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R. 도즈: 불안의 시대 이교도와 기독교인

 

불안의 시대 이교도와 기독교인 - 10점
에릭 R. 도즈 지음, 송유레 옮김/그린비

책을 펴내며 7
서문 9
참고문헌 약어 11

I. 인간과 물질적인 세계 19
II. 인간과 신령한 세계 59
III. 인간과 신성한 세계 95
IV. 이교와 기독교의 대화 131

옮긴이 후기 171
찾아보기 177

 


57 내가 이 장에서 보여주려고 시도한 것은 인간 조건에 대한 경멸과 육체에 대한 증오가 이 시기의 문화 전체에 퍼져 있는 전염병이었으며, 더욱 극단적인 형태로는 주로 기독교인이나 영지주의자에게 나타났지만, 그것의 징후는 더욱 온건한 형태로 순수한 그리스 교육을 받은 이교도한테도 드러났다는 점이다.

59 모호한 용어 '신령(daemon)'과 '신령스러운 것'(daemonios)에 대한 이러한 정확한 정의는 플라톤의 시대에는 뭔가 새로운 것이었지만, 기원후 2세기에는 자명한 진술이었다. 아마도 모든 이교도, 유대인, 기독교인 또는 영지주의자는 그러한 존재들의 존재와 중개자로서의 기능을 믿었다. 그 존재자들을 신령들이라고 부르든지 아니면 천사들이나 아이온들 또는 단순히 '영들'(pneumata)이라 부르든지 간에 말이다. 많은 경건한 이교도 눈에 그리스 신화의 신들조차 이 시기에 이르면 중개하는 신령들, 즉 보이지 않는 초세계적인 왕의 총독들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들과 접촉할 수 있는 '신령한 인간'은 그에 상응하는 존경을 받았다.

101 철학자들은 신의 자격으로 또 다른 것, 즉 완전한 좋음(선)을 부가했다. 그들은 인간이 이 신적인 좋음을 가능한 한 모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homoiosis, '신을 닮아감’의 가르침인데, 플라톤에 의해 처음으로 『테아이테토스』의 유명한 단락에서 언급되었으며, 우리가 다루는 시기의 플라톤주의자들(이교도 쪽과 기독교인 쪽 모두)에 의해 지속적으로 반복되었다.

129 우리가 다루는 시기 안에서 오직 플로티누스와 포르피리오스만이 엄밀한 의미에서 신비주의를 실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비 체험은 정도 차를 허용하며, 플로티누스의 신비주의는 고립된 현상이 아니다. 내향적 신비주의의 이론적 경향이 2세기 철학에 강한 흔적을 남겼고, 적어도 누메니우스의 경우 실제 경험을 암시하는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우리는 또한 외향적 신비주의를 닮은 것이 영지주의와 헤르메스주의 문헌에 나타났다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신과 신성 사이의 심리적 다리를 놓으려는 임의의 시도를 넓은 의미에서 '신비주의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신비주의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서 힘을 키워 플로티누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유스티누스로부터 오리게네스까지 이 시기의 거의 모든 종교 사상에서 유행했다고 말할 수 있다. 놀랄 필요는 없다. 페스튀지에르가 올바르게 말했듯이, "불행과 신비주의는 연결된 사실들이다". 3세기의 세계처럼 그토록 지적으로 가난해지고, 물질적으로 불안정하며, 공포와 증오로 가득 찬 세계로부터 탈출을 약속하는 길은 어떤 길이든지 진지한 마음들을 매료시켜야 했다.

140 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인기가 없었는가? 증거는 누군가를 차 버리려는 일반화된 욕구(이것은 항상 인정되지 않았지만, 영향력 있는 인간 본성의 요소이다)와 더불어 많은 이유를 가리킨다. 우선, 분명히 그들은 오래전부터 확립된 유대인들의 비인기성을 공유한다.

141 유대인들이 오래된 민족이고, 그래서 종교적 사안에서 조상의 관습을 따르는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던 반면 기독교인들은 혼합 국적의 신흥종파로서 그러한 특권을 주장할 수 없었다.

151 만약 2세기의 교양 있는 이교도에게 자신의 인생관과 기독교 인생관의 차이를 몇 마디로 표현해 달라고 요청한다면, 그는 로기스모스(logismos)와 피스티스(pistis)의 차이, 사유를 통한 확신과 맹목적 신앙의 차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리스 고전철학으로 길러진 사람에게 피스티스는 인지의 최하 등급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물들에 대해 풍문으로 믿지만, 그 믿음을 설명하지 못하는 무지한이들의 마음상태이다.

164 우리는 정치적 순교에 대한 근대적 경험으로부터 순교자들의 피가 실제로 교회의 씨앗임을 안다. 언제나 그 씨앗이 알맞은 토양에 떨어지고 너무 빽빽하게 심어지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 통치하에서 이교도 순교자는 거의 없었다. 기독교가 더 관용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교가 그 당시 목숨을 걸기엔 너무 초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165 기독교의 배타성 자체, 대안적인 숭배 형태들에 대한 가치 부여의 거부, 이것들은 오늘날 종종 약점으로 느껴지지만, 그때 상황에서는 강함의 원천이었다. 보통의 그리스-로마적인 관행이었던 종교적 관용은 당혹스러운 대안들의 집적체를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선택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숭배와 너무나 많은 비의, 너무나 많은 삶의 철학이 있었다. 여기서 당신은 하나의 종교 보험 위에 다른 것을 계속 쌓을 수 있지만, 그런데도 안심할 수 없다. 기독교는 깨끗하게 청소했다. 그것은 개인의 어깨 위에 있는 자유의 짐을 내려 주었다. 하나의 선택, 취소할 수 없는 선택 그리고 구원의 길이 분명했다. 이교도 비평기들은 기독교의 비관용을 비웃겠지만, 불안의 시대에는 ‘전체주의적' 신조가 강력한 매력을 펼친다. 오직 우리 자신의 시대에 수많은 혼란스러운 마음들에 공산주의가 지닌 호소력을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167 이웃에 대한 사랑이 오직 기독교적 덕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룬 시기에 기독교인들은 다른 어떤 집단보다 그것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실천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교회는 사회적 안전의 기본을 제공했다. 과부와 고아, 노인, 실직자 그리고 장애인을 돌보았으며, 빈자에게는 장례 비용을 대주었고, 역병이 도는 시기에는 간호서비스를 제공했다.

169 기독교인들은 형식적 의미 이상으로 '서로에게 소속된 일원'이었다. 나는 이것이 기독교 전파의 주요 원인, 아마 가장 강력한 하나의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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