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도스토옙스키(1)

 

2023.10.18 📖 도스토옙스키(1)

📖 도스토옙스키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Eduard Thurneysen(1888-1974),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Dostojewski, 1921)   

- 변증법적 신학
“신적 진리의 역설적 성격을 강조하는 신학 운동”, 신은 심판하는 존재이자 은혜를 베푸는 존재라는 것, 상반되거나 모순되는 대립항들이 공존하는 사태에 대한 신학적 응시. 죄(Schuld)를 지었다는 자각으로부터, 바로 그러한 자각으로부터만 속죄(Sühne)가 길어올려질 수 있다는 통찰 

- 도스토옙스키의 출발점,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이란 과연 무엇인가? 아니,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 도스토옙스키와 우리의 물음이다.” 이 물음을 외부에 돌려서 객관적으로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을 향해’ 물어가는 것, 이 물음을 물을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 전체에 끔찍한 위기가 닥쳐”왔기 때문에 생겨났으며, 역설적이게도 “그 위기는 구원의 가능성을 가득 머금고 있”다는 것.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제 《신학의 영토들》을 소개하면서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을 얘기했는데 이 책은 번역본은 굉장히 얇다. 번역본이 150페이지 정도 되는데, 1921년에 출간된 이 책의 원서는 절반쯤 된다. 도이치어로 된 책을 한국어로 번역을 하면 한 2배 정도 된다. 이 책의 해제를 김진혁 교수가 썼는데 거기를 보면 독일어 원서로는 77쪽밖에 안 되는 얇은 책이라고 하고 있다. 해제는 정말 말 그대로 무난한 해제이다. 제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을 읽어보고 그다음에 실존철학이라고 하는 단면으로부터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보고 가졌던 생각들이 있는데, 그런 생각들은 사실 뒤에 붙어 있는 김진혁 교수의 해설로부터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아무래도 실존철학의 관점에서 도스토옙스키를 읽는다 라기보다는 신학적 관점에서 보니까 그렇다.  

해제를 보면 칼바르트와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은 굉장히 친한 친구였는데, 부모인 아버지들끼리도 친구였고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고 굉장히 영향을 받았고 그다음에 칼바르트의 《로마서》, 이건 엄청난 책이어서 제가 평가할 수 없는 책이고, 《로마서》를 번역한 사람이 《도스토옙스키》를 번역한 손성현 박사인데 《로마서》에서 언급되는 빈도 수가 가장 높은 인물이 도스토옙스키이다. 도스토옙스키가 19번, 키르케고르가 12번, 루터가 9번, 칼뱅이 5번이다. 칼바르트의 《로마서》가 신학 책인데 19번이나 도스토옙스키가 인용되고 있다 라고 하면 이것은 거의 크리티컬한 영향을 미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칼바르트의 신학을 흔히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말하는데, 변증법적 신학을 함께 전개한 사람이 에밀 브루너가 있고 그다음에 이제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이다.  


일단 칼바르트의 신학에서 변증법적 신학이 무엇인가를 보면 김진혁 교수가 써놓기를 "변증법적 신학은 바르트와 투르나이젠이 다른 젊은 독일어 사용권 신학자들과 함께 20세기 초에 전개했던 움직임이다. 맥킴은 다음과 같이 변증법적 신학을 정의한다. 신적 진리의 역설적 성격을 강조하는 신학운동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은혜이자 동시에 심판이시다." 은혜를 베푸는 자이기도 하고 심판을 베푸는 자이다라고 할 때 변증법이라고 하는 건 "신적 진리의 역설적 성격을 강조하는 신학"이 변증법적 신학인데 여기서 핵심은 "역설적 성격"이라고 하는 것이다. 역설적 성격이라고 하는 것은 은혜이자 동시에 심판이다.  벌을 줄 거면 벌을 줄 것이고 은혜를 베풀 거면 은혜를 베풀 것이지 은혜와 심판이라고 하는 모순은 아니지만 아주 그 모순처럼 보이는 반대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또는 은혜를 베풀고 심판을 내리고 하는 그런 것들이 다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서로 정반대되는 심지어 모순되는 것들이 동시에 있는 것, 이게 변증법이라고 하는 것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니다. 신은 우리를 심판하면서도 은혜를 베푸는 존재이다.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성격은 우리에게 심판을 하면서 은혜를 베푼다. 우스갯소리로 병 주고 약 주는 존재라고 얘기를 하지만 그런 것을 강조하는 신학, 그게 바로 이제 변증법적 신학이다. 변증법이라고 하는 말은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말이 아니라 신이라고 하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심판하는 성격과 그리고 은혜를 베푸는 성격, 그 둘 그게 다 신의 행위이다.  은혜를 베푼다, 심판한다 라고 하는 두 개 모두를 동시에 강조한다 라는 점에서 변증법적 신학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바로 그 역설적 성격이 도스토옙스키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라고 보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중에서도 특히 《죄와 벌》에서 잘 드러난다.  

