안쓰는 것이 가장 좋다. 제 선생님의 논문이 변증법에 관한 연구인데 그 결론이 뭐냐면 변증법은 지칭이 불분명하니 안쓰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경우에도 마르크스가 변증법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열 번을 쓰면 여덟 번은 형성사적 고찰 또는 발생론적인 탐구를 가리킨다고 보면 되고, 두 번은 서로 반대되는 적대되는, 서로 어긋나 보이는 것이 동시에 있는 것을 변증법이라는 단어로 가리킨다. 그런 것은 먼 옛날부터 있었다. 기쁜 것과 슬픈 것은 정확하게 모순은 아니다. 기쁨과 슬픔이 겹쳐서 있을 수 있다. 그런것을 반대관계라고 한다. 애증이라는 말도 있다. 그런 것을 가리킬 때 쓰는 것이 열번 중에 두번정도이고 나머지는, 유물변증법이라고 하면 유물이라는 것도, 자연과학적인 의미에서의 물질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물질이라는 것은 경제적인 활동, 생산활동, 경제적인 생산활동 이런 것들을 물질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 그 물질을 중심으로, 인간의 경제적인 활동을 중심으로 해서 역사가 전개되어 왔다고 하는 것이 유물론적 역사이해, 즉 유물변증법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공산당 선언⟫은 무엇인가, 바로 그 물질적인 생산활동, 즉 경제적인 것을 중심으로 역사를 살펴보니까 이러하다는 것을 집약적으로 표현해놓은 문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공산당 선언⟫을 지금 역사고전강의에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왜 ⟪공산당 선언⟫을 역사철학의 문헌으로 보는가. 인류의 역사를 물질적 생산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해서 발생론적으로, 형성사를 가지고 서술하기 때문에, 그리고 미래의 전망, 지금은 부르주아 계급의 전성기일지는 모르나 미래의 전장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주인공이 된다고 하는 신의 섭리가 아닌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미래의 주인공이 된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공산당 선언⟫이 가지고 있는 역사철학적 바탕이다. 마르크스와 동갑인 역사학자가 야콥 부르크하르트이다. 부르크하르트도 마르크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는데 그 사람은 미래의 전망을 세우지는 못하겠다고 얘기한다. 역사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는 하는데 아마 부르크하르트가 훨씬 정직하고 역사가의 사명이 미래의 전망을 세우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에 굉장히 마음을 두고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근대 세계의 주인공인 부르주아계급의 등장 과정과 업적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극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에 주목을 해보면 이 텍스트가 드라마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부르주아계급의 등장 과정과 업적"은 역사적인 고찰이고 그 역사적인 고찰을 어떤 형식에 담아서 묘사하는가. 드라마의 형식에 담아서 묘사한다. 그래서 ⟪공산당 선언⟫의 텍스트 구조는 드라마, 즉 부르주아 계급의 비극과 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희극, 희극은 아니다, 그런 것이라고 하겠다. 지금 34강에서 37강에 이르는 과정을 좀 자세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뭐냐면 ⟪공산당 선언⟫를 놓고 그것의 주해를 달아가면서 읽자니 텍스트가 마땅한 것이 없어서 지금 역사고전강의에 있는 것을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다.

"드라마에는 주인공과 적대자가 있습니다." 드라마는 그렇다.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가 있다. "이 책의 주인공과 적대자는 각각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부르주아지, 부르주아 계급을 가리킬 때 부르주아지라고 하고, 프롤레타리아트,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가리킬 때는 프롤레타리아트라고 한다. 주인공과 적대자인데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계급이다. 계급이라는 집단이 주인공이다. 항상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 개인은 자본가 계급에 속한 사람일 수 있다. 그렇지만 세상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면 프롤레타리아트, 즉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의식을 가질 수 있다. 의식이라는 것에 마르크스가 과도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기는 한지만 주인공과 적대자는 계급이라는 것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목차를 보면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로 시작하는 발문이 있고 1~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과 주인공인 부르주아계급에 대한 설명, 2장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입장에서 본 향후 세계 전망, 3장은 당시의 세계 정세 분석과 사회주의 운동의 방식, 4장은 부록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1장과 2장이겠다. 주인공이 부르주아계급과 프롤레타리아계급이기 때문에 부르주아계급의 형성사를 다루고, 그것은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역사에 대한 역사의 묘사이다. 그리고 2장은 미래에 대한 전망, 그러니까 과거부터 지금까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전망. 이게 1장과 2장이다. 

