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북리스트 | 옥스퍼드 세계사 13장(5)

 

2022.04.27 옥스퍼드 세계사 13장(5)

《옥스퍼드 세계사》 13장 5번째 시간이다. 601페이지 "서구와 나머지", 13장은 앞서 얘기했듯이 13장 서술 전체가 논리적인 연쇄고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섹션 제목 아래에 여러가지 다양한 1815년 이후의 세계에서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면들을 소제목 아래에 서술하고 있다. 읽을 때 소제목 아래의 내용을 이해하고 넘어가면 충분하다. 그런데 설명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아서 읽을 때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National Liberation, NL, 민족해방, National이라는 말이 원래 국민이라는 말로 쓰였지만 민족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서구의 권력과 영향력, 모델이 확연히 우세해 보였던 20세기의 정치적 전개에 대한 서구의 표준적인 서사와 분석은 21세기 초에 이르자 예전만큼 유력하지 않았다." 문장 그대로이다. 사실 우리는 그 다음 문장에 나온 것처럼 20세기가 되어서, 1800년대, 1900년대가 되어서도 계속해서 비서구 지역이라고 해도 자기네 사회, 국가의 발전 모델 또는 발전의 목표를 서구에서 만들어진 경로를 따라가는 것에 두었다. "서구의 모델을 거부하는 이런 유형의 주요 모델마저도 유럽의 산물인 공산주의였다." 그래서 이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대표적인 움직임이로는 제3세계주의라는 것이 있었다.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이라는 것이 있었다. 1970년대 한국에서도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 또는 비동맹체제가 있었다. 그런 것들은 공산주의도 아닌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베트남의 호치민이라든가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또는 남아메리카의 반식민주의 운동 집단들, 그리고 아프리카. 이 경우에 유럽의 산물인 공산주의마저도 거부하는 비동맹운동들이라는 것이 있었다. 비동맹운동의 대표적인 회의가 반둥회의. 그리고 그런 비동맹운동의 선두주자로 나선 게 김일성이라는 자이다. 그 무렵부터 북한에 대한 숭배가 생겨났다. 주사파, 그 사람들은 공산주의자들은 아니다. 한국에서도 공산주의에 경도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비동맹운동에, 이런 것들은 정말 서구에서는 이런 것에 대한 서술이 없었다. 그 다음에 아예 한국 땅을 벗어나서 온 가족이 북한으로 가버린 사람도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이 부산대학교 철학과의 윤노빈 교수가 있다. 그 다음 대표적인 북한의 지식이라고 하면 정수일 교수가 있다. 우리는 쉽게 말해서 시대의 톱니바퀴에서 으스러지는 인간들이라고 말하는데 그 사람들이 대표적으로 비서구적인 모델들에 따라 민족해방운동에 나섰던 사람들이다. 구체적인 인물들을 거론해보면 그들의 삶의 족적을 알 수 있다. 그것이 1970년대 한국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1950년대 한국전쟁 이전의 해방공간에서도 나온다. 후지이 다케시,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 그 당시에는 장제스의 중국 파시즘이나 이런 모델들도 굉장히 각광받는 모델 중 하나였다. 파시스트라고 하는 것이 그 당시에는 굉장히 민족주의와 결부되어 있었고, 그것을 채택할 것인가 아니면 제3세계주의와 연결되는 지점, 《파시즘과 제3세계주의 사이에서》을 보면 그런 것이 나온다. 그게 이승만의 정치적인 뒷받침을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장치들이 있었고, 그것을 박정희의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 이런 말들이 느닷없이 나온 것이 아니라 만주국의 이상 이런 것에서도 나온다. 만주국이라고 하는 것이 여기 나온 것처럼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면서, 탈아입구, 아시아를 벗어나서 서구로 간다, 그러니까 서구 모델을 따라갔는데, 일본에서 어느정도 지난 다음에는 서구의 취약성에 주목을 하게 되고, "서구와는 다른 경로로 근대성이 이르겠다는 자의식적 접근법"이 등장했고, "제국주의와 서구화에 대한 반발의 일환으로 확산"되어 갔는데, 이 책에 서술된 것처럼 "사실 그런 접근법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19세기 후반에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중국의 양무 운동이 그런 접근법을 제시한 바 있었다."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중국의 양무 운동에서 내세운 구호가 동도서기, 동양의 도와 서양의 기술 이런 것인데 결국에는 서구화로 귀결되었다. 그렇지만 일본의 동경제국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들,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 이런 사람들이 만주에다가 나라를 세우고 만주국이라는 이상을 실현해보려는 시도도 하고 그랬다. 그러면 그런 것에서 보고 배우고 기묘하게 서구적인 것과 또는 동양의 팔굉일우, 이런 얘기, 대동아공영권, 그 다음에 광역질서론, 이것은 에드워드 카도 주장했던 바 있는, 그런 것들이 결합되면서 20세기 초반에 전세계에서 지역, 광역 질서 이런 것들이 등장했다.  그런 것들의 맥락의 흔적들이 20세기 후반에 전개되면서 비동맹운동이라든가 민족해방운동으로 표출되어 나왔을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프리카의 경우에는, 아프리카에서 민족해방운동을 했던 정수일 교수나 쿠바의 혁명가 체 게바라, 그 사람들은 그런 운동을 공산주의 운동을 전개하면 계급적대가 등장해서 부르주아계급을 타도하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국가를 만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이 책에 나온 것처럼 종족 정체성이 출현했다. 하나의 서사를 가지고 비서구지역을 설명하기에는 지나치게 비서구 지역의 다양성이 많다. 그래서 아마 이 서술도 "서구와 나머지"라고 했는데, 서구와 나머지라는 것이 지역만을 가리키는 것이지 거기에서 일어난 어떤 운동이나 지향점의 특성을 밝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라 본다. "게다가 두 운동은 특정한 과거상과 특정상 미래상을 연결하는 능력을 보여준 사례들 중 가장 주목받는 사례에 지나지 않았다." 특정한 과거상이라고 하는게 일본이나 중국의 전통을 말하는 것이겠다. 동도서기, 화혼양재 이런 것들의 구호로 나타난 것이 특정한 과거상과 특정상 미래상을 연결하는 능력. 그러면서도 중국이나 일본은 끊임없이 19세기에 끊임없이 서구를 말그대로 번역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학문용어의 대부분이 일본에서 번역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꼭 그렇지만 않다. 마루야마 마사오라든가 이런 사람들이 내놓은 번역어 성립 사정, 대담집들을 보면 일본에서 먼저 시작된 것도 있지만 중국에서 번역된 것을 일본에서 가져다가 다시 번역하고 그것을 한국에서 들여와서 한국에서 일정한 부분을 고치고 하는 부분이 있다. 번역어 성립 사정을 보면 비서구 지역에서, 특히 동아시아 지역에서, 어떻게 서구를 받아들이고 번역했는가. 문자 그대로 문서를 번역하고 또는 서구 문명을 어떤 식으로 로컬라이즈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제국의 정당성과 급진적 변화가 양립할 수 있었지만", 일본에서는 그런 것들을 하면서 근대제국으로 성립해서 일본제국이 되었고 그러면서 동시에 서구화를 많이 이루었다. 그런데 중국은 "1911~1912년 제국이 전복되고 공화국으로 대체된 중국에서는 그런 조합이 유지될 수 없었다." 결국 국공내전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기기서도 국민당은 장제스의 파시즘이 있었고,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은 과연 공산주의 이념에 충실한가, 지금을 봐도 그렇고 그때를 봐도 그렇고 아닌 것 같다. 서구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긴 미쳤는데 그것이 온전한 본래의 정체성을 드러내 보이면서 확립되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것 같다. "서구와 나머지"는 정말로 다양한 요소들이 개입되어 있었다고 정리하면 되겠다.