《도스토옙스키》 해제 170 변증법적 신학은 바르트와 투르나이젠이 다른 젊은 독일어 사용권 신학자들과 함께 20세기 초에 전개했던 움직임이다. 맥킴은 다음과 같이 변증법적 "신학을 정의한다. 신적 진리의 역설적 성격을 강조하는 신학운동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은혜이자 동시에 심판이시다. 위기의 신학이라 불리기도 한다."


《죄와 벌》은 엄청난 작품이다. 우리는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 라고 하는 서로 상응되는 말로서 번역을 하고 있는데 그게 틀린 말이 아니다. 도이치어로는 Verbrechen und Sühne인데, 해제에 따르면 바르트와 트루나이젠이 읽었던 옛 번역본은 신학적 함의가 매우 강한 번역본이었다고 한다. 'Schuld und Sühne'로 출간되었는데, Verbrechen도 죄지만 Schuld도 죄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 죄라는 게 형사적인 책임을 지는 그런 죄는 아니다. 또 Schuld 라는 단어에는 책임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잘못에 대한 책임, 윤리적인 의미에서의 죄악이라는 뜻도 된다. 그러니까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읽어보면 그런 것도 된다. 예전에는 그러니까 바르트와 트루나이젠이 이걸 읽었던 1차 세계대전 이후 1900년대 초에는 '죄와 속죄'라는 뜻을 가진 'Schuld und Sühne'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고도 하다.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오늘 이 책을 말하려는 이유는, 어제는 도스토옙스키에 대해서는 얘기할 일은 없겠다고 말했는데, 이 책을 소개하면서 도스토옙스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 조금 말을 해보려고 한다. 이 책은 5개의 챕터로 되어 있다. 제1장 인간이란 무엇인가, 제2장 도스토옙스키의 사람들, 저는 도스토옙스키의 글이 소설이라는 생각은 잘 안 든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어보면 그것에 등장하는 사람들 그리고 도스토옙스키의 관점,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 정교의 신자이다, 그 관점이라고 하는 게 굉장히 독특하다.  그리고 제3장 도스토옙스키의 관점, 제4장 이반 카라마조프, 대심문관, 그리고 악마 그리고 제5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렇게 돼 있는데, 이건 개신교 저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한 것 같다. 5개의 챕터를 각각 설명을 하면서 도스토옙스키에 대해서, 이 책의 내용을 설명한다는 것을 일단 기본 목표로 하고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생각도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아마 이게 도스토옙스키에 대해서 제가 얘기하는 거의 유일한 기회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세창출판사에서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시리즈 "라고 해서 나온 게 있다. 올해 2023년 6월에 《발자크/스탕달을 쓰다》까지 해서 5개가 나와 있는데, 처음 나온 게 《톨스토이를 쓰다》이고 두 번째 나온 게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니체를 쓰다》, 네 번째가 《카사노바를 쓰다》 그리고 다섯 번째가 《발자크/스탕달을 쓰다》이다. 이중 특히 열심히 읽은 게 《도스토옙스키를 쓰다》와 《니체를 쓰다》인데 이게 제일 많이 팔렸다.  알라딘에서 그것을 보면서 니체와 도스토옙스키 두 사람의 어떤 그 비중을 생각하면 당연히 한 번쯤 도전해보고 싶은 사람들이겠다. 그런데 저는 슈테판 츠바이크가 쓴 《도스토옙스키를 쓰다》와 《니체를 쓰다》를 읽으면서 그냥 무난하다 라는 그런 정도의 느낌만 받았다. 특히 《도스토옙스키를 쓰다》는 읽고서 제가 거론을 안 한다. 남에게 권하지도 않고 그냥 책 소개에 나와 있는 것처럼 도스토옙스키라는 세계적인 문호가 자신의 인생에서 어떻게 자기 의지를 펼치고 살았으며 어떻게 인류사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라고 되어있다. 인물의 재창조 그런 것에 치중한 나머지 도스토옙스키가 가지고 있는 근본 문제들에 대해서는 좀 부족하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동시에 또 제가 편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와 니체를 비교해서 생각을 많이 해보는데 흔히 실존철학이라고 할 때 니체를 얘기한다. 가령 니체는 기독교를 비판한다. 그래서 내놓은 게 초인이다. 그냥 좀 도식적으로 얘기해보자면 차라투스트라와 예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부인하고 그것의 대체 인물로서 차라투스트라를 내놓는다. 그러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니체에게 있어서 노예의 도덕이요, 절망이요, 아주 폐기시켜야 할 어떤 그런 것인데, 그것으로부터 우리가 얻어낼 수 있는 것 또는 되살려야 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냥 전적으로 버려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긍정적 계기라는 건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오로지 긍정적인 것만 있는 존재가 차라투스트라이다.  즉 조로아스터이다. 다시 말해서 한쪽은 전면적인 부정적인 것만 있고 다른 한쪽에게는 긍정적인 것만 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와 조로아스터라고 하는 이 두 존재는 서로 대립이 된다. 