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백치(상) ━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세트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 기념판 세트 - 전8권 - 10점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홍대화 외 옮김/열린책들

 

제1부
009 날씨가 풀린 11월 말의 어느 날 아침 9시경, 페테르부르크와 바르샤바 간 왕복 열차가 힘차게 연기를 내뿜으며 페테르부르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습한 대기에 안개가 자욱이 끼어 겨우 날이 밝았다는 것을 알아차릴 정도여서, 철길 양 옆으로 열 발짝 정도만 벗어나도 무엇이 있는지조차 차창을 통해서는 식별하기 힘들었다. 승객들 중에는 외국에서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어오는 평범한 사람들이나 상인들이 탄 삼등칸이 더 붐볐다. 열차가 이곳까지 도달했을 때는 흔히 그러하듯 모두들 지칠대로 지쳐 밤사이에 무거워진 눈꺼풀을 껌벅이며 추위에 몸을 떨고 있었고, 사람들의 얼굴은 안개 속에서 누렇고 창백해 보였다.

동이 틀 무렵부터 이 열차의 어느 삼등칸의 창가에는 두 승객이 서로 마주 보며 앉아 있었다. 외모가 상당히 빼어난 이 두 사람은 모두 젊어 보였으며 멋을 부리지 않은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이들은 서로대화를 나누고 싶어 했다. 만일 두 사람이 상대방에 대해서 알았고, 특히 이 순간 이들이 왜 서로에게 마음이 끌렀는지를 알았더라면, 어떤 인연이 이렇듯 기이하게도 그들을 페테르부르크-바르샤바 간 왕복 열차의 삼등칸에 마주 보고 앉게 했는지에 대해 물론 놀랐을 것이다. 이중 한 사람은 스물일곱 살가량으로 작은 키에, 검은색에 가까운 곱슬머리였다. 잿빛이 나는 그의 눈은 작았지만 이글거리고 있었다. 코는 평퍼짐하니 낮았고 광대뼈가 나온 얼굴에 얇은 입술은 불손하고 경멸기가 도는 듯했으며, 심지어는 표독스러운 미소마저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높고 잘생긴 그의 이마가 흉하게 발달된 얼굴의 아랫부분을 미화시켜 주었다. 이러한 얼굴에 죽은 사람 같은 창백함이 유난히 두드러져 보였다. 젊은이다운 다부진 체격에도 불구하고 창백한 안색은 그를 매우 지쳐 있는 사람처럼 보이게 했으며, 동시에 그 창백함 속에는 불손하고 거친 미소나 날카롭고 자만에 찬 시선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열정적인 것이 있었다. 그는 넓적하고 두툼한 검은 양털 외투를 따뜻하게 입고 있었으므로 밤새도록 그다지 추위에 떨지 않은 데 반해, 그의 맞은편 승객은 미처 예기치 못했던 으스스하고 습한 11월 러시아의 밤을 등줄기에 소름이 돋은 채로 참아 내야만 했다. 그는 큼직한 두건이 달린 널따랗고 두툼한 소매 없는 망토를 입고 있었다. 그러한 망토는 스위스나 북부 이탈리아 같은 아주 먼 나라에서나 여행을 떠날 때 흔히 입고 다니는 것이었다. 독일의 오이트쿠덴에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까지 가는 여정에 그런 옷을 입어도 되는지에 관해서는 미리 계산해 두지 않았던 듯싶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아주 유용한 것이 러시아에서는 완전한 무용지물이 되었다. 두건 달린 망토의 소유자는 중키가 약간 넘는 스물예닐곱 살가량 되는 젊은이였다. 숱이 많은 노란 머리에 볼이 움푹 파인 얼굴이었으며, 거의 흰색이 나는 뾰족한 턱수염을 살짝 기르고 있었다. 푸르고 큼직한 그의 두 눈은 무엇을 유심히 바라보는 듯한 눈빛을 띠었으며, 거기에는 무언가 고요하지만 신중한 것이 담겨 있었다. 또 그의 시선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첫눈에 간질의 기미가 있다는 것을 추측 해 낼 수 있을 만큼 이상한 표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에도 이 젊은이의 얼굴은 유쾌하고 심세하고 담담해 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윤기가 가셔 추위로 새파래져 있었다. 그의 두 손에는 여행 도구 일체가 들어 있음직한 낡고 색이 바랜 홀쭉한 비단 보따리가 놓여 있었다. 그는 밑창이 두툼한 반장화를 신고 각반을 차고 있었다. 모든 게 러시아식 행장이 아니었다. 양털 외투를 입은 머리가 검은 맞은 편 승객은 이 모든 것을 살펴보고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심심풀이 삼아서였다. 그는 마침내 무례한 듯한 웃음을 띠고 물었다.

