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1)

 

2023.10.30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1)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지나간 미래⟫(Vergangene Zukunft: Zur Semantik geschichtlicher Zeiten, 1979) 

- 문턱 시대(Schwellenzeit), 또는 말안장 시대(Sattelzeit) 
1750-1850. 역사의 연속성 속에서도 급격한 단절이 발생한 시기

- 경험과 기대의 의미
“경험 없는 기대는 없으며, 기대 없는 경험도 없다.”
“기대와 경험은… 동시에 역사와 역사인식을 구성한다.”
“‘경험’과 ‘기대’는 과거와 미래를 교차시키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시간을 다루기에 적합한 범주이다.”

 

요즘 포스타입에서 하고 있는 「20세기 읽기, 세미나」 1750-1870의 제3부를 읽다 보면 근대에 있어서의 시간이라고 하는 것, 시간에 관한 논의가 있다.  그런데 챕터 3을 읽다 보면 도이칠란트의 개념사 연구 대가인 라인하르트 코젤렉이 제시하는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개념이 굉장히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개념은 사실상 현대 역사학에서뿐만 아니라 이런 사회과학 또는 문화사 이런 것에서도 아주 골고루 적용되고 있는 개념이고, 적어도 1700년대 이후에 어떤 그런 역사학의 동향을 설명하는 데도 굉장히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는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개념에 대해서 좀 철저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개념을 알려면 책을 읽어야 하고, 문학동네에서 번역된 게 있다.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내용이 들어있는 논문집이 나온 게 있는데, 《지나간 미래》이다.  지금은 품절 상태로 오래도록 계속되고 있다.  지나간 미래라는 말이 좀 역설적이다. 지나간 과거인데, 과거가 미래를 뭘 어떻게 한다. 이 책의 부제가 Zur Semantik geschichtlicher Zeiten, 역사적 시간 또는 역사적 시대, 시간이라고 일단은 번역을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역사적 시간의 의미론에 관하여 이렇게 번역이 되겠다.  이 책에 실린 논문들이 사실 다 중요하다. 그래서 이건 정말 표준도서이고 동시에 여기에 실려 있는 그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논문이 거의 뭐 엄청나게 중요한 그런 논문이다. 이 책 전체를 설명하는 건 거의 1년 정도 걸릴 것 같고, 선행 지식도 많이 요구되니 약 25페이지쯤 되는 경험공감과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논문을 네 번 정도에 걸쳐서 설명을 하려고 한다.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하버드-C.H.베크 세계사: 1750~1870 - 근대 세계로 가는 길》의 시대 구분이 1750년에서 1870년까지이다. 바로 1750년에서 1850년이라고 하는 이 시기가 코젤렉은 '말안장의 시대'Sattelzeit 또는 '문턱 시대'Schwellenzeit라고 부른다.  저는 이제 문턱 시대라고 하는 말이 훨씬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문지방을 넘어간다고 그러는데, 그 문지방이 있는데 그걸 넘어가니까 연결은 되어 있으되,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단절이 있는 그러니까 완전히 단절이 것도 아니고 역사는 어쨌든 연속적 흐름이 있다. 연속적 흐름을 가지고는 있되 거기에 하나의 커다란 그런 단절이 아닌 문지방이 하나 있어서 이를 넘어가면 다른 세계로 가는 그런 시대라고 하는 것을 코젤렉은 1750년에서 1850년 사이로 설정한다. 굉장히 유용한 시대 구분 중에 하나이다. 이때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이 거대한 연속 속의 단절을 보여줬다. 그래서 말안장처럼 푹 패였다라고 말하는데 말안장이라는 표현보다는 문턱의 시대 라고 보는 것이 더 적당하다고 본다. 그러면 이 시대를 설명할 때 코젤렉이 사용하는 개념이 바로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다.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게 무엇인가. 우선 굉장히 좀 얕게라도 설명을 해보면, 우리 일상의 사례를 가지고 설명을 해보겠다. 우리는 뭔가를 경험한다. 그래서 과거에 겪은 일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한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 데이터를 가지고 합리를 예측한다 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과적인 설명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인과적인 설명 방식을, 예전에 이렇게 했으니까 앞으로 이렇게 할 거야, 이런 일이 일어날 거야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과거에 일어난 일들이 미래에 일어난 일들에 대한 하나의 근거 또는 바탕이 되는 셈이라고 하겠다. 

