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2)

 

2023.10.30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2)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지나간 미래⟫(Vergangene Zukunft: Zur Semantik geschichtlicher Zeiten, 1979) 

- 메타역사적 범주로서의 경험공간(Erfahrungsraum)과 기대지평(Erwartungshorizont)
“경험은 사건들이 체화되어 기억될 수 있는 현재적 과거”
“기대… 현재화된 미래로서 아직은 아닌 것, 경험되지 않은 것, 해명될 수 있을 뿐인 것을 지향”
“지평은 아직은 보이지 않는 새로운 경험공간을 나중에 열어주는 선을 뜻한다. 예측이 가능하지만, 미래의 해명가능성은 절대적 한계에 부딪힌다. 미래를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역사에서 ‘새로운 것’(what’s new)
“역사 속에서는 항상 주어진 조건 속에 포함되어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 혹은 더 적은 것이 일어난다.”
“기대되지 않았던 것만이 놀라움을 준다. 이때 새로운 경험이 생긴다. 즉 기대지평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경험이 발생한다. 그때의 경험획득을 통해, 그때까지의 경험을 통해 주어졌던 미래의 한계가 사라진다… 간단히 말해서, 그때그때 상이하게 새로운 해결을 유발하고, 그러면서 역사적 시간을 추동시키는 것이 경험과 기대 사이의 긴장이다.”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에 관한 이야기 두 번째 하겠다. 코젤렉은 경험이라고 하는 것과 기대라고 하는 것을 역사적 개념으로서 사용하기 적당하다고 본다. 코젤렉은 "경험’과 ‘기대’는 과거와 미래를 교차시키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시간을 다루기에 적합한 범주이다"라고 말했다.  

《지나간 미래》 393 경험’과 ‘기대’는 과거와 미래를 교차시키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시간을 다루기에 적합한 범주이다.

오늘은 2023년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이제 11월부터는 좀 산뜻하게 잘해 봐야지 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작년 11월에는 내가 뭘 했나 라는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작년 11월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지나간 것인 것 같아도 사실은 우리가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것의 연속선상 속에서 설명을 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내 머릿속에서 2022년 11월을 떠올린다고 할 때 2022년 11월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이기는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그것은 '현재적 과거'라고 말할 수 있다.  첫 번째 섹션은 방법론에 관한 머리 말인데, 두 번째에서는 메타역사적 범주로서의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을 본격적으로 설명한다.  세 번째 섹션에서는 경험과 기대 관계의 역사적 변화를 얘기했고, 어떤 경험이 있을 때 그것을 바탕으로 뭔가를 기대할 때 역사적 변화를 추동해 낼 수 있는가를 물어볼 수 있다. 그것은 세 번째 시간에 말할 것이고 세 번째 세션에서는 자세하게 설명을 한다. 

메타 역사적 범주로서의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두 번째 섹션에서는 우선 경험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사건들이 체화되어 기억될 수 있는 현재적 과거”, 현재적 과거라는 말은 좀 어려운데 과거의 것을 지금 우리 머릿속에서 생각할 수 있으면 그것이 바로 현재적 과거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2022년 11월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무의식적 행동 방식이나 그런 것들이 다 그런 경험 속에서 결합이 된다 라는 얘기이다. 더욱이나 이제 긴 장기간의 역사를 생각을 해보면 세대나 제도들을 통해 전해지는 경험 속에는 항상 낯선 경험들이 포함되거나 그 안에 스며들어와 있다. 그래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낯선 경험에 관한 학문으로 파악되었다"라고 얘기도 한다. 그런 자잘한 설명까지는 그냥 두더라도 일단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사건들이 체화되어 기억될 수 있는 '현재적 과거'라는 것은 꼭 기억해 둘 필요가 있겠다. 

《지나간 미래》 394 경험은 사건들이 체화되어 기억될 수 있는 현재적 과거이다.

《지나간 미래》 394 역사는 옛부터 낯선 경험에 관한 학문으로 파악되었다.

