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8-1

 

2023.11.01 🎤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8-1

커리큘럼

09.06 예술의 목적과 예술론의 학적 위치
09.13 플라톤의 미학
09.20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
10.04 mimēsis
10.11 신플라톤주의와 고전주의 예술론
10.18 maniera grande, cicerone
10.25 Baroque, Rococo
11.01 헤겔과 역사적 예술론
11.08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1):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조르조 바사리
11.15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2): 에르빈 파노프스키, 막스 드보르작

 

교재

강유원(지음), 《에로스를 찾아서 -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한 성찰


제8강. 헤겔과 역사적 예술론

일시: 2023. 11. 01.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345

 

 

오늘은 헤겔의 역사적 예술론인데 예술론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해겔의 역사적 예술론이다. 어렵기 때문에 잘 이해를 해야 한다. 오늘 얘기는 미학이나 예술학에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진리론에 관한 것, 그다음에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리고 역사 속에서 우리가 진리로 여겨졌던 것들이 과연 보편적 진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가, 아주 굉장히 복잡하고도 포괄적인 그런 얘기를 한다. 흔히 철학자 헤겔은 변증법, 정반합만 얘기해서 치우고 마는데, 헤겔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간단한 사람은 아니다. 헤겔의 진리론이 가지고 있는 예술 철학적인 또는 역사적인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그것을 포괄적으로 한번 생각을 해보자.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다"라는 말을 한 사람이 앙리 4세이다. 이 말에 루벤스가 앙리 4세의 연작을 그렸다. 사실은 미술사에서 또는 예술사에서 Baroque 이전의 시대는 지난번에 제가 말한 것처럼 정해진 규칙이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가 쉽다.  고전기 Quattrocento 당시의 작품들을 창작하는 사람들은 세상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고민하지 않고 자신의 작품을 활동을 했다. 정해진 규칙에 따라서 그것을 하기만 하면 되니까 시대가 어떻게 되는지 알 바 없으니까 그렇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고민이 미켈란젤로에서 매너니즘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앙리 4세가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다 라고 말했을 때 이 사람이 한 얘기에서 몇 가지 역사적인 현실들을 한번 살펴보면, 역사적인 파리라고 하는 것이 있고, 미사를 드린다는 것은 자기가 가톨릭으로 개종한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파리는 굉장히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고, 가치가 있다는 말은 말 그대로 가치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앙리 4세는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라고 가치 판단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앙리 4세의 인생을 보면 수 없이 여러 번 개종을 했다. 프로테스탄트였다가 그다음에 가톨릭이었다가 이런 식으로 개종을 했다. 그것은 그 사람이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다.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다 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언제 철회할 수도 있다. 내가 지난 번에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다고 말했는데 그게 틀린 판단이었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야 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앙리 4세가 이 발언을 했다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지금 이 순간, 이 순간의 가치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것이다. 즉 지금은 이것이 옳다 얘기하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역사적 진리를 표명한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역사적 진리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진리가 아니다. 그때그때 옳은 것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것이다. 루벤스라고 하는 화가는 앙리 4세의 저 말에 속된 말로 feel을 받아서 작품을 그린 것이다. 그러면 루벤스는 얼마나 불안했겠는가. 만약에 앙리 4세가 나쁜 놈으로 판명이 되었다면 말이다. 어떤 화가이든지 불멸을 원한다.  루벤스도 영원한 어떤 불멸을 원했을 것이다. 그런데 루벤스는 분명히 내가 다빈치처럼 되지는 못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저의 막연한 애틋함에서 나온 변론인데, Baroque의 작가들은 자기네들이 영원한 진리를 드러내고 있지 못한다는 걸 확신한 것 같다. 그러면서 지금 이 순간에 몰빵을 한다. 그러니까 자기가 불멸하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에 몰두한다. 그래서 강도가 훨씬 강해서 작품의 격정이라고 하는 게 아주 세게 드러나지 않았나 한다. 잔잔하고도 조화로움을 추구하지는 않은 것 같다. 루벤스는 분명히 자기가 다빈치처럼 불멸하지는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 현재 이 순간에 가치를 표명하는 앙리 4세에 대해서 그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Baroque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순간의 진리를 표현한다. 그러면 그것이 가치가 없는 것인가 라고 묻는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약간의 정당화 논변을 동원해야 될 필요가 있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이라는 책에서 개념화한 용어로 아우라가 있다. 아우라라고 하는 말이 지금은 굉장히 상투적으로 널리 쓰인다. 어디서 들어보긴 했는데 이 말에 정확한 개념 규정이 없는 상태이니 지금 외워야 한다. 원문 그대로 말하면 일회적 현존, 딱 한 번, 그러니까 딱 한 번에 나타남. 그다음에 이것에 보충해서 설명을 해보면 두 번은 있을 수 없다. 한 번밖에 없는 것이다. 원본이라고 하는 게 있고 그 원본을 내가 봤을 때의 어떤 느낌이 아우라이다.