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사회사상의 흐름(2) ━ 몽테스키외

 

2023.10.26 📖 사회사상의 흐름(2) ━ 몽테스키외

📖 사회사상의 흐름

레이몽 아롱Raymond Aron(1905-1983), ⟪사회사상의 흐름⟫(Les Étapes de la pensée sociologique, 1967) 

- 몽테스키외는 사회학자인가
명시적 의미에서의 사회학자는 아니다. 무의미한 다양한 사실들로부터 지적 이해가 가능한 질서를 추론하려 했다는 것은 사회학자 특유의 태도이다. 그가 질서의 발견을 시도했다는 것은 우발적으로 보이는 과정의 배후에 근본 원인이 있음을 전제한 것이다.  

- ⟪법의 정신⟫ 
대별하면 1)정부의 세 가지 유형에 관한 논의(정부 유형론), 정치사회학적 논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이은 고전적 정치학. 2)사회 조직에 영향을 주는 물질적·정신적 원인(원인론), 일종의 사회학적 논의. 3)앞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일반정신론(자연적·사회적·도덕적 원인의 종합, 즉 심성구조). 사회 조직과 정부 유형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근대적 사회학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 몇 가지 논점들
· 경제를 농업과 상업으로 분류하며 공업에 관한 논의가 없다. 이는 분명히 근대적 사회학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또한 생산성 개념도 결여 
· 종교에 관한 분석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 몽테스키외의 ‘삼권분립론’이 유명한데 과장된 의미부여를 경계해야 한다. 그는 귀족 계급의 대표이며, 귀족에 의한 정부 권력 간의 균형이 자유의 조건이라 본다. 

 

지난번에 레이몽 아롱의 《사회사상의 흐름》 소개를 하고 다른 걸 읽다 보니까 그 책에 대한 이야기를 더 못했다.  

레이몽 아롱의 이 책은 제1부 몽테스키외, 제2부 콩트, 제3부 마르크스, 제4부 토크빌, 제5부 사회학자들과 1848년의 혁명이고, 후편에 들어가면 다시 또 거기에 서문이 있다. 그다음에 제6부 뒤트켕, 제7부 파레토, 제8부 베버로 되어 있다.  최소한 10번은 설명을 해야 되겠다. 

레이몽 아롱의 책이 여전히 읽을 의미가 있다고 했던 것은 그냥 오래된 책이니까 볼 필요가 있다가 아니라 아롱의 통찰 중에서 유념해 둬야 될 것들이 있다.  그래서 그걸 좀 지적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처음에 레이몽 아롱의 책을 소개할 때는 오래전에 번역 출간되었거나 또는 번역되지 않아도 출간되었는데, 제가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는 여전히 의미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는 그런 책들을 소개해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까 무엇보다도 이 아롱 책도 생각나고 칼 포퍼의 《역사주의의 빈곤》 그다음에 테다 스코치폴의 《국가와 사회혁명》 그다음 배링턴 무어의 책도 있다. 좀 찾아보면서 얘기를 하겠다. 

오늘은 몽테스키외에 대해서 정리하려고 한다. 아롱의 지적들을 보면서 크게 봐서 세 가지 정도를, 아롱이 한 얘기 중에서 이것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게 세 가지 정도 있는데 그것을 거론해 두려고 한다. 

우선 올해 2023년 6월에 《법의 정신》이 완역본이 나왔다. 그 이전에는 발췌본이 있었고, 책세상에서도 발췌본이 나왔었다. 그래서 반가운 일이다. 몽테스키외를 언젠가는 강의를 할 것이기 때문에 정치사상으로서 몽테스키외, 그렇기 때문에 아롱이 지적한 부분도 무시할 수는 없다. 레이몽 아롱이 텍스트를 아주 상세하게 분석을 하는 건 아닌데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구성 구조라든가 또는 어떤 텍스트들 사이에, 각 편 사이의 관계라든가 이런 것들을 분석을 하고 있다. 그런 부분은 정말 본격적으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을 읽어가면서 해야 되는 부분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세 가지 정도를 얘기한다. 

