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북리스트」에서 제공하는 《몽유병자들》를 듣고 정리한다.
2022.07.05 몽유병자들(5) ━ 대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심상지도(2)
《몽유병자들》 다섯 번째 시간이다. 지난번에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라고 하는 심상지도를 가지고 말했다. 그것으로 카드를 한 장 썼다. 대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심상지도가 오늘도 중요한 주제이다. 그러니까 지난 번에 만든 대세르비아 심상지도에 이어지는 같은 제목을 가진 카드 한 장을 더 쓴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라고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심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심상들이 구체적인, 물질적인 또는 휴먼 리소스의 토대를 가지고 움직여가면 그게 바로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오게 되고, 가브릴로 프린치프,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암살한 주범이다, 그런 사람의 행동으로 나가게 된다. 그리고 그런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라는 심상이 세르비아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데에도 강력하게 작용한다. 그런 것들은 추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서 가볍게 여기면 안된다. 세르비아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말그대로 그 사람들이 어떤 사건을 접했을 때 그 사건을 해석하고 이해하고, 향후에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한 두명 정도가 아니라 세르비아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그런 성향을 가지고 있다면 또는 그것에 의해서 국가의 일을 판단한다면 그것은 굉장히 중요한 판단요소가 되는 것이다.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라고 하는 심상지도가 무엇인가. 우리식으로 번역하면 '국뽕의 민족'이라고 하는 심상지도가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라는 심상지도가 어떤 방식으로 대외관계에 나타나는가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75페이지를 보면 결별 섹션이 있다. 밀란 공은 "빈과의 국교를 굳게 다져서 러시아의 위협을 상쇄하려 했다." 이 사람이 1903년에 살해당한 밀란 오브레노비치이다. 그래서 이 사람은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좀 돈독하게 하고 있었는데 1903년에 살해됨으로써 세르비아 왕조가 교체되었다. 그리고 세르비아 왕조가 교체되면서 당연히 오스트리아 관계를 돈독하게 할 수 없었다. 오스트리아에 사실 빚을 많이 지고 있었고 세르비아에 대외수출도 오스트리아도 나아가고 그랬는데, 세르비아는 왕조가 바뀐 김에,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 전통적으로 서로 적대관계가 아니었다면, 밀란 오브레노비치가 왕위에 있었을 때 또는 아직 왕위에 있지 않았을 때 있던 조약들을 유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바꾸어버리면서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강력하게 가져가게 된다. 즉 "1906년 세르비아가 프랑스 차관을 받은 것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러면 프랑스와 세르비아의 관계가 기존의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와 관계를 파탄을 내고 동맹을 맺게 된 것, 그 사건이 벌어지게 된 중요한 배경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대세르비아 민족주의이다. 그런데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있다. 그 이유가 세르비아의 정치적 구조가 기독교를 믿는 소규모 자영농들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소규모 자영농이 세르비아 사회의 기반인데, 앞서 말한 것처럼 급진당의 정치적 기반이다. 소규모 자영농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사회에 주도적인 세력이고 그들이 지배하는 의회가 있다고 하면, 세르비아에서는 그것이 구조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외국인 혐오, 부패한 관료, 낮은 기업 윤리, 현저히 낮은 문해율, 이 당시에는 그랬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독특한 경제적·문화적 국면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을 계속 동원해 내는 것, 그게 민족주의의 강력한 도구가 된다. 따라서 대세르비아 민족주의 아래에 1번, 어떤 것을 기반으로,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열렬하게 밀고 있는 국민들은 소규모 자영농들이다. 그런 소규모 자영농들을 기반으로 나라이기 때문에 근대화라는 것이 어렵게 되는 것이다. 그 다음 외교정책에 끼치는 영향이 있다. 그것은 재정적 지정학적 이유로 프랑스와 동맹이 점차 강호된다는 것이다. 이말은 기왕에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계속해서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어왔던 오스트리아와의 관계를 파탄을 내면서까지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오스트리아가 어떤 짓을 한다고 하면 바로 엄청난 적대국이 되는 것이다. 굳이 오스트리아와 싸울 이유가 있었나 라고 생각되는 지점들이 있다. 굳이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죽여야 했나를 설명할 때 필요한 요소가 된다.
