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도스토옙스키(3)

 

2023.10.23 📖 도스토옙스키(3)

📖 도스토옙스키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Eduard Thurneysen(1888-1974), ⟪도스토옙스키, 지옥으로 추락하는 이들을 위한 신학⟫(Dostojewski, 1921)   

- 도스토옙스키의 관점 
변증법적 실존. “궁극적인 질문 때문에 괴로워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 궁극적인 질문이 있는 곳에 궁극적인 해답도 있기 때문이다.” 
“철저한 사실주의”, “완전한 사실주의를 통해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는 것”. 이는 인간이 대답할 수 없는, 인간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것을 무한히 추구한다는 의미에서의 초월적 형이상학의 시도 


- 도이치 문학 전통의 발달소설(Entwicklungsroman) 또는 교양소설(Bildungsroman)
인간을 묻지만 결론에 이르면 인간의 고통이 아닌 고요함에 이르는 것. 도스토옙스키의 결말이 신을 지향한다면 이는 러시아 판 교양소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완전히 허물어지고 부서진 상태로, 모로지 파헤쳐지고 뒤흔들린 상태로 인생의 문제와 마주 서 있다. 모두가 죽음을 눈앞에 둔 것 같은 상황이다. 그리고 위대한 작품에는 위대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신에게서 구원을 찾는다면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은 ‘부활문학’으로 전락할 것이요,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 대한 묘사는 위악僞惡일 뿐이며, 더 나아가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부르주아 사회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신성모독”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에두아르트 트루나이젠의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있다. 오늘은 제3장 "도스토옙스키의 관점"을 읽는다. 지난번에도 제가 지적했듯이 이 책을 쓴 사람은 신학자이다. 신학자이다 보니까 아주 쉽게 섣불리 신이라고 하는 그 지점으로 간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 쉽게 신으로 간다 하는 생각을 했고, 또 그렇게 쉽게 신으로 가는 것이 도스토옙스키가 가지고 있는 특징일 수도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부활이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도스토옙스키의 문학은 부활 문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부활 문학은 다르게 말하면 참회하는 신 앞에서 참회하는 문학이고 그렇게 되면 아주 자연스럽게 기독교 문학이다. 기독교 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꼭 실존철학 또는 실존신학과 이어지지 않는다는 건 아닌데 그렇게 보면 도스토옙스키가 가지고 있는 레디컬한 지점, 철저한 지점이 일종의 거짓 몸짓으로 돌변해버리는 또는 이 모든 징글징글한 파헤침, 도스토옙스키는 아주 불편하게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면서 파헤친다. 앞에서 나온 것과 같은 그런 등장 인물들은 인간이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가 있어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게 좀 작위적으로 보이고 위악적으로 보인다. 도스토옙스키 문학을 마지막에 도스토옙스키가 부활을 얘기한다고 결론을 내려버리면 그냥 이런 부활의 그 감동을 강하게 안겨주기 위해서 앞에서 이런 위약적인 인간들을 계속 배치하고 그들의 결을 정말 굉장히 가늘다 라고도 예리한 칼로 그들을 이를테면 잘라내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되면 도스토옙스키 문학은 그가 그렇게도 반대하는 부르주아적 위선과 별로 다르지 않은 것이 된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를 그렇게 읽는다 그러면 끝까지 읽어내기는 좀 어렵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렇게 읽기보다는 도스토옙스키를 읽을 때는 그냥 섣불리 도스토옙스키 문학을 부활 문학으로 읽으면 안 된다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트루나이젠은 그렇게 읽는다.  그렇게 읽기 때문에 그 점을 고려하면서 이 책을 비판적인 안목으로 읽어볼 필요가 있게 된다. 


