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5-2

 

2023.10.11 🎤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5-1

커리큘럼

09.06 예술의 목적과 예술론의 학적 위치
09.13 플라톤의 미학
09.20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
10.04 mimēsis
10.11 신플라톤주의와 고전주의 예술론
10.18 maniera grande, cicerone
10.25 Baroque, Rococo
11.01 헤겔과 역사적 예술론
11.08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1):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조르조 바사리
11.15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2): 에르빈 파노프스키, 막스 드보르작

 

교재

강유원(지음), 《에로스를 찾아서 -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한 성찰


제5강. 신플라톤주의와 고전주의 예술론

일시: 2023. 10. 11.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345

 

 


어떤 사태를 지칭하는 정확한 단어를 항상 생각을 하도록 노력을 해야 한다. 내가 지금 이 단어를 말함으로써 그 어떤 것도 규정하지 못하고 막연한 사태를 두리뭉실하게 얘기하고 있다고 하면 생각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질 않는다. 항상 규정적으로 이야기하려고 해야 된다.  

102페이지 보자. "신플라톤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 플로티노스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플라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또는 '관여' 등과 같은 술어로써만 설명되던, 아름다움과 진리가 현전하는 것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플라톤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로티노스에서도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은 동등한 위치에 있다. ··· 플로티노스가 분명히 지적하고 있듯이 아름다운 것은 지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감각에 의해서도 포착된다." 우리 눈앞에 보이고 있는 아름다운 것이 이제 감각으로 포착이 된다. 그리고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초월적인 영역에 있던 아름다움이 흘러내려서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플로티노스에서 아름다움은 감각의 층위부터 고찰된다." 우리에게는 감각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플루티노스의 유출설에 따르면 물이 위에서 흘러내리듯이, 물이 맨 위쪽에서 흘러내리면 위와 가까운 쪽일수록 물의 양이 많다. 그러니까 플로티노스는 물이 흘러내려오는 것을 가지고 이 우주에 있는 생명체의 등급을 매긴다. 다시 말해서 맨 위로부터 뭔가 흘러내려오는데 흘러내려오는 것이 많이 머물러 있는 것일수록 아름다운 것에 더 가깝다. 저 맨 밑에 있는 것은 짐승이다. 지금 생물학자들이 이런 거 보면 황당한 얘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23번
신플라톤주의의 대표적인 사상가 플로티노스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플라톤에서는 볼 수 없었던, 또는 '관여' 등과 같은 술어로써만 설명되던, 아름다움과 진리가 현전하는 것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이다. 플라톤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로티노스에서도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은 동등한 위치에 있다. ··· 플로티노스가 분명히 지적하고 있듯이 아름다운 것은 지성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감각에 의해서도 포착된다. 따라서 플로티노스에서 아름다움은 감각의 층위부터 고찰된다. 


아름다운 것도 마찬가지다. 그다음에 105페이지를 보자. "비례와 척도는 외관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뿐이며 진정한 아름다움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이것을 볼 줄 아는 이들은 전체를 두루 바라보는 이들이다. 이들에게는 마치 넥타(신들의 음료)에 취하여 흠뻑 젖는 것처럼, 그들의 영혼이 온통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워지는 까닭에, 단지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처음부터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은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그것이 저 위로부터 내려오는 아름다움의 몇 번째 단계가 그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움의 모습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에 섣불리 눈을 빼앗기지 않는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23번
비례와 척도는 외관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뿐이며 진정한 아름다움은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다. 이것을 볼 줄 아는 이들은 "전체를 두루 바라보는 이들"이다. "이들에게는 마치 넥타(신들의 음료)에 취하여 흠뻑 젖는 것처럼, 그들의 영혼이 온통 아름다움으로 가득 채워지는 까닭에, 단지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처음부터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Enn. 8. 10). 