우선 이 책이 사회사상의 흐름인데 사회사상 흐름이기 때문에 사회학자들을 다뤄야 한다.  그렇다면 과연 몽테스키외는 사회학자인가를 물어볼 수 있다. 첫째 몽테스키외는 사회학자인가를 물어볼 수 있다. 몽테스키외에가 사회학자인가를 물어보는 것은 당연히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회학자란 무엇인가 이것에 대한 대답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정해진 답이 있기 때문에 그것에 비추어 볼 때 몽테스키외가 사회학자인가라고 물어볼 수 있는 것이겠다. 사회학은 무엇보다도 콩트나 또는 마르크스나 이런 사람들이 창시자로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몽테스키외는 선구자로 간주된다. 창시자와 선구자는 분명히 다르다. 콩트나 마르크스는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사회라고 하는 것을 분석하고 있기 때문에 아주 명시적으로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사회를 분석하는 것이 바로 사회학이다. 그걸 분석하고 있으니까 그 사람들은 사회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몽테스키외에 사회학자 안으로 포함시키는가. 몽테스키외에는 아주 명시적인 의미에서의 사회학자는 아니다. 그런데 몽테스키외는 사회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취하고 있는 그런 사회학자 특유의 태도가 발견된다. 그것이 뭐냐 하면 다양하고도 무의미한 사실들로부터,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사실들로부터 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질서를 추론하려 했다. 그게 꼭 사회학자들만 그러한가. 그런 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는 그런 것들로부터 하나의 추상적인 질서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고 할 때 구슬이 서 말이다 라고 하는 것은 무의미하고도 다양한 사실들일 수 있겠고, 그것을 꿰는 실이라고 하는 것, 그게 질서가 될 수 있겠다. 그렇게 보면 질서를 찾는 모든 활동이 과연 사회학자들이 하는 활동인가, 사회 속에 있는 것들을 찾아보려고 했다는 점에서 사회학자 특유의 태도이다. 그러니까 아주 명시적인 의미에서의 사회학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사회학자 특유의 태도는 가지고 있다. 몽테스키는 사회학자인가 라고 물었을 때 그런 태도는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더 나아가서 몽테스키가 질서의 발견을, 즉 무의미한 다양한 사실들로부터 질서를 발견하려고 했다는 것은, 질서를 발견하고 싶다 라고 하는 것 이면에는 우발적으로 보이는 현실 세계의 과정들의 배후에 어떤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 원인이 있음을 전제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몽테스키외가 사회학자는 아니지만 사회학자 특유의 태도를 가지고는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고 한다. 

제1부 21 오늘날의 추세로는 몽테스키외가 사회학의 선구자로 간주되고 있다. 

제1부 21 몽테스키외가 어디에 <속하는가>에 관한 문제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프랑스 여러 학교에서 교과 과정의 편제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 몽테스키외는 문학부, 철학부, 경우에 따라서는 심지어 역사학부의 독서 목록에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제1부 21 몽테스키외를 사회학자로 여긴다는 것은 모든 역사가가 제기해 왔던 다음의 질문에 응하는 셈이 된다. 즉, 어떤 학문에서 몽테스키외 이론이 나왔던가? 어떤 학파에 그는 속하는 것인가? 

제1부 22 몽테스키외는 베어와 똑같이, 무의미한 사실에서부터 지적 이해가 가능한 질서로 옮겨가기를 원했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태도야 말로 사회학자에게 특유한 태도인 것이다. 


