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원의 북리스트 | 몽유병자들(9) ━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외교정책

 

2022.08.01 몽유병자들(9) ━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외교정책

《몽유병자들》 아홉번째 시간이다. 오늘은 182~208페이지까지 설명을 하려고 한다. 이 섹션의 제목은 매파와 비둘기파이다. 여기서 매파와 비둘기파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내부의 정치적 군사적 또는 외교적 행위자들 그리고 사라예보에서 암살을 당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 운트 보그닌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니까 고위 정책 결정자들과 참모, 외교부장관 그리고 그 밑에 여러 군사 행위자들을 포함한다. 동시에 세르비아 그리고 러시아의 행위자들을 포함한다. 계속해서 지난 시간에 이어서 행위자들이 어떻게 움직여 갔는가 그런 것들, 특히 오늘 읽을 매파와 비둘기파에서는 외교정책에 관련된 부분들이 많이 거론된다. 우리가 이렇게 제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에 있는 이런 여러가지 행위자들 사이의 관계 또는 긴장된 외교관계 이런 것들을 다루다보니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에 대해서 무감각해질 수 있는데 사실 인류의 역사에서 아주 뚜렷하게 기억에 남는 참상을 기록한 최대의 전쟁이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다. 또는 유럽대전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 전쟁은 참호전으로 유명하다. 참호전이라고 하면 길게 땅에다가 참호를 파서 거기에 사람들이 몸을 숨기고 적을 향해 총을 쏘고 하는 전쟁을 말한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은 실감하기 어려운데 유럽에서 참호전이 벌어졌다고 하면 한국의 땅덩어리와 지형이 다르다. 한국은 땅파기 어려운 나라이다. 화강암으로 되어 있어 땅이 딱딱하다. 그런데 유럽은 여러 나라들이 말랑말랑하다. 저지대로 되어있고, 산이 없다. 비가 조그만 와도 땅 속으로 물이 스며들고 게다가 전체가 석회암 지대로 되어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냉수를 마시는 것에 익숙하지만 전세계적으로 계곡물을 그대로 끓여서 바로 먹을 수 있는 나라는 그렇게 많지 않다. 유럽은 더군다나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그 더운 여름이든 겨울이든 질퍽질퍽한 땅을 파서 거기서 참호전을 벌였다는 것은, 조금만 검색해 보면 참호전의 참상에 대해서 나온다. 그것을 잊기가 쉬운데 지금은 제1차 세계대전의 출발점에서 벌어진 여러 사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매파와 비둘기파에 대한 설명이 꽤 긴데 여기에서 마지막 부분을 보면 "이런 일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가 언젠가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소소하지만 희망적인 조짐이었다."로 끝난다. 다시말해서 1914년 5월말, 이 시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 사이가 그렇게 당장 전쟁을 하자 이런 쪽으로 분위기가 휩싸여 있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 제위계승자였던 최고 의사결정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전쟁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대공과 그의 아내의 암살이라고 하는데 정말 사태를 일순간에 바꿔버린 어마어마한 사건인 것은 틀림없다. 5월말까지만 해도 고무적인 국면이었는데 사건이 벌어진 것이 6월 28일이기 때문에 불과 두 달도 되지 않아 사태가 급변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급변하게 되지만 그전까지도 계속 주변 여러 나라들 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재국과 세르비아 사이에 오랫동안 우호적인 분위기가 쌓여 있었고, 또 지난 시간까지 설명했던 심상지도가 괜찮게 작동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런 암살이 일어났다고 하더라도 곧바로 전쟁으로 가지는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최고의사결정자를 암살했는데 전쟁이 안나겠는가. 그런데 처음에 말했던 것처럼 제1부가 그런 배경을 보여주고, 제2부는 유럽이 어떠했는가를 보여주고, 제3부가 위기이다. 그래서 오늘 매파와 비둘기파를 읽고 나서 바로 사건이 진행되는 제3부 위기라는 국면으로, 제2부는 건너 뛸 것이다. 그러니까 "소소하지만 희망적인 조짐"이 있었는데 곧바로 제3부로 가보면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아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 운트 보그닌이 열차편으로 사라예보에 도착해 자동차로 갈아타고 아펠 부두를 지나 시청으로 향했다." 중간에 2부를 건너뛰고 보면 분위기가 좋았는데, 암살로 곧바로 전쟁이 벌어졌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게 사실일지는 모르지만 또는 어떤 점에서 보면 그런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그런 직접적인 촉발원인이 생겨나기 전에 원인(遠因)들이 켜켜이 쌓였던 것들이 제1부에 있고, 제2부는 켜켜이 쌓인 원인들 아래 놓여있는 원인들을 찾아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과 함께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아주 잘 보여주는 그런 여러가지 전투 현장에서의 양상들도 놓쳐서는 안된다. 유럽 사람들이 자기네가 문명인이고 제국주의적 침략을 하면서 아시아가 야만이라도 말하는데, 문명과 야만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 대륙 사람들이 문명이고 특정 대륙 사람들은 야만이라고 나눌 수 없다. 인간은 모두다 야만이고 모두 다 문명이다. 특정한 범주 안에서는 문명이고, 특정한 범주 안에서는 야만이다. 야만적인 측면도 있고 문명적인 측면도 있다. 

