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널드 헨델: 창세기와 만나다 ━ 탄생, 갈등, 성장의 역사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22. 3. 14.
창세기와 만나다 - 로널드 헨델 지음, 박영희 옮김/비아 |
감사의 말
들어가며
원작의 생애, 원작 사후의 생애 / 오류의 쓸모 / 창세기와 현실
1. 창세기의 기원
오래된 시 / 문서 자료 / 고대 배경 / 한 처음에 / 아담과 하와
2. 상징적 의미의 등장
의미를 밝히다 / 네 가지 가정 / 신성한 말과 세계
3. 종말론적 비밀
새로운 창조 / 낙원의 강 / 마지막 날 / 아담의 영광 / 마지막 아담 / 종말론적 이원론
4. 플라톤적 세계
동굴 밖으로 / 창세기 그리스어 역본 / 영혼의 상승 / 하늘의 예루살렘과 지상의 예루살렘 / 영지주의 창세기 / 빛나는 몸
5. 상징과 실제 사이
상징의 세계 / 상징의 남용 / 성서에 담긴 분명한 말 / 현실에 관한 희극 / 가정에 대한 질문
6. 창세기와 과학: 시작부터 근본주의까지
큰 빛 / 시녀의 이야기 / 지구는 움직인다 / 성서를 자연화하기 / 새로운 세계와 오래된 지구 / 한계점 / 근본주의
7. 현대
노예 제도와 노예 해방 / 제2의 성 / 불확실한 확실성 / 우화 / 현실주의로의 회귀
나가며: 우리 동네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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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표
18 변형을 통해서, 좀더 정확하게는 다양하고 끊임없는 변형을 통해서 본문은 의미의 새로운 층들을 갖게 된다. 이 층들에는 이전에는 생기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층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 층들을 갖게 되면서 책은 역사의 주체가 되고 새로운 종교 및 정치 지형으로 들어 간다. 창세기의 '전기'는 벤야민이 원작의 '생애'와 '사후의 생애' 라고 말한, 본래 의미와 후대에 원작이 미친 영향 모두를 포함한다. 창세기 '사후의 생애'는 창세기의 '생애'를 변형하고 갱신하며 확장한다.
23 창세기는 신이 창조한 단일한 세계를 상정한다. 그 안에서 인간은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에 매여 있다. 인류는 지상에 발을 디디고 살아가며, 가끔은 현명하지만 자주 어리석은 유한한 피조물이다. 창세기는 종종 인간의 삶을 가혹하리만치 현실주의적으로 묘사한다. 창세기가 생긴 후 수세기 동안 현실에 대한 두가지 새로운 개념이 생겨났다. 첫 번째는 종말론적 종교로 다가올 미래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리라고 기대하는 믿음이다. 종말론적 종교에 따르면 이때 죽은 자는 살아날 것이고 인간 존재는 온전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점차 창세기를 종말론적으로 재해석했고 여기서 마지막 날에 에덴동산으로 귀환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두 번째 새로운 개념은 그리스에 기원을 둔 것으로, 보이지 않는 더 높은 세계에 대한 개념이다. 플라톤에게서 고전적인 형태를 갖추게 된 이 개념은 오래지 않아 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사상에서 매우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기원전 3세기까지 대부분의 창세기 해석은 현실에 대한 종말론적 관점, 혹은 플라톤적 관점을 바탕으로, 때로는 둘이 함께 뒤섞인 채로 이루어졌다. 종말론적 관점, 혹은 플라톤적 관점으로 창세기를 해석하는 것은 이른바 상징적 해석이라고 불린다.
51 바빌로니아 선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는 더 넓은 창조 전승군에 속해 있다. 그러나 창세기는 오랸 전승을 단순히 반복하지는 않았다. 이 이야기는 오래된 생각과 이야기를 취하되 초점을 바꾸어 고유한 현실 이해를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해냈다.
57 창세기 창조 이야기는 당대 자연과학과 신학의 강력한 조합물이라 할 수 있다. 창세기 저자, 편집자는 창조와 관련된 오래된 신화들에서 일정 요소들을 가져와 새로운 사고를 담아내는 수단으로 변형시켰다. 태고의 네 가지 요소인 어둠, 물, 땅, 바람은 이보다 더 오래된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선화를 연상시키며 창조의 질서 정연한 구조는 우주에 대한 초기 그리스 철학을 연상시킨다.
69 이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유효한가? 이 본문들이 신성한 율법의 일부가 될 만한 가치가 있다면 어떻게든 중요하고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리고 이 본문이 현대에 어떠한 면에서, 왜 가치가 있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존경받고 권위 있는 해석자가 있어야 했다.
70 탁월한 책 『과거의 성서 』에서 제임스 쿠걸은 예루살렘 수문 앞에서 토라가 "발표된"(달리 말하면 공개된) 이후 수 세대, 수 세기에 걸쳐 성서 해석자들이 성서를 해석하며 암묵적으로 지니게 된 네 가지 가정을 도출해낸다. 즉 성서란 비밀을 간직하고 있고, 현재에도 유효하며, 완벽하고, 신성하다. 이 가정들은 초기 다양한 성서 해석의 바탕을 이름과 동시에 이 시기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있던 현실 이해를 보여준다.