그런데 이제 우스갯소리로 예수 그리스도 가고 조로아스도 오고 이런 식의 분위기가 형성되게 된다. 그런 관계는 변증법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강유원이라는 존재 안에 정말 폐기시켜야 마땅한 그런 측면이 있다. 그렇다면 강유원은 오로지 오로지 폐기시켜야 될 인간인가, 그냥 죽어 마땅한 놈인가, 그냥 스스로 자살을 하지 않는 게 정말 이상할 정도의 버러지 같은 존재인가, 그건 아니라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보기에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 안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것이 있을 수 있다. 이게 도스토옙스키가 보는 인간이다. 그렇다면 이 인간 안에는 아주 못마땅하고도 버려야 마땅한 부정적인 측면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으로 되살려낼 수 있는 그런 것이 동시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동시에 있는 것, 바로 그게 바로 변증법적인 측면이다. 니체는 예수 안에서 전혀 그런 긍정적인 걸 발견할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에 그런 까닭에 Übermensch로서의 조로아스터를 그 자리에 세워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변증법적이지 않다. 니체는 그냥 순차적이다. 이거 가고 이거 오고 이렇게 얘기를 한다. 그리고 니체의 저작들을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정적인 것들을 말할 때 보면 굉장히 호방하다. 굉장히 화끈하게 얘기를 한다. 어떻게 보면 좀 경멸적으로 말하면 철이 없다. 속된 말로 막 까대기에 바쁘다. 그냥 환희에 들떠서 과잉 수사가 넘쳐 흐르고 그러니까 읽기가 되게 힘들다. 물론 니체의 철학이 가지고 있는 굉장히 진지한 측면들을 제가 결코 무시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니체는 해결 이후에 형이상학에 있어서 니체의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그런 측면들을 가지고 있다. 백승영 씨가 쓴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을 보면 그런 부분들이 있다.  그런데 변증법이라고 하는 그런 역설의 공존 또는 모순의 공존, 대립물들의 공존이라고 하는 것이 변증법의 1번 뜻이다. 예전에 제가 《문학 고전 강의》에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을 읽을 때 카산드라에 있는 변증법적 측면이 있다고 그냥 지나가는 말처럼 말했는데 그런 것들이다. 변증법은 어떤 사태를 파악하는 방법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증법이라고 하는 어떤 주제 아래서 실존철학을 집어넣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따로 하는 게 더 낫다.  키르케고르 같은 경우도 그렇다. 엄청난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인데, 그렇게 절망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거기서 키르케고르는 뭔가를 끄집어내려고 한다. 거기 바로 넘어진 자리에서 다른 데로 가지 않고 바로 넘어진 자리에서 넘어져서 깨진 상처를 이렇게 싸안고서 일어나려고 하는 그런 것이 바로 이제 변증법적인 태도이다. 그렇다면 변증법이라고 하는 건 그냥 막연한 추상적인 어휘의 유희가 아니라 어찌 보면 굉장히 피가 흐르는 현장을 말해주는 경험이다. 앞서 제가 말한 것처럼 그냥 스스로가 살아있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못 마땅할 때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바로 그렇게 자기를 응시했다고 하는 것, 그것 자체가 어찌 보면 자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처참한 지점을 모르고 지나가는 게 아니라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응시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처참한 국면을 벗어날 수 있는 모멘트, 계기인 것이다. 무지의 자각이다. 그런 점에서 그게 바로 소크라테스의 변증법이다. 그래서 칼 바르트나 트루나이젠이 변증법적 신학이라고 하는 것을 할 때 도스토옙스키가 호명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말로 그것에 관한, 그 문제에 관한한, 1800년대 이후의 저자들 중에서, 저는 도스토옙스키가 도대체 소설로 읽히질 않는다. 도스토옙스키는1821년에서 1881년까지 살았다. 말 그대로 세기말을 쫙 꿰뚫고 간 사람인데, 도스토옙스키에서 바로 이제 그런 것들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들에 등장하는 인간들이라고 하는 게 얼마나 그러한가. 《악령》이라든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인간들, 읽고 있으면 굉장히 찜찜한 그런 상황들이다. 그게 바로 흔히 하는 말로 도스토옙스키의 문제 상황이다. 그래서 트루나이젠은 이 책에서 첫 번째 챕터인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니체 같은 경우도 실존철학이라고는 하지만 니체의 철학이 실존철학이냐 과연 니체가 인간을 묻고 있나 그런 생각이 든다. 과연 니체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논의되고 있는가, 니체에게는 약간의 지적인 허영이 묻어 있다고 본다. 그래서 굉장히 진지하게 물어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이 된다. 그것을 가장 뼈저리게 묻고 있는 사람이 도스토옙스키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 본다. 


