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도스토옙스키(2)

 

2023.10.19 📖 도스토옙스키(2)

📖 도스토옙스키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Eduard Thurneysen(1888-1974),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Dostojewski, 1921)   

- 도스토옙스키의 사람들
“기묘한 인간들의 조합이다. 모든 사회 계층의 사람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정신적인 영역에서 나온 사람들…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적인 인간들… 대지에 착 달라붙은 것 같지만 완전히 뿌리 뽑힌 인생… 그들의 삶은 특히 진부하고 통속적이다… 어두운 골목, 작고 좁은 방, 어딘지 의심스러운 술집, 유곽, 교도소” — 인간들이 사는 장소(지하실), 인간들의 삶의 양상이 “도스토옙스키의 세계”를 구축한다. 

- 그루셴카
삶의 극한을 경험하게 하는 악마적 대상, “완전히 지옥에서 온 여자”
“거기서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어리석음, 차갑고 영혼 없는 이해타산, 과도한 자긍심, 남을 짓밟아버리려는 의지, 강하고 폭력적인 자기 과시, 자기를 멸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예 멸절시키는 광포한 충동, 무절제한 사랑과 잔인함… 여기서 인간은 신적인 존재도 되고 악마적인 존재도 된다.” 

- 신비(mystērion)
악마적 대상, 신과 대면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을 알게 된다.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 제2장 도스토옙스키의 사람들을 읽는다. 어제 첫 번째 챕터를 읽으면서 도스토옙스키 문학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거론되는 문제가 무엇인가 라고 했을때 바로 인간이라고 말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인간, 인간을 묻는다 라는 점에서 도스토옙스키 문학은 철저하게 실존문학이다. 물론 인간이 주인공이 아닌 문학이 어디 있겠는가. 많은 인간들이 나오는 그런 소설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서 박경리의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그 사람들도 물론 극한의 경험을 하고 그들도 인간 자체에 대해서 물어본다.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사람은 어떻게 변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행동하는가 이런 걸 묻는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묻는다라고 하면 《오이디푸스 왕》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묻는다. 그것을 제쳐둘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런 것을 묻는 작품들 모두가 다 실존적 문학인가. 그렇게 말하지 못할 까닭도 없지만 그래도 인간 자체를 물음의 대상으로 삼아서 끈질기게 물어들어간다 라고 할 때 그것이 이제 실존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는 도스토옙스키의 경우에는 실존 신학으로 분류를 해보곤 한다. 실존철학이 아니라 실존신학이다. 여기서 신학이라고 하는 말은 기독교의 신, 이슬람교의 신 그런 의미에서의 신적 존재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 실존하는 인간으로서 신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겠지만 오히려 저는 이것을 하나의 인간의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도달할 수 없는 물음들, 신비 속에 감춰져 있는 물음들을 제기한다, 대답까지 나오지는 않아도 그것을 제기한다 라는 점에서 신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실존신학이 아니라 실존인간학이라고 해도 될 것인데, 인간에 대해서 묻는다는 것이 결국 인간의 알 수 없는 지점, 끝까지 탐구를 해봐도 알 수 없는 지점이 있으면, 그건 이제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이니까, 그러면 결국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그래서 실존 형이상학이라고 말을 해도 될 것 같고, 또 실존신학이라고, 신학을 형이상학과 같은 의미로 쓸 수도 있으니까, 신학이라고 얘기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형이상학보다는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다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 신이라고 하는 존재는 완전한 존재로 상정되기 때문이다. 신은 완전한 존재로 상정된다. 그에 비해서 인간은 아주 명백하게 불완전한 존재이다. 신이 있다 없다에 대해서는 우리는 말할 수 없지만 상정할 수는 있다. 

 