제1장 75 밀란 공(훗날 국왕)은 빈과의 국교를 굳게 다져서 러시아의 위협을 상쇄하려 했다.
제1장 76 1903년 세르비아 왕조 교체는 양국 관계의 중대한 재조정을 알리는 신호였다.
제1장 79 1906년 세르비아가 프랑스 차관을 받은 것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75페이지를 보면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했다. 이것은 여기에 나온 것처럼 "공식적으로 오스만제국의 영토인 두 지방을 오스트리아가 30년 동안 점령하고 있었고 1878년 관할권을 변경할 때 아무런 문제도 제기되지 않았으므로, 점령에서 완전 병합으로의 명목상 변경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세르비아의 외교장관도 그것을 모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세르비아 대중들에게는 이제 오스트리아와 전쟁이라고 하는 극한 대립의 계기로 작용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그전까지 군사적인 도움이나 재정적인 도움을 계속 받고 있었다면 그것이 어려웠겠지만 사실은 그전에 이미 프랑스와 여러가지로 사이가 좋아져버린 상태. 그래서 "세르비아의 정책과 목표에 대한 엘리트와 민중의 이해를 규정한 심상지도가 다시 한 번 부각되었다."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한 사건은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 사이에 돌이킬 수 없는 적대 관계를 만들어 놓게 된다. 이렇게 되는데 있어서는, 대세르비아 민족주의 심상지도라고 하는 것은 상징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상징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위력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제1장 83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이 모든 것이 바뀌었다.
제1장 83 공식적으로 오스만제국의 영토인 두 지방을 오스트리아가 30년 동안 점령하고 있었고 1878년 관할권을 변경할 때 아무런 문제도 제기되지 않았으므로, 점령에서 완전 병합으로의 명목상 변경은 대수롭지 않은 문제처럼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제1장 84 세르비아의 정책과 목표에 대한 엘리트와 민중의 이해를 규정한 심상지도가 다시 한 번 부각되었다.
대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심상지도(2)
1. 세르비아 왕조가 교체로 인한 대외관계의 변화
1906년 세르비아가 프랑스 차관을 받은 것은 중요한 전환점 → 프랑스와 세르비아의 관계가 기존의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와 관계를 파탄을 내고 동맹을 맺게 된 것.
2. 세르비아의 정치적 구조는 기독교를 믿는 소규모 자영농들이 지배하는 사회
외국인 혐오, 부패한 관료, 낮은 기업 윤리, 현저히 낮은 문해율
3. 1908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 → 모든 것이 바뀌었다.
보스니아는 지리적으로나 민족지학적으로나 대세르비아의 심장부
세르비아의 정책과 목표에 대한 엘리트와 민중의 이해를 규정한 심상지도가 다시 한 번 부각
4. 민족주의적 목표를 추구하는 새로운 대중조직이 출현
정치성 불가피성과 종족적 불가피성이 뒤섞인 세르비아의 심상지도가 투영되어 있다.
민족주의 집단들의 급진화
85페이지를 보면 "베오그라드 주재 영국 공사는 1909년 4월 27일 보고서에서 오스트리아의 병합이 세르비아에서 불러일으킨 과격한 감정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다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부분은 중요한 부분이다. 거기에 보면 "보스니아는 지리적으로나 민족지학적으로나 대세르비아의 심장부다." 그러니까 그것을 건드린 것이다. "언젠가 대세르비아가 창건되어 현재 오스트리아렬, 헝가리령, 오스만령에 흩어져 있는 민족의 모든 분파를 하나의 공동체로 합칠 날을 고대한다." 지금 베오그라드 주재 영국 공사가 만들어놓은 보고서 안에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라고 하는 심상지도의 구체적인 내용, 그리고 그들이 지향하는 바가 담겨 있고 동시에 이것이 얼마나 많은 외교 관계와 또는 군사전략에 영향을 미칠 것인가 하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대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심상지도를 공부하는 이유는, '아 심상지도라고 하는 것이 이런 식으로 영향을 미치는구나', 그러면 한국인의 심상지도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볼 기회를 갖기 위해서 이런 것을 공부하는 것이다. 심상지도라는 것은 권력이라고 하는 것이 가지고 있는 상징적인 측면들을 보여준다.
