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1-1

 

2023.09.06 🎤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1-1

커리큘럼

09.06 예술의 목적과 예술론의 학적 위치
09.13 플라톤의 미학
09.20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
10.04 mimēsis
10.11 신플라톤주의와 고전주의 예술론
10.18 maniera grande, cicerone
10.25 Baroque, Rococo
11.01 헤겔과 역사적 예술론
11.08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1):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조르조 바사리
11.15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2): 에르빈 파노프스키, 막스 드보르작

 

교재

강유원(지음), 《에로스를 찾아서 -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한 성찰


제1강. 예술의 목적과 예술론의 학적 위치

일시: 2023. 9. 6.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345

 

 

이번 수업을 배운다고 해서 그림을 더 잘 보게 되고 인생이 아름다워지고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이론적인 것일 뿐이다. 미리 말하지만 굉장히 어렵고, 중간에 시험이 있다. 10번에 걸쳐서 강의를 하는데 공지 사항을 봐서 알겠지만 우선 미학이라고 하는 영역을 조금 한 다음에 예술학의 영역을 들어갔다가 예술철학까지 해서 8번을 강의하고, 마지막 두 번은 미술사의 일반적인 흐름을 강의한다. 흔히 말하는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를 읽을 때 등장하는 얘기를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기본적이고 원리적 지식을 강의한다. 오늘부터 시작해서 8번에 걸쳐서 하는 것은 미학, 예술학, 예술 철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들과 사고 방식들 또는 원리들을 이야기하는데 특정한 학문 영역의 학문 분과 안에 속하지 않는 것들일 수도 있다. 철학에서 배우는 것도 있고 미학과에서 배우는 것도 있고 예술사회학에서 배우는 것이기도 하는 그런 것인데 그것들을 다 모아서 이번에 공부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의 다학제적 공부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이 이번에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을 10번에 걸쳐서 들으면, 몇 가지 효과가 생기는데 첫째는 창의적 사유가 가능해진다. 꿈에 그리던 창의적 사유가 드디어 수원 글로벌평생학습관에서 익힐 수 있게 된다. 창의적 사고가 가능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가령 제가 《철학 고전 강의》를 썼는데 형이상학이라는 학문 영역은 굉장히 협소하다. 서양의 형이상학은 《철학 고전 강의》에서 다루고 있는 것처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 이렇게 5명만 배우면 된다. 5명만 배우면 철학은 끝이다. 그러니까 다른 걸 참조할 필요도 없다. 칸트는 어떻게 살았는가 플라톤의 일생은 어떠했는가 이런 것들은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아무 관계가 없다. 정말 순수한 추상의 영역이다.  

우리에게 먼저인 것이 있고 본성상 먼저인 것이 있다. 우리에게 먼저인 것은 쉽게 말하면 감각적인 것이다.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이유는 음식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이어트가 성공했을 때 자신의 모습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이다. 아이디얼한 것을 그려볼 줄 아는 사람이 성공한다. 본성상 먼저인 것은 우리가 알 수 없고 본질적으로 먼저인 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건 이상적인 것이다.  추상적인 사유를 하는 사람이 사실 창의적인 사람이다. 그러니까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같은 것은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일들과는 아무 관계없어 보이는 뜬 구름 위의 얘기인 것 같지만 사실은 현실적으로 벌어지는 모든 사태들을 싹 걷어내고 뼈대만 딱 추려서 우리에게 제시해 놓은 것인데 배우기는 어려우나 접근해 가기는 쉽다.  그런데 미학, 예술학, 예술 철학은 5명으로는 안된다. 그림도 좀 볼 줄 알아야 하고,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먼저인 것과 본성상 먼저인 것 두 개를 다 알아야 된다.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안에는 아이디얼한 것도 있고,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들은 아이디얼한 그림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반면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은 앵그르와 같은 사람들이 그린 그림에 나오는 사람들이다.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될 것 같은 이 두 개의 영역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을 우리는 창의적이라고 말한다. 미켈란젤로 같은 사람들은 머릿속에 아이디얼한 것이 있는데 우리는 그 아이디얼한 것을 말로도 표현하기가 어려운데 그 사람은 돌을 깎아서 만들어내버렸다. 그는 본성상 먼저인 아이디얼한 것을 우리에게 이 감각적인 것을 매개로 삼아서 우리에게 제시해 줬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다층적 다차원적 다영역적 사유를 할 줄 아는 것을 창조적 사유라고 말한다. 이것을 간단히 한마디로 말하면 다학제적multidisciplinary이라고 말한다. 여러분들은 이번에 미학, 예술학, 예술 철학을 공부를 하게 되면 적어도 창의적 사유라는 게 무엇인지 다차원적으로 다층적으로 다영역적으로 다학제적으로 사용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그것을 할 줄은 몰라도 도대체 어떤 것들을 갖춰야만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만 해도 굉장히 중요한 것이다. 

