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도스토옙스키(4)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5
- 2023. 10. 26.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도스토옙스키》을 듣고 정리한다.
2023.10.24 📖 도스토옙스키(4)
📖 도스토옙스키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Eduard Thurneysen(1888-1974),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Dostojewski, 1921)
- 경건함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닿아오지 않는 순간을 우리는 소멸이라 부른다. 소멸이라 부르는 것은 경건함이다.”(⟪숨은 신을 찾아서⟫, 표2)
- “세 겹의 긴장”
· 인간은 세속적인 만족을 포기해야 한다.
·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인 실존의 확실함마저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 인간은 신을 설명할 수 없으므로 신마저도 포기해야만 한다.
- 무신론의 단계들
· 세계는 악으로 가득 차 있다, 신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 모순에 빠진 인간의 무신론
· 인간이 스스로 고안해낸 신 — 형이상학적으로 경직된 무신론
· 신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이 환상에 도취되어 거짓말을 형상화한 것 — 악마
오늘은 트루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 네 번째 챕터를 읽는다. 네 번째 챕터는 "이반 카라마조프, 대심문관, 그리고 악마"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이반 카라마조프의 '대신문관' 이야기, 그리고 악마의 환상, 여기서 "도스토옙스키는 이 세상의 종교와 교회가 교묘하게 이런 인간적인 시도에 가담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았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 4장 95 도스토옙스키는 이 세상의 종교와 교회가 교묘하게 이런 인간적인 시도에 가담하고 있음을 꿰뚫어 보았다.
본격적으로 챕터 4를 읽어가기 전에 앞에서 이 책을 얘기하면서 정리해 두었던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저의 입장을 다시 한 번 말하려고 한다. 물론 도스토옙스키는 신을 얘기한다. 인간의 고통과 고난과 이런 것들을 다 얘기하고 맨 마지막에 신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트루나이젠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신을 찾는 것이 도스토옙스키 문학의 극명한 특징이다 라고 말을 하는데 물론 저도 도스토옙스키가 신을 얘기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과연 그 신이라고 하는 게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독교의 신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도스토옙스키가 신을 찾는 그 지점에서 철저하게 인간의 극명한, 아주 밑바닥으로 완전히 내려간 모습의 인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본다. 예전에 제가 쓴 책 《숨은 신을 찾아서》 표 2에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닿아오지 않는 순간을 우리는 소멸이라 부른다." 이게 바로 이제 보이고, 들리고, 닿지 않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또는 몸으로 닿지 않는 것, 모든 감각을 상실해버린 상태, 더 이상 그 어떤 것에도 반응할 수 없는 상태, 그것을 소멸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우리는'이라고 그랬는데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게 아니라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는 바로 그렇게 소멸이라고 부르는 것은 경건함이다, 소멸이라 부르는 것은 경건함이다 라고 써놓았다. 일반적으로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은, 내일 읽을 때 다시 또 말할 것이지만, 트루나이젠은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필연적으로 경건주의적인 참여의 노력을 떠올리게 된다 라고 말한다. 톨스토이나 경건주의자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의로운 사람, 불의한 사람, 회심자와 비회심자 그런 구분이 있어야 되고 그러한 구분이 목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저는 사실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너무 힘들었다. 톨스토이의 주요 작품들은 두 번 정도는 읽은 것 같다. 그런데 좀 나쁘게 말하면 가식적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것들이 경건함인가. 그걸 경멸적으로 부를 때 우아틱하다, 우아를 떤다 라는 이런 식으로 얘기한다. 저는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그냥 우아하게 뭔가를 하는 것을 경건으로 치장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인간으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가능성을 완전히 소멸해 버린 상태, 그 상태에서 경건함이라고 하는 것이 생겨난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인간의 참혹함에 대해서 쭉 이야기를 할 때 그 마지막에서 트루나이젠은 신을 찾는다고 얘기를 하지만 사실은 그 지점에 도달한 인간이 경건한 인간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심지어 위약적으로 악마인 척하는 것, 악마를 찾아가 버리는 것, 그게 그 소멸의 단계에서 보이는 경건함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을 해본다.
《숨은 신을 찾아서》 표2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닿아오지 않는 순간을 우리는 소멸이라 부른다. 소멸이라 부르는 것은 경건함이다.
트루나이젠의 제4장을 읽을 때 여기에서 끊임없이 트루나이젠은 인간이 신을 찾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읽으면서 신을 찾는 부분을 인간 자신의 '내가 이렇게까지도 참혹해질 수 있겠는가' 하는 그런 것을 발견하는 지점이라고 우리는 바꾸어서 읽을 필요가 있겠다. 트루나이젠은 "인간은 자기 인생의 가장 깊은 의미에 충실하고자 하는 한, 세 겹의 긴장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고 말을 한다. "첫째가 인간은 빵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빵은 세속적인 만족을 의미한다." 세 겹의 긴장 중에서 첫째 긴장은 세속적인 만족을 포기한다.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인간이라는 존재는 유한하기 때문에 그렇다. 유한하기 때문에 세속적인 만족을, 영원히 살고자 하는 그런 욕망을 품고 있다, 그런 만족을 포기해야 한다.
