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뮤얼 보울스: 도덕경제학

 

도덕경제학 - 10점
새뮤얼 보울스 지음, 최정규 외 옮김/흐름출판

한국 독자들에게 | 자유주의의 종말
서문

1장 호모 이코노미쿠스, 무엇이 문제인가?
2장 부정직한 자들을 전제로 한 법질서
3장 도덕감정과 물질적 이해관계
4장 정보로서의 인센티브
5장 자유주의 시민문화
6장 입법자의 딜레마
7장 아리스토텔레스적 입법자가 해야 할 일

부록 1 가산적 분리 가능성(Additive Separability), 그리고 그 조건이 위배되는 경우
부록 2 사회적 선호와 인센티브의 효과를 측정하는 데 활용되는 실험실 게임
부록 3 이를렌부슈와 루샬라의 실험(2008)에서 보조금 지급의 총효과, 직접효과, 간접효과
부록 4 신뢰와 자유주의적 법치

 


한국 독자들에게 | 자유주의의 종말

11 자유주의의 위기는 스스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국내 자유방임의 결과로 경제적 불평등이 증대되었고 과거 자부심 강한 제조업 분야의 몰락이 초래되었습니다. 전 지구적 자유방임은 이러한 문제에 대 한 준비된 희생양이었습니다.

보편적 선거권이 도입된 이후 자유주의적 가치의 운명은 광범위한 유권자들 손에 달려 있습니다. 현재의 유권자들, 그리고 이전 세대의 유권자들은 대부분 과거에 자유주의가 표방한 자유의 열렬한 옹호자였던 사람들입니다. 재산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까지 투표권이 확대된 일을 비롯해 19세기와 20세기 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끌어 온 것은 노동자와 소농, 도시 빈민의 운동이었습니다. 오늘날자유주의가 표방하는 자유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 이런 평범한 사람들의 적극적인 지지가 다시 한 번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유주의가 불평등을 심화하는 경제모델과 결합해버린 이상, 이제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나 '자유무역'을보호주의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그저 지역 중심적 사고방식만을 확산시킬 뿐입니다.

초기 자유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약자와 취약 계층을 보호하려는 데 헌신하는 사회에서라면 그리고 급격한 기술 변화와 세계화에 불가피하게 뒤따르는 경제적 불안정성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사회에서라면, 사라질 위험에 처한 정치적 자유주의의 가치들을 되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적 자유주의가 되살아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제 모델이 필요합니다.
"왜 경제적 인센티브는 선한 시민을 대체할 수 없는가"라는 이 책의 부제가 가리키는 것처럼, 《도덕 경제학》에서 제시된 여러 증거들은 새로운 경제가 어떤 모습일 수 있는지를 가늠하게 해줄 지침이 될 수 있습니다. 정치적 가치들과 같은 여러 가치들은 단지 '물려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의 사회적, 경제적 경험을 통해서 재생산됩니다. 경제 모델이 평등한 존엄, 진정한 자유 그리고 관용 등의 가치를 추구할 수 있으려면 노동현장에서, 공동체 내에서 그리고 정부의 노력 아래서 이러한 도덕적 원칙들이 배양되고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적절한 환경을 제공해주어야 합니다.

현재 미국 자본주의를 특징짓는 경제적 불평등, 정치적 계층화, 그리고 불안정성은 정치적 자유주의의 도덕적 기초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주는 제반 조건들을 해치는 요인들입니다. 자본주의가 새로운 형태로 변모함으로써 과연 정치적 자유주의가 지향하는 도덕적 임무를 수행해낼 수 있는 체제가 될 수 있는지는 여전히 열려 있는 문제입니다.