이제 두 가지 점을 여기서 생각할 수 있다. 과거에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해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예측한다고 해서 그 예측이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반드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과거에 일어났던 방식은 똑같은 초기 조건들로서 미래에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의 예측은 어느 정도 개연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반드시 똑같이 일어나는 사건을 알아 맞출 수는 없다. 그러니까 우스갯소리를 해보자면 모든 예언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계를 손아귀에 쥐고 필연적으로 앞날의 일을 다 설계해 놓은 신이 아니라면, 미래에 대한 예언은 항상 틀릴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또 한 가지, 그게 우리의 과거의 경험 데이터를 가지고 미래를 예측하는 데서 생겨나는 첫 번째 문제이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이건 정말 심각하다. 첫 번째는 아주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어느 정도는 들어맞을 수는 있다. 왜냐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변화하지 않을 경우에는, 예를 들어서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런데 1500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1520년, 1530년, 1540년, 1560년, 1570년, 1580년, 1590년까지도 조선시대의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대충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의 시간에 연결되어 있었고 그렇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을 예측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아버지가 하던 일, 할아버지가 하던 일을 내가 계속해서 할 것이고, 나의 자손들이 앞으로도 20년, 30년 40년을 지나도록 하리라고 예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기술의 발전이라는 언급도 크게 없었을 것이고 그냥 느닷없는 사건이라고 해봐야 우리 집안에서 고시 합격자가 나와서 집안이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하는 그런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1592년에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대변란이 조선시대에 일어난다. 1392년에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200년 만에 그런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이제 1592년 임진왜란을 겪은 사람들은 정말 미중유의 사태를 겪었기 때문에 미래를 예측하는 게 굉장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가령 1630년의 사람들은 불과 30년 전에 그 일을 겪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언제 전쟁이 또 일어날지 모르겠다 하는 그런 불안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이 편안하게 살고 있다 해도 그들의 마음속에는 뭔가 예측이라고 하는 것이 과거 1592년 이전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 2023년을 살고 있는 우리들은 당장에 우리 자신의 생애 속에서, 당장 저만 해도 20살이던 때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상상도 하지 못하는 머나 먼 미래로 와버렸다. 그때는 정말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을 지금 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속도를 감당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70대 이상 된 사람들은 그 속도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냥 특정한 과거의 특정한 시점에 자기가 갖고 있던 생각, 그리고 자신을 흔들림 없이 지켜주던 생각, 그 생각에다가 자신을 딱 붙들어 매놓고 바깥 세상이 변화하고 있는 것도 외면하고, 그 변화하는 세상에 의해서 바뀌고 있는 관념도 외면하고, 그리고 그 변화하는 세상의 주역과 그 변화하는 관념의 주역들마저도 외면하고, 대화하지 않고, 그들만의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안심이 된다. 그들이 추구하는 건 안정이다. 안정된 세계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간다. 자기네들만이 가지고 있는 제1전제로부터 출발해서 거대한 허구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지 않나 그렇게 본다.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측을 포기하고 기대지평을 갖지 않는다. 미래에 대해서 그냥 안심하고 살아가다가 죽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코젤렉이 말하는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말은 이런 것과는 조금 다르다. 지금부터는 경험이라든가 기대라든가 이런 말들을 학문적으로 생각을 해보자. 이런 말들은 사실은 특정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태들을 파악할 때 사용하는 그런 형식적인 범주들이다. 이런 형식적인 범주들은 사실 우리의 과거의 역사적·경제적·사회적·정치적 범주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살아온 생활 세계 속에서 이렇게 생겨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민주주의라는 개념이 있다. 조선시대 사람들한테 민주주의라고 얘기하면 뭔 말인지 모를 것이다.  또는 코젤렉도 얘기하는 것처럼 사회적 노동과 같은 말 또는 우리가 주권 개념을 얘기했는데, 국권이라는 말은 들어봤어도 주권이라는 말은 1800년대의 조선 사람들에게는 도대체 알 수 없는 그런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는 공간이라든가 시간이라든가, 지금 오늘날 우리가 아주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생산력, 생산 관계, 전쟁과 평화, 이런 수술어 또는 자유 또는 사회 이런 개념들은 도대체 낯선 개념이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개념들과 유사한 뭔가는 그들이 가지고 있었겠지만 그들의 경험 세계 속에서, 그들의 생활 속에서는 민주주의라든가 자유라든가 이런 말들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생활 세계가 달라졌기 때문에 이 세계를 규정하는 개념들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코젤렉의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라는 말은 아까 말한 것처럼 문턱의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서 새롭게 도입한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개념을 이해하는 데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 즉 빠른 속도로 시간이 압축되고, 한 사람의 생애 속에서 전혀 다른 종류의 그런 경험들을 하게 되는 그런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앞서서도 말한 것처럼 앞날을 예측한다 라고 하는 그런 것들을 생각해보면 우리가 어떤 것을 경험하고 있을 때에야 또는 어떠한 경험이 쌓여야만 앞날에 대한 예측도 가능하고 또 앞날에 대한 기대도 가능하겠다.  그런 경험들이 없다면 아무것도 기대하고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라는 것도 사실은 따지고 보면 각각의 개인이 스스로 해봐야 되는 것이다. 