 

과거의 것들이 지금 떠올려진다는 것, 그것은 과거는 과거이되 현재다 라고 얘기할 수 있다. 그다음에 기대라고 하는 것은, 지금 오늘이 2023년 10월 31일일이다. 그런데 내가 2024년 10월 31일은 이런저런 모습으로 있고 싶다 또는 그런 희망을 품고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기대를 하려면 내가 그동안 해온 게 있어야, 즉 경험이 바탕이 되어야 그것을 기대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아무리 희망을 품어도 2024년 10월 31일에는 농구를 잘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할 수는 없다. 그건 제가 농구공을 만져본 적도 없다는 그런 경험에 근거해서 아주 확실하게 말도 안 되는 그런 기대이다. 그런 것들을 우리는 헛된 꿈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기대라고 하는 것은 적어도 그런 경험공간이라고 하는 것이 배경에 있지 않으면 성립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기대는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어쨌든 미래에 일어날 일인데 지금 현재 내 머릿속에서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지금으로 미래가 당겨와 있다.  내가 그것을 당겨다가 지금 미래를 생각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기대라고 하는 것은 '현재화된 미래'다 라고 코젤렉은 설명한다. 일종의 라임을 맞춘 것이겠다. 경험은 현재적 과거이고 기대는 현재화된 미래이다. 그러니까 지금 현재라고 하는 것을 가운데다 놓고 과거와 미래가 서로 결합되어 있는 셈이다. 그렇지만 과거와 미래라고 하는 것은 서로 대칭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라고 하는 것이 쭉 흘러와서 현재에 응축되어 있고, 이렇게 현재에 응축되어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미래라고 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그런 까닭에 내일이 되면 다시 오늘은 과거가 될 것이고 내일 가지게 되는 기대라고 하는 것은 다시 또 오늘 생각했던 그 어떤 것을 바탕으로 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역사라고 하는 것은 전혀 끊어지지 않고 계속 연속되어가고 있는 것이고, 그렇게 연속되어가고 있는 현재들을 계속 이어붙어서 역사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현재는 항상 과거를 기억하고 있고, 그런 기억을 바탕으로 해서 미래를 당겨와서 현재 속에서 사유한다. 그러니까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서로 대칭 개념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러니까 과거와 현재 또는 경험과 기대, '현재적 과거'로서의 경험과 '현재화된 미래'로서의 기대, 이 두 가지가 항상 우리 자신의 현재 속에 있다. 그것을 코젤렉은 '양면적 현재성'이라고 부른다. 이 세 개의 개념은 일단 기본적으로 기억을 해 둘 필요가 있겠다.  

《지나간 미래》 394 기대도 오늘 속에서 이루어지며, 현재화된 미래로서 아직은 아닌 것, 경험되지 않은 것, 해명될 수 있을 뿐인 것을 지향한다. 

《지나간 미래》 394 양면적 현재성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과거와 미래를 거울처럼 관계짓는 대칭적 보완개념이 아니다.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을 얘기하는데 일단 앞에서는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고 기대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다 라는 것에 대해서 규정을 했다. 그런데 경험에 대해서는 왜 공간이라는 말을 붙이고 기대에 대해서는 왜 지평이라는 말을 붙이는가에 대해서 설명을 해보겠다. 우리가 어떤 경험이라고 하는 건 공간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다. 예를 들어서 어떤 시간 속에서 과거에 내가 이러이러한 것을 경험했다 라고 말한다 할지라도 그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일을 겪었던 공간을 완전히 배제하고 생각해 볼 수는 없다. 경험이라고 하는 건 공간하고 연결돼 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같은 사건이라고 해도 어떤 공간에서 그것이 벌어지는가에 따라서 그것이 가져다주는 의미론semantic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를 만난다 할 때 그 사람을 어디에서 만나는가 라는 것이 그 사람과의 경험을 다르게 만들어 준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본다면 자유라는 개념이 있다고 할 때 그 자유라는 개념이 형성되어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방식이 다를 텐데 그것이 한반도에서 자유라는 것이 가지게 되는 의미 그다음에 미국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자유라는 개념이 가지게 되는 의미는 굉장히 다르다. 미국 사람들이 자유라는 개념을 들었을 때 그들은 분명히 미합중국이라고 하는 그런 공간 속에서 그 개념이 통용되고 그것이 형성되는 여러 가지 물질적인 사태들을 함께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또 다르게 떠올릴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자유라고 하는 것은 사실 그렇게 오래된 개념이 아니다. 뭐든지 자유롭게 말할 수 있고 이런 것들이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그 경험이 발생했던 공간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기대지평이라는 말에서 왜 지평이라는 말이 들어가는가. 지평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에 관여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상의 선이다. 지평이라고 하는 건, 그러니까 지평선地平線이라고 하는 것은 地를 쓰니까 공간이라고 생각하기가 쉬운데 사실 그것은 가상의 것이다. 가상의 것이니까 경험해 본 적이 없고 어느 공간에 그것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코젤렉은 기대공감보다는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지평은 아직은 보이지 않는 새로운 경험공간을 나중에 열어주는 선을 뜻한다." 그러니까 시간과 미래에 우리가 만나게 될 어떤 공간을 지칭하는 말이 지평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에 만나게 될 공간 그러니까 미래에 만나게 될 경험해보지 않은 공간 또는 미래에 만나게 될 아직 보이지 않는 새로운 경험 공간을 지평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것은 일정한 정도로 예측할 수는 있겠지만 아주 분명하게 확신을 가지고 틀림없이 확실한 것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래서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것은 예측이 가능하지만 미래의 해명 가능성은 절대적 한계에 부딪힌다고 말한다. 