 

그런데 가만히 보면 부처님의 말씀하고 비슷한 게 있다. 불교에서는 밝을 명明과 알 지知는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알지 못하면 무명無明이다. 무명이라고 하는 것은 미망의 상태에 젖어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부처님의 설법에 따르면 우리가 뭔가에 집착을 하게 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본질은 한순간에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별것도 아닌 것임을 알지 못한 채 계속 집착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불교나 고대 희랍 철학이나 플라톤주의나 신플라톤주의, Klassik, 고전주의 모두 다 기본적으로 알아야 된다는 얘기이다. 다 묶어서 앎이다. 그래서 이것을 주지주의主知主義라고 부른다.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 철학을 아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아무리 니체를 하든 낭만주의 철학을 하든 뭘 하든 간에 기본 바탕은 주지주의자이다. Klassik이라고 하는 영역에 있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앎이라고 하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무언가를 해 나가는 것이다. 부처님도 크게 깨달았다고 하는데, 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디오티마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하든 여기에 흘러내려온 것들을 우리가 보고서 알고 있든 간에 어쨌든 그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앎이라고 하는 것이다. 앎이 없으면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유의 기본적인 방식이다. 이 앎을 부정하고 들어가 버리면 Romantik인 것이다. 현대 Romantik 같은 경우에는 가령 니체 같은 사람이 앎을 부정한다. 그런 사람들은 의지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인간에게는 이제 의지가 있다. 의지will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앎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물론 오늘날의 인지심리학적인 이론들에서는 어떤 knowledge에서 will이 나온다 라고 얘기하지만 철학에서는 아직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들은 주의주의主意主義, 의지에 중심을 둔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고전주의, 신플라톤주의, 플라톤주의, 고전주의는 앎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들에게는 영혼이 온통 아름다움으로 채워지는 까닭에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처음부터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왜 겉으로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가. 저것은 그냥 charming일 뿐이다, beauty가 아니다 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그러면 이 얘기를 극단으로 밀고 가면 우리 눈앞에 놓여 있는 모든 것은 beauty의 본질은 아니고, 그냥 beauty가 조금씩 묻어 있을 뿐인 것이 된다. beauty가 조금씩 묻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에 매몰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하면 본질주의자가 된다.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고 말하면, 본질세계, 현상세계 또는 너머에 있는 아름다움이 있는데, 눈앞에 있는 아름다움 현상 세계에 대해서 마음을 뺏기지 않는다고 말하면 결국에는 살아있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내 눈에는 아름다운 것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은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적인 인간이 되는 수밖에 없다. 이론적으로는 저 너머에 있는 아름다움을 보고 싶어 하는 수밖에 없다.  
 

 

참다운 아름다움으로 향해 나아가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되는 일정한 정도의 부정의 단계라는 게 있다. 눈앞에 보이는 현상들을 무無으로 돌리는 것이 있다. 명明이라든가 지知가 있는데 이것은 참다운 앎이다. 그런데 참다운 앎에 이르기 전에 이르기 전에 눈앞에 있는 현전하는 것들이 무無라고 하는 것, nothingness가 먼저이다. 현전하는 것들의 nothingness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이 참다운 명明과 각覺으로 갈 수 없다. '현전하는 것들이 왜 nothingness야, 그냥 닥치는 대로 누리면서 살면 되지'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실존주의이다.  플라톤주의나 신플라톤주의의 반대 말이 실존주이다. 신플라톤주의와 플라톤주의는 하면 hyper kallos, 즉 저 너머에 진짜 아름다움이 있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저 너머에 있는 아름다움이 본질이다. 그리고 현전하는 눈앞에 있는 것들을 현상이라고 한다. 이것들은 내 눈앞에 실제로 있으니까 실제로 있는 것, 실존이다. 실존철학Existenz은 '눈앞에 있는 것들이 실제로 있는 거니까 여기에 진리가 들어있지 무슨 본질 따위가 있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존철학을 이해를 하려면 플라톤주의를 먼저 이해를 해야 한다.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저 너머에 있는 진짜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냥 닥치는 대로 내가 누리고 즐기면 예술이지 라고 말하면 본질주의적 예술론, 고전적 예술론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게 Romantik의 하나이다. 인상주의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인상주의 이후의 회화는 고전주의를 완전히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 인상주의까지 설명하고 끝냈다. 그다음 것인 파노프스키와 같은 사람들 얘기는 해석학의 이론이지 예술이론은 아니다. 인상주의印象主義은 Klassik이론을 결정적으로 부정해냈기 때문에 그렇다. 인상주의impressionism는 실제로 있는 것을 말한다. 인상주의는 철학 이론으로 말하면 실존주의이다. 눈앞에 있는 것만 파악하면 끝인 것아 인상주의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것들이 진리를 갖고 있지 않다 라고 생각을 해야만, 그러면 진짜는 어디 있을까 라고 했을 때 저 너머 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신플라톤주의 같은 것이고, 뭐가 nothing이야 somthing이지 라고 말하면 그것이 인상주의이다.  

