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1-2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5
- 2023. 9. 11.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을 듣고 정리한다. 2023.09.06~2023.11.15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에서 진행되는 강의이다.
2023.09.06 🎤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1-2
커리큘럼
09.06 예술의 목적과 예술론의 학적 위치
09.13 플라톤의 미학
09.20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
10.04 mimēsis
10.11 신플라톤주의와 고전주의 예술론
10.18 maniera grande, cicerone
10.25 Baroque, Rococo
11.01 헤겔과 역사적 예술론
11.08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1):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조르조 바사리
11.15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2): 에르빈 파노프스키, 막스 드보르작
교재
강유원(지음), 《에로스를 찾아서 -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한 성찰》
제1강. 예술의 목적과 예술론의 학적 위치
일시: 2023. 9. 6.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345
플라톤의 초월적 미학에 관한 설명을 했는데 플라톤의 초월적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도저히 가닿을 수 없는 것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아주 수월하게 쉽게 말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한 얘기라는 걸 꼭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래야만 플라톤을 놓치지 않고 건너뛰지 않고 가게 된다. 플라톤을 건너뛰면 형이상학은 물론이고 정치철학도 그렇고 미학에서도 뭔가 학문적인 것이 있을 수가 없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이쪽 분야에서는 플라톤을 건너뛸 수가 없다.
이제 아리스토텔레스를 보자. 초월적 미에 대한 논의는 부족이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 부족이라기 보다는 없다고 보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어떤 점에서 중요한지 지금부터 설명을 하면 미는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아름다움은 저기 있고 나는 그것을 알았다는 것이 플라톤의 미학이다. 아름다움이 저기 있다는 것은 객관적이다. 그러니까 내가 저기 있는 걸 알았으니까 아름다움이 있다고 얘기하는 게 플라톤의 미학이다. 초월적이라는 것이 저 하늘 위에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지만 어쨌든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능력을 기르면 된다. 플라톤의 초월적 미학은 감각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조금은 이상적인 것을 알았다는 뜻에 가까웠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아름다움이라는 게 무엇인지 물어보니까 그것은 즐거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라고 말한다.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파인 다이닝을 하는 사람들은 그게 맛있다고 해서 맛있는 음식은 아니다 라는 말을 한다. 즉 맛은 있겠지만 고급 음식은 아니다. 그러면 백종원씨는 맛있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 라고 얘기할 것이다. 맛이라고 하는 것은 먹는 사람마다 다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기에 훨씬 가깝다. 즉 나한테 즐거움은 됐다는 것이다. 강의자료를 보면 비극의 고유한 쾌락이란 애련과 공포에 기인한 쾌락. 즐거움이라고 말하면 왠지 별거 아닌 것 같으니까 쾌락이라고 번역을 하는데 희랍어로 hēdonē이다. 쾌락을 주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쾌락은 객관적으로 저기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느껴야 한다. 즉 이것은 주관적 아름다움이다. 그러면 나는 쾌락을 느낀다. 나는 즐겁다. 뭔가 아름다운 것이 나에게 왔다. 아름다운 것이 나에게 왔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아름다움을 아는 것은 저기에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쾌락을 느끼니까 아름다움을 아는 것이다. 순서가 바뀌었다. 네가 쾌락을 느끼든 말든 아름다움은 있는 거야 라고 하는 것과 내가 쾌락을 느껴야 그것이 아름다움에서 발생해서 나에게 왔다는 걸 안다는 것이다.
연습해 보자. 나는 쾌락을 느낀다. 저기서 나에게 아름다움이 왔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헤도니즘hedonism은 굉장히 중요하다. "요즘 드라마가 볼 거 없어"라는 말은 나에게 쾌락을 주는 드라마가 없다는 뜻이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플라톤적인 '미학'의 입장에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예술론' 입장에서 얘기하는 것이다. 미학이라고 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론의 출발점이다. 아름다움 즉 미학이 아니라 드라마를 하는 사람이라든가 영화를 하는 사람이라든가 이런 사람들은 관객theatēs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나 혼자 즐기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드라마나 영화를 하는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라고 하는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아름다움과 쾌락에 대해서 연구를 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예술론이다.
