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티오의 책들 | 역사 고전 강의 — 62 / 제37강

 

⟪역사 고전 강의 - 전진하는 세계 성찰하는 인간⟫, 제37강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쉽게 단결하지 못한다. 그들이 공동의 계급의식을 갖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그들은 하나의 정체성만 가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프롤레타리아계급 운동 내부에서도 전선은 분열되었다.”

 

2022.03.05 역사 고전 강의 — 62

오늘은 ⟪역사 고전 강의⟫, 제37강, 37강을 마치려고 한다. 37강을 마치면 제4부가 38,39,40강이다. 37강은 발문은 프롤레타리아계급의 분열. 37강은 19세기를 마무리하는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뒷부분을 먼저보면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노동자 계급의 상태", 417~423페이지까지 여섯 페이지에 걸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상태를 전반적으로 집약해서 말을 했고, 결론부분을 보겠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역사를 보면 나오는 얘기인데, 다시 말해서 《공산당 선언》 이후의 마르크스주의 운동의 역사를 말그대로 거칠게 얘기한 것을 그것에 관한 역사철학의 연구자로서의 결론을 내놓은 것이다. "계급적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19세기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서구에서는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정치적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경제 시스템으로는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정치적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경제 시스템으로서의 근대적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은 것이 200년을 거쳐가면서이다. 이만큼 인류의 역사라는 것은 오랜 세월이 걸려서 자리를 잡는다. 그러면 그런 역사의 흐름 속에서 특정한 역사적 국면이 있고 그러한 역사적 국면에 따라서 조건들이 변화한다. 그러면서 특정한 사상이 등장했다. 설명 순서가 이렇게 되어있다.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따라 변화하는 조건들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러한 조건들에 따라 특정한 사상들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정한 사상이 역사적 국면에 따른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않는다. 사상이 먼저인 것은 있을 수 없다. 우리가 흔히 유토피아론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유토피아론이라고 하는 것들은 이루어 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망상처럼 보이기 쉽다. 저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 시대가 어떠했는가를 이른바 유토피아론이라고 불리는 글을 쓴 사람들이 그 시대를 깊숙이 통찰하고 그 시대에 대해서 뭔가를 썼기 때문에 유토피아론이라고 불리는 것들도 사실은 아주 근본적인 의미에서 그 시대의 반영이라고 생각한다. 그것 안에는 분명히 현실화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플라톤의 《국가》를 이상국가론이다라고 하는데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남녀 능력에 따라 평등하게 뭔가를 한다는 얘기를 한다. 그 당시에는 말도 안되는 것이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 노예를 인정하고 그런 것들을 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보고서이지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의 측면에서 보면 플라톤과 비교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어떤 정치체제의 성립 또는 그런 체제에 대한 열망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굉장히 파토스가 없는 담담한 사람이니까. 그런데 남녀가 평등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유토피아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인권의 관점에서 여성문제를 접근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유토피아론자라고 하지 않는다.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해결책을 내놓는 사람이다. 따라서 어떤 사상에 대해서 유토피아론이라고 하는 것은 당대의 사회를 굉장히 깊이 있게 골똘히 연구한 또는 고민한 사람이 내놓은 산물에 대한 모욕이다. 그렇게 볼 수는 없다. 

제37강 417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쉽게 단결하지 못한다. 그들이 공동의 계급의식을 갖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그들은 하나의 정체성만 가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프롤레타리아계급 운동 내부에서도 전선은 분열되었다.

제37강 424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 이전의 노동자 계급의 상태입니다.

제37강 425 지금까지 우리는 19세기의 역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하였습니다. 서구에서는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계몽주의를 거치면서 정치적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가, 경제 시스템으로는 자본주의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제37강 425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따라 변화하는 조건들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러한 조건들에 따라 특정한 사상들이 등장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하튼 특정한 역사적 국면에 따라 조건들이 변화했고, 그러한 변화된 조건에 따라 사상들이 등장했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면 우리 눈 앞에 놓여있는 사상이 있으면, 그러면 이 책에 나와있는 것처럼 제러미 벤담이 1748~1832까지 살았는데, 《파놉티콘》을 1791년에 썼다. 그러면 《파놉티콘》은 도대체 이 안에 들어가 있는 역사적 국면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떤 조건들의 변화를 추적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조건들이 어떤 식으로 《파놉티콘》이라는 텍스트에 반영되어 들어갔는가,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는 것이 역사 속에서 등장했던 사상사적인 고전들을 읽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 가장 기본적인 것들이 책을 읽는 것에서도 변화해왔다. 지금은 그것을 기본으로 한다는 말이다. "제러미 벤담(1748~1832)이 16세기에 태어났나면 《파놉티콘》(1791) 같은 책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책은 18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발생한 도시 빈민의 문제를 나름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파놉티콘》을 보면 조금 황당해 보이는 얘기들이 있으니까 이것을 유토피아론으로 볼 것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정치사상에서나 사상사의 책들을 유토피아론이라고 규정하는 것 자체가 그 책에 들어있는 시대와 역사적 조건과 국면들을 파악하기가 싫다는 게으름의 표현이거나 아니면 파악할 능력이 안된다고 하는 무능력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판타지 소설 영역에 분류하지 뭐하러 사상사로 분류해서 책을 읽겠는가. "18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발생한 도시 빈민의 문제를 나름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의 산물"이었다. "마찬가지로 19세기의 시대적 조건들은 19세기 사상과 제도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상과 제도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기본 바탕입니다." 그런데 "19세기는 우리가 사는 시대의 여러 요소들이 원형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기"인데 이제 이것들이 근원적으로 바뀐 것이다. 인류세라고 불리는 시대가 되면서 21세기에 사는 인간들은 역사적 국면에 따라 조건들이 변화했다는 것을 아주 뚜렷하게 감지해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요소들이 기본에 놓여있고 원형의 형태로 존재하기는 하는데 인간에 의해서 좀 더 가속화된 좀 더 강력해진 그런 변화를 만들어냈고 지금 현재 21세기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아주 뚜렷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상사를 읽을 아주 기본적인 태도와 21세기의 조건들에 대해서 먼저 얘기했다. 