창의적인 것을 기르려면 핵심 지식core knowledge을 외워야 한다. 베이직 아이디어와 베이직 스킬을 외워야 한다. 창의적인 요리를 하려면 조리 도구를 다룰 줄 알아야 한다. 가스레인지 불도 못 키는 사람이 창의적 요리를 할 수는 없다.  그러니 핵심 지식은 외워야 한다. 즉 미학, 예술학, 예술 철학에서 창의적 사유를 하기 위해서는 8번에 걸쳐서 강의하는 것을 외워야 한다는 것이다. core knowledge가 많은 학문 영역은 오래된 학문 즉 고전적 학문이어서 철학이 어려운 것이다. 


창의적 사유가 무엇인지를 막연하게 라도 알고 창의적 사유를 접근해 가는 방식을 기른다는 게 이번 강의의 첫 번째 목표이다. 두 번째는, 이건 별거 아닌 것 같은데, 앞으로 8번 강의하면서 도이치어를 많이 쓰게 될 것이다.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은 사실 도이치어로 이루어진 학문이다. 글로벌 평생학습관에서 독일어로 된 뭔가를 배웠다는 것이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 된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독일어로 만들어진 학술 용어들을 접근해 가는데 있어 가장 앞에 있는 길이 예술학, 예술 철학이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여러분들에게 설명해가면서 쓰려고 한다. 

Genuss라는 단어가 있다. 향유享有, 누린다 라는 뜻이다.  알고 즐기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에 살면서 담양 소쇄원을 안 가본 사람과 가본 사람은 Genuss의 차원이 다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Genuss라고 하는 것은 고도의 정신적 쾌락을 가리킬 때 쓴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우리가 향유를 할 수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는가. 향유하는 인간의 매뉴얼을 여기서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내 시선을 돌릴 수 있게 해주려면 어디서 무엇을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이론적인 원칙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것들을 Genuss라고 한다. 부르크하르트는 미술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은 모르겠지만 감상하는 사람들은 목적이 향유에 있다고 말한다. 나중에 《치체로네》, 콰트로첸토(Quattrocento), 친퀘첸토(Cinquecento) 즉 르네상스 시대를 얘기하면서 말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을 향유하는 것 그래서 그 아름다움을 향유해서 자신의 뇌의 편도체 속에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가득 채우는 것이 우리가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을 공부하는 아주 궁극적인 목표이다. 그런데 기왕에 아름다운 걸을 채우려면 잘 알아서 아름다운 것을 식별해내서 채워야 되지 않겠는가.  파인 다이닝fine dining이라고 하는 것을 안 해본 사람과 해본 사람은 다르다. 한국 사회는 이제 Genuss에 대한 감각을 길러야 될 때이다. Genuss가 있는 사람들은 향유를 할 줄 안다.  