신은 완전한 존재로 상정되고 인간은 명백하게 불완전한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 신이라고 하는 완전한 존재를 상정함으로써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 아주 명백하게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 선언되고 그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선언한 상태에서 인간이 스스로를 묻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 불완전함을 묻게 되는 것이고, 그 불완전함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적 사태이다. 그리고 불완전함이라고 하는 것을 지속적으로 자각할수록 상정된 신의 완전함이 사유되고 그런 까닭에 인간이 나는 불완전한 존재다 라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해보려면 상정된 차원에서라도 완전한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신은 그 존재가 실제로 있든 그렇지 않든 간에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사유하게 하는 하나의 추동력으로서 또 완전함을 향해 가고자 하는 또는 불완전함을 탐구하게 하는 어떤 지향점을 설정해주는 계기moment가 된다. 그러므로 신은 나에 대해서 있는 것이다. 나의 불완전함을 탐색하는 하나의 내 앞에 대면해 있는 존재로서, 나를 위하여 나에 대하여 상정되어 있는 것이고, 그렇게 신이 내 앞에 완전한 존재로서 상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는 신을 향해 가는 것이면서 동시에 신을 향해 가는 것이 곧 나의 불완전함을 깨닫는 것이므로 나에게로 반성하게 하는, 나에게로 되돌아오게 하는 그런 계기이기도 하겠다. 그런 까닭에 실존 신학이다 라고 말하면 신이 실제로 있는가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존재로서 상정된 신이 내 앞에 나에게 대면해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철저하게 자각하게 하는 그런 것이다. 그게 바로 실존 신학이라고 하는 말을 사용한다 하면 그 의미가 되겠다. 그렇다면 완전한 신에 대해서 사유를 하고 그 완전함을 사유하고자 하는데 그 과정에서 나의 불완전함이 자극된다. 즉 나의 사유로부터 완전함과 불완전함이 동시에 발생하기 때문에 그러한 역설적 상황이 되므로 실존 신학은 변증법적 신학이다 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제2장은 "도스토옙스키의 사람들"이다. 제1장이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일반론이라면 이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어떤 사람들을 서술하고 있는가, 어떤 사람들에 대해서 자세하게 얘기를 하고 있는가 그것을 다룬다. 대표적인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일단 트루나이젠의 설명을 읽어보고 그 부분에 대해서 간단하게 코멘트들을 해보겠다. 27페이지부터 63페이지까지이다. 첫 번째 문장이 "기묘한 인간들의 조합이다. 모든 사회 계층의 사람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정신적인 영역에서 나온 사람들", 도스토옙스키의 인간들이 그렇다. 아주 기묘한 인간들인데 동시에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읽어보면 그렇다.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인데 완전히 정말 삶에 찌들어 있는 그런 사람들인데 또 트루나이젠의 표현처럼 "대지에 착 달라붙은 것 같지만 완전히 뿌리 뽑힌 인생", 그러면서도 "진부하고 통속적", 정말 도스토옙스키의 등장 인물들을 보면 이럴 수가 없다, 정말 어떻게 이런 인간들이 다 있어 라는 그런 느낌을 주는 사람들이 있다. 게다가 도스토옙스키의 장소들은 "어두운 골목, 작고 좁은 방, 어딘지 의심스러운 술집, 유곽, 교도소", 한마디로 지하실이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중에서 《지하 생활자의 수기》가 모든 도스토옙스키의 전 작품들의 축약판이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죄와 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백치》이런 것들은 주제를 드러내 보이고 있지만 《지하 생활자의 수기》는 제목이 장소를 드러낸다. 장소에 관한 이론적인 탐구가 굉장히 중요하다. 영화나 이런 데서도 어떤 장소가 비치면 그 장소가 우리에게 어떤 심상을 던져준다. 그게 굉장히 잘 드러난 작품 중 하나로 기억하고 있는 게 Once Upon a Time in America이다. 거기에 보면 여러 장소들이 나온다. 영화 제목은 Once Upon a Time in America, 옛날 옛적의 아메리카 라는 말로 시간을 나타낸다. 시간을 나타내는데 영화는 이제 등장 인물들의 어떤 행위도 중요하지만 여러 장소가 나온다. 특히 어린애들이 어른 옷 입고 걸어가는 것을 원경으로 찍어 놓은 영화 포스터를 보면, 그 장소 그리고 여러 장소들이 등장하는데, 굉장히 인상적인 부분들이 있다. 장소라고 하는 것,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의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곳은 "어두운 골목, 작고 좁은 방, 어딘지 의심스러운 술집, 유곽, 교도소", 한마디로 말해서 지하이다. 《지하 생활자의 수기》가 그런 점에서 도스토옙스키 작품의 블루프린트라고도 할 수 있겠다. 등장 인물들이 현실 속에 완전히 착 달라붙어서,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적인 인간들인데, 사실 그들은 그런 까닭에 진부하고 통속적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완전히 뿌리 뽑힌 인생이니까, 그 장소에 둘러붙어 있는 것 같지만 아주 역설적이게도 완전히 뿌리 뽑힌 인생이라는 점에서 이제 변증법적 계기들을 보여준다. 이 부분이 첫째로 이제 변증법적 계기가 된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두 가지가 겹쳐져서 도스토옙스키의 세계를 구성한다. 그런 인간들과 그 인간들이 살아가는 장소가 겹쳐져서 그 인간들의 삶에 양상modus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이다. 