제1장 85 베오그라드 주재 영국 공사는 1909년 4월 27일 보고서에서 오스트리아의 병합이 세르비아에서 불러일으킨 과격한 감정을 이해하는 유일한 길은 다음을 기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제1장 85 애국자는 언젠가 대세르비아가 창건되어 현재 오스트리아령, 헝가리령, 오스만령에 흩어져 있는 민족의 모든 분파를 하나의 공동체로 합칠 날을 고대한다. (······) 그의 관점에서 보면 보스니아는 지리적으로나 민족지학적으로나 대세르비아의 심장부다.
그 다음에 두번째로는 "민족주의적 목표를 추구하는 새로운 대중조직이 출현했다." 이것 역시 그 심상지도에서 영향을 받아서 나타난 사건이다. 대외적으로는 오스트리아와 원수가 된 것이고,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대중조직이 출현했다. 그러니까 국내정치에서도 "세르비아 내 민족주의적 히스테리를 제어하는 동시에 온건한 '민족'정책의 배후에서 의회와 정치 엘리트를 통합해야 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정치성 불가피성과 종족적 불가피성이 뒤섞인 세르비아의 심상지도가 투영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세르비아의 심상지도라고 하는 것은 종족적으로는 불가피한다. 그런데 종족적 불가피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굉장히 곤란한 여러가지 일들을 해 나가야 한다. 특히 외교관계에 있어서. 그러면서 새로운 대중조직이 출현했는데 그 대중조직이 "민족주의 집단들의 급진화"이다. 흑수단 이런 것들이 생겨나면서 가브릴로 프린치프와 같은 이들이 등장한다. 이 부분은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라는 심상에서 파생되어 나오면서도 새로운 카드로 봐야하는 지점이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나온 사람들이 행동을 해서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쏴서 죽였기 때문에 이것은 연결고리로 카드가 하나 더 나와야 한다. 대세르비아 민족주의라는 카드에서 외교적인 영향, 국내 정치적인 영향이 하나 있고, 두번째로 나온 것이 민족주의적 목표를 추구하는 새로운 대중조직이 출현했다라고 하는 부분, 그리고 그 심상지도를 뒷받침하는 세르비아 내부의 구체적 경제적 문화적 상황들이 있겠다.
제1장 86 세르비아를 휩쓴 분노의 물결을 타고 민족주의적 목표를 추구하는 새로운 대중조직이 출현했다.
제1장 87 그는 세르비아 내 민족주의적 히스테리를 제어하는 동시에 온건한 '민족'정책의 배후에서 의회와 정치 엘리트를 통합해야 했다.
제1장 88 정치성 불가피성과 종족적 불가피성이 뒤섞인 세르비아의 심상지도가 투영되어 있었다.
제1장 90 1908~1909년의 분노와 실망은 민족주의 집단들의 급진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강의노트 > 강유원의 북리스트 2021-23'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유원의 북리스트 | 몽유병자들(7) ━ 독특한 정치체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0) | 2022.07.20 |
---|---|
강유원의 북리스트 | 가르침과 배움(53) #Steiner 75쪽 (0) | 2022.07.18 |
강유원의 북리스트 | 몽유병자들(6) ━ 새로운 급진적 대중조직의 출현 (0) | 2022.07.12 |
강유원의 북리스트 | 가르침과 배움(52) #Steiner 75쪽 (0) | 2022.07.11 |
강유원의 북리스트 | 가르침과 배움(51) #Steiner 74쪽 (0) | 2022.07.07 |
강유원의 북리스트 | 가르침과 배움(50) #Steiner 72쪽 (0) | 2022.07.04 |
강유원의 북리스트 | 가르침과 배움(49) #Steiner 71쪽 (0) | 2022.07.01 |
강유원의 북리스트 | 몽유병자들(4) ━ 대세르비아 민족주의의 심상지도 (0) | 2022.07.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