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한 번인 것이다. 오늘이 11월 1일이다. 그런데 작년에도 11월 1일이 있었다. 우리는 11월 1일이 또 왔다고 생각하지만 2023년 11월 1일은 한 번 뿐이다.  우리는 2023년 11월 1일의 아우라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아우라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건 딱 한 번이라고 하는 규정을 먼저 얘기를 해야 한다. 항상 이것은 절대로 되풀이될 수 없는 일회적인 것이고 자체로 가치가 있다. 일회적 현존이지만 되풀이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 자체로 가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역사적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아우라라는 용어는 느낌, 분위기 이런 얘기가 아니다. 그것은 부수적인 것이다, 한 번 딱 나타나고 끝나는 것이다. 단 한 번으로 그것의 진리성을 입증해 보이는 것, 그게 아우라이다. 앙리 4세가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다 라고 말했을 때 파리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가치가 있는 것이고, 가톨릭으로 개종해서까지 파리에 입성을 해야겠다 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 말을 했을 때 루벤스는 앙리 4세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 가장 첨예하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고 그 문제와 대결해서 해결을 하려고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하찮은 문제일 수도 있는데, 루벤스는 앙리 4세가 당대의 가장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루벤스가 앙리 4세의 연작을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은 시대의 진리를 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때가 바로 시대정신의 현현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여기서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말이 중요하게 드러나게 된다. Quattrocento의 창작자들은 지금 내가 이 시대에 굉장히 중요한 것을 하고 있다하기보단 영원한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즉 비례와 균형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한 것이고, 영원한 것은 내가 죽은 다음에도 계속해서 유지될 것이니까, 지금 사람들이 뭐가 중요하다고 하는지는 하나도 안 중요하고,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을 찾아서 창작을 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것이 Quattrocento의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루벤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영원하고 보편적인 게 중요한가 아니면 시대적 진리가 중요한가. 우리 인간 개인은 생물체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인간에게 변함없는 건 뭐냐 하면 생물체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게 인간에게 영원한 것이다. 집단으로 가면 모르겠는데 개인의 차원에서는 시대적인 것이 중요하다. 17세기는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영원한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각각의 개인이 생각하기에 시대정신의 현현이라고 여기는 것에 닻을 내리고 그것에서부터 뭔가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사실 루벤스가 가지고 있는 예술의욕Kunstwollen이 있다. 그 사람 마음속에는 그냥 이런 거 저런 거 생각하지 않고 앙리 4세가 멋져 보였던 것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그의 예술의욕Kunstwollen을 시대정신의 현현으로서의 앙리 4세에 대한 루벤스의 정당화로서 나타난 것이라고 말하며, 그것이 루벤스의 Baroque 회화라고 말할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일회적 현존. 다큐멘터리 영화는 딱 그 순간에 찍는다. 다큐멘터리 영화는 엄청난 아우라의 덩어리이다. 우리가 사진을 찍는다고 하면 찍는 순간은 일회적인 것이다. 찍는 순간에 아우라는 사라졌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그 순간을 스마트폰으로 찍어왔다고는 하지만, 복제품mimēsis이다. 루벤스는 이걸 기록해두고 싶었던 것이다.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다 라고 말은 굉장히 위험한 발언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종파 싸움을 가지고 사람이 죽는 것을 본 적이 없어서 별로 이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프로테스탄트나 가톨릭이나 이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악마로 간주했기 때문에 엄청나게 사람 죽였다. 앙리 4세가 이 얘기를 했을 때 루벤스는 이것이야말로 굉장히 엄청난 거구나 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시대정신의 현현이라고 하는 것에 역사적인 진리 값을 주었다. 그러면 역사에 충실한 것이 진리일 수 있다고도 얘기할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누구나 다 진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령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다 라고 말했던 것이 후대의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앙리 4세의 만용이었을까 잘한 짓이었을까. '저건 역사적 진리다'라고 말했을 때 끊임없이 역사 논쟁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게 만용인지 참다운 용기인지를 가지고 계속 따지게 된다. 역사적 진리는 후대의 정당화를 둘러싸고 계속해서 논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이것에 대해서 시대정신의 현현이다 아니면 만용이다 했을 때 시대정신의 현현을 딱 집어냈다고 하면 루벤스는 높게 평가되는 것이고, 만용이라고 하면 루벤스는 쓸데없는 짓을 한 놈이 되어 버린다. 다시 말해서 창작자의 가치가 역사적 진리에 대한 평가에 좌우된다. 창작자의 가치가 역사적 진리에 대한 평가에 좌우된다 라고 해버리면 결국 어떤 사람의 정당화를 더 좋아하느냐의 문제, 즉 호불호의 문제가 되어버린다. 루벤스를 옹호하고자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앙리 4세를 옹호해야 하고 그 당시에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다고 하는 말이 만용이 아니었음을 계속해서 정당화를 해야 한다. 역사적 진리라는 건 참으로 하찮다. 역사는 누구든지 유죄로 만들 수 있고 누구든지 무죄로 만들 수 있다. 