특수주의particularism라고 한다. 특수한 뭔가에 대한 감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프랑스 사람들이나 이탈리아 사람들이나 에스파냐 사람들은 배타적인 것이 있다. 자기네들이 향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자부심과 자기네들이 누리고 있는 것이 가지고 있는 미학적인 우월감이 너무 크다. 그러다 보니까 이 특수주의라고 하는 말은 다르게 말하면 배타주의가 된다. 특수주의라고 하는 것이 생겨나야만, 나의 특수성을 존중받고 싶어서 다른 사람의 특수성을 존중하는 것이 생긴다. 그런데 그냥 나는 돼지국밥 취향이고 너는 순댓국밥 취향이다 라고 할 때의 특수주의와 파인 다이닝에서의 특수주의는 그것에 들어가는 스킬과 도구와 노고의 차이가 굉장히 다르고 차이가 있다. 고급스러운 particularism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야만 우리의 문화가 발전하는 것이다. 그게 선진국이다.  아일랜드가 영국을 제치고 지금 유럽에서 소득 순위 2등이다. 그런데 아일랜드를 문화대국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아직은 거기까지 못 간 것이다. 우리가 중국을 짱깨 새끼들이라고 얘기한다 해도 중국이 역사 속에서 쌓아온 문화적인 위력이라는 걸 무시할 수가 없다. 그들이 과거든 지금이든 시대와 불문하게 그걸 만들어냈다 라고 하는 것은 그것을 요구하는 자가 있었다는 것이고, 그걸 요구하는 자가 있었다는 것은 그걸 누리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고도의 특수성에까지 이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건 한두 명의 천재만 가지고는 되지 않는다. 그걸 누리고 싶은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날 한국은 고려 시대에 청자를 만들었던 사람들보다도 문화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게 바로 특수주의particularism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번에 강의를 하면 첫째는 core knowledge를 충분히 이제 외워야 한다. 둘째는 Genuss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이론적으로 미학적으로 뒷받침하면서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어떤 정신세계를 갖춰야 한다. 미학적이다 라고 하는 것이 단순한 허영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있어서 정신적 아름다움을 향유Genuss하는 그런 태도를 갖추는 것이 이번 강의의 목표이다. 


강의자료를 보면 미학이란 무엇인가 그다음에 예술학이란 무엇인가 있다. 미란 무엇인가, 무엇을 미로 규정할 것인가, 미는 속성을 가진 대상이 있는가 이런 것들을 탐구하는 학문이 미학이다. 그러니까 미학은 아름다움에 관한 학문적인 통찰이다. 그런데 미학의 탐구를 통해서 우리가 미술 작품 감상을 잘하게 된다든가 미술이나 예술 일반에 관한 소양을 넓힐 수는 없다. 미학이라는 과목과 미술이나 예술 일반에 관한 소양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와 마찬가지이다.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객관적으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가령 소립자란 무엇인가, 안드로메다는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한 것처럼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고 그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실제로 있는데 그게 무엇인가 라고하면 미학의 출발점은 플라톤이다.  


아름다움의 대상이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 아름다움이 있다.
강의자료를 보면 플라톤의 초월적 미학이라고 되어 있다. 초월적이라고 하는 게 어디를 넘어서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 보이는 데 있다는 뜻이다. 내 시야를 벗어나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 그러니까 플라톤에서 초월적이다 라는 말이 나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 감각에 포착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오감, 즉 눈으로 보고 맛으로 느끼고 냄새 맡고 귀로 들리고 하는 것을 넘어서 있다. 초월적이라는 말이 어려운 게 아니라 우리의 감각으로서는 잡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감각으로 잡을 수 없다고 해서 우리가 모르는 건 아니다. 우리 인간은 감각 말고도 많은 게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감각으로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부지이거나 모르는 건 아니다.  뭔가가 외부로부터 데이터가 들어와서 우리의 뇌에서 일정한 작용을 거쳐서 일정한 정도의 앎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감각에 기원을 두고 있지만 감각을 넘어선 것이고 감각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감각을 넘어서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안 봐도 알아 라는 말을 한다.  안 봐도 알 수 있다. 이 영역 그러니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있다고 해서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안다는 것과 있다는 것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 라고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안다 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라는 뜻이 된다. 즉 '있다'와 '안다'를 동일시하는 태도가 플라톤의 태도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플라톤의 초월적 미학은 이상적인 것이고 있지도 않은 걸 가지고 안다고 말하는 거 아니냐 라고 얘기를 한다. 하지만 사실 눈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아름다움에 대한 초월적 탐구라고 하는 것이 거짓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남에게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아름다움이 아니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나만이 누릴 수 있는 특수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용납이 되어야, 카라바조는 진짜로 나쁜 놈이고 범죄자이지만, 카라바조가 용서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카라바조의 그림에서 아름다움이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카라바조만이 구현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저는 사실 카라바조를 보면서 짜증이 난다.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냥 아름답지 않다. 그리고 인상파에서는 마네의 그림은 그런대로 구조가 보이니까 아름답다고 여기는데,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아름답다 라고 하는 것은 렘브란트 같은 경우이다. 각기 다르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단어는, 무엇은 아름답다 라고 하는 것은 술어이다. 카라바조는 아름답다, 렘브란트는 아름답다 라는 것.  저의 경우 카라바조는 아름답다는 술어를 붙이지 않는다. 그런데 렘브란트에는 붙인다. 그러면 카라바조는 아름답다 라고 말하는 사람과 렘브란트는 아름답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다. 그런데 둘 다 아름다움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나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면서 아름다움을 '느낀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안다'고 얘기해야 한다. 배운 사람들은 아름다움이 느껴진다가 아니라 아름다움을 알겠네 라고 말해야 한다. 이제 일상 어법을 바꿔야 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아름다움을 알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저기 있네 라고 말해야 한다.  

