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북리스트 | 몽유병자들(4) ━ 대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심상지도

 

2022.06.27 몽유병자들(4) ━ 대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심상지도

오늘은 《몽유병자들》 네번째 시간이다. 오늘은 두 부분을 읽으려고 한다. 제1부가 사라예보로 가는 길들이고, 1장 세르비아의 유령들, 2장 특성 없는 제국이다. 1장 세르비아의 유령들, 이 부분에 세르비아에서 1914년 7월위기인 이 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에 세르비아라고 하는 나라가 아주 중요한 행위자이다. 정말로 중요한 1차적인 행위자이다. 그 다음에 세르비아만큼이나 중요한 행위자가 오스트리아 제국이다. 그래서 제1부가 사라예보로 가는 길들에서 제1장이 세르비아를 다루고 있고, 제2장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다루고 있다. 따라서 1장 세르비아의 유령들, 세르비아가 어떤 방식으로 움직여 나갔는가를 알아보는데, 1장 세르비아의 유령들의 섹션들이 베오그라드 암살사건, ‘무책임한 분자들’ , 심상지도 , 결별 , 격화 , 세 차례 튀르크 전쟁 , 대공 암살 음모 , 니콜라 파시치, 대응하다로 되어있다. 여기서 오늘은 심상지도까지 일단 설명하겠다. 

1장 세르비아의 유령들, 베오그라드 암살사건은 1903년 6월 11일에 있었던 세르비아 국왕과 국왕의 정부 드라가의 암살사건을 다루고 있다. 암살 사건 자체도 굉장히 중요한데 이 암살 사건을 다루는 기본적인 이유는 세르비아 내부에서 세르비아 군에 있는 사람들도 일부가 속하는 암살 음모단이, 말하자면 세르비아 안에서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세르비아라고 하는 나라가 중요한 행위자인데 세르비아 안에서 세르비아의 어떤 정치적인 상황을 좌지우지하는 주요한 행위자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암살단이라는 것이다. 세르비아는 오스만 튀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한 다음에 경쟁적인 두 가문이 국왕 자리를 맡아왔다. 그게 바로 오르레노비치 가문과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이다. 이 가문이 국왕을 계속했다. 그러니까 세르비아 군주정은 불안한 요소를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데 정치적인 쟁투가 끊이지 않았다. 왜 그러는가. 43페이지를 보면 "경쟁하는 두 왕가,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 사이에 노출된 위치, 소규모 자작농들이 지배하는 유달리 무례한 정치문화, 이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탓에 세르비아 군주정에서는 정쟁이 끝이지 않았다." 이런 말이 있다. 제1장의 첫번째 절이 베오그라드 암살사건인데 베오그라드 암살사건은 책 제목이고, 우리가 제1절을 독서카드로 정리한고 하면, 나중에도 활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범주들이 등장하지 않아서 정리하지 않았는데, 굳이 이 부분을 정리하겠다고 한다면 핵심은 세르비아 정치문화의 기본적인 특징이다. 다시말해서 세르비아 정치문화의 기본적인 특징은 일단 불안정한 세르비아 군주정이 있다. 이것은 어떤 것들이 작용해서 하는가. 경쟁하는 두 왕가,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 사이에 노출된 위치, 소규모 자작농들이 지배하는 유달리 무례한 정치문화, 이런 것들이 세르비아 군주정에서의 불안 요소을 가져온다. 이러한 불안 요소이 계속 있다보니 국왕에 반대하는 감정의 진원지로서 군대가 있게된다는 말이다. 그 군대에서 중요한 행위자가 한 사람 나오는데 바로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바치이다. 드라구틴 디미트리예바치는 본명이고 '아피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암살 음모단의 핵심이 된다. 그래서 두번째 절 '무책임한 분자들'로 이어지는, 이 군의 암살 음모단이, 대체로 6월 11일의 사람들이다 라고 불렸다. 핵심적인 숫자가 68명이다. 그리고 이들이 국왕 암살 이후에 세르비아 왕국이 이제 군주가 존재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진정한 의회제 정치체가 된 다음에 사그러들 줄 알았더니 점차 와해되기는커녕 세르비아의 정치와 공적 세력에서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1차 1절을 2절을 묶어서 우리는 세르비아 정치체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를 찾아낼 수 있다. 그게 바로 음모단 네트워크, 군대와 민간당국이 밀착하고 '6월 11일의 사람들', 1903년 6월 11일에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국왕이 시해되었었다, 그 사람들이 군인들이라면 동시에 군대와 민간당국과 밀착되고 그 사람들의 음모단 네트워크가 점차로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자베리텔리라고 부른다. 음모의 대의를 좇아 전향한 이들이다. 1914년 7월 사태에서 사고를 친 놈도 바로 이 음모단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1903년 암살 이후 군대와 민간 당국의 밀착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가 세르비아가 1914년 사태에 대처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게 일종의 세르비아 국가 내부의 중요한 정치문화이다. 암살 음모단, 6월 11일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든지 정치에 해악을 끼치는 심각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1장 43 경쟁하는 두 왕가,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 사이에 노출된 위치, 소규모 자작농들이 지배하는 유달리 무례한 정치문화, 이 요인들이 함께 작용한 탓에 세르비아 군주정에서는 정쟁이 끝이지 않았다.