《도스토옙스키》 2장 27 기묘한 인간들의 조합이다. 모든 사회 계층의 사람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정신적인 영역에서 나온 사람들, 모두가 삶으로부터 끄집어내어져 다시 삶 속으로 배치된다. 

《도스토옙스키》 2장 27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현실적인 인간들이다.

《도스토옙스키》 2장 27 대지에 착 달라붙은 것 같지만 완전히 뿌리 뽑힌 인생이나니! 모든 삶이 그렇지만, 그들의 삶은 특히 진부하고 통속적이다. 

《도스토옙스키》 2장 27 어두운 골목, 작고 좁은 방, 어딘지 의심스러운 술집, 유곽, 교도소···. 


도스토옙스키의 세계란 무엇인가. 인간들의 삶의 양상, 뿌리 뽑혀 있다고 하는 삶의 향상, 그것이 어떻게 어디서 구성되는가. 그들이 사는 인간들이 사는 장소인 지하실이다. 삶의 양상이라고 하는 것, 뿌리 뽑힌 삶, 그런데 뿌리 뽑힌 삶이라 할지라도 지하실에서 아등바등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들의 모습이 도스토옙스키의 세계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점에서 아주 많은 인간들이 등장하는 장편 대하소설들과 구별되고 있는 지점이겠다.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 하면 얘기한 것처럼 실존 신학적 계기들이다. 첫 번째 등장하는 인물이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무엇으로 움직이는가. 라스콜리니코프는 대학생이다. 이념으로 움직인다. "그는 비범한 인간이며, 자신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그 이념을 가지고 노파를 죽인다. 그리고 "시베리아에 가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말로 표현해낼 수 없는 인생의 '무언가Etwas'와 직접 마주하게 된다." Etwas라고 하는 말은 something이다. 무언가와 직접 마주하게 된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인생의 Etwas. 

《도스토옙스키》 2장 29 그는 "비범한 인간"이며, 자신의 "이념"을 가지고 있다.

《도스토옙스키》 2장 31 시베리아에 가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말로 표현해낼 수 없는 인생의 '무언가Etwas'와 직접 마주하게 된다. 


나스콜리니코프는 그런 이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하면 뭔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안 됐다는 걸 알게 되고 휴머니티의 경계선에서 바르르 떨고 있게 된다. 여기서 트루나이젠은 그렇게 얘기한다. 거기서 라스콜리니코프가 깨닫게 된 것은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 쪽에서는 저쪽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놓일 수 없다." 그러다 보니까 신에 대한 믿음이 생겨나고 부활을 갈망하게 된다. 이 부분은 트루나이젠은 신학자니까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은데 저는 아닌 것 같다. 지금 트루나이젠의 책을 읽다 보면 꼭 결정적인 지점에서 신에 대한 믿음을 불러온다. 그건 아닌 것 같고 인간의 한계를 딱 깨닫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지점에서 신을 향해 가는 것도 아니고 니체가 말한 것처럼 인간 너머의 삶에 진입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 너머의 삶이라고 하는 게 바로 초인Übermensch의 삶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니체는 초인을 데려왔는데, 그 초인이라고 하는 게 예수 그리스도하고 어떻게 다르겠는가. 초인 숭배가 일어나지 않겠는가. 실존철학은 또는 제가 얘기하는 것처럼 실존신학은 초인을 추구하는 시도가 아니다. 인간이 처절하게 부서진 그 현장을 목격하고 그 현장의 목격 보고서를 쓰는 게 실존 신학이다. 초인의 삶을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그 부서진 지점에서 신을 찾는 것도 아니다. 실존신학이라고 하는 게 신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기는 하지만 신을 찾는 시도는 결코 아니다. 그냥 신은 인간의 형편없는 모습을 탐구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적 계기로서 주어져 있다. 그 방법론적 계기로서 주어져 있다 라는 점에서 실존신학이라고 할 때 그 신학이라는 말이 의미를 가질 수 있겠다. 사실 《죄와 벌》은 저도 읽은 지가 좀 된 작품인데 읽을 때 계속 좀 느끼했다. 나스콜리니코프가 지나치게 아주 속된 의미에서의 속류적 관념론, 속된 의미에서의 관념론에 빠져든 게 아닌가 한다. 그래서 저는 《죄와 벌》은 사실 그렇게 딱히 권하는 작품은 아니다. 

