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역사 고전 강의 — 54 / 제34강(1)

 

⟪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제34강(1)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1848년 혁명의 선언서, ⟪공산당 선언⟫을 작성한다.”
— ⟪공산당 선언⟫을 읽는 기본적인 입각점으로서의 역사적 맥락, 지식인과 사회의 관계

 

2022.01.29 역사 고전 강의 — 54

⟪역사 고전 강의⟫ 제34강을 읽는다. 34강부터 37강까지가 ⟪공산당 선언⟫에 대한 해설이다. ⟪공산당 선언⟫이라는 책, 팜플렛의 대해서 정말 많은 해설서들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대학에서 강의를 해서 《강유원의 고전강의 공산당 선언》을 출간한 적이 있다. 지금은 절판되어서 구하기 어렵다. ⟪공산당 선언⟫은 고전 텍스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팜플렛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역사 고전 강의⟫에서 책 한권에 대해서 조금 길게 해놓은 것은 드물다. 385페이지에서 425페이지니까 대체로 50페이지 가까운 정도의 분량이다. ⟪공산당 선언⟫이라는 텍스트 자체는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1848년 혁명의 선언서, ⟪공산당 선언⟫을 작성한다." 이 문장 안에 시대적인 맥락이 들어가 있다. 1848년 혁명의 선언서로서 만들어진 팜플렛이다. 따라서 1848년 혁명 이후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느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지금 2022년에 이 텍스트를 읽어볼 만한 의미가 있냐고 물어본다면 첫번째 대답은 글쎄 그렇게 심각하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것이 첫번째 내놓을 수 있는 대답이다. 1848년과 지금, 그 당시 여러나라에서 번역본이 출간되기도 하였고 하는 게 뒤에 붙어 있다. 그런데 과연 그 당시에도 의미가 있었을까 해본다면 글쎄라는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더욱이나 오늘날 ⟪공산당 선언⟫이 작성되던 시기와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와 글쎄 자본자계급과 노동자계급이라고 하는 이런 계급 구도는 여전히 의미있는 분석의 틀 일 수 있겠지만 크게 많이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가 변화했다. 따라서 ⟪공산당 선언⟫를 글자 그대로 읽는, 성서를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이 어이없는 정통신앙이듯이, ⟪공산당 선언⟫도 문자 그대로 읽는 것은 어이없는 정통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한다. 

제34강 385 마르크스는 엥겔스와 함께 1848년 혁명의 선언서, ⟪공산당 선언⟫을 작성한다.