예술론과 미학의 차이가 이것이다. 예술론은 항상 그 중심에 쾌락이 있다. 관객에게 기쁨을 줘야 한다. 미를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을 하는 사람은 관객에게 hēdonē를 모토로 삼아야 한다. 이게 예술론의 출발점이다. 그러면 여기서는 무엇이 중요한가. 도대체 내가 이것을 어떻게 만들어야 사람들이 쾌락을 느낄까 또 어떻게 해야 돈이 벌릴까를 궁리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명백하게 주체의 심리적 경험이다. 예술론과 미학은 아주 다르다. 미학은 앎에 집중한다면 예술은 느낌에 집중을 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일을 한 것이다. 어떻게 해야 사람이 가장 잘 쾌락을 느낄 것인가 즉 작품을 어떻게 구조화할 것인가에 대해서 연구를 한 것이다. 그게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라고 하는 작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이 어떤 경우에 쾌락을 느끼는가를 많이 연구하고 그 쾌락을 극대화할 수 있는 작품 구조와 장치와 이런 것들을 연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마디로 말해서 그것은 질서와 크기라고 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얘기했다. 크기라고 하는 것이 반드시 물리적인 크기를 가리키는 건 아니고 질서라고 하는 것도 반듯반듯한 질서는 아니다. 질서라는 것 안에는 심리적 지배도 들어간다. 영화를 보는데 헤어나오질 못하겠다는 것은 그 영화가 굉장히 잘 질서화 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이 헤어나오지 못하는 질서 속으로 집어넣은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은 굉장히 중요한 작품이다. 대개 시학이라는 말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사실은 예술 창작론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하다. 또는 창작 예술론이라고 볼 수도 있고 창작된 예술 작품에 대한 논의라고 해도 되고 예술을 창작하는 것에 관한 논의라고 해도 된다. 그러니까 예술학의 출발점이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가장 널리 알려진 예술 작품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와 소포클레스와 같은 사람들의 비극 드라마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잘 만들어진 비극 드라마가 무엇인지 물었을 때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라고 말했다.
그다음에 인식론적 미학, 칸트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보자. 미의 초월적 속성은 알 수 없다. 플라톤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은 아름답다라고 말하고 할 때 칸트는 아름다움은 각자 알아서라는 얘기이다. 미는 주관적 판단에 달려 있다. 사람들이 아름답다 아름답지 않다 라는 말들을 하는데 도대체가 어떤 정신이 머리에 있어서 아름답다 라는 말을 쓰는지를 따져보기 시작한 것이다. 즉 무엇 무엇은 아름답다 라는 판단이 있을 때 그 판단은 어떤 경우에 나오는가. 그러면 그것은 아름다움에 대한 연구와는 무관하게 판단에 대한 연구이다. 미적 판단이 가능해지는 선험적 조건을 따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결은 논리학 책에서 칸트는 물속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수영을 잘할 수 있는 것만 연구하는 이상한 사람이라는 얘기를 한 바 있다. 미학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하고 이제 다음 시간에 좀 자세하게 얘기를 하겠다.