그다음에 106페이지를 보면 "인간은 신을 담고자 노력해야만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다." 눈앞에 있는 것들이 이게 별거 아니구나, 모두 헛 것이구나 라고 생각한 순간 불변의 hyper kallos를 향해 가야 되는데, 그러니까 디오티마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플로티노스에서는 신을 담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그 연결고리가 그렇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23번
인간은 신을 담고자 노력해야만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다.


"그 어떤 영혼도 만일 스스로 아름다움에 관계하지 못한다면, 아름다움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신과 미를 직관하고 싶다면, 먼저 온전히 신과 같이(theoeidēs) 되고자, 또 온전히 아름다워지고자 애써야 한다."  신과 같이theoeidēs라고 하는 단어가 중요한 단어이다.  theo가 신이고 eidēs는 형상이다. 신과 같이는 '신을 닮고자 하는'이라는 말이다. 지금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앤네아데스 1. 6. 9이 인용되었는데, 《에로스를 찾아서》에 인용된 것들은 가장 authentic 구절들이다. 그러니까 플로티노스가 미학 이론에서 또는 플로티노스의 형이상학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을 들면 지금 읽은 구절이다. 암기해야 한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23번
"그 어떤 영혼도 만일 스스로 아름다움에 관계하지 못한다면, 아름다움을 볼 수 없을 것이다.  누구든지 신과 미를 직관하고 싶다면, 먼저 온전히 신과 같이(theoeidēs) 되고자, 또 온전히 아름다워지고자 애써야 한다."(Enn, 1. 6. 9). 


"이처럼 플로티노스는 인간이 신을 닮을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초미超美의 영역에 있는", 여기서 초미超美는 hyper kallos이다, "아름다움 자체가 세계 영혼 안에 빛을 비추고 다시 그 빛이 자연물을 비추어 자연물이 아름다움 자체의 모상이 되듯이, 아름다움 자체가 세계 영혼 안에 빛을 비추고", 이렇게 되어 있는데 거기 지금 계속 비춘다는 얘기가 있다. 그 문단에 보면 "그가 제시하는 빛의 비춤(illuminatio), 일자로부터의 유출(emanatio)", 이 두 개는 원래 형이상학 이론에 나오는 개념인데 예술 창작의 원리적 개념으로 사용된다. 이 개념도 외워야 한다. 오늘 외워야 되는 것이 많다. theoeidēs를 외워야 되고, illuminatio, emanatio, symmetron 이런 개념들은 꼭 기억을 해야 한다. 이런 개념들이 가장 이제 고전주의 즉 Klassik 예술 이론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것이고, Klassik 예술에서 기본적으로 사용된다 하는 것은 고전적 형이상학에서 Klassikal metaphysics에서 사용되는 개념들이다 라는 얘기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23번
이처럼 플로티노스는 인간이 신을 닮을 수 있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초미超美의 영역에 있는 아름다움 자체가 세계 영혼 안에 빛을 비추고 다시 그 빛이 자연물을 비추어 자연물이 아름다움 자체의 모상이 되듯이, 아름다움 자체가 세계 영혼 안에 빛을 비추고 다시 그 빛이 인간에게 빛을 비추어 인간이 아름다운 작품을 산출해 낼 가능성도 플로티노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플로티노스에 대한 확장된 해석이기는 하겠지만, 그가 제시하는 빛의 비춤(illuminatio), 일자로부터의 유출(emanatio)이 예술창작의 원리적 개념으로 전용될 가능성을 함축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주해 25번을 보면 "플로티노스는 수와 척도, 비례를 감각적인 것에서만 인정할 뿐 참다운 아름다움에는 그것이 적용될 수 없다고 한다. 참다운 아름다움은 일종의 신비한 직관을 통해서만 또는 신을 닮으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알게 된다." 지금 읽은 문장을 네모를 쳐두고, 플로티누스가 플라톤과 다른 점이라고 적으면 된다. 플라톤은 디오티마의 사다리에 따르면 사람이 노력해서 타고 올라가면 된다고 했다. 그런데 플로티노스는 신비한 직관을 통해서만 또는 신을 닮으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알게 된다고 했다. 거기 신비한 직관 그리고 "또는"이라고 했다. 제가 쓴 책에서 '또는"이라는 말이 나오면 앞에 있는 말과 뒤에 있는 말이 호환 가능하다는 뜻이다. "신비한 직관"이라는 것과 "신을 닮으려는 노력"이라는 것이 같은 것이다. 플라톤에서는 신비한 직관과 같은 것은 없었다. 플라톤이 신비한 것 같아도 사실 플라톤은 신을 전제하지 않는다. 어쨌든 인간이 무릎팍이 다 까지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 올라가서 아름다운 곳으로 올라가려고 한다. 즉 meletē를 한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25번
플로티노스는 수와 척도, 비례를 감각적인 것에서만 인정할 뿐 참다운 아름다움에는 그것이 적용될 수 없다고 한다. 참다운 아름다움은 일종의 신비한 직관을 통해서만 또는 신을 닮으려는 노력을 통해서만 알게 된다. 