제3장 도스토옙스키의 관점의 첫 번째 관점을 보겠다. 도스토옙스키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상처와 아픔 속에서 참된 회복을 맛보게 된다. 궁극적인 질문 때문에 괴로워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질문이 있는 곳에 궁극적인 해답도 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도스토옙스키 문학이 가지고 있는 변증법적 관점이다. 앞서 여러 차례 말했듯이 질문하는 자리에, 바로 그 자리에 그 대답이 있다는 것이다.  질문이 있는 곳에 해답이 있다. 즉 질문과 해답의 공존. 궁극적인 것에 대한 질문을 할 때 인간이 묻고 있는 것인데 바로 그 자리에 신이 있으면 그것은 변증법적인 것이 아니다. 궁극적인 것을 물을 때 인간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물을 때 거기서 신을 찾아버린다든가 아니면 니체처럼 초인을 불러온다든가 그러면 그것은 변증법적인 것이 아니다. 역설이 성립해 있지 않다. 선택지가 아니라 또 다른 선택지가 있어 버리는 것이다. 신이냐 인간이냐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신은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이 뭔가를 물었을 때 신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변증법적 선택지가 아니다. 변증법이라고 하는 건 모순이기 때문에 그 고통을 그냥 이렇게 품고 가야 되는 것이다. 쉽게 신에 대한 질문이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가 없다.  궁극적인 것을 물을 때 신에 대한 질문이라고 단정지어서 말할 수가 없다.  그것을 신에 대한 질문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게 되면 신학인데 그건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신학자들을 최종 분석에서는 마지막 분석에서는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신학자들과 물리학자들 사이에 차이가 없어져버린다. 

《도스토옙스키》 3장 68 그들은 자신의 상처와 아픔 속에서 참된 회복을 맛보게 된다. 궁극적인 질문 때문에 괴로워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질문이 있는 곳에 궁극적인 해답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 질문을 하는 자리에서 도스토옙스키는 계속 질문을 한다. 그 질문이 바로 철저한 사실주의라고 하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는 질문을 한다. "완전한 사실주의를 통해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자기 예술 작품의 핵심적인 경향이다. 완전한 사실주의를 통해서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는 것 이게 도스토옙스키의 관점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도스토옙스키의 방법론이다. 이 방법론이야말로 아주 변증법적 방법론이다. 그래서 우리는 도스토옙스키를 변증법적 실존 문학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면 완전한 사실주의를 통해서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이제 도스토옙스키의 방법론인데, 그것은 이제 도스토옙스키와 같은 러시아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이제 물어볼 수도 있다. 투르나이젠의 이 책이 굉장히 좋은데, 신학자가 써서 좀 그렇지 않겠나, 이 정도만 했어도 충분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질문 "완전한 사실주의를 통해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완전한 사실주의를 통해서 인간을 물어가는 것, 계속 묻는 것, 그것은 도스토옙스키처럼 러시아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 오이디푸스도 그렇게 묻는다. 고대의 소포클레스도 그렇게 물었던 것이고 그다음에 19세기 말에 도스토옙스키도 그렇게 물었던 것이고,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도 그렇게 묻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도스토옙스키의 변증법적 방법론 즉 완전한 사실주의를 통해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을 발견한다 라고 하는 것이야 말로 문학이 가지고 있는 또는 실존 문학이 가지고 있는 또는 실존신학이 가지고 있는 궁극적인 보편성의 지점이 되겠다.  

《도스토옙스키》 2장 72 그는 "완전한 사실주의를 통해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는 것"이야 말로 자기 예술 작품의 핵심적인 경향이라고 말한다. 

 

트루나이젠은 이제 그 너머에 있는 소실점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계속 물어봤을 때 도스토옙스키의 그 물음은 인간 너머에 있는 소실점을 향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너머에 있는 소실점이라는 말로써 트루나이젠이 무엇을 가리키고자 하는지는 아주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바로 신이겠다. 그리고 그것을 트루나이젠은 초월적 형이상학이라고 말하는데, 저는 이 점에서 조금, 트루나이젠은 초월적 형이상학이라고 하는 말을 신학이라고 생각을 할테고, 그것이 바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라고, 하느님에 대한 탐구 그렇게 연결을 시킨다고 본다. 그런데 저는 형이상학 연구자로서 형이상학이 반드시 신에 대한 질문이냐 하는 것에는 그렇게 찬성하지 않는다. 형이상학은 신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그냥 완성되지 않는 궁극적인 것 또는 우리가 가서 닿을 수 없는 궁극적인 것에 대한 물음이라고 말해도 된다. 따라서 그 소실점에 반드시 신을 위치시킬 필요는 없다 라고 본다.  

