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향연(7)

 

2023.08.21 📖 향연(7)

플라톤, ⟪향연⟫(Symposion)

V 알키비아데스의 틈입闖入
- 알키비아데스의 도착 212c4-215a3
‘갑자기’ 나타난 알키비아데스, 에로스가 아닌 소크라테스를 찬양함

- 알키비아데스의 연설: 소크라테스 찬양 215a4-222b7
모상을 통한 찬양. 실레노스와 사튀로스와의 유사성; 아이러니와 방자함(오만함), 절제; 인내와 용기; 소크라테스의 독특함

- 소크라테스의 답사와 자리에 대한 승강이 222c1-223a9
소크라테스, “알키비아데스, 자네 안 취한 것 같네그려.”; 알키비아데스,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곁에 있으면 다른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과 어울릴 기회를 갖는다는 게 불가능하지.”

 

 

플라톤의 《향연》 알키비아데스가 정말 느닷없이 갑자기exaiphnēs 판에 끼어들면서 얘기가 아주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부분을 오늘 읽는다. 오늘 읽고 내일 읽으면 일단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향연》이 대체로 어떤 얘기다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하게 될 것 같다.  

알키비아데스가 느닷없이 나타났다. 작품 안내를 보면서 전체 줄거리를 살펴보고 그다음에 구체적으로 주목해서 볼 만한 부분들을 보겠다.  "아리스토데모스의 보고대로라면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 대해 대개 칭찬들을 하는데, 자신의 이야기에 대해 부정적 언질을 받은 아리스토파네스만은 뭔가 발언하려 했다고 한다."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약간 뭐라고 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는 실제로 소크라테스를 그의 희곡 《구름들》이라고 하는 코미디에서 약간 비웃은 바 있기는 하다. 플라톤이 그런 것을 고려해서 여기서 한번 먹인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여튼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관계는 내버려 두고 알키비아데스가 나타났다.  그런데 알키비아데스가 나타나서 뭐라고 하는 것도 가만히 보면 알키비아데스가 아리스토파네스가 하려고 했던 뭔가를 하려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좀 들기도 한다. 갑자기 나타난 알키비아데스의 술취한 얘기들이 쫙 있다. 그래서 이야기의 맥이 끊기고 향연이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이제 알키비아데스가 불평을 하는데 첫째가 아름다운자 아가톤 옆에 앉아 있는 게 마땅치 않다고 불평을 한다. 둘의 에로스 관계가 심상치 않다고 불평을 하는 것이다. 상대방이 이제 질투를 부린다고 하는 부분이 나오고 그다음에 아가톤에게 둘러준 머리띠를 돌려받아 소크라테스에게 돌려주고, 자기가 이야기 판을 술판으로 바꾸는데, 이제 사회자였던 에뤽시마코스가 나타나서 다시 그러면 안 된다 에로스를 찬양하라고 얘기하니까 알키비아데스는 이렇게 말한다. 소크라테스 옆에서는 다른 누구도 찬양할 수 없다고 하니까 에뤽시마코스가 그러면 그냥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라고 이야기를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를 찬양한다고 하니까 기분이 묘했겠다. 그래서 경계심을 표명하자 알키비아데스는 자기가 진실만 말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에 여러 개의 아이러니가 들어가 있다. 알키비아데스가 과연 진실을 말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여기까지가 알키비아데스의 도착 부분인데 알키비아데스의 도착 부분이라고 하는 것도 212c4-215a3니까 그렇게 짧은 부분은 아니다.   


본문을 보면 갑자기 바깥 문을 두드리는 큰소리가 났는데 알키비아데스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알키비아데스가 들어와서 이렇게 얘기한다. "자네들, 취했다고 나를 비웃을 텐가? 하지만 나로서는 자네들이 비웃는다 할지라도 어쨌거나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네. " 이게 좀 안 믿기는 얘기 같다. 왜냐하면 우리 농담처럼 술 취한 사람은 다 자기는 안 취했다고 말하니까 그렇다. 그러면서 아가톤이 이제 그에게 동석을 권했다.  그런데 이제 여기서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발견하고 말한다. "선생님이 계시리라고는 도통 생각도 못한 곳에 갑자기 나타나곤 하시던 평소의 습관대로 말입니다. 그래 지금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왜 또, 여기 앉아 계시나요? 아리스토파네스 옆도 아니고 우스운 자이거나 그런 자가 되기를 바라는 어떤 다른 사람 옆도 아니고, 이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곁에 앉으시려고 수을 쓰셨는데 말입니다." 조금 묘한 부분이다. 갑자기 나타났는데 알키비아데스 생각에는 소크라테스가 이런 자리에 있을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도 좀 이상한 것 같고 아리스토파네스 옆에 있어야 되는데 왜 아가톤 옆에 있는가. 《향연》은 플라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려고 하는지를 알아내는 게 정말 끝이 없다. 그러니까 읽으면서도 이게 본심이 아닌지 이게 정말 먹이는 건지 어떤지를 계속 궁리하면서 읽어야 되기 때문에 원래 뭔 말을 하려고 했는지를 알아내는 것 자체가 어렵다.  그건 이미 《향연》의 형식에서 그것이 나타났다. 아폴로도로스가 말을 하는데 아폴로도로스도 아리스토데모스에게 전해 들은 얘기이다. 그렇게 전해들은 얘기를 자기가 연습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지금 아폴로도로스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얘기가 원래 무슨 얘기였는지, 아폴로드로스가 개작했다고 할 수도 있고 아리스토데모스가 개작했다고 할 수도 있다. 무엇이 원래 진실이었는지는 저 장막 너머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향연》의 형식 자체가 우리에게 본래 그 자리에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형식 자체가 우리에게 이미 암시하고 있다.  