플로티노스는 meletē 얘기가 없다. 즉 이 사람들은 신비한 직관이라는 말로써 게으름을 감추거나 아니면 정말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어떤 영역에 대해서 신비한 직관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다. 이게 플로티노스하고 플라톤이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온전한 의미에서 인문주의적 또는 인간주의적 고전humanistic Klassik은 아니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 있다. 그리고 르네상스 인문주의라는 말을 쓰는데 저는 르네상스에다가 인문주의라는 말을 잘 안 쓴다. 왜냐하면 르네상스 당시의 사람들은 신비한 직관을 믿은 아주 충실한 christian들이었다. 플라톤과 다르다. 르네상스 회화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것은 1번 키워드는 Klassik인데 두 번째로는 그들이 christian이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다음 시간에 maniera grande, cicerone, 그다음에 매너리즘을 이해할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Klassik의 완성자이면서 동시에 매너리즘의 시작이다. 매너리즘은 너무 힘들어서 Klassik을 유지할 수 없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일상적으로는 매너리즘이라는 상투적인이라는 뜻인데, 상투적인이라는 뜻은 Klassik 흉내를 내고는 있는데 Klassik의 본질적 정신은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런데 미켈란젤로가 그것을 보여준다. 그 사람이 애초에 기독교 신자가 아니면 매너리즘에 빠질 이유가 없다. 신 앞에서 절망할 이유가 없다.  사람이니까 뭐 못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내가 신 앞에서 이렇게 밖에 못하다니 하는 신 앞에서의 절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너리즘이다. 플라톤은 christian이 아니고 플로티노스는 christian인데, 그렇다고 그 사람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는 뜻이 아니다. 이교도적인pagan 것과 기독교적인christian 것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기독교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읽은 것처럼 신비한 직관이라든가 신을 닮으려는 노력이라든가 이런 것들, 또 인간은 도대체 초월적인 신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는 절망을 말한다. 절망이라고 하는 건 인간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어떤 신적인 것을 전제할 때 절망이라고 하는 말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전제하지 않으면 절망은 없다. 절망은 이데아를 가진 인간이 하는 것이다. 그게 없으면 절망을 안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 도달해야 될 당위적인 이상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자기가 계속 하고 있는 일이 그게 전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절망을 하질 않는다. 

Klassik이라고 하는 개념은 철저하게 규범인데, 이 규범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도 당위적 규범이다. 그러면 이것에 이르지 못하는 인간은 절망을 하게 된다. 사실 플라톤에서도 그런 절망이 보이기는 하지만 플라톤은 절망하지 말고 계속해서 디오티마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봅시다 라고 말한다. 그런데 플로티노스는 신비한 직관을 얘기한다. 이 개념이 르네상스 시대의 멜랑콜리melancholy이다. 르네상스의 작품을 보면 Klassik 한 규범을 만들어서 하고 있는데 계속 보고 있으면 어딘가 우울하고 어두운 구석이 있다. 그게 절망에서 나오는 건데 인간은 내가 아무리 노력을 해도 ideal한 것에 도달하지 못할 거라고 하는 절망이 옆구리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을 조금 좀 심하게 표현을 해버리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된다. 