제37강 425 예를 들어 제러미 벤담(1748~1832)이 16세기에 태어났나면 《파놉티콘》(1791) 같은 책을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책은 18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발생한 도시 빈민의 문제를 나름의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19세기의 시대적 조건들은 19세기 사상과 제도들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사상과 제도들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기본 바탕입니다. 다시 말해서 19세기는 우리가 사는 시대의 여러 요소들이 원형의 형태로 존재하는 시기입니다.


그러면 앞부분에 "선언 100주년이 기념될 때에는 제4차 인터내셔널이 이 행성의 결정적 혁명 세력이 되어 있을 것이다." 트로츠키 1937년 아프리칸스 어판 서문에 써있는데 100주년이 기념될 때는 1940년대이다. 그런데 "트로츠키의 기대와는 반대로 1940년대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트로츠키의 예언이 틀려버렸다. 마크 레빈슨의 《세계 경제의 황금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라는 책이 있다. 전후 자본주의의 세계에 대해서 다룬 책인데 굉장히 읽고 좋았던 책이다. 그런데 이 때만 해도 《세계 경제의 황금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라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 경제의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라는 것이 오리라고 예측하지는 못했겠다. 그러면 우리의 지금 입장에서 "선언 100주년이 기념될 때에는 제4차 인터내셔널이 이 행성의 결정적 혁명 세력이 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틀린 예언으로 정말 쓸데없는 헛소리로 간주하고 말 것인가의 문제가 부각된다.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이런 글을 쓸 때는 있는 그대로의 현상을 단순하게 서술만 한 것이 아니라 이러 이러한 것으로 나아가야 마땅하다 라고 하는 것도 꼭 그 안에 담겨 있다. 다시 말해서 무엇이 옳은 가치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글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리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서술한다고 해도 그 안에 항상 글쓰는 사람의 뭔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지향점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 트로츠키가 그렇게 말한 것은 무엇인가. 지금 현재 자신이 1937년 아프리칸스 어판 서문을 쓸 당시에 자본주의 체제가 어느 지점에서 올바르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가를 지적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소비에트 연방이 아주 훌륭한 나라였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올바름을 실현하기 위한 지향점이 되어야만 하는가를 품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제37강 417 "선언 100주년이 기념될 때에는 제4차 인터내셔널이 이 행성의 결정적 혁명 세력이 되어 있을 것이다." _《공산당 선언》, 트로츠키 1937년 아프리칸스 어판 서문

제37강 417 트로츠키의 기대와는 반대로 1940년대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418페이지부터 부르주아계급에 대항하는 프롤레타리아계급의 세력 약화. 어떻게 해서 세력이 약화되었는가. 도시 인구가 늘어나면서 프롤레타리아의 수가 양적으로 성장했고,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희망이 불타오르던 시기가 있었다. 그런 것도 있지만 왜 안되는가. 먹고 살기가 넉넉하니까 즉 대호황의 시기였다는 점도 있고, 그 다음에 자기가 프롤레타리아가라고 해서, 즉 노동자라고 해서 의식도 노동자 의식을 갖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가 가지고 있는 의식이 그 존재에 따라서 반드시 일대일로 대응해서 아주 수시로 동기화가 되지는 않는다. 이데올로기와 사회적 관습이 거기에 개입된다. 그 다음에 노동자라는 의식은 문화적 민족적 사회적 종교적 차이 또는 남성 여성의 성별 차이에 비하면 굉장히 낯설고 새로운 것이다. 그것을 갖기가 어렵다. 즉 "계급적 정체성은 종교적 정체성과 민족적 정체성에 비하면 새롭고 낯선 것입니다." 그래서 19세기 말에 등장했던 독일 사회민주당이라는 집단들도 현실적으로 눈 앞에 펼쳐지는 이러저러한 상황을 보면서 자신들의 이른바 혁명전략을 수정해야 한다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다. 그게 바로 422페이지에서 간략하게 정리를 해놓은 독일 '수정주의 논쟁'이다. 베른슈타인이 쓴 《사회주의란 무엇인가》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쓴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이 두 개의 텍스트가 대표적이다. 지금 베른슈타인이 옳았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옳았다 이렇게 말하기는 어려운데 그만큼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사태들을 어떻게 이겨내고 어떻게 노동자 계급의 정체성을 지켜나갈 것인가, 이런 것들이 참 고민스러운 문제였겠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제1차세계대전가 끝난 후에 극우파들에 의해서 무참히 살해되었다. 그러고보면 제1차세계대전 당시 극우파, 극우 폭력집단을 결집해놓은 사람들이 나치 히틀러 패거리들이다. 그 세력들이 참 어이가 없는 놈들이다. 

제37강 418 도시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프롤레타리아가 양적으로 성장하고, 그 결과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희망이 불타오르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제37강 420 계급적 정체성은 종교적 정체성과 민족적 정체성에 비하면 새롭고 낯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