《도스토옙스키》 4장 97 인간은 자기 인생의 가장 깊은 의미에 충실하고자 하는 한, 세 겹의 긴장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도스토옙스키》 4장 97 인간은 "빵"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빵은 세속적인 만족을 의미한다.
세 겹의 긴장 중에서 둘째의 긴장은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인 실존의 확실함마저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정신적 실존의 확실함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글자 그대로 어둠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어둠 속으로 뛰어들고자 할 때 또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길이라고 했을 때, 바로 그때 "인간은 경배할 수 있는 대상을 필요"로 하고 "흔들림 없는 확신, 확고한 세계관", "단번에 인간의 양심을 안정시켜줄 수 있는 확실한 토대"를 원하는데. 글쎄 그게 종교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걸 종교라는 이름으로 갖지만 사실은 그것은 위선이고 인간의 자기 만족을 위한 하나의 가상의 구조물에 불과한 것이다. 트루나이젠은 이 지점에서 "모든 인간적인 개념과 설명이 멈춰선 자리, 바로 그곳에서 신적인 것이 시작된다"고 말하는데, 저는 모든 인간적인 것이 멈춰진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소멸이라고 생각하고, 바로 그것을 소멸이라고 하는 것을 자각한 순간, 그 순간이 바로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경건해지는 것, 날 것 그대로의 인간, 실존적 결단의 실존적 참혹함의 자리에 서 있는 인간, 그리고 그것이 있는 그대로 그것을 인정해버리는 것, 그게 바로 경건함이라고 생각한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바로 하느님까지도 신까지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서 뭐라고 설명해 주고 하는 존재는 신이 아니다. 그 설명은 신의 이름을 빌려서 인간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에게도 항상 해명할 수 없는 존재이다. 트루나이젠은 이제 바로 그곳에서 믿음이 시작된다고 하는데, 글쎄 그게 그 믿음일까 하는 의문이 늘 있다. 저는 그래서 명목상으로는 가톨릭 신자지만, 가톨릭 신자라는 것은 그냥 명목이고, 인간은 영원히 신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신에게 신앙을 고백한다 하는 것은, 그냥 그 순간은 내가 스스로를 알 수 없는 그런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도스토옙스키》 4장 100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인 실존의 확실함마저도 기대해서는 안 된다.
《도스토옙스키》 4장 100 인간은 경배할 수 있는 대상을 필요로 한다. 흔들림 없는 확신, 확고한 세계관을 갖고 싶어한다. "단번에 인간의 양심을 안정시켜줄 수 있는 확실한 토대"를 원한다.
《도스토옙스키》 4장 102 모든 인간적인 개념과 설명이 멈춰선 자리, 바로 그곳에서 믿음이 시작된다.
그다음에 이제 종교와 교회의 본질을 파헤치는 무자비한 분석이 세 단계로 나온다. 어떻게 보면 이반의 변신론이다. 신을 옹호하는 논변 또는 신에 대한 변설. 첫째가 "종교는 하느님이 온 세계를 질서 있게 다스린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의 수수께끼 같은 인생에는 온갖 고통이 끊이지 않는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 이 세상의 악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게 바로 이제 신정론이다. 신이 온 세계를 질서 있게 다스린다고 주장하는데, 그런데 왜 이 세계에는 악이 있다는 것인가. 이게 이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 신정론의 문제 중 하나가 종교에서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 이반 카라마조프가 얘기를 한다. 두 번째로는 신정론이라고 하는 것, 신이 세계를 질서 있게 다스린다고 하면서 이 세계에는 온통 고통뿐이다. 악이 있다 그러면 무엇이 되겠는가. 무신론에 빠져든다. 신 따위는 없어 라고 하는 것, 그러다가 신 따위는 없어 하다가 이제 두 번째로는 형이상학적으로 경직된 무신론으로 전환된다. 열정적이고, 고통을 주고, 고통 속에서 신을 깨닫게 하는 그런 신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으로 논변을 만들어내서, 그게 바로 형이상학적으로 경직된 무신론 그 단계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신은 인간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다. 형이상학적으로 경직된 무신론은 신이 인간에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하기 때문에 신이라고 하는 것은 그저 원리일 뿐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건 신이 아니다. 그게 바로 이제 형이상학적 무신론의 단계로 들어간다. 그런데 그것이 다시 한 번 변신을 하고 전환을 하면 악마적이고 사탄적인, 뭐 그 따위 신이 무슨 소용이 있겠어 라는, 형이상학적이든 뭐든 간에 신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환상의 덫이 되어서 스스로가 신이 되고자 하는 인간의 그런 열망을 또는 인간의 오만함을 형상화한 악마, 그 악마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게 바로 도스토옙스키가 대신문관 장면들을 통해서 신에 대해서 논변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는 그 과정에서 거짓된 또는 달콤한 위안을 주고 있는 교회를 비판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4장 106 종교는 하느님이 온 세계를 질서 있게 다스린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의 수수께끼 같은 인생에는 온갖 고통이 끊이지 않는다. 이 두 가지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가?
오늘은 대심문관 장면을 분석한 부분을 읽으면서 도스토옙스키의 생각을 한번 살펴보고 그에 대한 트루나이젠의 해석을 읽고 그리고 그것에 대한 저의 생각을 아주 간단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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