제34강 385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1848년 혁명의 선언서, ⟪공산당 선언⟫을 작성한다. 그들은 근대 세계의 주인공인 부르주아계급의 등장 과정과 업적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이 문헌은 묘사로 가득찬 듯하지만 미래의 전망을 세우기는 마찬가지다. 다가올 세상의 주인공이 신의 섭리나 인류 일반이 아닌 프롤레타리아계급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제34강 386 먼저 ⟪공산당 선언⟫의 텍스트 구조를 알아보겠습니다. 이 텍스트는 한 편의 드라마처럼 쓰여 있습니다. 드라마에는 주인공과 적대자가 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과 적대자는 각각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입니다. 목차를 보면 "하나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로 시작하는 발문이 있고 1~4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장은 자본주의의 전개 과정과 주인공인 부르주아계급에 대한 설명, 2장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입장에서 본 향후 세계 전망, 3장은 당시의 세계 정세 분석과 사회주의 운동의 방식, 4장은 부록입니다.


첫 문장.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앞서도 설명했듯이 "이 문장에서 투쟁하는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계급입니다. 다시 말해서 계급이 역사의 행위자로 등장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정말 엄청나게 역사철학적인 연구를 해서 내놓은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랬을지는 않을 것 같은데, 어떻게 보면 무심코 한 얘기일수도 있는데, 이 문장 하나가 역사를 보는 시각에서 굉장한 전망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대체로, 대부분의 경우 일반적으로 편향들이 있다. 역사의 주인공이 누구냐, 세계사적 영웅을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사실은 그 개인들이 모이고 모여서 하나의 집단을 이루는 것이고, 그래서 그 집단이 집단심성을 이룬다. 우리가 프랑스혁명을 이야기할 때도 《프랑스혁명의 공포정》을 이야기할 때도 마라, 당통, 로베스피에르를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들도 그 사람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그 사람, 한 사람이 잘나서 그렇게 갔겠는가. 시대가 그 사람에게 응집되어서 대변인으로서 떠든 것이다. 그것도 개인에게 초점이 맞춰진 것은 마찬가지인데 지금 여기서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계급'이다. 사람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계급만 나온다. 그러면 이제 이때부터 한 개인을 들여다보면서 역사 연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그 개인들이 모여서 계급을 형성하고 있고 그 계급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고, 서로 영향을 주고 있는 그런 인공적 구성물로서의 사회, 이 사회라고 하는 것이 연구 대상이 된다. 그러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역사적으로 탐구를 하는데 무엇을 탐구하느냐, 문화를 탐구하는 것도 아니요, 위대한 정치가를 탐구하는 것도 아니요, 그 역사 속에서 어떤 집단들이 경제적 활동을 어떤 식으로 해왔는가를 탐구하기 때문에 그것은 경제사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경제적인 활동이 어떤 집단 속에서 이루어졌는가를 또 살펴보니까 그건 사회이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이 ⟪공산당 선언⟫에서 취하고 있는 관점은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면 사회경제사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게 이제 마르크스가 내놓은 혁명에 대한 전망이라든가 이런 것들은 다 틀렸다고 얘기할 수 있어도 적어도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사회 속에서 펼쳐지는 경제적인 행위, 활동 그리고 그 활동의 주체로서의 계급, 사회경제사라고 하는 학문의 전망, 관점을 내놓은 것에 대해서는 아주 논박의 여지가 전혀없는 탁월한 업적이다. "역사에서 행위하는 주체가 계급이라면 역사의 연구 대상은 그 계급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인공적 구성물로서의 사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구성체를 중심으로 계급의 역학관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이 옆에다가 '계급 중심의 사회경제사 방법론'이라고 적어두면 되겠다. 이것을 집약해서 말하고 있는 문장이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이 문장 하나에다가 지금 이야기한 것을 집약해서 넣었다. 

제34강 386 이 책은 첫 문장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이 문장에서 투쟁하는 주체는 개인이 아니라 계급입니다. 다시 말해서 계급이 역사의 행위자로 등장한 것입니다.

제34강 386 역사에서 행위하는 주체가 계급이라면 역사의 연구 대상은 그 계급이 서로 대립하고 있는 인공적 구성물로서의 사회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회구성체를 중심으로 계급의 역학관계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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