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3-2

 

2023.09.20 🎤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3-2

커리큘럼

09.06 예술의 목적과 예술론의 학적 위치
09.13 플라톤의 미학
09.20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
10.04 mimēsis
10.11 신플라톤주의와 고전주의 예술론
10.18 maniera grande, cicerone
10.25 Baroque, Rococo
11.01 헤겔과 역사적 예술론
11.08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1):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조르조 바사리
11.15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2): 에르빈 파노프스키, 막스 드보르작

 

교재

강유원(지음), 《에로스를 찾아서 -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한 성찰


제3강.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

일시: 2023. 9. 20.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345

 

 

여러분들은 계속 그 에로스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서야 한다. 제가 그 정도 훌륭한 인도자는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그런 사람이 되어서,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 《향연》을 읽고 즐길 수 있는 단계에 오른 사람들이라면 그 단계에서 배울 수 있는 고급 기술들이 꽤 있을 것인데, 그런 것을 가르쳐주고 싶은 게 제가 바라는 것이다. 독일 벤츠 이런 데 가면 테스트 드라이브 코스가 있다. 거기서 테스트 드라이브하는 사람들을 교육하는데 똑같은 코스를 계속 돈다. 왜 계속 도는가. 돌다 보면 기술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반복하는 것 같아도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과 인간이 쳇바퀴를 도는 건 다르다. 경험이 누적되어서 장난 아니게 쌓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그런 사람들은 운전 고급 기술이 있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기초적인 과정을 이렇게 익혀서 어느 정도의 일종의 면역 같은 것이 형성이 되어서 이걸 익힐 수 있는 단계로 올라가면 고급 텍스트를 읽고 즐기는 고급 기술을 가르쳐줄 수 있게 된다. 그걸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을 들여서 하는 것이다. 

"인도자가 곁에서 지켜보지만 그 단계를 겪는 것은 에로스를 가진 사람이고,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대하여 어떠한 해석이나 비평을 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서 즉 옆에서 지금 여러분들이 지금 플라톤의 《향연》이라고 하는 텍스트 내용을 배우고 있는데, 《향연》이 재미있네 아니네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제가 《향연》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하는 걸 그냥 배우고만 있을 뿐이다.  《향연》은 어려운 것 같다 라는 그런 즉각적인 직접적인 경험만 있을 뿐이다. 그런 경험만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지금 대자적 해석, 객관적인 해석과 비평은 제가 여러분들에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들도 어느 정도 그런 해석이나 비평을 하려면 경험을 내재화해서 그것을 자기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계가 되어야 한다. 즉 인도자가 되어야 된다. 늘 스스로 이원화해서 다른 사람이 하는 걸 옆에서 지켜보고, 다른 사람이 사다리 타고 올라가는 걸 도와주고, 여기까지 가면 어떻게 된다, 저기까지 가면 어떻게 된다 라는 것을 계속 일러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그 과정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지금 플라톤의 《향연》이라고 하는 텍스트는 진리를 어떻게 하면 알아낼 수 있는가 그리고 진리는 어떤 방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수될 수 있는가 그런 것들에 대한 종합적인 설명을 담고 있는 것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3번
인도자가 곁에서 지켜보지만 그 단계를 겪는 것은 에로스를 가진 사람이고, 자신이 만들어낸 것에 대하여 어떠한 해석이나 비평을 하지 않는다. 달리 말해서 그가 산출하는 것은 즉자적 경험이지 대자석 해석과 비평이 아니다.