카라바조를 보고 아름다움이 거기에 있다.  그러니 나는 그 아름다움을 알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과 저처럼 렘브란트를 보면서 렘브란트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아름다움을 알겠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는 아름다움이 다른 것이다. 그건 서로 말로 주고받을 수 있는 아름다움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오감 능력을 넘어선 영역에 그게 있다는 것이다. 그게 플라톤이 말하는 초월적 미학이론의 핵심이다. 초월적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은 도저히 가 닿을 수 없는 이상한 곳에 있는 게 아니다.  

카라바조에 대해서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사람, 렘브란트에 대해서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사람, 반가사유상을 보고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사람 모두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쓴다. 그것이 서로 다른 것 같은데 다 같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쓴다. 그러면 우리는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의 원자재가 있을 것이다. 그 원자재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서 말을 끌어다가 아름다움이라는 말을 쓰지 않겠는가. 그 원자재를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공통적으로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정의는 없지만 누구나 다 동의하는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있다. 

플라톤은 미의 이데아와 좋음(선, 올바름)의 이데아, 진리(앎)의 이데아가 하나라고 얘기를 했는데 사실 이건 거짓말이다. 적어도 좋음의 이데아와 앎의 이데아는 같을지 몰라도 아름다움의 이데아는 선과 악에는 관계가 없다. 사실 각기 영역이 다르다. 진리는 그냥 기능이다. 나쁜 것을 알 수도 있고 좋은 것을 알 수도 있다. 이것은 인간의 실천적 도덕적 태도인데 아름다움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사실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무협지를 보면 정파와 사파가 있는데 여기도 마魔도가 있다. 서양에서는 마魔를 알 수 없는 힘이라고 해서 악마적diabolic이라고 번역을 한다. '마가 꼈다'라고 하는데 이때 마魔는 예술적인 힘artistic power이다. 그러니까 카라비조 같은 사람은 마가 껴서 나쁜 짓을 하면서도 예술가적인 뭔가를 하는 것이다. 마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넘어갈 수 없는beyond 예술적인 힘을 말한다. 


플라톤은 아름다움이 있다고 얘기한다. 그것은 일상적인 연마와 훈련을 통해서는 습득할 수 없다. 그러니 초월적인 것이다. 플라톤은 그러한 것을 탐구하는 것이 미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플라톤의 초월적 미학이라고 하면 굉장히 뜬금없는 얘기가 아니라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뭔가 굉장한 위력을 탐구해 보려고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추구하는 사람이 바로 erōtikos다. erōtikos라고 하는 것은 뭔가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향연》에 대해서 얘기할 때 다시 말하겠다. 그다음에 에이도스eidos는 궁극적인 이데아를 가리킬 때 쓴다. 플라톤은 그 eidos를 인간이 알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리고 참다운 미와 거짓된 미가 있다 라고 생각했다. 플라톤의 미학에 대해서는 이 부분만 잘 기억해 두면 되겠다. 

글로벌 평생학습관에서 미학, 예술학, 예술 철학을 첫 시간에 배웠는데 첫째 나는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것은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 아름다움이 저기에 있고 나는 그것을 알았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말을 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게 왜 중요하냐면 그렇게 규정적으로 말을 해야 내 생각이 규정적으로 바뀐다. 머릿속에서만 맴돌면 안된다. 내가 "아름다움이 저기 있다. 나는 그것을 알았다"라고 말하면 하나도 안 어색한데 여러분이 직접 해보면 조금 어색할 것이다. 그건 앎의 영역으로 들어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이 그런 말을 할 때 "저 사람은 뭘 느낀다는 거야. 도대체 똑바로 말을 안 해"라는 생각이 들어야 지식의 필터가 장착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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