여기 몽테스키외가 시작되는 부분에 레이몽 아롱이 얘기하는 것이 있다. "몽테스키외가 어디에 <속하는가>에 관한 문제가 불확실하다는 것은 프랑스 여러 학교에서 교과 과정의 편제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 몽테스키외는 문학부, 철학부, 경우에 따라서는 심지어 역사학부의 독서 목록에 동시에 나타나기도 한다." 사상사가들이 몽테스키외를 어떤 경우에는 문인의 한 사람으로서, 또 정치 이론가로서, 법제사가로서 분류한다 그 말이다.  심지어 경제학자의 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고 한다. 케인즈가 일반이론에서, 재담으로 웃기자고 한 얘기겠지만, "몽테스키외는 프랑스의 최대 경제학자로서 아담 스미스에 견주어 마땅한 인물이며, 예리한 통찰력 · 명석한 사상 또한 상식의 소유자로 중농주의 경제학자들보다 출중하며 모든 경제학자가 꼭 지녀야 할 자질을 구비하고 있다"고 했다. 글쎄 이건 프랑스 사람들한테 립서비스를 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런데 여하튼 몽테스키외는 문인이기도 하고 법학자이고 정치 사상가였던 건 틀림없다.


그런데 몽테스키외는 아주 분명하게 사회학자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정치 사상가라고 분류할 수 있다. 왜 그러는가.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이라고 하는 텍스트를 크게 나누면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첫 번째는 정부의 세 가지 유형 이른바 정체론, 또는 정부 유형론 이렇게 말해도 되고, 정체론을 다루고 있다. 이 부분이 바로 몽테스키외이 《법의 정신》이라고 하는 책을 정치사상 텍스트로 만들어주는 얘기이다. 이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서 내려오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렇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과 유사한 내용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부분에는 읽어보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이게 바로 정부 유형론이고 사회학적인 분류로 나눈다면 정치사회학에 해당한다. 정치사회학, 정치적 현상에 대한 사회 구조, 정치적 현상들이 또는 정치 체제가 그 성립하고 있는 사회 구조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그리고 어떤 사회 구조에 따라서 어떠한 정치 체제가 가능한지 이런 걸 따져 묻는 게 정치사회학인데 그런 것에 해당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은 정치사상 텍스트로 분류할 수 있다. 이건 아주 명백하게 고전적 정치철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리고 거기까지가 몽테스키외의 놓여 있는 영역이다.  몽테스키외는 근대적인 정치사상의 맥락 속에다가 위치시킬 수는 없다. 

두 번째로는 사회 조직에 영향을 주는 물질적·정신적 원인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의 두 번째로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것은 앞의 부분을 정부 유형론이다 한다면 원인론이라고 우리가 부를 수 있다. 사회 조직에 영향을 준다고 그랬고 그런 사회 조직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회 조직이 정신적·물질적 원인에 의해서 형성이 될테고 그리고 그 사회 조직은 또 정부 유형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렇게 두 가지 영역들이 그런 관계를 맺게 되는데, 생각해 보면 사회 조직에 영향을 주는 물질적·정신적 원인들이 있다. 그런 사회 조직에 영향을 주는 그런 물질적·정신적 원인들을 집약한 것은 일반정신이다. 그게 《법의 정신》의 셋째 부분이다. 그런데 그 일반정신을 통해서 사회 조직과 정치적인 조직, 정부 유형들이 서로 연결이 된다. 그게 바로 일반정신이라고 하는 개념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렇게 보면 사회학적인 어떤 저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선 사회 조직에 영향을 주는 물질적·정신적 원인을 탐구하고 일반적 정신, 그게 《법의 정신》 제19편 일반적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된다. 그러면 그것은 분명히 사회 조직으로부터 추론되어 나온 것이다. 그런데 그게 바로 정부 유형과 사회 조직을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그리고 정부 유형론은 정치사회학에 해당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몽테스키외는 사회학자라고 말한다 해도 크게 잘못된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사회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아주 분명히 근대적 사회를 그 학문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몽테스키외가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사회학자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법의 정신》이라고 하는 이 텍스트도 바로 거기에 한계가 있다. 《법의 정신》을 읽어서 우리가 뭘 얻어내는 건 사실 어렵다. 그런데 아주 명시적으로 그를 사회학자로 분류해서 분류해 넣을 수 없는 이유는 도대체 어디 있는가. 그게 이제 몇 가지 논점들을 살펴보면 그게 아주 분명해지는데, 첫째 몽테스키외는 경제를 농업과 상업으로 분류한다. 다시 말해서 공업이 없다. 몽테스키외의 경제 분석에는 공업이 없다 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사회학을 현대 사회 분석에 활용할 수 없음을 아주 뚜렷하게 보여주기도 하고 동시에 그를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사회학자로 분류해 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몽테스키외가 살던 시대에는 공업이 없었다. 그에 따라서 사회학자라고 하면 아주 당연히 알고 있어야 되는 개념인 생산성 개념도 결여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몽테스키외를 근대적인 의미의 사회학자로 보기는 어렵고, 정치사회학에는 어느 정도의 업적이 있다고는 하지만 《법의 정신》이 정치사회학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도 엄밀하게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고전적 정치학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것에 해당한다. 