92페이지를 보자.  "《향연》에서 제시된 '디오티마의 사다리'는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라기보다는",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는 여기 써놓은 것처럼 초월적인 것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인 것에서 초월적인 것으로 올라가는 과정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미적인 것을 창조하는 '예술적 창작활동'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예술적 창작 활동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세 번째 시간이다. 세 번째 시간을 지나서 플라톤의 《향연》까지 배웠다고 해보자. 그리고 가령 '미술사 미끈미끈'이라는 책을 읽는다고 해보자.  이제 플라톤의 《향연》이라고 하는 텍스트가 어떻게 돼 있고, 진짜 초월적인 아름다움이 어떻고, 그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향해가는 과정은 어떻고, metabasis가 어떻다는 것을 이번에 배웠다.  그런 사람이 '미술사 미끈미끈'을 보면 '아 이 책은 이래서 엉망이구나'가 보인다는 말이다. 즉 텍스트를 해석하고 비평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텍스트를 해석하고 비평할 수 있게 된다 라고 하는 것은, 예술적 창작 활동이라고 하는 것에서 창작 활동이라는 것은 꼭 뭔가 새로운 그림을 그리고 하는 만이 아니라 창작이라고 하는 건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에 대한 해석을 만들어내고 이 책에 대한 비평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플라톤의 《향연》에 나오는 디오티마의 사다리 또는 에로스의 사다리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활동 일반에 관한 이야기인 것이라고 생각을 할 수 있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3번
《향연》에서 제시된 '디오티마의 사다리'는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형이상학적 논의라기보다는 미적인 것을 창조하는 '예술적 창작활동'에 대한 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다음에 "미를 산출하는 것은 재현이 불가능한 일회적 활동이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읽어보면 된다.  맨 밑에서 둘째 줄 "예술가는, 물질적인 것들을 경험하는 단계를 거쳐 정신적인 것에 이르는 유수한 방식으로, 물질적 도구를 이용하여 작업을 하지만 감상자에게는 정신적 쾌·불쾌를 느끼게 함으로써 물질적인 것을 정신적으로 것으로 변형시키는 기능(ergon)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으며, 이 기능을 '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잘 알아놓아야 된다. 예술 감상과 창작의 두 개가 하나의 측면에 있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 종이에 보면 디자이너가 그림을 그렸다. 이건 종이에 불과하고 잉크에 불과한데 이것으로 우리는 뭔가 정동이 일어난다. 정서의 움직임이 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것이다. 물질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쾌라고 하는 그것이 일어난다. matter가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쾌라고 하는 것이 일어난다. 즉 hēdonē가 일어난다. 그런데 단지 쾌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이거 너무 좋아'라고 하는 뭔가 있다. 단순한 hēdonē가 아니라 hēdonē가 변해서 Genuss가 된다. matter라고 하는 건 물질인데 물질物質이라고 하는 것은 thing이다. 물物이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들어와서 쾌라고 하는 것으로 바뀌어서 물物이 정신적인 것으로, matter가 spiritual한 것으로 바뀌어서 ‘좋다’라는 느낌이 든다. 이렇게 물物이 정신적인 것으로 바뀐 것은 위상 전환phase shift이 일어나는 것이다.  냄비에다 물을 넣으면 어느 순간 갑자기 탁 끓는 것처럼 비등점에 올라간 것이다. 이것은 좋게 말하면 초월적 이행이자 쾌를 산출하는 metabasis이다. 그런데 쾌를 산출하는 metabasis가 있는데,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묘해서 메타인지라는 것을 한다. 메타라는 것이 있고 바시스가 있으면 넘어간다는 것인데 이를 메타인지하는 것이다. 내가 hēdonē를 느끼면서 '놀랍지 아니한가, 원래는 matter에 불과한 것인데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와서 쾌를 산출해내고 hēdonē를 산출해내고 있고 그런 위상 전이가 일어나고 내가 그것에 대해서 뭔가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 놀랍지 아니한가'라고 한 번 더 생각을 하게 된다. 즉 쾌락을 산출하고 있는 자기 정신에 대해서 자기가 한 단계 올라가서 보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메타인지를 해야 된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3번
미를 산출하는 것은 재현이 불가능한 일회적 활동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3번
예술가는, 물질적인 것들을 경험하는 단계를 거쳐 정신적인 것에 이르는 유수한 방식으로, 물질적 도구를 이용하여 작업을 하지만 감상자에게는 정신적 쾌·불쾌를 느끼게 함으로써 물질적인 것을 정신적으로 것으로 변형시키는 기능(ergon)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으며, 이 기능을 '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라면을 먹을 때 '라면을 괜히 먹었다'라는 생각도 냄비에 물을 담아서 렌지 위에 올린 순간부터 먹고 땀을 흘릴 때까지를 돌이켜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괜히 먹었다'라는 것은 이 쾌락을 억누를 만큼 라면이 가져다줄 폐해를 떠올린 것이다. 즉 2차 생각을 하는 것이다. 쾌락에 파묻혀 있고 쾌락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더한 걸 찾는다. 그런데 라면을 먹으며 '진짜 맛있네'하는 지점에서 우리 인간의 사유는 이렇게 처음으로 돌아간다. 지금 냄비에다 물을 넣어서 렌지 위에 올렸다. 그리고 이 과정을 거쳐서 초월적 이행으로 갔다. 그러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때 우리의 사유는 냄비에 물을 넣고 렌지 위에 올리는 순간으로 되돌아간다. retrospective한 것이다. 그러니까 prospective thinking과 retrospective thinking이 동시에 일어난다. 후회의 전형적인 말이 '라면 괜히 먹었네'인데 '라면 괜히 먹었네'라는 건 냄비에 물을 올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니까 후회를 할 때도 '냄비에 물을 넣고 렌지 위에 올리지 말았어야 해'라고 말하는 게 배운 사람인 것이고 못 배운 사람은 '라면 괜히 먹었네'라고 얘기하는 것이 맞다. 그러면 결국에는 처음에 시작해서 올라갔다가 초월적 이행에서 hēdonē가 산출되고 다시 처음으로 돌이켜봤는데, 이 지점에 왔을때 '위대한 한 끼였도다. 렌지여, 위대한 렌지여, 위대한 물이여, 냄비는 왜 이렇게 아름다운가'라고 떠드는 것이 바로 Genuss이다. 이 과정 전체를 prospective 하고 retrospective 를 해서 전체를 의미해서 말하는 것이 Genuss이다.   