13장 601 서구의 권력과 영향력, 모델이 확연히 우세해 보였던 20세기의 정치적 전개에 대한 서구의 표준적인 서사와 분석은 21세기 초에 이르자 예전만큼 유력하지 않았다.

13장 602 20세기에는 서구의 모델을 거부하는 이런 유형의 주요 모델마저도 유럽의 산물인 공산주의였다.

13장 602 이 중요한 요인들은 세계의 대부분을 장악한 서구의 취약성에 주목하게 했다. 처음에는 군사력으로, 그 다음에는 만연한 소비주의로 숨겼던 서구의 취약성은 유럽의 식민 열강이 제시한 미국식 통제 모델과 영향 모델에서 먼저 나타났다. 그렇지만 서구와는 다른 경로로 근대성이 이르겠다는 자의식적 접근법은 제국주의와 서구화에 대한 반발의 일환으로 확산되었다. 사실 그런 접근법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19세기 후반에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중국의 양무 운동이 그런 접근법을 제시한 바 있었다. ━ 게다가 두 운동은 특정한 과거상과 특정상 미래상을 연결하는 능력을 보여준 사례들 중 가장 주목받는 사례에 지나지 않았다.

13장 602 일본에서는 제국의 정당성과 급진적 변화가 양립할 수 있었지만, 1911~1912년 제국이 전복되고 공화국으로 대체된 중국에서는 그런 조합이 유지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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