《도스토옙스키》 2장 33 인간은 하느님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 2장 35 인간 쪽에서는 저쪽으로 넘어가는 다리가 놓일 수 없다는 것을!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트루나이젠이 설명하듯이 스토리 구도는 아주 간단하다. 아버지가 있고 아들 셋이 있다. 그런데 그루센카라고 하는 여인을 두고 정말 크게 벌어지는 경우이다. 그러니까 트루나이젠이 지적하고 있듯이 《죄와 벌》의 경우에는 이념인데 여기서는 여자가 있다. 이게 굉장히 작품의 악마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념을 가지고 악마가 되는 사람도 있긴 하겠지만 사실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무시무시한 작품으로 볼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악마적 여성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그루센카는 어쩌고 저쩌고 다 떠나서 인간에게 그 삶의 극한을 경험하게 하는 악마적 대상으로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트루나이젠이 인용하고 있는데 "그래, 그녀는 그런 존재야. 한 마리 호랑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왕, 완전히 지옥에서 온 여자, 이 세상에서는 그냥 상상이나 해보는 모든 지옥 여자들의 여왕이다." 완전히 지옥에서 온 여자, 악마적인 뭔가를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다면 여기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의 극한성을 실존적으로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그루센카라고 하는 여성이 등장했는데 그 여성이 바로 신이다. 그리고 이제 그 악마와 교접하려는 이들이 이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아버지이다. 라스콜리니코프는 이념에 매혹되었고, 이 카르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이념이 아닌 에로스에 매혹된다. 이 에로스라고 하는 건 exotic한 에로스의 매혹이 된다.  

《도스토옙스키》 2장 39 이번에는 모든 폭풍과 재앙의 중심에 ━ 《죄와 벌》의 경우처럼 하나의 이념이 아니라 ━ 여자가 있다. 

《도스토옙스키》 2장 40 그래, 그녀는 그런 존재야. 한 마리 호랑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여왕, 완전히 지옥에서 온 여자, 이 세상에서는 그냥 상상이나 해보는 모든 지옥 여자들의 여왕이다. 


"거기서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어리석음, 차갑고 영혼 없는 이해타산, 과도한 자긍심, 남을 짓밟아버리려는 의지, 강하고 폭력적인 자기 과시, 자기를 멸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예 멸절시키는 광포한 충동, 무절제한 사랑과 잔인함", 이게 인간의 본모습이다. "이 모든 것이 뒤엉키며 무서운 파도를 일으킨다. 여기서 인간은 신적인 존재도 되고 악마적인 존재도 된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으면서 저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트루나이젠의 이 설명이 거의 저의 독후감이나 다름없다 라는 것을 자백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이다. 인간이 왜 이 따위야, 인간에 대한 경멸이 아니라 나도 이런 놈이겠지 라고 하는 누군가가 거대한 손으로 나의 뒷덜미로 딱 들어올려서 너 이런 놈이지 하고 대면시켜주는, 그렇다면 그루센카는 신이다. 악마가 됐건 신이 됐건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를 그냥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는 알아차리게 해주는 자각하게 해주는 에로스이다. 그렇다면 그루센카를 그렇게 대면하고 인간의 어리석음, 이해타산, 자기과시, 충동, 잔인함 이런 것들을 드러내주는 계기로서 우리 앞에 상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딱 마법Zauber이다." 

《도스토옙스키》 2장 42 거기서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을 태워 없애는 어리석음, 차갑고 영혼 없는 이해타산, 과도한 자긍심, 남을 짓밟아버리려는 의지, 강하고 폭력적인 자기 과시, 자기를 멸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아예 멸절시키는 광포한 충동, 무절제한 사랑과 잔인함. ━ 이 모든 것이 뒤엉키며 무서운 파도를 일으킨다. 여기서 인간은 신적인 존재도 되고 악마적인 존재도 된다. 

《도스토옙스키》 2장 44 에로틱한 것의 마법이다. 그야말로 딱 마법Zauber이다.