 

 

서문

19 나는 인간의 사회적 행동의 진화와 관련된 고고학 · 유전학 · 민속지학 자료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허버트 긴티스와 내가 "협력하는 종"이라 부른 종, 즉 인류의 문화적 · 생물학적 진화를 설명하기 위해 최정규, 아스트리드 호펜시츠, 허버트 긴티스와 함께 모델을 개발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시행했습니다. 이 연구 결과를 통해 앞선 실험 결과들이 결코 예외적이지 않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습니다. 인류에게 윤리적이고 관대한 동기가 보편적으로 존재할 것으로 기대할만한 유전적 ·문화적 근거가 많았습니다.

다음 단계에서는 애초에 내가 이 연구에 발을 들이게 된 과제로 되돌아갔습니다. 인간이 이기적인 동시에 관대하다면, 또 도덕적인 동시에 도덕에 대해 무관심한 존재라면 그런 인간에게 잘 작동할 수 있는 정책과 제도를 수립하는 데에 인간 행동에 관한 새로운 경험적 사실이 어떤 함의를 갖는지 살펴볼 차례가 되었습니다. 이를 위해 나는 20년 전 한쪽으로 밀어놓았던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 짧은 책은 바로 그런 오랜 여정의 결과물입니다.

 

1장 호모 이코노미쿠스, 무엇이 문제인가?

250년 전 장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 men as they are"을 놓고 "법은 어떠해야 하는지 laws as th ey might be"를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간을 뜻하는 말로 'men'이라는 젠더편향적 단어를 사용한 것을 빼면, 이 구절은 현재에도 여전히 호소력이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사회를 잘 통치하려면 거버넌스를 구성하는 법이나 경제적 유인, 더 나아가 정보나 도덕적 호소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사람들의 반응은 그들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기도 하고 제약하기도 하는 욕망이나 목표, 습관, 믿음 그리고 도덕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루소가 말한 '있는 그대로의 인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경제인, 즉 호모 이코노미쿠스Homo economicus를 살펴보자. 오늘날 법학자들이나 경제학자들, 그리고 이들의 아이디어에서 영향을 받은 정책입안자들 사이에서는 공공정책을 수립하거나 법체계를 설계할 때, 혹은 기업을 비롯한 민간 조직을 구성할 때, 사람들(시민이든 피고용인이든 사업 파트너이든 아니면 잠재적 범죄자이든)이 이기적이며 도덕에 무관심하다고 가정해야 한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부분적으로는 이런 이유에서 다양한 금전적 인센티브가 제공되고 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기 위해, 교사들이 효과적으로 가르치도록 하기 위해, 체중감량·투표·금연을 독려하기 위해, 비닐봉투 대신 재활용 가능한 종이봉투 사용을 권장하기 위해, 재무관리에서 수탁자의 책임감의 독려하기 위해, 연구자들에게 기초연구를 장려하기 위해 여러 물질적 인센티브가 제공된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에 동기부여를 하기 위해서 반드시 경제적 인센티브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경제적 인센티브 없이 내재적이거나 윤리적이거나 그 밖의 비경제적인 이유로도 이런 행동에 동기부여를 할 수 있다.

법학자 · 경제학자 · 정책입안자들 사이에서 위와 같은 가정이 널리 통용되고 있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정말로 인간이 철저하게 도덕에 탄심하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는 점이 이상해 보일지 모른다. 사실 이 가정은 사실에 입각한 것이기보다는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세워진 것이었다. 심지어 흄 조차도 이 책의 앞머리 글에서 인용한 문단 마지막 부분을 통해 그 금언이 "실제로는 거짓"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내가 주장하려는 바는 법을 설계하거나 정책을 수립하거나 사업체를 조직하려고 할 때, 호모 이코노미쿠스를 시민·피고용인·학생·채무자의 행위 모델로 삼는 것은 결코 신중한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인간이 이기적이라는 패러다임에 따라 정책을 펴면 도덕적 무관심과 이기심이라는 가정을 점점 더 사실로 만들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람들은 유인이 없을 때보다 유인이 있을 때 훨씬 더 이기적으로 행동하곤 한다. 둘째, 벌금이나 보상 같은 물질적 인센티브가 때로는 잘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흄이 주장하는 대로 부정직한 사람의 탐욕을 이용할 수 있도록 아무리 정교하게 인센티브를 설계하더라도, 인센티브만으로는 좋은 거버넌스가 확립될 수 없다.