《지나간 미래》 396 '기대공간'보다는 '기대지평'이라는 은유를 사용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지평은 아직은 보이지 않는 새로운 경험공간을 나중에 열어주는 선을 뜻한다. 예측이 가능하지만, 미래의 해명가능성은 절대적 한계에 부딪힌다. 미래를 경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 이제 코젤렉이 인용한 게 있다. "저 지평에 이미 공산주의가 보입니다"라고 흐루시초프가 어느 연설에서 말했다. 그러자 청중 하나가 질문했다. "흐루시초프 동무, 지평이 뭡니까?" "사전을 찾아보시오"라고 흐루시초프가 대답했다. 학구열이 강했던 이 사람은 사전을 뒤져 다음과 같은 설명을 찾아냈다. '지평: 하늘과 땅을 가르는 가상의 선. 사람이 다가가면 뒤로 물러난다.' 흐루시초프는 "저 지평에 이미 공산주의가 보입니다"라고 말을 했다. 흐루시초프의 눈에는 공산주의가 보인다고 보인다는 것이다. 가상의 선이 아니라 자기 눈에는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사전에 따르면 지평은 하늘과 땅을 가르는 가상의 선이다. 있지 않은 선이고 있지 않은 선이기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 사전에 따르면 지평은 가상의선인데 흐루시초프의 눈에는 보였다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흐루시초프는 거짓말을 한 것이다. 게다가 지평은 가상의선인데 사람이 다가가면 뒤로 물러난다 그러니까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흐루시초프는 두 가지 거짓말을 한 셈이다. 공산주의가 보인다 라고 해서 가상의 것이 보인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고 또 하나는 공산주의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거기에 다가가면 뒤로 물러나는 것이니까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저 지평에 공산주의가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은 공산주의는 보이지 않고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것임을 사전에 근거해서 알 수 있다. 이게 바로 동구권의 우스갯소리이다. 

《지나간 미래》 396 "저 지평에 이미 공산주의가 보입니다"라고 흐루시초프가 어느 연설에서 말했다. 그러자 청중 하나가 질문했다. "흐루시초프 동무, 지평이 뭡니까?" "사전을 찾아보시오"라고 흐루시초프가 대답했다. 학구열이 강했던 이 사람은 사전을 뒤져 다음과 같은 설명을 찾아냈다. '지평: 하늘과 땅을 가르는 가상의 선. 사람이 다가가면 뒤로 물러난다.'


어제도 말했듯이 사람이 뭔가에 대해 기대지평을 가지고 기대를 하면, 지금 지평이라는 말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역설적인 상황이다, 그것은 지평이기 때문에 가상의 것이고 우리의 관념 속에만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가 거기에 다가간다 해도 그것을 우리가 손으로 잡을 수가 없다. 단지 기대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기대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가상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향해서 이미 몸을 움직여 간다. 그렇지만 기대를 통해서 의도했던 상황이나 행동 결과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조건 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해서 "역사 속에서는 항상 주어진 조건 속에 포함되어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 혹은 더 적은 것이 일어난다"는 것이 코젤렉의 지적이다.  