그런데 그 지점에 갔을 때 "카라마조프 가문의 비극적인 소용돌이 안에도 어떤 깊은 의미, 최종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다고 믿었던 알로샤", 트루나이젠은 신학적인 의미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부활을 말한다 라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저는 그 지점은 털어내버리고 신학자가 아니라 철학자로서 읽는다 라고 하면 "비극적인 소용돌이 안에도 어떤 깊은 의미, 최종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렇게 고쳐 읽는 것이 낫지 않나 한다. "비극적인 소용돌이이기 때문에 바로 그것이 비극이기 때문에 바로 그 안에만 구원이 있다." 즉 똑같은 장소에at the same place 비극과 구원이, 서로 대립되는 두 항목이 공존한다. 그것이 바로 변증법적 신학이다. 그루센카라고 하는 신적 존재, 악마도 신적 존재이다, 신적 존재가 있고 바로 그 신적 존재를 보면서 내가 얼마나 잔인한 놈인가, 얼마나 어리석은 놈인가 이런 것들을 깨닫게 되고, 바로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이 비극이고, 그런 비극의 소용돌이 안에, 그리고 비극이기 때문에 구원이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그게 이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2장 45 카라마조프 가문의 비극적인 소용돌이 안에도 어떤 깊은 의미, 최종적인 구원의 의미가 있다고 믿었던 알로샤의 믿음은 결코 허무맹랑한 믿음이 아니다. 


그다음에 《백치》. 저는 《백치》를 읽으면서 미시킨 공작이 간질을 앓고 있다고 했는데 좀 낯간지러웠다. 차라리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가장 빠릿빠릿한 작품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트루나이젠은 《백치》를 얘기하면서 미시킨 공작이 "인생의 최종적인 근거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인생 자체를 해체한다." 라고 말한다. 인생이라고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어디에 있는가를 참고하고자 하는데 그걸 탐구해가면 탐구해 갈수록 인생 자체가 해체돼 버린다. 즉 이것 또한 역설적인 사태이다. 그리고 인생을 해체해버리면 최종적인 근거가 나타날 수도 있다. 무슨 말인가. 앞에서 그루센카를 대면했을 때 모든 것이 부서져 버린다. 자기가 지금까지 뭐 옳다고 여겼던 것들이 다 부서져 버리고 잔인함, 자긍심 그런 것들만 남는다. 그러면 그게 '이게 사실은 나의 최종 근거였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또는 정신이, 이를테면 헤겔적으로 얘기해 보면, 정신이 스스로를 전개해 나간다. 자기가 어떠한 존재인지 모르고 대상 세계를 향해 나가서 세상의 이런저런 모든 온갖 것을 다 편력하고 경험한다. 그렇게 경험하면서 자기 외화外化 Entäußerung한다. 자기 바깥으로 나아간다. 그런데 그렇게 바깥으로 나가서 세상의 온갖 걸 다 겪어보니까 결국 그 모든 것들이 자기 안에서 흘러나왔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는 또는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그런 과정이 있다. 즉 외화가 바깥으로 나가는 과정이 곧 자기 안으로 되돌아오는 과정이라고 하는 것들을 알 수 있다. 처음에는 우리가 자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몰랐다. 그루센카를 대면하기 전에는 또는 신을 대면하기 전에는 악마를 대면하기 전에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몰랐다. 나는 내가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했다. 즉 나에게는 내가 일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신을 대면하고 악마를 대면하고 그루센카를 대면했을 때 그들이 내 앞에 섰을 때 비로소 내가 어떤 존재인지 잔인한 존재인지 자기 과시에 물욕에 가득 찬 존재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을 헬라스어로 본래적인 의미에서 mystērion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원래 착한 놈인 줄 알았는데 그런 신적 존재들을 대면한 다음에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으니까, 나 자신 안에 전혀 다른 또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순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하나의 mystērion이 되는 것이다. mystērion라고 하는 말은 알지 못하는 것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예전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금은 드러난 것이 mystērion이다. 그러니까 신학에서 쓸 때는 어떤 특정한 사람들에게 계시된 신의 비밀, 그것이 나중에는 영지주의자들에게는 그노시스, 그노시스를 가진 자들만에게 신의 비밀secret이 드러난다. 그렇게 드러난 것을 가리킬 때 mystērion이라는 말을 쓴다. 그렇다면 바로 그 신, 악마, 크루센카가 바로 우리에게 mystērion을 산출해내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moment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런 점들이 바로 그 실존신학의 구체적인 내용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신이라고 하는 것은 실존의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정점을 만들어 내주는 계기이다. 최고의 정점이 무엇인가. 자신의 본질을 하나도 남김없이 드러내 보이는 것이 바로 최고의 장점이다. 