《도스토옙스키》 3장 75 모든 인간적인 것이 결국 심리학적 실제 너머에 있는 소실점과 종합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그의 심리학 아닌 심리학이 펼쳐 보이는 인생의 그림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저 너머에 있는 소실점이다. 

《도스토옙스키》 3장 76 그가 형이상학자라면, 그의 형이상학은 엄밀한 의미에서 초월적인 형이상학이 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이런 지점들이 헤르만 헤세와 같은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쓴 이른바 교양소설Bildungsroman, 여기서 트루나이젠은 발달 소설Entwicklungsroman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다른 용어로는 이제 교양소설Bildungsroman이라고 얘기한다. 그런 교양 소설들은 궁극의 지점에 가면 고요하게 자기 자신 안에서 침잠하는 그런 인간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 이를테면 이제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와 같은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가장 잘 완성된 교양소설은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일 것이다. 그것이 보여주는 그 고요한 침잠의 세계, 스토아적 고요함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그런 Bildungsroman과는 전혀 다른 결말을 가지고 있다. 즉 마지막까지도 인간을 깨부숴버린다. 그것이 이제 도스토옙스키가 가지고 있는 파괴력이고 레디칼이다. 그런 까닭에 Bildungsroman은 실존문학이 될 수 없다. 앞서 얘기했던 것처럼 도스토옙스키의 결말이 또는 그 소실점이 투르나이젠이 지적하는 것처럼 신을 지향하고 있다고 하면 도스토옙스키의 문학 역시 실존 문학은 아니다. 러시아판 도야 소설, 교양소설, 발달 소설일 뿐이다. 그렇게 물론 해석할 여지도 있다. 중간에 등장하는 인간들이 헤르만 헤세의 작품들보다는 좀 참혹하긴 하지만 결말이 신이라면 그것 역시 발달 소설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트루나이젠은 그런 도이치 소설에서 많이 발견될 수 있는, 도이치 문학의 전통에서 명성이 자자한 발달 소설을 비난하면서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맨 마지막에 구원이 신의 손에서 오고 있다는 희망이 있다는 얘기를 하면서 구별된다고 말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되면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완전히 허물어지고 부서진 상태로, 오로지 파헤쳐지고 뒤흔들린 상태로 인생의 문제와 마주 서 있다. 모두가 죽음을 눈앞에 둔 것 같은 상황이다. 그리고 위대한 작품에는 위대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마지막에 하느님의 손에서 구원을 얻는다 하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부활 문학이 된다. 그리고 도이치 문학 전통에서 빛나는 그런 Bildungsroman과 다르지 않은 그런 작품이 된다. 여기에서 투르나이젠이 도스토옙스키 문학에 대한 처절한 분석을 끝까지 못 해내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 3장 80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자신의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완전히 허물어지고 부서진 상태로, 오로지 파헤쳐지고 뒤흔들린 상태로 인생의 문제와 마주 서 있다. 모두가 죽음을 눈앞에 둔 것 같은 상황이다. 그리고 위대한 작품에는 위대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다음 도스토옙스키 문학에서 한 가지 더 이게 뚜렷하게 짚어봐야 되는 지점은, 니체라면 그것을 귀족의 도덕이라고 불렀을 만한 것들에 대한 경멸 그리고 아주 냉혹한 비판이다. "유럽의 문화를 정신적으로 선도해 나가던 부르주아 계층의 눈앞에 거울을 들이댔다. 이른바 선량한 상류 사회의 부패와 거짓과 불안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주 딱 잘 꼬집어서 내놓은 지적이다. 바로 이런 것들을 니체는 귀족의 도덕이다 라는 식으로 얘기를 한다. 