향유享有, 누려서 가진다. 이게 바로 Genuss이다.  누려서 가진다는 것, 내가 뭔가를 가진다 라고 할 때 '이것은 나의 것this mine'이라고 말할 때는 온전히 나의 것이어서 이 물건을 볼 때 내가 이것에서 소외감을 전혀 느끼지 않을 때, 남이 조금도 그것에 들어올 틈이 없는 것, 그게 나의 것이다. 온전한 나의 것만이 나는 항유할 수 있다. 향유를 할 수 있는 조건은 온전한 내 것이어야 한다.  76페이지 소동파의 적벽부 번역본을 펴보자. 소자가 말한다.  "손님도 저 물과 달을 아는가. 물은 이처럼 흐르지만 가버린 적이 없고, 차고 비는 것이 저와 같지만 끝내 없어지지도 늘어나지도 않는다. ··· 천지 사이에 물건은 각기 주인이 있으니 내가 가진 바가 아니라면 한 턱 끝도 취하지 말아야 하거니와"라고 했다.  소동파에 따르면 천지 간의 물건은 각기 주인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우리가 자연물을 보고 온전히 향유할 수가 없다. 내가 만든 게 아니다. "오로지 강 위에 부는 맑은 바람과 산 사이에 밝은 달은 귀로 들으면 소리가 되고 눈을 대면 색을 이루어", 여기서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내 것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건 고정되어 있지 않은 거니까 그렇다. 그런데 그것도 바람 자체가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걸 귀로 들어야 내 것이 되는 것이다. 내 안으로 들여와야 된다. 귀로 들어서 어떻다 라고 내가 표상을 만들어야 된다. 밝은 달을 보고 "눈을 대면 색을 이루어 취하여도 금하지 않고 써도 다하지 않으니 이는 조물주에 다하지 않는 보고이며 나와 그대가 함께 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동파가 여기서 말하는 건 유형의 물건이라고 하는 것은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물과 마찬가지로 그렇다.  