《도스토옙스키》 2장 56 그는 인생의 최종적인 근거를 탐색하는 과정에서 인생 자체를 해체한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조금 안타깝게도 트루나이젠은 "바로 이 지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깨달음과 성서의 궁극적인 통찰이 근본적으로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라고 말한다. 글쎄 저는 그건 아닌 것 같다. 성서도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겠다. 성서를 실존신학적으로 읽으면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다. 트루나이젠이 파악한 도스토옙스키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부활이라고 하는 것, 속죄와 부활이라고 하는 것인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도스토옙스키의 깨달음이라고 하는 게 인간의 악마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허약함, 그것이 도스토옙스키의 깨달음인데, 트루나이젠이 보기에는 부활이고, 제가 보기에는 인간의 악마성이다. 그리고 인간의 악마성이라고 하는 것이 가장 잘 드러난 지점이 바로 이제 ecce homo라는 말로 널리 알려진 그 부분이다.  

《도스토옙스키》 2장 63 바로 이 지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깨달음과 성서의 궁극적인 통찰이 근본적으로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요한복음의 그 부분을 한번 잠깐 보면,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가 예수를 신문한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부분,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그러니까 네가 말한 대로다 라고 얘기를 했다. 필라투스가 신문을 하다가 죄를 찾을 수 없으니까 "다시 밖으로 나와 유다인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 / 과월절이 되면 나는 너희의 관례에 따라 죄인 하나를 놓아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이 유다인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물었다. / 그러자 그들은 악을 쓰며 그자는 안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나서 이제 19절에 가면 "빌라도는 다시 밖으로 나와서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를 너희 앞에 끌어내 오겠다. 내가 그에게서 아무런 혐의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너희도 이제 보면 알 것이다."라고 했고, "예수께서는 가시관을 머리에 쓰시고 자홍색 용포를 걸치시고 밖으로 나오셨다.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가리켜 보이며 자, 이 사람이다. 하고 말하였다." 그게 바로 그 라티움어로 ecce homo라고 옮겨지는 그 구절이다. '이 사람을 보라'라는 식으로 옮겨지는데,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든 메시아가 되었건 간에 예수는 그런 존재로서 등장하였는데 그냥 완전히 인간 그 자체로서 드러나 보였다. 필라투스에게 신문을 받고 고난을 받고 그리고 '이 사람이다', 나는 이 유대의 총독으로서 이 사람을 아무리 신문에도 너네들이 말하는 그런 죄목을 찾지 못하겠는데 너네들은 도대체 무슨 재주로 이 사람의 죄를 찾겠다고 한다는 것이냐 하고 지금 거기다가 내놓은 것이다. 그것을 갖다가 트루나이젠도 한 번은 짚어서 말한다. 라스콜리니코프를 따라갔던 소냐가 "나는 벌벌 떨고 있는 피조물인가, 아니면···?" 그때 소냐가 그의 말을 끊는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가 가까이에 있다."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은 제가 말하는 실존신학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 같고 어제도 말한 것처럼 니체의 잘난 척에 불과하고,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라고 하는 것 자체가 벌거벗은 철저하게 자기 의식으로, 예수는 메시아로서 이 세계에 왔는데 메시아임을 유대인들에게서 완전히 부정당하고 고난의 정점에 딱 이르렀을 때, 그 사람, 메시아인 사람, 그 사람을 보면 어떻겠는가. 그럼으로써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악마성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도 해석을 해보겠다. 

요한 18.38-40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빌라도는 이 말을 하고 다시 밖으로 나와 유다인들에게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 / 과월절이 되면 나는 너희의 관례에 따라 죄인 하나를 놓아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이 유다인의 왕을 놓아주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고 물었다. / 그러자 그들은 악을 쓰며 "그자는 안 됩니다. 바라빠를 놓아주시오." 하고 소리질렀다. 바라빠는 강도였다. 

요한19.4-5 빌라도는 다시 밖으로 나와서 유다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를 너희 앞에 끌어내 오겠다. 내가 그에게서 아무런 혐의도 찾아내지 못했다는 것을 너희도 이제 보면 알 것이다." / 예수께서는 가시관을 머리에 쓰시고 자홍색 용포를 걸치시고 밖으로 나오셨다.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가리켜 보이며 "자, 이 사람이다." 하고 말하였다. 

《도스토옙스키》 2장 37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니체의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가 가까이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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