두 번째로 근대의 사회학자들이 그런 걸 많이 논의하고는 있지만 종교에 대한 분석이 아주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글쎄 저는 종교에 대한 분석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게으르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몽테스키외의 시대에는 종교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리고 중요한 점 중에 하나가 사회학적인 탐구의 성과물인 원인론, 즉 사회 조직에 영향을 주는 물질적·정신적 원인, 그 원인론과 정부유형론을 이어주는 일반정신, 그 일반정신은 몽테스키외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업적이다. 그러니까 세 권짜리로 이번에 완역된 것을 읽을 때는, 그 중에 한 부분만 읽는다고 하면 제19편 일반정신을 읽어야 한다. 그런데 일반정신을 읽으려면 원인론에 해당하는 부분과 정부유형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일반정신론이 이어주고 있기 때문에 결국 다 읽어야 된다 라는 얘기가 된다. 일반정신은 오늘날의 용어로 대체해서 말을 해보자면 자연적·사회적·도덕적 원인의 종합적 산물이다, 또는 심성 구조mentality 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몽테스키외에게 있어 아주 유명한 게 삼권 분립이다. 삼권분립이라고 하는 것을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는 것처럼 행정, 입법, 사법 이렇게 삼권이라고 이해하면 곤란하고, 몽테스키외에게 있어서 삼권분립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지나치게 의미를 많이 부여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몽테스키외가 아주 치명적인 한계이고 동시에 레이몽 아롱도 잘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몽테스키외는 귀족이었다. 아주 당연하게도 귀족 계급의 대표이다. 몽테스키외가 삼권분립을 이야기한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삼권분립은 아니다. 몽테스키외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자유로운 어떤 정부, 자유로운 사회이다. 그런 자유가 이루어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귀족들이 나서서 정부 권력 간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라고 주장을 했다.  그러니까 조금 단순화해서 말하면 몽테스키외가 말한 삼권분립이라고 하는 것은 귀족들에 의해서 정부 권력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을 말한다. 삼권분립의 주체가 귀족이라고 하는 것을 주의해야 될 필요가 있겠다. 

제1부 37 몽테스키외의 주요 개념은, 그 법률적 의미에 있어서의 권력분립이 아니라, 사실은 여러 가지 사회적 힘의 균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즉 정치적 자유의 조건이었다. 

제1부 39 엄연한 사실은 몽테스키외가 사회적 힘의 균형 즉, 자유의 조건을 오직 귀족사회의 모델을 기초로 해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레이몽 아롱의 몽테스키외에 나온 내용,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레이몽 아롱의 생각을 제가 재정리해서 말한 것이다. 그리고 《법의 정신》은 정치사상 강의에서 하기로 하고, 몽테스키외에 대해서 레이몽 아롱이 지적한 바를 이렇게 정리해 둘 필요가 있어서 말한다. 지금 말한 내용은 《사회사상의 흐름》에서도 여전히 오늘날에도 읽을 만한 내용으로 추려 뽑아서 정리한 것이다.

다음에는 콩트를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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