아까 우리가 라면을 끓였다. 라면을 끓여서 이렇게 저렇게 해서 hēdonē를 느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진라면 공장이 망해서 그걸 더 이상 누릴 수 없다. 그러면 이제 진라면은 내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렇다 해서 내가 진라면을 끓여서 먹고 누렸던 hēdonē는 내 것이다. 이걸 가지고 있어야 부자인 것이다. 에르메스 가방을 가지고 있어야 부자가 아니라 어떤 가방을 가지고서 그 가방으로서 내가 정신적인 것을 산출해서 그것을 갖다가 그것으로부터 쾌락이 나와야 되고 프로세스 전체를 알고 있어야 된다. 이렇게 전체를 알아야 향유Genuss가 된다.  쾌락을 누리는 게 Genuss가 아니라 여기서 참으로 내 것인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해내는 것까지 가야 Genuss가 된다. 가령 마카오에 가면 성당이 많이 있는데 저는 거기 가면 사진은 찍지 않고 뚫어진 게 성당을 보고 온다. hēdonē를 가지고 오려고 하는 것이다. 아이폰이 Genuss를 하는가. 물질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에 담으니까 집에 와서 아무리 들여다봐도 일회적인 아우라가 안 서는 것이다. Genuss는 라면을 먹고 난 순간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일어난다. '그때 라면이 이랬어, 다음에 이렇게 끓여봐야지'라고 하면서 이제 라면 끓이기 1번, 라면 끓이기 2번, 라면 끓이기 3번, 후회했을 때 좋았을 때 이런 것들을 다 묶어서 100번은 더 먹을 것이다. 수없이 먹은 라면을 머릿속에서 계속 돌이켜 생각해 보고, 돌이켜 생각해 보고, 돌이켜 생각하는 게 두 글자로 연습이다.  참다운 라면을 언젠가 꼭 먹고야 말겠다고 하면 그게 바로 라면의 이데아이고 그 참다운 라면을 향해서 계속 디오티마의 사다리를 타고 있는 것이다. 라면을 먹으면서 지난번에 먹었던 라면을 떠올리면서 먹어야 것이 라면 먹는 연습이다. 


오늘 배운 것이 metabasis, 메타인지(metacognition)인데 메타라는 단어가 나왔으니까 하나 더 말하겠다. 지금까지 라면을 먹을 때마다 참다웠다라는 게 1번 생각. 그런데 라면을 먹을 때마다 지난번 라면과 지금 라면을 동시에 생각한다. 지금이 204번째 라면이구나. 이것은 라면 먹기 연습이야. 진정으로 참다운 라면이 어딘가에 있을 거야. 라면의 이데아를 찾아서 계속 생각한다. metanoia라고 할 때 noia가 생각이니까 metanoia는 두 번째 생각이다. 이것을 개심改心, 즉 생각을 고쳐먹는다 라는 뜻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내가 그동안 개판으로 살았구나, 인간 말종이었구나 라고 해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야지 라고 회개를 하고 마음을 고쳐먹는 것을 metanoia라고 부른다. 회개라고 하기도 하고 개심이라고 한다. 마르코의 복음서 1장 15절에 보면 예수가 하는 말이 있다. 광야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예수가 이제 공공 영역에서 public activity하면서 하는 첫마디가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이다. 이때 회개라는 단어가 이것이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다 버리고 내 말을 들으라는 말이다. 원래 metanoia는 그렇게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니까 생각을 바꿔서 이제 Genuss를 향유하는 방법이다. 향유하는 방법을 계속 연습을 해야 한다.  prospective한 생각과 retrospective 한 생각, 이 두 개를 계속해서 왔다 갔다 하니까 이거는 거대한 사이클이다. 우리의 사유라고 하는 것은 시작에서 끝으로 갔는데, 끝에 갔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시 이것이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거대한 사이클이다. 라면 먹을 때는 요만한 사이클이 도는데, 라면을 포함한 음식물 일반의 사이클이 있고, 우리 인생의 사이클도 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이라는 건 계속 metanoia의 연속이다.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고 다시 생각해보고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을 인간 사회의 본성인 것이다.  