제2장 208 이런 일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세르비아가 언젠가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소소하지만 희망적인 조짐이었다.

제7장 569 1914년 6월 28일 일요일 아침 오스트리아-헝가리 제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조피 초테크 폰 초트코바 운트 보그닌이 열차편으로 사라예보에 도착해 자동차로 갈아타고 아펠 부두를 지나 시청으로 향했다.


매파와 비둘기파에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부분들을 말하려고 한다. 먼저 매파와 비둘기파는 아주 흔한 비유법이다. 전쟁을 하자는 것이 매파이고, 전쟁을 하지말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하는 것이 비둘기파이다. 그러면 읽을 때는 비둘기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외교정책을 전개하려고 했는가, 그 다음에 매파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누구이고, 그들은 왜 전쟁 이외의 것은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가, 그런 것들을 살펴봐야 한다. 한국에서도 매파와 비둘기파가 있는데 그들은 지금 여기서 거론되는 이유들과 거의 다르지 않게 주장한다. 183페이지를 보면 "제국의 외교정책은 체제의 꼭대기에 있는 소규모 운영진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외교정책은 하나의 군도를 이루는 권력 중심들의 상호작용에서 나왔다. 이 중심들의 관계는 얼마간 비공식적이었고 언제나 유동적이었다." 이게 외교정책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만이 아니라 모든 외교정책이 이런 식으로 나온다. 그래서 외교정책을 따져보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군사정책도 외교정책의 하나로 다뤄야 한다 라는 생각이 아직은 뚜렷하지 않았을 때이다. 아직은 그점에서 한국은 북한이라고 하는 특수한 집단이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보는데, 국방부장관을 아직도 군 출신이 한다. 그런데 한국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 있지 않은 나라들은 군 출신이 아니어도 국방부장관을 한다. 그것은 바로 제1차 세계대전,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외교정책 아래에 군정책, 전쟁정책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면 제국의 외교정책을 움직여가는 여러 기관들은 무엇인가. "참모본부가 그런 중심 중 하나였고, 황태자의 군사청도 마찬가지였다. 하우스 광장에 위치한 외무부 역시 분명 핵심 행위자였다."  이런 참모본부와 외무부, 군사청 이것을 총괄하는 사람이 황태자였다. 이것을 보면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군사정책과 전쟁정책, 외교정책 이런 것들이 하나로 움직여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장 183 제국의 외교정책은 체제의 꼭대기에 있는 소규모 운영진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외교정책은 하나의 군도를 이루는 권력 중심들의 상호작용에서 나왔다. 이 중심들의 관계는 얼마간 비공식적이었고 언제나 유동적이었다. 참모본부가 그런 중심 중 하나였고, 황태자의 군사청도 마찬가지였다. 발하우스 광장에 위치한 외무부 역시 분명 핵심 행위자였다.



그 다음에 그런 것을 움직여가는 사람은 누군인가. 184페이지에 있다. "다수 지배 성격이 두드러진 체제를 배경으로 특히 세 사람이 유력자로 부상했다. 오스트리아군 참모총장 겸 육군원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남작, 합스부르크 제위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1912년부터 공동 외무장관을 지닌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백작." 그러니까 베르히톨트, 회첸도르프, 페르디난트 이 세 사람이 주요한 행위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외교정책을 볼 때는 그들 각각이 가지고 있는 특징들을 봐야 한다. 그래서 먼저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에 대해서 검토를 한다. 회첸도르프는 로맨틱한 군인이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은 일단 한마디로 말해서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지정학적 곤경에도 편집광적 일변도 전술로 접근했다. ...사실상 모든 외교 난제에 대한 그의 대답은 '전쟁'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보면 "특히 세르비아에 집착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은, 일종의 이념이겠다, "투쟁과 경쟁을 국제 정치의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현실로 보는 사회다윈주의적 철학이 있었다... 국가들 간의 영원한 투쟁을 전망하는 홉스적 시각에 더 가까웠다." 이것은 전형적인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군인이라면 가장 가지고 있을만한 전형적인 사람이다. 하나의 사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사례가 아주 많은 군인들에게 발견될 수 있으므로 우리는 그 사람을 포토스topos, 전형이라고 말 할 수 있겠다.