52페이지를 보자.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피치노가 사랑하는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인간을 사랑하면 곧바로 절망을 대가로 얻게 되지만 신을 사랑하는 것은, 죽도록 충족에 이를 수 없다는 본연의 양상 때문에 죽을 때까지 사랑을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그리하여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영원히 사랑을 구가하는 극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굉장히 역설법으로 쓰였다. 인간을 사랑하면 곧바로 절망을 대가로 얻게 된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불멸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눈앞에 보이는 이 소멸하는 인간의 모습 뒤에 불멸의 아름다움이 있을 거라고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책을 한 권 읽으면 진리에 이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읽지만 그렇게 되는가. 죽을 때까지 읽어도 안 된다. 그러니까 인간을 사랑하면 곧바로 절망을 대가로 얻게 된다. 그래서 사랑이라고 하는 건 해도 괴롭고 안 해도 괴롭다. 그런데 우리는 신에 이를 수 없다. 신비한 직관을 얻기 전에는 신에 이를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죽을 때까지 신은 사랑할 수 있다.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굉장히 역설적인 그런 것이다.  그게 바로 피치노가 보는 사랑이다. 굉장히 자학적이다. 출발점부터 절망을 내포하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플라톤에서도 저런 Klassik의 개념이 절망을 포함하고 있지만 플라톤이 말하는 절대자라고 하는 건 인격신이 아니다. 우리에게 절망이라고 하는 어떤 sentiment를 주지 않는다. 그러니까 인간과 인간 사이에 사랑이라고 하는 건 다 덧없다. 그냥 출발부터 절망이다. 그러니까 아끼지 말고 사랑한다고 말을 해야 한다.  

《에로스를 찾아서》 끝없는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게 해주시길 빕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피치노가 사랑하는 대상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다.  인간을 사랑하면 곧바로 절망을 대가로 얻게 되지만 신을 사랑하는 것은, 죽도록 충족에 이를 수 없다는 본연의 양상 때문에 죽을 때까지 사랑을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그리하여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영원히 사랑을 구가하는 극상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52페이지를 보면 "피치노가 보는 세계는 신의 작품이다. 이 세계의 구조는 일찍이 플로티노스가 알려주었던 것처럼 신이 천사를 통해서 또는 영혼을 통해서 빛을 비춤으로써 구축되었다. 인간은 이렇게 빛을 내려보낸 신, 아름다움을 향한 격정, 사랑을 가슴에 뿜는다. 신에 대한 이 사랑이 이제 15세기 르네상스(콰트로젠토)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다." 이제 르네상스라고 말할 때 '인간의 재발견' 이렇게 말하면 다 거짓말이다. 르네상스 회화에서 인간을 발견하는 건 바보들이 하는 얘기이다. 신에 대한 사랑이 콰트로첸토의 원천이다.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이 아름다운 것이다.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인간이 비례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끝없는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게 해주시길 빕니다.
피치노가 보는 세계는 신의 작품이다. 이 세계의 구조는 일찍이 플로티노스가 알려주었던 것처럼 신이 천사를 통해서 또는 영혼을 통해서 빛을 비춤으로써 구축되었다. 인간은 이렇게 빛을 내려보낸 신, 아름다움을 향한 격정, 사랑을 가슴에 뿜는다.  신에 대한 이 사랑이 이제 15세기 르네상스(콰트로젠토)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다. 신이 만든 이 세계는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어떻게 식별해내는가. 피치노는 알베르티처럼 비례에 의한 조화가 아름다움을 빚어낸다고 찬양한다. 그는 고대 현인賢人들을 두서없이 불러낸다.  

