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도스토옙스키(5)

 

2023.10.25 📖 도스토옙스키(5)

📖 도스토옙스키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Eduard Thurneysen(1888-1974),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Dostojewski, 1921)   

- 고난을 겪는 인간에 대한 연민
“생명을 향한 적극적인 관심, 인간에 대한 이해, 모든 피조물의 고통과 희망을 한없는 연민으로 품어 안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 겸허한 사랑
“그곳[시베리아 형무소]에서 그를 사로잡은 하나의 압도적인 체험,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체험은 겸허한, 부서진, 고통당하는 인간과의 만남이었다.” 
“겸허한 사랑은 무서운 힘이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힘이다. 그 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트루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 마지막 챕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어제도 말했듯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서 하느님이라고 지칭되는 부분들, 그런 부분들을 저는 그냥 인간이라는 것으로 지칭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을 한다. 도스토옙스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도스토옙스키가 신을 진정으로 찾았는가, 뭐 그랬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읽으면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차이가 드러나지도 않고 도스토옙스키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실존적 차원이 모두 급격하게 신으로 환원되어 버리는 그런 면모를 또는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다. 


책 129페이지에 보면 도스토옙스키에게서 나타나는 하나의 특징이 있는데, "그 특징이란 생명을 향한 적극적인 관심, 인간에 대한 이해, 모든 피조물의 고통과 희망을 한없는 연민으로 품어 안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작품은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독보적이고 위대한 증언의 기록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처절한 경험들, 그 겪음들을 드러내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면 그것을 읽고 나서 사람들은 아주 쉽게 신에게 의지한다. 그렇게 하라고, 그런 것을 의도로, 그런 것을 목적으로 작품을 쓰는 사람들 많이 있다. '신이여, 제가 이렇게 괴롭습니다. 그러니 저를 꼭 붙들어 주십시오'라는 그런 기도문을 쓰기도 한다. 고행을 하는 것도 신을 찾기 위해서 고행을 한다 라고 하는데 그러면 저는 그런 의문이 든다. '신을 찾기 위해서 고행을 한다고? 뭐 어차피 인간은 고행을 하든 고행을 하지 않든 신보다는 연약한 존재인데, 새삼스럽게 몸을 괴롭혀가면서 고행을 해서 신을 찾습니까? 그냥 처음부터 신을 찾고 그것을 믿고 따라가 버리면 그만이지.' 어렵게 내 몸을 괴롭히고 그럴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인간이 고행을 하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또는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그런 이유들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 그럴 때 신을 찾기보다는 차라리 인간 자신을 찾는 것이 사람이 해야 될 더 마땅한 도리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한다. 아니면 인간이 처절한 경험을 할 때 인간이 처방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그런 것은 생물학적인 몰락이겠다.  몰락 즉 죽음, 그런데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면 생명을 끊어버리면 더 이상 인간일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그런 몰락을 스스로 불러오기보다는 그런 고통 속에서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을 한번 보는 것, 그게 이제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을 향한 적극적인 관심, 인간에 대한 이해, 모든 피조물의 고통과 희망을 한없는 연민으로 품어 안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 도스토옙스키가 말하고 싶었던 건 이게 아닐까 한다. 신을 중간에다 매개하지 말고, 신이 우리에게 인간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였다는 것, 이런 건 매개물로 집어넣지 말고 저 사람 역시 나와 다르지 않다는 그런 공감, 그리고 그가 명시적으로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그 사람 역시 고난 속에 처해 있다고 하는 그런 연민, 그것이 실존철학에 가까운 태도이고 그런 것이야 말로 느닷없이 초인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진정한 긍정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단순한 경건함이 아니라 완전히 바닥으로 내려간 다음에 그 바닥에서 솟아나는 공감인데 뜻밖에도 그러한 공감은 고요하다. 내가 이렇게 고통을 겪어보니까 사람이 얼마나 힘든 존재인지 알겠다 또는 인간이 얼마나 불안 속에서 헤매고 사는지 알겠다 그런 말을 호들갑 떨면서 할 게 없다. 그렇다면 타인의 죄를 알고 있고 다른 사람이 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민을 가지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사랑일 것이고, 어쩌면 그것이 바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신적인,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냥 섣부른 위로와 섣부른 안락을 구하는 신, 그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다른 인간에게 연민을 가지는 것, 그것이야 말로 참다운 인간적 신적 태도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을 해본다. 