루벤스는 사실 당대에는 하찮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는데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역사적 진리를 그려냈다 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후대 사람들은 하찮아 보여도 어쨌든 그런 다큐멘터리를 그린 셈이다. 그때는 진실했던 순간이었다. 그래서 다큐멘터리를 찍는 사람, 즉 Baroque의 화가는 절대로 나중 일을 생각하면 안된다. 그냥 찍어야 된다. 인간은 어차피 후대의 평가에 대해서 뭐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냥 그때그때 생각하기에 최선이다 여겨지는 것을 다큐멘터리로 찍는 것, 그리고 지금 일회적 현전으로서의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 간단하게 말해버리면 아우라에 충실하자는 것, 이게 Baroque의 정신이다. 이들에게는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그동안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새로운 평가가 하나 있는데, 바로 authentic라는 말이다. 진정성이 있다는 말인데 authentic을 우리말 옮기면 '나름'이다.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라고 할 때의 나름. authentic이라는 것이 말하자면 Baroque 이후에 예술 작품에 적용되는 가장 적절한 평가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어차피 인간이 영원한 진리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하면 authentic한 태도로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이 가장 적절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역사적 진리에 근거한, 즉 일회적 현존을 authentic하게 뭔가 드러내 보여주고자 하는 이런 태도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구나 라고 생각한다면, 17세기 이후로는 상대적 진리에 만족하며 살아야 되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적 진리에 만족하고 사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사실 이 시대를 한 번 벗어나버리면 Quattrocento 이후의 시대에서는 Klassik을 찾는 것 자체가 오만한 태도이다. 불변의 것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유행이라든가 시대사조라든가 그런 말들이 계속 예술에서 오고 가게 된다.   

헤겔은 일회적 현존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드러나는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것에 영원한 진리의 조각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시대 착오적인 사람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기독교적인 의미에서 신이라고는 대놓고 말을 하지 않지만 이 우주에는 그런 세계 정신이라는 게 있다는 것이다. 불변하는 우주적 정신이 인간이라고 하는 행위자agent를 통해서 자신의 진리를 드러내 보여준다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그때 일회적 현존으로 지나가는 것인데, 헤겔은 사실은 세계정신Weltgeist이라고 하는 불변의 것이 있다는 것이다.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말은 그것 자체로 그냥 그때그때의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을 Weltgeist라는 말과 연결시켜서 얘기를 하면 진리의 조각이 되는 것이다. 그런 진리의 조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애틋하게 드러낸 것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책에는 진리의 조각이 있다고 얘기를 하는 것, 그러니까 에코는 중세 사람들은 바로 그 모든 것에 신의 진리가 다 들어있다고 하는 일종의 우주론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을 놓쳐버리면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그때의 진리일 뿐이고 일회적인 것일 뿐이다. 그런데 세계정신 또는 신적정신과 연결되는 것이라면 더 이상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의 조각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해결의 역사 철학을 그렇게 생각하면 이것은 기독교적인 신학이 되어 버린다. 