예술학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hēdonē, 즉 쾌락에 관한 논의이다. 그런데 쾌락이라고 하는 건 우리가 음식을 먹고도 쾌락을 느낄 수 있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쾌락을 느낄 수도 있고 뭔가를 경험해보면서 쾌락을 느낄 수도 있다. 쾌락을 주는 요소는 굉장히 다양하다. 그러면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보자. 쾌락은 나의 것, 주관이 느끼는 것이다. 쾌락을 주는 것은 대상object가 쾌락을 유발한다. 예술학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잘 생각해야 한다. 자연自然은 스스로 있는 것이다. 누가 시킨 게 아니다. 자연이라고 하는 단어를 보면 무의도적unintentional이라는 단어를 떠올려야 한다. 예술학은 자연학과 반대되는 것이다. 자연은 위대함을 의도하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은 것은 예술의 대상이 아니다. 예술을 하는 인간은 자연을 보고 모른 척해야 한다. 의도하지 않은 것들은 알 수가 없다. 즉 자연은 의도하지 않는다. 없다가 아니라 의도와는 애초에 관계없는 것이다. 비의도적nonintentional이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밀레가 그린 들판 그림을 보고 뭔가를 판단하는 것이지 그 그림을 보고 들판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밀레가 그걸 그린 의도가 있는 것이다. 미학, 예술학, 예술 철학을 배운 사람은 자연에 대해서 감탄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자연 경치에 감탄하지 않아야 한다. 내추럴하다는 것은 있는 그대로, 본성상 그러하다는 것이다. 본질이 그러한 것에 대해서 우리가 뭔가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연의 반대말은 인공물Kunstwerk이다. Kunst는 기술이라는 뜻도 되고 예술이라는 뜻도 되며, 인공이라는 뜻도 된다. 그리고 뒤에 붙은 werk는 영어로 말하자면 work이다. 그러니까 예술학을 한 사람은 artwork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Kunstwerk라고 쓴다. 발터 벤야민의 책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이 있다. 이때 예술 작품이라는 단어가 Kunstwerk이다. 기술 작품이라고 말하고 예술 작품이라고 말하고 인공물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냥 Kunstwerk라고 말하는 게 쉬울 것이다. Kunstwerk라고 말하면 이것을 구현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의 기술 그다음에 창작자의 예술 의욕, 그리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니까 자연물에 대립되는 인공물 Kunstwerk이라고 하는 단어 안에 이것이 다 들어간다.
인공물의 이해를 위한 예술작품의 기원, 목적, 창작, 감상 등에 관한 탐구 그러니까 Kunstwerk를 둘러싼 모든 것을 탐구하는 것이겠다. Kunstwerk를 둘러싼 모든 것이 예술학이다. 예술학이라고 하는 것이 제일 범위가 넓다. 그런데 강의자료의 "예술 작품의 이해를 위한"이라고 하는 부분에서 이해라는 말에 볼드체가 되어있다. 창작자의 예술 의욕이라든가 또는 창작자의 의도만 있는 게 아니라 감상자도 여기에 이제 끼어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예술학이라고 하는 학문을 제대로 하는 것이 굉장히 어렵다. 따지고 보면 미학이 제일 쉽고, 어렵기로는 예술학이 가장 어렵다. 우선 이해를 위해서 필요한 몇 가지 가장 기본적인 것만 얘기하고 그 밑에 있는 얘기들은 다음에 심화 학습으로 배울 것이다. 《에로스를 찾아서》에 다 나온다.
Kunstwerk의 이해가 중요한데 이해라고 하는 말은 해석학이라고 하는 학문 영역에서 따로 다룬다. 철학에 보면 철학적 해석학이라고 하는 학문 영역이 있다. 철학적 해석학은 이해를 탐구하는 학문 영역이다. 철학적 해석학의 창시자는 슐라이어 마허라고 하는 신학자인데 그 사람 이후로 발전되어온 학문이다. 예술 작품의 이해, 인공물의 이해를 위한 몇 가지 요소들이 있는데 우선 창작자의 지향 또는 의도intentio를 알아야 한다. 인텐티오intentio라고 읽는다. 창작자의 의도를 알아야 되는데 의도를 알기 위해서는 그 창작자가 작품 노트를 남겼다라든가 또는 그 의도를 의도적으로 안 남겼을 수도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어떤 사람을 이해하고 싶다 할 때 그 사람이 쓴 작품을 읽고 작품 속에 일관성 있게 나타나고 있는 뭔가를 찾아보기도 한다. 즉 이해를 위한 여러 가지 탐구 장치들이 있다. 창작자의 intentio를 이해하기 위해 굉장히 다양한 작가 연구가 들어가게 된다. 그래서 작가론이라고 하는 영역이 예술학 안에 들어간다. 그래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일생을 반드시 좀 살펴보고 가야한다 라고 하는 미술사 얘기들이 들어간다. 작가의 생애를 왜 미술사에서 보는가. 창작자의 intentio를 알아내기 위한 것이다.