트루나이젠은 첫 번째 챕터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했는데 이건 굉장히 중요한 출발점이다. 인간은 변증법적 존재다. 즉 선과 악, 영리함과 우매함, 아름다움과 추함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 너머에 있는 그런 인간, 그게 넘어서 있는 거 선악을 넘어서 있다. 선한 측면도 있고 악한 측면도 있는데 그게 동시에 있다고 하면서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트루나이젠이 그렇게 말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그리는 세계와 그곳에 등장하는 인간들과 대면할 때 비밀스러운 공포와 전율이 일어난다." "안전한 자기 집에 있는데도 불현듯 예기치 못한 위험스러운 가능성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이건 정말 그렇다.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볼 때도 공포와 전율이 일어나야만 인간 자신에 대한 실존적 통찰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실존철학에서는 인간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들여다볼 때 자신이 가지고 있는 비밀스러운 공포와 부정적인 측면이 보이고, 그것으로부터 굉장히 놀라서 비밀스러운 공포와 전율이 일어나야만 그게 실존철학적인 계기로 들어가는 것이고, 거기서 비밀스러운 공포와 전열이 일어난 다음에 그것으로부터 역설적이게도 희망을 끄집어내는 것이 변증법적인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 비밀스러운 공포와 전열이 일어나게 된다. 그게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게 도스토옙스키와 우리의 물음이다. 

《도스토옙스키》 1장 12 선과 악, 영리함과 우매함, 아름다움과 추함 너머의 인간이다. 심지어 국가와 가족, 학교와 교회 너머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도스토옙스키》 1장 12 안전한 자기 집에 있는데도 불현듯 예기치 못한 위험스러운 가능성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의식하게 된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그리는 세계와 그곳에 등장하는 인간들과 대면할 때 비밀스러운 공포와 전율이 일어나는 것도 이와 비슷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 속의 인물들은 "그들의 삶에 나타나는 수수께끼 속에서 내 삶의 수수께끼가 나를 응시한다." 그것이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것이고, "바로 이것이 도스토옙스키와 우리의 물음"이고, "완전히 그 질문에 사로잡혀버린 것, 그 질문의 까마득한 넓이와 끝없는 깊이를 드러냄으로써 그와 연관된 다른 모든 질문까지도 자신의 작품이 흘러들게 만든 것, 이것이야말로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운명이고 그의 천재성이다." 책에서는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 점을 멋지게 그려냈다고 얘기했는데 저는 별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스테판 츠바이크 그리고 니체나 입센 이런 사람들 얘기도 하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제가 보기에는 니체보다는 윗길인 것 같다. 그래서 "경제적 토대의 붕괴, 사회적 도덕의 퇴락을 분명하게 감지하고, 노예로 전락한 인류가 저 밑바닥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도스토옙스키는 그 정도가 아니다. "사슬에서 풀려난 악마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니체는 여기까지 못 갔다. 

《도스토옙스키》 1장 14 그들의 삶에 나타나는 수수께끼 속에서 내 삶의 수수께끼가 나를 응시한다

《도스토옙스키》 1장 14 바로 이것이 도스토옙스키와 우리의 물음이다.