내 주장이 맞다면, 광범위하고 잘 정의된 사적 재산권의 확립, 시장경쟁의 강화, 금전적 인센티브를 통한 개인 행동의 유도 등 경제학자들이 선호하는 정책은 좋은 거버넌스에 필요한 윤리적 동기나 그 밖의 사회적 동기를 해치는 의도치 않은 문화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나는 시장경제가 올바르게 작동하기 위해 필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이런 정책들이 이기심을 부추길 뿐 아니라, 협력적이고 관대한 시민문화를 견고하게 유지해주는 사회적 수단을 훼손할 수 있다는 점을 보이려고 한다. 이런 정책들은 시장이 작동하는 데 필수적인 사회 규범까지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대출을 신청할 때 자기 자산과 부채 상황을 정직하게 적어내는 것, 약속을 잘 지키는 것, 누가 지켜보지 않아도 열심히 일하는 것 같은 일상적인 미덕도 이른바 몰아냄 효과crowding-out라 불리는 문화적 재앙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시장과 같은 경제제도는 이런저런 규범이 부재하거나 위태로울 경우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특히 오늘날 같은 지식기반 경제에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사회규범이리는 문화적 토대가 필요하다. 이런 규범 중 하나가 '악수는 말 그대로 악수handshake is indeed handshake'라는, 즉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라는 확신이다. 누군가 이를 의심하는 순간, 그 불신 때문에 교환을 통한 상호 이득의 창출은 제한될 수 있다.

경제학자들이 시장의 완벽한 작동을 위해 필요하다고 여기는 정책이 오히려 시장의 작동을 저해할 수도 있다는 역설은 시장을 넘어서는 곳에서도 적용된다. 이런 정책을 편 결과, 시민의식이나 사회규범을 준수하려는 사람들의 내적 욕구가 고갈되어 미래에 더 나은 정책을 수립할 여지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축소될 수 있다. 일부 경제학자들은 아주 먼 과거에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시장을 창조한 것으로 상상했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을 수 있다. 다시 말해 도덕적 무관심과 이기심의 확산은 경제학자들이 이상적이라고 말할 법한 그런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일지도 모른다. 

정책을 수립하거나 법을 설계하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떤 거버넌스 체제에서도 인센티브와 제약은 필수적이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인간"이 호모 이코노미쿠스와 닮았다는 가정 아래 정책을 수립하거나 법을 설계하면, 인센티브 제공을 통해 공익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적절히 활용하려던 바로 그 이기심만을 조장함으로써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라는 가정이 '실제 있는 그대로 인간'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라면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고갈되고 훼손될 무엇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45 시민들에게 좋은 습관을 심어주는 것이 입법자의 임무라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으로부터, '악한 사람'을 가정하며 경제적 거버넌스와 법을 강조하는 시스템적 사고로 초점이 전환되는 긴 여정은 16세기 니콜로 마키아벨리에게서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부패'라 부른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사회 관습을 세우는 데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2세기 뒤에 등장할, 사람의 부정직함에 대한 흄의 언급을 예고하는 듯한 문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는 다르게 권고한다. "공화국을 수립하고 법을 제정하려는 사람이라면 모든 사람이 악하며, 자신에게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면 결코 좋은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배고픔과 가난이 부지런한 사람을 만들며, 법이 좋은 사람을 만든다고들 한다. '법이 좋은 사람을 만든다'는 마키아벨리의 말은 입법자가 대중에게 습관을 심어 주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과 언뜻 비슷하게 들린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모든 사람이 악하다'는 표현에서, '선하다'라는 말과 '사악하다'라는 말을 사람의 됨됨이가 아닌 행동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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