212e 자네들, 취했다고 나를 비웃을 텐가? 하지만 나로서는 자네들이 비웃는다 할지라도 어쨌거나 내가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네.  

213c 선생님이 계시리라고는 도통 생각도 못한 곳에 갑자기 나타나곤 하시던 평소의 습관대로 말입니다. 그래 지금은 무슨 일로 오셨나요? 왜 또, 여기 앉아 계시나요? 아리스토파네스 옆도 아니고 우스운 자이거나 그런 자가 되기를 바라는 어떤 다른 사람 옆도 아니고, 이 안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곁에 앉으시려고 수을 쓰셨는데 말입니다.  


지금 알키비아데스가 여기 들어왔는데, 알키비아데스와 소크라테스는 정말 영원한 관계이다. 알키비아데스가 이제 연설을 하기도 하는데 자기도 에로스에 대해서 얘기한다 하다가 소크라테스를 찬양한다고 한다. 이 찬양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 무엇일지 찬양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 이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을 한다.  "나는 이 사람의 광기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 대한 친애도 몹시 무서워하거든." '이 사람이 사랑하는 자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광기 어린 애착'으로 의역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 알키비아데스가 사랑하는 자는 소크라테스이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게 광기어린 애착이다. 그러면 적절한 애착이 아니다. 플라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게 적절함인데 적절한 애착은 아니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소크라테스 입장이 참 곤혹스럽지 않겠는가. 알키비아데스가 여기서 하려는 것은 객관적으로 에로스에 대한 얘기도 아니고 소크라테스를 찬양하는 것이다. 그런데 찬양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사랑은 아니다. 맹목적인 집착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알키비아데스는 소크라테스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게 그 사랑하는 대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알키비아데스가 하는 얘기는 어떻게 보면 정말 가슴 아픈 얘기이다. 그래서 "선생님이 곁에 계시는 한은 다른 어느 한 사람도 제자가 찬양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렇게 해서 이제 알키비아데스가 연설을 시작하는데 알키비아데스의 연설은 모상을 통한 찬양 그리고 아이러니와 방자함 그리고 인내와 용기, 독특함, 이 네 가지 항목을 들어서 소크라테스를 찬양한다. 

213d 나는 이 사람의 광기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에 대한 친애도 몹시 무서워하거든.

214d 선생님이 곁에 계시는 한은 다른 어느 한 사람도 제자가 찬양하지 못할 테니까요.


먼저 모상을 통한 찬양은 소크라테스를 찬양하긴 하는데 모상eikōs을 통해서 즉 이미지를 통해서 하겠다고 말한다. 그 이미지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는 겉보기에는 실레노스 조각상이나 또는 사튀로스인 마르쉬아스를 닮았다. 이제 실로로스나 사튀로스는 못 생겼다는 것이다. 게다가 방자함도 닮았다고 얘기를 한다. 그리고 이제 자기만이 아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얘기해 보겠다고 하면서 두 번째로 넘어간다. 겉은 무지로 둘렀지만 속은 절제로 가득 찬, 겉은 장난스럽지만 속은 진중한 아이러니의 인간이다. 소크라테스는 아이러니의 인간이다. 자기는 그걸 어떻게 알았는가. 다른 사람들은 겉모습만 보고 이렇게 저렇게 할지는 몰라도 자기는 소크라테스의 속을 들여다보고 아름다움에 반했다. 그러니까 소크라테스 속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결국 좋음이다. 소크라테스의 좋음에 반했고 그다음에 소크라테스의 마음을 사로잡아 자신을 성숙시킬 수 있는 내밀하고 진중한 이야기를 전달받는 관계로 발전하리라는 것이 기대였는데 소크라테스가 끄떡없더라 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소크라테스가 자기를 받아주지 않더라 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다음에 작품 안내를 보면 세 번째가 용기와 인내인데 소크라테스는 전쟁터에서 굉장한 용기와 인내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특함. 인간 어느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인간 어느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다. 이것은 알키비아데스의 입을 빌려서 말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알키비아데스의 말이 맞을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어느 누구하고도 비슷하지 않았다. 본문을 보면서 다시 얘기해 보겠지만 이건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플라톤의 대화편 전체를 아주 꼼꼼하게 읽어본 건 아니지만 이 《향연》을 여러 번 읽어보면서,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비록 알키비아데스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어떤 건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저는 이것을 이렇게 읽는다. 이런 네 가지 특징을 거론할 때 알키비아데스의 입을 빌려서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과연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소크라테스는 그런 사람이다에 해당하는 것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에 관한 설명이 플라톤이 생각하는 소크라테스라고 봐도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있는 그대로의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아닐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알키비아데스는 당대의 유명 인사이다. 그 사람의 입을 빌려서 이렇게 표현을 한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그냥 차치해 두고 여기에서 알키비아데스가 묘사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은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플라톤이 알고 있는 '있는 그대로의 소크라테스의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거기에 더해서 플라톤이 생각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인간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게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말하면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형 그게 바로 이 《향연》에서 알키비아데스가 말하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 대화편 전체를 봐도 이렇게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한 부분은 없다. 플라톤의 최후를 다루고 있는 《파이돈》에서도 소크라테스와의 대화가 나와 있지 소크라테스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없다. 그러니까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다 보면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인지를 이런 대화편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낼 수는 있는데 주제화해서 다룬 건 이 부분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 인간형이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의 소크라테스 찬양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러면 그게 왜 중요한가.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독특함'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제 앞부분을 먼저 얘기하고 얘기해보겠다.  