《도스토옙스키》 3장 87 그는 특히 유럽의 문화를 정신적으로 선도해 나가던 부르주아 계층의 눈앞에 거울을 들이댔다. 이른바 선량한 상류 사회의 부패와 거짓과 불안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한 가지 더 도스토옙스키가 지적하고 있는 건, 니체는 사회주의에 대해서 노예의 도덕이라고 그랬는데, 도스토옙스키도 그걸 지적하고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부르주아 사회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신성모독"을 비판한다. 바로 이제 그게 제4장에서 종교와 교회를 겨냥하는, 종교와 교회가 허튼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주의도 레디컬하지 못하게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부르주아 사회주의의 그것도 도스토옙스키에서 굉장히 그 비난을 받고 있는 지점이다. 부르주아 사회주의는 근본적으로 모든 현세적인 것에서 초월적인 세계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속세적인 것에서 탈속적인 것을 지워 없애버리려 한다.  즉 현실 속에서 지상천국을 만들려고 하는 그런 시도이겠다. 그런 시도를 도스토옙스키가 비난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도스토옙스키가 섣불리 신을 끄집어 오지는 않는다. 섣불리 신을 끄집어 들인다고 하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기독교적 사회주의이다. 기독교적 사회주의도 아주 말랑말랑한 신적인 구원이라고 하는 당의정을 우리 눈앞에서 흔들어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부르주아 사회주의하고 다르지 않다. 오히려 도스토옙스키가 시도하고 있는 것은 그 세기말이라고 하는 이 상황 속에서 근원으로 내려간 인간 영혼을 뒤흔드는 근본적인 고통의 경험 그런 것들이 아닐까 싶다. 도스토옙스키의 생몰연대를 보면 1821년에 태어나서 1881년에 죽었다. 60살을 살고 갔다. 오늘날 지금 21세기 우리는 60살 살면 안타깝다 생각하지만 불과 20년 전만 해도 65세면 충분히 살았다라고 하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일반적인 그런 합의가 있었다. 그래서 저도 한때는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 19세기 말에 도스토옙스키 정도 살았다 하면 많이 산 사람이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신을 찾는다든가 그런 일까지 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생각이 든다. 

《도스토옙스키》 3장 90 개혁적이고 진보적인 부르주아 사회주의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이 교리는 신성모독이다.

《도스토옙스키》 3장 91 그것은 본질적으로 모든 현세적인 것에서 초월적인 세계의 흔적을 지워버리고, 모든 속세적인 것에서 탈속적인 것을 지워 없애버리려는 시도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 《도스토옙스키》 제3장 도스토옙스키의 관점은 일단 트루나이젠의 관점, 트루나이젠의 그런 논변을 좀 제쳐놓고 제 나름대로 이것에 근거해서 그리고 제가 예전에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서 가졌던 그런 생각을 바탕으로 다시 정리를 하면 도스토옙스키은 트루나이젠도 인용하고 있듯이 완전한 사실주의를 통해 인간 안에 있는 인간을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이렇게 발견하는 것은 도스토옙스키가 단순히 러시아인이기 때문에 그러했던 것도 아니고, 이것이야말로 모든 실존적 문학에서, 인간 실존을 물어가는 문학에서는 보편적인 방법론이고 태도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것은 신을 찾지 않는다 라는 의미에서 영원히 가닿을 수 없는 어떤 초월적인 것을 향해 인간이 나아간다는 점에서는 초월적 형이상학의 태도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결국 그 자리에서, 그렇게 인간이 이제 완전히 철저하게 부서지는 인간의 자리에서 대답을 찾는다 라는 점에서는 모순의 공존이라고 하는 변증법적 실존문학의 그런 방법론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 인간은 결국 고요함에 이를 수 없기 때문에 도이치 문학의 전통에서 우리가 찾아볼 수 있는 발달소설Entwicklungsroman 또는 교양소설Bildungsroman과 같은 그런 것과는 아주 근본적으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는 그런 작품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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