책도 인공물이다. 책을 잘 읽는 방법은 무엇인가. 예술의욕, 즉 저자는 왜 이렇게 썼을까를 한 번 생각해도 책을 잘 읽을 수가 있다. 굉장히 많이 읽을 수 있고 다각적으로 읽을 수 있다. 작품을 좀 더 잘 향유할 수 있다. 그러니까 창작자의 의도만 생각해도 향유의 깊이와 넓이가 아주 달라진다. 우리는 그런 것을 감정이입이 된다고 말한다. 예술가의 입장 속으로 들어가서 창작자의 의도를 탐색하는 것이 예술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 창작자의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도구들이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실용적 대상과 Kunstwerk를 어떻게 구별하는가. 실용적 대상과 예술 작품의 결정적인 차이는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을 미적으로 경험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 예술 작품이다. 이것은 나중에 예술학을 본격적으로 할 때 다시 얘기하겠다. 예술 작품과 실용 작품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의도intentio다.
패러디와 오마주, 표절은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 영화를 보면서 그 패러디한 원본이 생각이 나면 패러디이다. 그리고 그것이 생각이 날 수밖에 없도록 많은 것을 참조를 해놓는다. 반면 영화를 아주 많이 본 사람만이 작품을 하나 오롯이 떠올리는데 그것이 오마주이다. 오마주 작품이나 패러디 작품을 만든 사람은 원본 작품이 떠올라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이다. 표절은 절대로 안 떠올라줬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예술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창작자가 내 것을 제발 좀 예술로 봐주세요 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어떤 메커니즘이 있는지는 수용미학와 같은 감상자의 예술적 지향 이런 것들이 관계가 된다는 점만 일단 외워두자. 그다음에 인공물이라고 하는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인데 의도는 예술가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의도를 통해서 도구를 통해서 의도를 드러내 보이면 인공물이 나오는데 창작자의 의도에 도구를 더해서 Kunstwerk가 나온다. Kunstwerk를 만들어 내놓은 이유는 요러요러한 것을 여러분들이 느껴주셨으면 합니다 라고 하는 것을 Kunstwerk에다가 담아놓은 것이다. 여기서 요러요러한 것에 해당하는 것이 의미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의도를 도구와 소재로 유형화해서 Kunstwerk에 집어넣어서 요러요러 한 것 알아주세요 라고 했을 때 요러요러한 것에 해당하는 것이 의미이다.
예술학의 감상자는 의미를 이해해야 이것으로부터 Genuss가 나온다. 결국 앎의 영역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의도도 알아야 하고 도구도 알아야한다.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향유가 가능해진다. 예술의 목적은 향유에 있다. 창작을 하는 사람도 상대방이 내가 예술 작품임을 알아줬으면 하는 것을 알아보았을 때 얼마나 뿌듯하겠는가. 이러면서 향유의 공동체가 생겨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미학은 고요한 어떤 이해라면 향유의 공동체는 굉장히 개운해지면서 카타르시스적인 향유가 생기는 것이다.
의미를 이해함으로써 향유가 가능하고 이 향유가 창작자와 감상자에게 동시에 일어날 때 향유의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것이 어떻게 보면 미감적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의미를 이해해야 제대로 향유를 하는가 알아야 한다. 의미는 여러 단계가 있다. 의미라고 하는 것은 우선 자연적 의미가 있는데 자연적 의미라고 하는 것은 사실 의미와 표현 의미가 있다. 특정한 시대에는 어떤 사물을 창작자들이 약속이나 한 듯이 특정한 형태로 표현을 했었다. 그걸 양식Stil이라고 한다. 두 번째는 도상학적 분석을 통해서 알아내는 규약 의미가 있다. 이것은 문화적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알아내야 한다는 얘기다. 문화적 맥락에서 획득하는 의미가 무엇인가를 탐색해보는 게 도상학적 분석이라고 한다. 이건 나중에 다시 할 것이다.