1장 57 이처럼 1903년 암살 이후 군대와 민간 당국의 밀착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가 세르비아가 1914년 사태에 대처하는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1장 63 자베리텔리zaverutelji라고 불린 그 민간인들(음모의 대의를 좇아 전향한 사람들)은 애초의 음모단보다도 더 극단주의로 기울었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국왕이 즉위한 이후에 새로운 행위자로 등장한 사람 중 하나가 급진당 지도자 니콜라 파시치이다. 이 사람은 급진당 지도자인데 급진당은 소규모 자작농의 지지를 받고 있고,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 집단들과 연계를 맺고 있었다. 니콜라 파시치가 왜 중요한가. 1904년부터 1918년까지 총 9년간 10개 내각의 수장을 지냈다. "1914년 사라예보 암살 사건 이전과 당시와 이후에 세르비아 정치의 정점에 있었던 파시치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 앞선 위기 국면에서 핵심 행위자 중 한 명이 될 터였다." 그래서 니콜라 파시치는 암살 음모단 중의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행위자가 등장하게 된다. 그런데 니콜라 파시치가 가지고 있던 대중적 기반은 세르비아 인구의 대부분인 소규모 자작농이고, 동시에 그 급진당은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 집단들과 연계를 맺고 있다. 그러면 한가지 추론을 해볼 수 있다.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 집단들과 연계를 맺고 있으면 오스리아-헝가리 이중제국과 대립구도에 놓이게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제1장 57 이 까다로운 권력 구도를 다루는 책임을 제일 많이 짊어진 사람은 급진당 지도자 니콜라 파시치Nikola Pašić였다.

제1장 57 1904년부터 1918년까지 그는 총 9년간 10개 내각의 수장을 지냈다. 1914년 사라예보 암살 사건 이전과 당시와 이후에 세르비아 정치의 정점에 있었던 파시치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에 앞선 위기 국면에서 핵심 행위자 중 한 명이 될 터였다.

제1장 58 이 정당의 대중적 기반은 세르비아 인구의 대부분인 소규모 자작농이었다. 농민의 당으로서 급진당은 다양한 포퓰리즘을 받아들여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 집단들과 연계를 맺었다.

이것을 카드로 한 장 쓴다면 어떻게 쓰는 게 좋겠는가. 세르비아 내부의 암살 음모단으로 쓰면 되겠다. 군내에서 국와 살해 음모단이 있었다. 일종의 군대의 사조직이다. 이른바 6월 11일 사람들, 1903년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국왕이 시해에 가담했던 사람들. 그리고 이 사람들이 민간인들과 결탁이 되면서 민간인들은 자베리텔리라고 불리게 된다. 음모의 대의를 좇아 전향한 사람들, 애초의 음모단보다도 더 극단주의로 기울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특별히 어떤 공식적인 직책을 맡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비밀 결사단체이기 때문에 무책임한 분자들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무책임한 분자들이 날뛰면서 정치적인 상황을 급격하게 전화시키고, 만들어 내고 하기 때문에 어떻게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주요한 행위자들의 조건들이다.