《도스토옙스키》 5장 129 그 특징이란 생명을 향한 적극적인 관심, 인간에 대한 이해, 모든 피조물의 고통과 희망을 한없는 연민으로 품어 안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작품은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독보적이고 위대한 증언의 기록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이 스스로 거인이 되어 반항적인 몸짓을 보일 때 그때 이제 아주 열정적인 비난을 퍼붓는다. 그리고 그는 시베리아의 형무소에 갔었는데 트루나이젠도 그걸 지적한다. 그곳에서 "그를 사로잡은 하나의 압도적인 체험,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체험은 겸허한", 겸허하다는 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겸허한, 부서진, 고통당하는 인간과의 만남이었다. 사람이 고통을 당하면 겸허해지는가. '악 밖에 안 남는다'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겸허한 사랑은 무서운 힘이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힘이다. 그 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한다. 이것을 다르게 보면 오만함이 없는 고요함이다, 오만함이 없으면 경건한 게 아니라 그저 고요한 것이고, 그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그게 무슨 혁명적인 투쟁을 하거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고요할 뿐인데 그게 과연 뭘까.  트루나이젠은 그게 "급진적인 입장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문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펼쳐놓는 것은 모든 기존 질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공격이다"라고 얘기한다. 이런 부분들은 톨스토이의 작품에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낯간지러운 경건주의적 참회와는 아주 구별되는 것이다. 트루나이젠은 톨스토이를 굉장히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을 노골적으로 서술한다. 그냥 야금야금 이렇게 해 들어가는 게 아니라 일격에 톨스토이를 친다. 특히 그 톨스토이에게서 트루나이젠의 불만인 것은 이런 것이다.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거의 유일한 요청처럼 나타나는 것이 도스토옙스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도 대단히 흥미롭다. 톨스토이에게서는 순교자가 되라는 요구가 자주 눈에 띈다." 

《도스토옙스키》 5장 140 도스토옙스키가 직접적인 고발과 열정적인 비난을 쏟아부을 때가 있다. 인간이 스스로 거인이 되어 반항적인 몸짓을 보일 때다. 

《도스토옙스키》 5장 140 그를 사로잡은 하나의 압도적인 체험,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체험은 겸허한, 부서진, 고통당하는 인간과의 만남이었다. 

《도스토옙스키》 5장 140 "겸허한 사랑은 무서운 힘이다. 그것은 가장 위대한 힘이다. 그 힘에 맞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도스토옙스키》 5장 143 도스토옙스키의 입장은 언뜻 보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급진적인 입장이다. 인생의 문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히 펼쳐놓는 것은 모든 기존 질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공격이다. 

《도스토옙스키》 5장 144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필연적으로 경건주의적 참회의 노력을 떠올리게 된다. 

《도스토옙스키》 5장 149 톨스토이의 작품에서는 거의 유일한 요청처럼 나타나는 것이 도스토옙스키에게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도 대단히 흥미롭다. 톨스토이에게서는 순교자가 되라는 요구가 자주 눈에 띈다. 


경건함이 끝까지 가면 순교자가 되는 것인데, 순교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것은 굉장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오만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신을 증거할 수 있다고 나의 목숨으로써 신의 위대함을 증명해 보일 수 있다고 나대는 게 바로 순교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결정적으로 못마땅한 것들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가지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그런 생각 잘 안 하게 된다. 나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도 없지만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냥 차분하게 고요하게 그를 응시하고, 용서하는 건 아니고 그렇다고 증오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그를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는 있다. 인간이 스스로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이제 자기가 자기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은, 신이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굳이 스스로가 스스로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아도 인간은 스스로가 굉장히 불쌍한 존재이다. 존재 자체가 불쌍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 받는 실존을 입각점으로 가지게 되면, 어리석게도 또는 섣불리 또는 아주 쉽게 손쉽게 신을 찾지 않고, 자신의 고통을 자기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차라리 다른 사람이 겪고 있는 고난을 함께 연민으로 가지는 태도, 그런 것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고난이겠다 그렇게 생각을 해본다. 


트루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 그러니까 트루나이젠이 읽은 도스토옙스키를 제가 읽은 도스토옙스키와 비교하면서 이렇게 설명을 해봤는데 여러분들은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어떠했는지 또는 어떻게 읽을 것인지, 제 생각이 옳다는 얘기가 아니다, 어떻게 읽을 것인지를 한번 이런 식의 독법을 통해서, '트루나이젠은 이렇게 읽는구나. 나는 그렇게 읽기보다 이렇게 읽는 게 좋겠어' 그런 것들을 한번 찾아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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