사실 의미와 표현 의미를 알아내는 것은 일상적 커뮤니케이션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예술학에서는 문화적 맥락에서 획득하는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문화적 맥락에서 획득하는 의미를 잘 모르고 무조건 자기네들이 가지고 있는 사실 판단의 기준만 가지고 재단하려고 하면 이때 나타나는 현상이 블랙리스트이다. 현상 의미가 문화적 맥락에서 획득하는 의미라고 했을 때 그것을 도상학적 분석을 통해서 알아내는 것이 예술학적 의미 탐구이다. 나중에 다시 설명할 것이다.
문화적 맥락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데 문화적 맥락을 순 우리말 두 글자로 표현하면 뜬금없다고 할 때의 뜬금이다. 문화적 맥락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간단히 말하면 사회적으로 생활이 안 된 사람이다. 예술학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맥락을 갖고 있어야 현상 의미를 이해하고 예술학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향유를 할 수 있는데 남들 웃을 때 못 웃어버리는 사람이 된다. 그러니까 문화적 맥락이라고 하는 것이 파악되지 않을 경우 의미 파악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술학이 가지고 있는 정치적인 측면이다. 억압된 사회, 한 가지 해석만 강요를 하는 사회, 다양한 해석들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문화적 맥락에서의 의미 획득 활동이 일어나지 않는다. 여러분들이 생각한 대로 한번 얘기를 해보세요 라고 말을 해야 되는데 그렇게 말하면 잡아간다고 하면 사회주의 예술이 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소비에트 연방에서 유행했던 예술인데 우리가 보기엔 이상하지만 그게 규약이다. 그러니까 문화적 맥락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해보면 예술학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정치적인 시각 속에서 얘기가 된다. 그래서 이 부분을 비틀면 반체제 예술이 되는 것이다.
본질의미를 알아내는 것을 도상 해석학적 의미라고 한다. 예술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논의가 되는데 강의자료를 함께 살펴보면 예술 작품에 대해서 논의하는 게 아니라 어떤 예술 작품이 되었건 모든 Kunstwerk 안에는 어떠한 의미가 들어있고 그 의미라고 하는 것은 느닷없이 갑자기 툭 던져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대'의 '세계관'의 영향 아래서 만들어진 것이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서 지금 특정한 시대라 말과 세계관이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생각하여야 한다. 그러면 그 시대와 세계관을 탐구함으로써 사람들이 무엇을 추구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게 바로 예술 철학이다. 예술철학은 예술작품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인공물 철학이다. 모든 인공적 창작물의 의미와 세계관을 찾아내는 것이다. 이것도 나중에 심화 학습 시간에 더 하려고 한다.
오늘 여러분들은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한다.
첫째 시간에 배운 객관적 미학, 즉 초월적 미학인 "아름다운 것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안다."와 지금 두 번째 시간에 배운 Kunstwerk를 꼭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고 앞서 말한 것처럼 이번 강의는 구체적 미술작품, 미술사에 대해서 논의를 하지 않는다.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같은 경우에는 미술 작품을 아주 정연하게 설명하는 데 굉장히 공을 들인 책이다. 좋은 책이니까 계속 읽으면 된다. 예술 작품에 대해서는 주관적인 입장에서 내가 괜찮다고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저의 입장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파워 오브 아트》라고 하는 책을 추천한다.
다음 주에는 두 번째 시간으로 플라톤의 미학인 《향연》을 한다. 아름다움에 관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라 형이상학에 대해서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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