《마르크스 이해하기》라는 욘 엘스터의 2권자리 책이 있다.  이런 책들을 먼저 읽는 것이 좋다. 그러면 이렇게 반문을 할 수 있다. 너는 ⟪공산당 선언⟫을 읽고 해설서를 쓰지 않았나. 본인의 독서이력을 전제한다면 《마르크스 이해하기》를 먼저 읽은 사람은 아니다. 이를테면 마르크스의 저작을 처음으로 읽었다고 하는커ㅏ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40년 가까이 마르크스와 관련된 책과 저작을 읽어왔다. 데이비드 맥렐런의 《칼 마르크스의 생애와 사상》 또는 로버트 터커의 《칼 마르크스의 철학과 신화》 이런 1940, 1950년에 출간되었던 책들이 번역된 것, 이런 것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관점에서 만들어진 책, 그리고 가장 최근에 나온 이사야 벌린의 마르크스 평전, 많이 있다. 경제사에 관한 관한 책들. 아예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부터 시작을 한다고 그러면 살아있는 동안에는 ⟪공산당 선언⟫까지 못 올 수도 있다. 적어도 지금 《옥스퍼드 세계사》에서 다루고 있는 1350년 이후로 기초부터 다지기 시작하면 마르크스까지 올 수가 없다. 그러니까 ⟪공산당 선언⟫을 34강부터 37강까지 해설을 통해서 처음 읽는 분은 우선 읽되 어이없는 정통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서 문자그대로 맞는 말이야 하고 가면 안된다는 것이다. 사회과학 서적이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것들을 함께 읽어 나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더욱이나 한가지 학문방법론적 측면에서 말하자면 마르크스 당대까지만 해도 지식인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 속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대책을 내놓을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를 발견하고 대책을 내놓으려면 사실 그 사회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그 사회를 이른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다시말해서 자기 자신, 사회는 범위가 크니까,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혼자 데카르트처럼 난로가에 앉아 나 혼자 나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나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고, 나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아 낼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 어떤 식으로 해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 대책을 내놓을 수 있다라는 관점이 있다고 해보겠다. 그게 대체로 지식인들은 가능하다는 것이 그냥 무비판적으로 의심없이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자. 그게 가능한 것인가. 자기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이 가능한가. 철학용어로는 자기초월적입장이라고 한다. 자지가 자기를 벗어나서 자기를 볼 수 있다는 뜻에서 자기초월적. 자기초월적 입장이기만 해도 괜찮은데 신에게 의탁해서 신의 입장에서 본다고 하는 것이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자기초월적을 한 단어로 말하면 초월론적 자기. 초월론적 주관. 자기가 자기를 이론적으로 벗어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 다시말해서 마르크스 시대까지만 해도 지식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자기 입장을 벗어난 자기초월적 입각점을 가질 수 있다 라는 것이 무비판적으로 전제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쓰는 이 밑바닥에 놓여있는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것이 아주 형편없는 생각이다 라고 하는 것이 이미 논박되어 있다. 지식인이라고 해도 그가 살아온 인생의 과정, 그리고 그가 살고 있는 사회적인 여러가지 요인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논박되어 있다. 예를 들어서 메모하는 것으로, '루만의 메모상자'로 유명한 니클라스 루만이 있다. 니클라스 루만의 책 중에 《사회의 학문》이 있다. '사회의' 학문이다.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사회 안에 있는 것이다라는 말이다. 지식인의 자기 초월적 입각점을 제목 자체가 부정하고 있다. 그러니까 루만의 책을 보면 인간의 경제적인 또는 정치적인 진리 추구 행위가 또는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 이런 팜플렛은 그가 사회 속에서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것에 관한 잘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원초적으로 나온 이론이 칼 포퍼의 Canvas Theory이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보면 마르크스나 플라톤이나 헤겔 모두 비판하고 있는데, 《열린사회와 그 적들》은 대체로 원전 텍스트들을 잘못 읽은 부분들이 많다는 점에서는 엉망이지만 기본적으로 마르크스, 플라톤, 헤겔을 사회 속의 지식인, 즉 자기초월적 지식인의 한계를 지적했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옳은 점들이 있다. 다시말해서 Canvas Theory는 어떤 화가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네들은 그 사회라고 하는 그림을 사회 바깥에서 그리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사실은 그들도 그 캔버스 속에, 화가의 그림을 그리는 바탕(도화지) 안에 있는 것에 불과한데 마치 그것 바깥에서 자기가 전지전능한 어떤 위치에서 그림을 새로 그릴 수 있고, 다시 그릴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비판을 한다. 어쨌든 포퍼가 시초를 내놓았는데 정교한 이론으로 다듬어진 것은 지식사회학이다. 학문이라고 하는 것, 지식인이라고 하는 것,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사회에서 벗어난 초월적인 입각점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라는 맥락에서 가능한 활동이고, 사회를 초월한 학문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또는 학문이라는 것은 사회체계에 의존하는 행위다. 그것을 지식사회학과 행위사회학에서 많이 다룬다. 대비해서 생각해보면 마르크스와 동시에 많이 거론되는 사회학자가 막스 베버이다. 막스 베버가 쓴 책 중에 《경제와 사회》가 있다. 니클라스 루만의 책은 '학문과 사회'가 아니라 《사회의 학문》이다. 그런데 막스 베버의 책은 '경제와 사회'이다. 그러면 경제라는 것과 사회라는 것이 별도의 사회체계처럼 간주할 수 있다는 것이 여기에 함축되어 있다. 대립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도 심하게 폄하해서 말할 때는 허황된 사람이라도 말하는 경우도 있고, 베버도 굉장히 현실적인 것 같지만 베버도 지식이라든가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썼다고는 하지만 베버도 완전히 지식의 사회 초월적 입각점 이런 전제에서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그것을 꼭 생각해야 한다. 마르크스가 전지전능한 입장에서 쓴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이 당시의 지식인들이 그냥 무비판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 역사가들이 흔히 이런 얘기를 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은 역사가 기록하지 않는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들을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대 사람들은 그것을 알 수가 없고 따라서 무의식 중에 그것들을 무시하고 간과하고 지나가는 경향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런 것처럼 마르크스를 읽을 때는 이 사람들이 자기자신은 사회에서 한 발짝 벗어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무의식 중에 전제했구나 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또 거기에서 더 나아가서 정통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정통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까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얘기는 틀림없어, 성서근본주의자들과 똑같은 것이다. ⟪공산당 선언⟫ 근본주의에 빠져들어가면 답이 없다. 기본적으로 사회를 보는 하나의 여러 요소들을 분석하는 것들은 받아들이되 변화된 사회와 유동적인 시간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여기에서 34강에서 37강까지 ⟪공산당 선언⟫을 다루고 있는데 일단 당대의 상황들 속에서 이 텍스트가 어떤 것을 반영하고 있는가, 그것을 논의하고 두번째로 1848년 혁명이라고 하는 것이 이 텍스트에 반영되어 있다. 우선 오늘은 이 발문의 첫 문장, 1848년 혁명이라고 하는 것을 배경으로 해서 이 것이 쓰였다. 그런데 이 문헌 자체가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읽어야만 하는 것이고,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성립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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