《지나간 미래》 397 역사 속에서는 항상 주어진 조건 속에 포함되어 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이 혹은 더 적은 것이 일어난다.


우리가 뭔가를 시도한다고 할 때 뭔가 기대를 가지고 시도를 하는데 뭔가 주어진 조건을 가지고 시작을 한다. 그런데 일을 진행시켜 나아가다 보면 새로운 조건들이 생겨나고 또는 있는 조건들이 사라지고 그런 일들이 벌어진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조건들이 생겨나게 되면 더 많은 것이 일어나게 될테고 어떤 조건들이 사라지면 더 적은 것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역사라고 하는 것은 정말 기대하는 것만큼 얻을 수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예상치 못하게 기대되지 않았던 것들이 우리에게 생겨나기도 한다. 사실 코젤레에게 있어서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개념은 상당히 중요한 어떤 역할을 하는 경우가 뭐냐하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역사 속에는 새로운 것이 있는가 를 물어볼 수 있다. 역사에서 ‘새로운 것’(what’s new)을 물어볼 수 있다. 사실 과거의 역사관에 따르면, 역사가 순환론적 역사관을 가졌던 시대에는 역사라고 하는 것은 발전이 없다. 발전이라고 굳이 말하지 않고 그냥 새로운 것이 있을 수 없다. 순환론에 따르면 옛날 것이 되돌아온다 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는 그걸 믿는 사람은 없다. 역사는 돌고 돌다 돈다 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과거의 것이 똑같이 있는 그대로 다시 나타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리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과거의 몸매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 몸에다가 과거에 입었던 옷을 다시 입어보면 과거에 자신이 그 옷을 입었을 때의 느낌을 그대로 가질 수는 없다.  몸이 변한 것이다. 그리고 몸이 변한 만큼 생각도 변하고 느낌도 변하고 그럴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과거의 것보다 더 나아졌다 라고 말할 수는 없더라 하더라도 그냥 그것 그대로 새로운 경험들이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러이러할 것이다 라고 기대지평을 가졌는데 그 기대 지평은 막상 거기에 다가가면 그 지평선에 다가가면 뒤로 물러나고 새로운 경험이 발생한다. 그리고 그렇게 새로운 경험은 그 공간과 결합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 공간을 가져다준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미래를 예측한다고 할 때, 예언이 아니라 예측이다. 종교적 예언은 아주 무의미한 것이다. 뭔가를 기대지평을 가지고 미래를 예측한다 라고 얘기하고 있을 때는 자신의 경험 공간을 바탕으로 해서 하는 것이겠다. 그런데 지금까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경험공간은 기대지평을 결정하는 데는 충분하지 않다. 뭔가 좀 더 새로운 것이 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을 우리는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런 긴장들, 즉 경험 공간이 있는 그대로 작동해서 나의 기대 지평을 충족시켜줄 것이다 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태이기 때문에 나의 기대 지평 속에서, 또는 미래에 대한 예측 속에서 그리고 그것이 실현되었을 때 새로운 것이 나오거나 또는 그것에 못 미치는 것이 나온다든가 하는 것, 그런 것들이 바로 우리들로 하여금 긴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아예 까마득히 예측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는 절망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서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어제 말한 것처럼 그냥 자신에게 아주 익숙한 것 만을 붙들고 확증 편향을 강화하면서 그 속에서 갇혀 살게 된다. 그것이 바로 이제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험과 기대 관계가 서로 연결이 되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좋은 방향으로든 나쁜 방향으로든 역사적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나간 미래》 398 기대되지 않았던 것만이 놀라움을 준다. 이때 새로운 경험이 생긴다. 즉 기대지평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경험이 발생한다. 그때의 경험획득을 통해, 그때까지의 경험을 통해 주어졌던 미래의 한계가 사라진다. 기대가 시간적으로 추월되면서 이 두 차원은 그때 그때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한다. 

《지나간 미래》 398 간단히 말해서, 그때그때 상이하게 새로운 해결을 유발하고, 그러면서 역사적 시간을 추동시키는 것이 경험과 기대 사이의 긴장이다.


내일은 세 번째 섹션의 전반부를 설명하겠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