제2장 184 이처럼 다수 지배 성격이 두드러진 체제를 배경으로 특히 세 사람이 유력자로 부상했다. 오스트리아군 참모총장 겸 육군원수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 남작, 합스부르크 제위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에스테 대공, 1912년부터 공동 외무장관을 지닌 레오폴트 폰 베르히톨트 백작.

제2장 187 콘라트는 애정생활과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지정학적 곤경에도 편집광적 일변도 전술로 접근했다. 1914년 이전 유럽의 사령관들 중에서도 그는 유달리 공격적이었다. 사실상 모든 외교 난제에 대한 그의 대답은 '전쟁'이었다.

제2장 188 시아에 들어오는 여러 잠재적인 적들 중에서 콘라트는 특히 세르비아에 집착했다.

제2장 189 분쟁 추구의 밑바탕에는 최강이 되기 위한 투쟁과 경쟁을 국제 정치의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현실로 보는 사회다윈주의적 철학이 있었다.

제2장 189 국가들 간의 영원한 투쟁을 전망하는 홉스적 시각에 더 가까웠다.


그 다음에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전쟁은 일체 원하지 않고 아주 뚜렷하게, 190페이지를 보면 "나의 정책은 평화 정책이네."라고 말했다. 그리고 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 역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정책을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콘라트와 그의 전쟁 정책을 가장 일관되게 반대한 유력자"이다. 사실 이 사람이 그래서 암살당한 것이 굉장히 짠하다. 전쟁을 가장 일관되게 반대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조카이자 왕위 계승계증자가 되었는데 보헤미아 출신의 조피라는 여성과 결혼을 하면서,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못마땅해 하는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어쨌든 이 사람은 여러가지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자기가 자신이 즉위한 뒤 제국 체제를 재구성할 의도가 있다는 것, 사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게 조금 거슬리는 정책이지만,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겠다, 그래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서 헝가리 세력을 약화시키고 대오스트리아 연방, 이런 정도로 갈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군대에 대한 생각도 회첸도르프와는 달랐던 것 같다. 

제2장 190 콘라트와 그의 전쟁 정책을 가장 일관되게 반대한 유력자는 합스부르크 제위계승자이며 장차 사라예보에서 살해당해 1914년 7월 위기를 촉발하게 되는 프란츠 페르디난트였다.

제2장 193 대공은 자신이 즉위한 뒤 제국 체제를 재구성할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핵심 목표는 군주국의 동부에서 헝가리의 패권을 꺾거나 약화하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196페이지를 보면 외무장관 베르히톨트에 대해서 설명이 되어있다. 그런데 대강 이렇게 보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에서의 대외정책이나 전쟁정책, 군사정책의 최고결정자들에 대해서 거론이 되고나서 이들이 이런 생각을 계속 유지하기 어렵게 사태가 뭐냐, 바로 199페이지의 발칸전쟁이다. 이 발칸전쟁으로 인해서 세르비아가 알바니아를 둘러싸고 오스트리아와 각을 세우게 되고 또 전쟁을 이기고 그런 다음에 앞서 봤던 것처럼, 이미 세르비아에 대해서 안좋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부정적 태도와 부정직, 기만, 신용불가 이런 것들이 있었는데 이미 발칸 전쟁 시기를 거치면서 세르비아는 201페이지에 나와있는 것처럼 "살인과 도살이 체계의 반열에 오른 국가"로 낙인 찍히게 된다. 그 와중에 외교부 부장인 고위 관료 프란츠 마체코가 의견서를 만들게 된다. 마체코 의견서라는 것이 202~204페이지에 걸쳐서 나와있는데 한마디로 나와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교로서 뭔가를 해결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그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외교정책의 기조는 "보수적 평화 정책"의 옹호자라는 빈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외교적 방법과 목표에 확고하게 맞추어져 있었다. 러시아라든가 독일이라든가 이런 나라들이 주요한 행위자였지만 지금 현재 직접적으로 적대적인 가능성이 있는 나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세르비아이다. 게다가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여전히 전쟁 정책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그러니까 그가 암살당하지 않았으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이렇게 보면 거의 확실해 보인다. 더군다나 세르비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 사이에 좋은 조짐도 있었다. 그것이 바로 "언젠가 좋은 이웃으로 살아가는" 상황에 놓여있었는데, 지금 그게 바로 사라예보에서의 사건으로 사태가 엉망으로 망가져버리게 된 셈이다. 

제2장 204 보고서의 초점은 "보수적 평화 정책"의 옹호자라는 빈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외교적 방법과 목표에 확고하게 맞추어져 있었다.

제2장 206 프란츠 페르디난트는 여전히 전쟁 정책의 최대 걸림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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