제2부
349 제1부의 말미를 장식했던 나스타시야 필리포브나의 파티에서 일어난 이상한 사건이 있고 난 이틀쯤 후에 미시킨 공작은 서둘러 모스크바로 떠났다. 예기치 못했던 유산 상속 문제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때 그가 출발을 그렇게 서둘렀던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서는 페테르부르크를 떠난 이래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공작의 모험과 마찬가지로 별로 전해줄 정보가 없다. 공작은 정확히 6개월 동안 떨어져 있었으므로, 그의 운명에 흥미를 느낄 만한 이유를 가진 사람들조차 이 기간 동안에는 그에 관해 지나질 정도로 아무 소식도 들을 수 없었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으나 아주 간간이 그에 관한 어떤 풍문을 접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런 풍문도 사람들에 따라 말이 다르기 일쑤였다. 누구보다 공작에 대해 관심이 있던 사람들은 물론 예판친 장군 가족이었다. 공작은 모스크바로 가면서 이 가족과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했다. 그러나 장군은 그런 와중에도 공작을 두세 번 만나 보았다. 이들은 만나서 무언가에 대해 심각하게 상의를 하곤 했다. 예판친 장군은 그렇게 공작과 만났으면서도 가족에게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공작이 떠난 후 처음 얼마 동안, 그러니까 거의 한 달 가량이나 예판친 장군의 집에서는 공작에 관해 입을 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다만 장군 부인 리자베타 프로코피예브나만이 맨 처음에는 〈내가 공작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어!>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리고 이틀인가 사흘 후에는 정확히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난 평생 살아오면서 사람들을 잘못보는 게 커다란 흠이야.〉 그리고 마침 내 열흘쯤 후에는 딸들에게 무언가 잔뜩 화가 나 있는 표정으로 결론을 지었다. 〈이제 실수도 할 만큼 했어! 더 이상 그런 실수는 안 할 거야!〉 한 가지 지적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은, 이들의 집안에서 이때 아주 살벌한 분위기가 상당히 오랫동안 가시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무언가 짜증스럽고, 긴장되고, 입 밖으로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논쟁의 여지가 존재하고 있었다. 모두들 이맛살을 찌푸리고 살았으니 말이다. 장군은 밤낮, 사업 관계로 분주했다. 이때처럼 바쁘고 활동적 인 때도 드물었는데, 특히 공무로 바빴다. 집안 식구들마저 그의 얼굴을 보기 힘들 정도였다. 예판친 장군의 딸들도 공작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자기네들끼리 있을 때도 지나치게 언급을 자제했을 것이다. 이 아가씨들은 거만할 정도로 자존심이 강해서 자기네들 사이에서도 때로는 수치심을 느낄 정도였다. 이들은 첫마디가 아닌 첫 번째 시선에서 이미 상대방의 의중을 이해하고 있을 정도라 구태여 많이 말할 필요가 없었다.

제3의 관찰자라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앞에서 얘기한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비록 그것이 적은 자료이지만 예판친 장군의 가족과 딱 한 번 만났던 공작이 그들에게 특이한 인상을 심어 준 것만은 틀림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공작의 기이한 행동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찌 되었든 인상을 받은 것만은 사실이었다.

점차 도시에 퍼졌던 소문들은 미지의 암흑 속으로 묻혀 버리게 되었다. 어느 바보 공작에 대한 얘기가 회자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바보 공작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공작은 갑자기 엄청난 유산을 상속받아, 파리의 샤토데플뢰르의 유명한 캉캉댄서 노릇을 하다 러시아로 온 프랑스 여자와 결혼했다는 설이 떠돌았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공작이 아니라 어느 장군이 상속을 받았고, 프랑스 캉캉 댄서와 결혼한 것은 러시아의 어느 상인이자 대부호인데 그는 결혼식 파티 때 술에 취해 객기를 부리다가 최근에 나온 70만 장의 복리 채권을 촛불에 태워버렸다고 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이 생겨 이 모든 소문은 곧 잠잠해졌다. 무언가 얘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지들이 많이 끼여 있는 로고진 일행이 그를 앞장세우고 대거 모스크바로 떠났다는 것이 그러한 사정의 한 예이다. 그것은 나스타시야도 참석했던 예카테린고프 공원에서의 지독한 술 파티가 있은 뒤로 정확히 1주일 후였다. 이 사건에 대해 흥미를 느낀 소수의 사람들은 나스타시야가 예카테린고프 사건 다음 날 도망쳐서 자취를 감추었으나, 곧 모스크바로 떠났다는 사실을 어느 풍문에서 들었다고 했다. 로고진이 모스크바로 떠나게 된 것은 이러한 풍문을 어느정도 뒷받침해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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