120 칠십인역 번역자들은 대체로 히브리어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그러나 그렇게 히브리어를 충실하게 옮기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물은 때때로 번역자가 품고 있는 플라톤적 철학사상을 반영했다. 번역자들은 박식한 학자, 교양있고 헬라화된 유대인이었다. 그들은 성서의 사상과 그리스 사상이 다양한 방식으로 섞인 세계관을 갖고 있었다. 문자에 충실한 번역을 한 그 결과물을 통해 우리는 창세기가 어떻게 플라톤화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165 상징적 해석은 성서의 문자적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해석자의 책략, 일종의 발악이다. 루터는 이를 두고 "맥락 없이 이상한 의미로 왜곡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이해가 부족함을 고백"하라고 조언한다. 라쉬와 마찬가지로 루터에게도 성서의 본래 의미를 알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지침은 문맥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미가 모호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루터는 "왜곡하기보다는" 차라리 "우리의 이해가 부족함을 고백"함이 낫다고 여긴다. 이는 본문의 문제를 대하는 매우 근대적인 태도다.
189 라쉬, 루터, 그리고 라블레는 성서에 대한 고전적인 네 가지 가정 중 세 가지 가정들을 비판했다. 그리고 스피노자에 이르러 마지막 가정, 즉 성서가 산성한 책이라는 가정 또한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스피노자의 논문은 열광 어린 반응을 낳았고, 이 시기, 17세기와 18세기의 정신적 풍토에서 과거 네 가지 가정들은 어느 것도 손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네 가지 가정들이 참되다고 여기는 사람들조차 다른 많은 사람이 이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음을 알고 불안해했다. 네 가지 가정은 논쟁거리가 되었다. 르네상스 시기를 거치며 이 가정들은 더는 보이지 않는 배경이 될 수 없었다. 이들은 더는 숨 쉬는 공기처럼 일상생활에 자연스럽게 묻어 들어있는 요소가 아니었다. 성서에 대한 고전적인 네 가지 가정들이 모두 도마 위에 오르게 되면서 창세기의 생애는 선의 본성, 자연, 이성, 현실에 대한 새로운 논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227 신대륙의 발견은 인류 문명의 다양성과 역사의 복잡성에 관해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세계 역사의 표준 모형은 창세기였고 창세기 10장에 나오는 '민족목록'이 민족들의 표준목록이었기 때문에 선대륙의 발견은 새로운 도전을 일으켰다. 창세기가 알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민족과 땅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몇몇 사람들은 신대륙 사람들을 창세기 족보에 끼워 맞추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229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이 이론들은 대부분 힘을 잃었다. 사람들은 대개 모든 이가 노아의 자손이라고 생각했지만, 창세기의 족보는 아무리 좋게 보아도 모호하기만 해 보였다. 많은 역사학자는 창세기가 구대륙만 알고 있었지 신대륙은 알지 못했다고 결론 내렸다.
242 오늘날까지 근본주의자들에게서 권위를 갖는 이 입장은 몇 가지 흥미로운 전략적 특징을 갖고 있다. 이 입장은 성서 기록을 "말 그대로", "의도된 바"를 따라 해석하는 것의 타당성을 받아들인다. 성서의 문자적 의미만이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나 성서학의 발견이 성서의 문자적 의미와 충돌을 일으키는 부분에서 근본주의자들은 이제 '감추어진' 문자적 의미에서 권위를 찾는다. 성서 무오설은 부분적으로 잃어버린 성서, 즉 "성서 원본"의 특성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현재까지 갖고 있는 성서는 과거 저자들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적은 원본과 다를 수 있다. 근본주의자는 과학이나 성서학과 충돌을 일으키는 부분이 생기면 본래 성서 원본은 그것과 다른 것을 말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48 근본주의는 근대 과학(특히 진화론)과 성서학에 대한 반감, 분노에서 나왔다. 물론 근본주의자들이 반감을 표한 것은 이 둘 뿐만이 아니지만 결국 핵심은 이 둘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역사는 기껏해야 백 년이 넘지 않는다. 근본주의는 미국의 대호황시대에 탄생한 보수적인 대중주의와 과거에 대한 향수를 연료 삼아 움직이는 운동이다. 이 운동에는 성서의 문자적 의미가 진리이기를 바라는 갈망이 담겨 있다. 근본주의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단순한 진리에 대한 확언, 그리고 지식인들에 대한 불신은 미국 대중에게 깊은 공감을 일으켰다.
10 우리가 창세기 이야기들을 소설(허구의 이야기)로 읽는 순간(과학과 학문은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함을 입증했다) 우리는 창세기가 본래 가르치려 하는, 창세기를 경전으로 대하는 청중 밖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현실주의는 우리에게 마술적인 현실주의다. 과거의 독자와는 달리 우리는 창세기의 권위에 굴종하기를 거부한다. 우리는 반역자다. 이는 현대라는 다층적 현실의 또 다른 특징이다. 망명 중에, 어떤 면에서는 망명 중이었기에 서구 역사와 문학의 모든 것을 활용할 수 있었던 이스탄불의 아우어바흐처럼 우리 현대인들(여기에는 종교적인 보수주의자들도 포함된다)은 창세기가 낳은 고대, 중세, 그리고 근대 초기의 세계관 밖에 서 있기에 창세기에 실제로 담긴 복잡성을 헤아리며 창세기를 읽을 수 있다. 우리는 저 역사의 굴레 밖에 서 있다는 점에서 반역자다. 아우어바흐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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