조금 옆으로 새서 얘기를 해보면 자기가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뭔가 하는 일이 있다. 그런 일들을 부모가 다 해주고 하나도 자기 스스로 해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어떤 낯선 상황이 닥치면 문제 해결 능력을 가지기가 어렵다.  문제 해결 능력을 가지기 어렵다는 건 자신이 뭔가 가설을 세워서 그 가설을 바탕을 두고 해보고 시행착오를 겪은 다음에 자기 몸으로 뭔가를 해본 경험이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없다면 솔루션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그걸 또 부모가 대신해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부모가 가지고 있는 경험이라고 하는 것은 아이의 경험과는 전혀 다른 것이고, 또 부모가 계속 해주다 보면 부모가 죽는다면 아이는 어떡하겠는가. 그런 당황하는 상황이 닥쳤을 때 아이는 굉장히 공황 상태에 빠질 것이다.  

이제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한번 생각을 해보겠다. 일단 역사라고 하는 것이 진행되었을 때, 진행된 역사라고 하는 것이 기억을 일단 가져온다. 우리 인간이 뭔가 겪었을 때 기억을 갖고 온다. 그런데 그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쌓아 올려지면 경험이라고 하는 것으로 누적이 된다. 기억이라고 하는 것이 쌓아 올려져서 경험이라고 하는 새로운, 여기서 경험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냥 겪은 것 일반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역사적 경험이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각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수집하고 그렇게 수집한 것을 일정한 틀에 따라서 서사를 만들어서 그렇게 만들어낸 서사를 역사적 경험으로 가지게 된다. 그런데 그 서사를 어떤 방식으로 기록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이 가지게 되는 역사적 경험은 다를 것이다. 당장 1979년 10월 26일이라고 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하나 있다. 그 사건에 대한 기억들은 각기 제각각 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을 바탕으로 해서 1980년의 기억이 있고 그다음에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있다. 그것이 하나의 역사적 기억인데, 그 기억을 같은 방식으로 서사화해서 역사적 경험으로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1979년에서 지금까지의 40여 년의 역사를 하나의 한반도 이남 지역에서의 민주정의 성립 또는 국민의 보편적 평등을 향해 나아간 민주주의의 경험이라고 하는 역사적 경험으로서 가지게 된다. 그것은 한반도 이남 지역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펼쳐진 것이다. 그래서 경험공간이라고 하는 개념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그것에 바탕을 두어서 아주 자연스럽게 앞으로 이러이러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또는 이러이러한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기대지평을 가지게 된다. 기대 지평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희망이 아니라 그것을 꼭 이룩했으면 하는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러한 기대지평이 앞날에 대한 역사적 인식까지도 구성을 하게 된다.  즉 경험공간은 과거의 기억들을 일반화해서 특정한 공간 속에서 일어난 기억들을 일반화해서 가지는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앞으로의 시간 속에서 일어날 일들을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될 것이다. 

《지나간 미래》 391 경험 없는 기대는 없으며, 기대 없는 경험도 없다.

《지나간 미래》 391 기대와 경험은 ━ 왜냐하면 기대는 희망보다 더 많은 것을 포괄하고, 경험은 기억보다 더 깊은 것이기 때문이다 ─ 동시에 역사와 역사인식을 구성한다.

《지나간 미래》 393 경험’과 ‘기대’는 과거와 미래를 교차시키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시간을 다루기에 적합한 범주이다.


오늘은 일단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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