루벤스의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냥 작품만 이렇게 들여다보면 안된다. 지난번에 얘기했던 것처럼 Baroque부터는 적어도 매너리즘부터는 작품을 이해하려면 그것만 들여다보면 안 되고 작품 바깥을 봐야 한다. 작품 바깥에서 그 의미를 끄집어와야 작품 해석이 가능하다.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을 볼 때 그 예술 작품 하나만 보면 되는 게 아니다. 루벤스의 작품을 보려면 앙리 4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되고 파리는 미사를 드릴 가치가 있다 라는 말을 언제 했는지도 알아야 되고, 루벤스가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일을 했는지 주변을 파봐야 작품에 대한 총체적 이해가 가능해진다. 그게 다 상황 인식이 있을 때 작품 인식이 가능한다. 역사적 진리라고 여기 있다. 역사적 진리라는 것은 사실은 상황 인식 또는 상황지이다. 상황 인식이 있어야 작품 인식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이 상황에 대한 앎이 있어야 한다. 결국 Baroque 회화로부터는 거의 다큐멘터리 분위기가 나온다. 회화에 대한 앎이 있어야 되니까 역사적 진리를 알아야 한다. 그런데 헤겔은 이것은 결국 진리 값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진리 값을 갖게 하기 위해서 세계정신, 즉 신적인 정신과 연동되어 있다 라는 말을 바닥에 깔고 간다. 1800년대 중반 얘기인데 말이 안 된다. 그러니까 헤겔이 죽은 뒤로 곧바로 폐기되고 말았다. 그런데 헤겔이 역사 철학에서 얘기한 것이 예술 철학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서 헤겔 역사 철학의 기본적인 테제들이 예술 철학으로 깔려 들어가게 된다. 그렇게 적용이 되면서 우리로 하여금 한번 생각을 해보게 한다. 순간순간에 진리에 대해서 고민을 하면서 역사적 진리가 영원한 진리 값을 가질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한다. 헤겔 이전 사람들은 영원한 진리에 지나치게 몰입한 나머지 우리가 일회적으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순간의 진리라고 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영원한 진리만 얘기하면 목적론이 된다. 목적을 위해서 지금의 수단과 지금의 삶을 희생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꾸 신적인 목적이 있고, 영원한 목적이 있고, 균형을 맞춰야 되고, 비례를 맞춰야 되고 하면 결국은 억압과 구속이 된다. 그런데 지금 현재 순간 순간으로 계속 이어지는 어떤 일회적인 경험들도 굉장히 귀중할 수 있으니 그것을 버릴 수는 없다. 시대정신과 세계정신의 관계 속에서 어디에다가 우리의 포인트를 줄 것인가를 가지고 계속 고민을 하는 것이 바로 헤겔이 고민했던 바이다. 이 사람은 어쨌든 철학자로서 완결된 뭔가를 만들어놔야 하니까 세계정신을 가지고 세계정신 안에다가 시대정신을 끌어넣어야 했다.  시대정신을 계속 누적시켜서 총합을 만들면 그게 신적 정신으로서의 세계정신이고, 시대정신은 세계정신 속에 변증법적으로 통일된다 라고 말한다. 변증법적이라는 말은 얼핏 보면 서로 반대되어 보이는 것들도 사실은 신적인 정신의 두 측면인 것을 말한다. 동전의 이쪽 면과 저쪽 면은 서로 반대인 것 같지만 하나의 동전의 양면인 것처럼, 지금은 시대정신이 이것인 것 같고 과거에는 저것인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인 신적 정신, 즉 세계정신의 양 측면이었고 그것은 변증법적으로 통일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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