그래서 "물질적인 것들을 경험하는 단계를 거쳐 정신적인 것에 이르는 유수한 방식으로, 물질적 도구를 이용하여 작업을 하지만 감상자에게는 정신적 쾌·불쾌를 느끼게 함으로써 물질적인 것을 정신적으로 것으로 변형시키는 기능(ergon)을 '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유희이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읽다 보면 유리알 유희를 사람들은 머릿속에서만 뱅글뱅글 생각한다. 그러니까 그동안은 라면을 먹을 때마다 항상 후회하는 이유는 그것이 먹을 때마다 참다운 라면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라면을 먹지 말고 가만히 앉아서 그동안 먹었던 라면들에 대해서 머릿속에서 유희를 해보라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에 라면을 좀 더 잘 먹을 수 있고 좀 더 참다운 라면을 향해 갈 수가 있다. 이걸 계속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정신 속에서 거대한 라면 끓이기가 계속 일어나면 그게 바로 정신이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정신이 가지고 있는 위력이 그런 것이다. 흔히 말하는 해결의 정신철학이라고 하는 게 이걸 다루고 있는 것이다.  


그다음에 주해 15번을 보면 "디오티마의 사다리가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그것에 이르고자 하는 에로스의 도정에 관한 것이라면, 《티마이오스》에서는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은 균형잡힌 것이라는 주장이 제시된다." 다시 말해서 서양에서의 미술양식 이론의 이론적인 1차 근거는 플라톤의 대화편 《티마이오스》이다. 비례와 척도. 레오나드 다빈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비례와 척도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플라톤은 《향연》에서는 예술가의 창조적 힘과 기능에 대해서, 《티마이오스》에서는 양식의 규준을 제시함으로써 예술의 주요 영역에 관한 전범典範을 내놓은 셈이다." 이 두 개는 꼭 기억해야 된다. 가령 비례와 척도가 아름다움의 기준이 아닌가, 흔히 '균형 잡힌 얼굴'이라고 그러는데, 이게 다 《티마이오스》에서 기원하는 비례 이론이다. 그다음에 주해 17번부터 21번까지는 그냥 읽어보면 된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5번
《향연》에 제시된 '디오티마의 사다리'가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그것에 이르고자 하는 에로스의 도정에 관한 것이라면, 《티마이오스》에서는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은 균형잡힌 것이라는 주장이 제시된다. 이는 비례와 척도라고 하는 객관적 방식이며, 이것이 '양식'樣式의 단초가 된다. 따라서 플라톤은 《향연》에서는 예술가의 창조적 힘과 기능에 대해서, 《티마이오스》에서는 양식의 규준을 제시함으로써 예술의 주요 영역에 관한 전범典範을 내놓은 셈이다. 