《도스토옙스키》 1장 14 완전히 그 질문에 사로잡혀버린 것, 그 질문의 까마득한 넓이와 끝없는 깊이를 드러냄으로써 그와 연관된 다른 모든 질문까지도 자신의 작품이 흘러들게 만든 것, 이것이야말로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의 운명이고 그의 천재성이다.  

《도스토옙스키》 1장 16 경제적 토대의 붕괴, 사회적 도덕의 퇴락을 분명하게 감지하고, 노예로 전락한 인류가 저 밑바닥에서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도스토옙스키》 1장 16 사슬에서 풀려난 악마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이지만 도스토옙스키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슬에서 풀려난 악마들이 사실은 인간 내면에 있는 것이다. 니체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을 이겨내려면 조로아스터라고 하는 Übermensch가 있어야 된다 라고 얘기했는데, 도스토옙스키는 "사슬에서 풀려난 악마들이 인간에게 있다". 그런데 그 악마를 제압해야 되는 것도 그리고 그 악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속죄해야 되는 것도 바로 그 악마를 가진 인간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제 도스토옙스키의 시선이 인간 내면을 향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그런 것이다. 그게 이제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 나오는 대사를 트루나이젠은 인용을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인생을 발견하는 거야. 끊임없이, 영원히 발견하는 거지. 이미 발견된 것은 중요하지 않아." "이 소크라테스적인 지혜가 곧 도스토옙스키의 지혜이며, 그의 예술 세계가 간직한 비밀의 모든 것이요 마지막이다." 

《도스토옙스키》 1장 19 "정말 중요한 것은 인생을 발견하는 거야. 끊임없이, 영원히 발견하는 거지. 이미 발견된 것은 중요하지 않아." 

《도스토옙스키》 1장 19 이 소크라테스적인 지혜가 곧 도스토옙스키의 지혜이며, 그의 예술 세계가 간직한 비밀의 모든 것이요 마지막이다. 


소크라테스의 물음도 그것이다. 끊임없이 발견해 나가는 것, 나에 대해서 묻고 또 묻고 계속 이렇게 묻는 것, 그리고 이제 《죄와 벌》마지막 장면이라든가 카라마조프가 갇혀 있는 형무소에서 마지막으로 나오는 얘기 그리고 이제 그런 것들을 얘기하는데, 앞서 말한 것처럼 변증법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런 위기와 고통이 동시에 구원의 가능성이라고 말한다. 도스토옙스키는 다른 걸 외부에서 가져오질 않는다. 그 안에서 계속 길어낸다. 그래서 트루나이젠은 이제 그걸 짚어서 이렇게 얘기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 전체에 끔찍한 위기가 닥쳐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위기는 구원의 가능성을 가득 머금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온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도스토옙스키》 1장 22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 전체에 끔찍한 위기가 닥쳐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위기는 구원의 가능성을 가득 머금고 있기 때문에 그곳에서 이런 음성이 들려온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그의 소설이 표방하는 것은 부정에서 나온 위대한 긍정이다. 정말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긍정이다. 바깥에서 가지고 오지 않는다. "악마의 시험이 쇄도하는 지옥 한복판에서만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으며, 그래야만 새날 아침의 여명이 밝아온다." 트루나이젠은 신학자니까 이런 얘기를 하겠지만 도스토옙스키는 우리에게 이제 바로 그 질문,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서 계속 물을 때 인간의 구원이 얻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은 결국 인간의 실존을 묻는 것이다. 동시에 실존을 묻는 것도 동시에 인간의 본질을 묻는 것이기도 하다. 의심의 물음이기도 하고 동시에 구원으로 가는 시작이기도 하고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유신론적 실존철학과 무신론적 실존철학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구원은 신이 줄 수도 있지만 인간에게 또는 나 자신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고 묻는 것, 그것이 내가 나를 딛고서 나를 물음으로써 동시에 나를 구원의 디딤돌로 삼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이 있건 없건 관계없다. 그 지점이 바로 이제 실존철학이 서 있는 지점이다. 실존철학의 출발점은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트루나이젠의 책의 챕터 1이 바로 그 인간이란 무엇인가인데, 그것에 대한 설명을 빙자해서 제 생각을 좀 덧붙여봤다.

《도스토옙스키》 1장 23 바로 그 부정에서 나온 훨씬 위대한 긍정 때문이다.

《도스토옙스키》 1장 23 악마의 시험이 쇄도하는 지옥 한복판에서만 저 높은 곳에 계신 하느님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으며, 그래야만 새날 아침의 여명이 밝아온다. 


다음번엔 제2장 도스토옙스키의 사람들을 얘기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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