 

대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심상지도
1. 세르비아 정치문화의 기본적인 특징
- 경쟁하는 두 왕가, 오스만제국과 오스트리아제국 사이에 노출된 위치, 소규모 자작농들이 지배하는 유달리 무례한 정치문화
음모단 네트워크 

2. 세르비아 내부의 암살 음모단
-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국왕이 시해에 가담했던 사람들.
- 자베리텔리: 음모의 대의를 좇아 전향한 사람들, 애초의 음모단보다도 더 극단주의로 기울었다

3. 대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심상지도
- 기본적으로 심상지도가 가질 수 있는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다. 
- 모든 세르비아인의 통일을 모토로 내걸고 있으며, 역사적 근거는 스테판 듀샨의 중세 제국인데 그것은 오래된 역사적 권리의 표명
- 중세의 다종족 정치체를 근대 민족국가의 관념과 융합할 수 있다는 허구가 심각한 문제

4. 세르비아 외교의 문제점
- 원대한 민족주의와 발칸반도의 복잡한 종족정치 현실 사이의 괴리가 있다는 것


중요하게 볼 부분은 심상지도이다. 대세르비아의 심상지도라고 하는 항목을 넣을 수 있다. 그런데 공식적인 정신은 어찌보면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또는 공식적인 정신을 무력화시키는 것이 심상지도가 되겠다. 조금 읽다보면 나오는데, unspoken assumption, 말해지지 않은 전제, 즉 암묵적 전제라는 것이 나온다. 예를 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에 두려움이라고 하는 것이 아테나이가 세력을 확장시켜서 에게 해의 패권을 쥐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들이, 특히 코린토스에 위협이 되었다. 그러면 코린토스는 실제로 자기네 폴리스가 그런 위협을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언젠가는 아테나이가 침략해오겠지라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된다. 그런 것들이 바로 심상지도이다. 동시에 아테나이도 멜로스 회담, 자기네들과 적대하는 세력과 회담을 할 때 내놓는 얘기, 그런 얘기들은 객관적인 증거들로 뒷받침되지 않고, '우린 이렇게 생각해, 그리고 폴리스 시민들은 대체로 동의하고 있어' 이런 정도의 심상지도를 보여준다. 바로 이게 mental map이다. 세르비아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심상지도는 중요하다. 그냥 허구의 것일 수도 있지만 허구가 끼치는 영향이 굉장히 크다. "모든 세르비아인의 통일'이라는 이념을 뒷받침한 것은 20세기 전환기 발칸의 정치지도와 거의 관련이 없는 세르비아의 심상이었다." 이게 멘탈리티이다. 딱 듣기에도 헛소리이다 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세르비아인을 어떻게 규합을 하겠는가. 바로 이것이 대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결부가 된다. 그런데 이게 새롭게 발명된 것이 아니라 과거에 있었던 사건을 살짝 개작해서 만든 것이다. 이의 역사적 근거는 스테판 두샨(1308~1355)의 중세 제국이었다. 이게 바로 개수 작업을 거쳐서 중세 제국의 신화가 대 세르비아 민족주의로 새롭게 확립된다. 그런데 핵심적인 사건은 "두샨 차르의 제국은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패한 이후 붕괴한 것으로 추정된다." 날짜가 나와있는데 추정된다는 것은 후대 사람들이 정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바로 코소보 전투라는 것을 기리게 된다. 그것이 "모든 세르비아인을 통일하는데 대大세르비아 '복원'은 혁신이 아니라 오래된 역사적 권리의 표명이었다." 그리고 세르비아이나의 과거 정치적 ·민족적 생활에 현재의 세르비아인들의 삶이 뿌리를 두고 있다. 신화가 하나 만들어졌다. 그래서 "중세에 급속히 팽창한, 합성물 같았던 두샨 차르의 다종족 정치체를 같은 문화와 언어를 가진 근대 민족국가의 관념과 융합할 수 있다는 허구에 근거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 속칭 삑사리가 가는 것이다. 중세는 어떠했는가. 제국이라고 하는 것은 다종적 정치체이다. 규모가 크다고 해서 제국이 아니라 다종적 정치체이다. 이게 바로 전형적인 중세적인 정치체이다. 그런데 그것에 근거해서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세워놓고 이제 땅덩어리를 정하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여기까지가 대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자리를 잡아야 할 곳, 그래놓고 같은 문화와 언어를 가진 세르비아 민족이 여기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그러면 그 안에 세르비아 민족만 살고 있지 않으니 그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면서 인종청소가 벌어지는 것이다. 예정에 코소보라든가 보스니아 내전 등이 여전히 심상지도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굉장히 뿌리가 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심상지도를 정리해야 한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반드시 제1차세계대전 당시 세르비아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대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심상지도는 이런 종류의 심상지도가 가질 수 있는 요소들을 다 갖추고 있다. 먼저, 모든 세르비아인의 통일을 모토로 내걸고 있다. 그것의 역사적 근거가 스테판 듀샨의 중세 제국인데 그것은 오래된 역사적 권리의 표명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중세의 다종족 정치체를 근대 민족국가의 관념과 융합할 수 있다는 허구가 심각한 문제다. 이런 민족주의는 대개 주적을 설정한다. 그 주적이 바로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이다. 오스만 제국은 이미 조금 물러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적으로 설정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부 정책이나 선전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 비전은 세르비아인의 문화 및 정체성과 긴밀히 얽혀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거듭 사로잡은 사건은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평원에서 세르비아인이 튀르크인에게 패한 전투였다." 여기서 이 전투가 엄청나게 윤색이 되면서 서사민요의 주요 테마로까지 펼쳐지게 된다. 이것은 "암살, 순교, 희생, 망자의 원수를 갚으려는 복수심은 서사 민요의 주요 테마였다." 