본문으로 읽겠다. 본문 22페이지부터 29페이지까지 "어떤 놀라운 것" 부분은 디오티마의 사다리, 에로스의 사다리에 관한 요약문이다. 오늘 설명을 들었으니까 이 부분은 읽는 데 어려움이 없을 거라고 본다. 그다음에 "모든 좋은 것" 챕터 《티마이오스》 얘기가 있다.  그리고 그다음에 "이런 건 조금도 겪어본 적이 없네" 챕터의 알키비아데스 얘기가 있다. 그리고 플라톤의 얘기가 있고 "때는 밤이었다"까지가 오늘 얘기이다. 37페이지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 비로소 생겨나서" 챕터가 굉장히 공들여 쓴 챕터이다. 제가 쓴 책을 읽을 때 약간의 꿀팁을 알려드리면 공들여서 말장난을 한 것 같은 게 잘 쓰여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들었다 해도 알키비아데스는 참다운 사랑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나의 사람들 앞에서 긴 연설을 하며, 정치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국가》와 같은 것을 보면 정치적인 것이 최고의 활동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제가 보기에는 플라톤은 모르겠는데, 소크라테스는 정치적 활동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활동이라고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간단히 말하면 짱 박혀서 알키비아데스 같은 애들을 비웃고 갈구고 혼자서 고요하게 이런 인생의 모든 것, 우주의 모든 것을 Genuss하는 것을 최고의 활동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저도 혼자 책 읽으면서 낄낄대고 읽다가 '이거 진짜 재밌거든'하고 이렇게 와서 잘 모르는 사람들한테 일깨워서 하는 것이 제일 재밌는 것 같다. 제가 이렇게 녹음해서 배포를 하는 것은 여러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지난번에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서 녹음을 해서 들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여기서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에게 디오티마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해도, 일부러 플라톤이 그렇게 한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참다운 얘기를 못 듣도록 해놓았다. 정치적 활동을 하는 사람은 소크라테스에게는 궁극적으로 괜찮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 같다. "플라톤은 진리와 사랑이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말이 아닌 행위 속에서만 생겨난다"고 했는데 이 행위라는 건 실천이라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연습meletē이다. "행위 속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사랑이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에로스를 찾아서》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 비로소 생겨나서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들었다 해도 알키비아데스는 참다운 사랑을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나의 사람들 앞에서 긴 연설을 하며, 정치적 활동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진리와 사랑이 말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말이 아닌 행위 속에서만 생겨나는 것이 사랑이요,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라고 한다. 인간은 결핍된 존재이고, 그 결핍을 채우려는 갈망에서 다른 인간을 찾는다.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쫓아다닌 까닭이 그것이었을 것이나, 소크라테스 또한 아름다움을 찾아다녔으니, 알키비아데스를 돌아볼 틈이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갈망에서 다른 인간의 몸을 탐하고,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들이마시고, 그것을 마시고 자신을 발산함으로써 무아無我의 순간을 향해 간다. 이는 갈망에서 시작되었으니 에로틱erotic하고, 전혀 낯선 것이니 엑조틱exotic하며, 절정의 환희를 경험하는 것이니 엑스타틱ecstatic할 것이다. 

 

플라톤은 그래서 "불꽃에서 댕겨진 불빛처럼 혼 안에 비로소 생겨나서"라고 얘기를 한 것 같다. "인간은 결핍된 존재이고, 그 결핍을 채우려는 갈망에서 다른 인간을 찾는다.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쫓아다닌 까닭이 그것이었을 것이나", 소크라테스에게서 알키비아데스는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그걸 얻고 싶어서 찾아다녔겠는데 소크라테스는 알키비아데스처럼 찌질한 놈을 거들떠볼 틈이 없었을 것이다. "인간은 갈망에서 다른 인간의 몸을 탐하고", 디오티마의 사다리는 처음에 일단 아름다운 육체부터 시작을 한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차원으로 올라간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굉장히 물질적인 것에서 시작한다. 그러니까 그것을 erotic하다고 말할 수 있다. erotic은 결핍을 채우려는 갈망이 1차적인 의무이다. 그런데 그 과정은 자기는 처음으로 경험해 보는 어떤 이국적인 것이다. 그런 경험들을 exotic하다고 말한다. exotic은 이국적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는데 전혀 낯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처음 경험해 보는 것, 아주 낯선 것을 통해서 자신의 결핍, 즉 에로틱한 것을 충족시키니까 거기서 ecstasy를 맛보는 것이다.  e로 시작되는, 라임을 맞춰서 그 세 개의 단어를 써놓았다. 없는 영어 실력을 동원하여 그걸 만드느라고 고생을 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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