 

"신이 만든 이 세계는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어떻게 식별해내는가.  피치노는 알베르티처럼 비례에 의한 조화가 아름다움을 빚어낸다고 찬양한다. 그는 고대 현인賢人들을 두서없이 불러낸다." "고대의 사람들을 나란히 세워놓는다. '재생再生이라 하면서, 아무리 고대인들이 호명되어도 피치노의 목표는 굳건하다 ━신과 같은 본성을 갖고자 하는 것, 신과 하나가 되려는 것, 신적 모방. 이러한 모방 안에서 사랑과 지적 관조는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결코 지상에서 성취되지 못한다.  콰트로첸토가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만 작동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상은 가슴속에 가득 차 있으나,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방황하게 하고 쓸쓸함에 빠뜨리고 마침내는 육체의 관능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훗날의 낭만주의자들은, 루터 이후 신에 대한 믿음이 분열되어 황폐해진 세상을 돌이켜보면서 콰트로첸토의 열망과 사랑을 되살려내려 한다. 이는 또 다른 재생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끝없는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게 해주시길 빕니다.
고대의 사람들을 나란히 세워놓는다. '재생再生이라 하면서, 아무리 고대인들이 호명되어도 피치노의 목표는 굳건하다 ━신과 같은 본성을 갖고자 하는 것, 신과 하나가 되려는 것, 신적 모방. 이러한 모방 안에서 사랑과 지적 관조는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결합은 결코 지상에서 성취되지 못한다.  콰트로첸토가 그렇게 짧은 기간 동안에만 작동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상은 가슴속에 가득 차 있으나,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방황하게 하고 쓸쓸함에 빠뜨리고 마침내는 육체의 관능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훗날의 낭만주의자들은, 루터 이후 신에 대한 믿음이 분열되어 황폐해진 세상을 돌이켜보면서 콰트로첸토의 열망과 사랑을 되살려내려 한다. 이는 또 다른 재생이다. 

“훗날의 낭만주의자들은 바로크를 말한다.” 바로크는 뭔가 신을 그리는데 클래식이 없으니까 규준이 없고 그냥 마음만 앞서는 시대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은 가슴속에 가득 차 있으나,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안타까움은 사람을 지치게 하고 방황하게 하고 쓸쓸함에 빠뜨리고 마침내는 육체의 관능으로 흘러드는 것이다." 이상은 가슴속에 차 있는데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이 바로 매너리즘인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 옆에 이 챕터의 제목이 "끝없는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게 해주시길 빕니다"이다. 이게 말하자면 콰트로첸토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소원이다.


그다음에 56페이지를 보자. "위기" 챕터이다.  거기 보면 "아르놀트 하우저는 과도기나 다름없는", "고전주의 클래식(Klassik)는 하나의 전범典範이므로" 이렇게 돼 있다. 매너리즘 얘기하려고 하는 부분이다.  이걸 잘 연결해놔야 한다. 클래식에서 그 열망을 충족시키는 자들이 절망해가지고 바로 매너리즘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꼭 잘 기억해 놔야 한다. 그리고 플라톤의 플라톤의 클래식과 이른바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시대의 클래식이 다른 건 신적인 것에 대한 사랑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사랑과 이 사랑은 다른 것이다. 저쪽은 충족 가능한 사랑이고 이쪽은 충족될 수 없는 사랑이다. 기본적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가지고 있는 불완전성과 충족되지 않는 것 그리고 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허무성 이런 것들이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무책임한 얘기일 수 있는데 서구적 정신의 기본 바탕이다. 고대 그리스 정신이 아니라 기독교 이후 시대의 서구 정신의 기본 바탕은 인간은 완전함에 이를 수 없다 라는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막 죽인다. 간단하게 말하면 기기독교 이후의 서구인들에게 인간은 그렇게까지 존엄성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기독교도들이 그렇게 이교도들이 학살하고 그러는 것이다. 신 중심의 종교이다. 인간은 불완전하죠다. 신에 도달하지 못한다. 불완전한 건 쓸모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 시대의 인간과 기독교 시대 이후의 인간은 인간관 자체가 다르다. 굉장히 위험한 것이다. 동아시아 세계는 인간이 완전함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인간 존중이다 아니다 이런 그런 얘기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관점이 어떻게 돼 있는가, 인간의 불완전함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 신을 전제하는가. 동아시아 세계는 그러지 않는다.  

처음에 미학 이론을 보고 오늘은 클래식을 설명했다. 이제 피치노까지 왔다. 그리고 여기서 형이상학 그다음에 인간론, pagan과 christian의 차이점들에 대해서 뚜렷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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