이것이 이제 말하자면 멘탈맵의 기본적인 내용인데 이게 현실적인 정치적 영향을 적어야 한다. 그것은 70페이지에 있는 것처럼 "세르비아 외교정책의 수립자들은 이 나라의 정치문화를 뒤덮은 원대한 민족주의와 발칸반도의 복잡한 종족정치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에 악전고투할 수밖에 없었다." 세르비아 외교의 문제점은 원대한 민족주의와 발칸반도의 복잡한 종족정치 현실 사이의 괴리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마케도니아도 있고 불가리아도 있고 그런데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사로잡힌 사람은 마케도니아도 우리 세르비아 땅이다, 세르비아 사람들이야 라고 정해버린다. 관념 속에 있는 구도를 가지고 결정해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세르비아 대민족주의가 앞서 얘기된 민간인 암살음모단 이런 무책임한 분자드들과 결합이 되면 동시에 위험첨만한 영토회복주의와 결합이 되면서 세르비아 지역에서의 화약을 슬슬 쟁여두는, 터질만한 사건으로 가는 바탕이 된다.

제1장 64 '모든 세르비아인의 통일'이라는 이념을 뒷받침한 것은 20세기 전환기 발칸의 정치지도와 거의 관련이 없는 세르비아의 심상이었다.

제1장 64 세르비아 국가를 확장해서 보는 역사적 근거는 스테판 두샨(1308~1355)의 중세 제국이었다.

제1장 65 두샨 차르의 제국은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패한 이후 붕괴한 것으로 추정된다.

제1장 65 모든 세르비아인을 통일하는데 대大세르비아 '복원'은 혁신이 아니라 오래된 역사적 권리의 표명이었다.

제1장 65 중세에 급속히 팽찬한, 합성물 같았던 두샨 차르의 다종족 정치체를 같은 문화와 언어를 가진 근대 민족국가의 관념과 융합할 수 있다는 허구에 근거하고 있었다.

제1장 67 대세르비아라는 비전은 정부 정책이나 선전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이 비전은 세르비아인의 문화 및 정체성과 긴밀히 얽혀 있었다.

제1장 67 사람들을 거듭 사로잡은 사건은 1389년 6월 28일 코소보 평원에서 세르비아인이 튀르크인에게 패한 전투였다.

제1장 68 암살, 순교, 희생, 망자의 원수를 갚으려는 복수심은 서사 민요의 주요 테마였다.

제1장 70 세르비아 외교정책의 수립자들은 이 나라의 정치문화를 뒤덮은 원대한 민족주의와 발칸반도의 복잡한 종족정치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에 악전고투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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