"나는 소크라테스 선생님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려 시도하겠네.  모상들을 통해서 말일세." 그러니까 겉모습부터 시작을한다. 그다음에 "선생님은 방자한 분입니다." 여기서 방자하다라고 하는 것은 휘브리스hybris이다. 오만한 분이란 얘기이다. 그러니까 누구한테 들을 때나, 이야기하는 자가 아주 보잘 것 없는 자, 듣는 이가 여인이건 남자이건 젊은 사람이건 신들리게 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얘기를 듣고 있다 보면 완전히 푹 빠져버린다는 것이다. 코뤼바스적인 그러니까 사실은 압도적인 양반이다 라는 얘기이다. 그리고 이제 이분과 얘기를 하다 보면 부끄러워진다. 그분과 동의한 것이 부끄러워질 뿐만 아니라 약속을 해놓고 못 지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 그것도 수치스러워진다고 말한다. 이 수치스러움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그다음에 사실 알키비아데스 자신도 오만하기가 만만치 않다. "자네들 가운데 아무도 이분을 알지 못한다는 것 잘 알아두게." 자기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앞에는 오만하다, 못 생겼다 얘기하고 여기서는 "안쪽을 열어젖히면 이 분이 얼마나 많은 절제로 가득 차 있는지를 상상이 가는가? ··· 그분은 사람들을 상대로 딴청을 부리면서 그리고 놀면서 온 삶을 보낸다네." 딴청을 부리고 시치미를 뗀다. 이것은 단순히 시치미 떼는 게 아니라 이런 뜻도 된다. 의견, 진리가 아닌 것, 진리가 아닌 것에서 그것을 외면하고 진리를 향해 가려는 것, 즉 진리가 아닌 거짓 의견을 시치미 떼고, 거짓 의견을 진리로 착각하지 않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것도 시치미 떼는 것이다. 시치미 떼는 대상이 진리가 아니라 거짓 의견에 시치미를 뗄 수도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든 그분이 진지할 때 열어젖혀서 안에 있는 상들을 본 적이 있는지 나는 모르네.  하지만 나는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것들이 내겐 아주 신적이고 황금과 같으며 아주 아름답고 놀라운 것들로 보였네." 알키비아데스는 안에 있는 걸 보긴 봤다. 그다음에 한 번 육체적으로 덮쳐버리기도 했는데 고백도 하고 그랬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너와는 안 될 것 같다 라는 얘기를 하였다는 것이다.  

215a 나는 소크라테스 선생님을 다음과 같이 찬양하려 시도하겠네.  모상들을 통해서 말일세.

215c 선생님은 방자한 분입니다.

216d 자네들 가운데 아무도 이분을 알지 못한다는 것 잘 알아두게.

216e 안쪽을 열어젖히면 이 분이 얼마나 많은 절제로 가득 차 있는지를 상상이 가는가? ··· 그분은 사람들을 상대로 딴청을 부리면서 그리고 놀면서 온 삶을 보낸다네. 

217a 어느 누구든 그분이 진지할 때 열어젖혀서 안에 있는 상들을 본 적이 있는지 나는 모르네.  하지만 나는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그것들이 내겐 아주 신적이고 황금과 같으며 아주 아름답고 놀라운 것들로 보였네. 


그다음에 이제 소크라테스는 얼마나 인내가 있는가, 용기가 있는가는 이제 실제로 있었던 얘기이다.  "우리가 함께 포티다이아로 출전하게 되어 거기서 공동 식사를 하게 된 것은 이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난 이후의 일이었네." 그러니까 펠로폰네소스 전쟁 무렵에 이제 포티다이아로 출전을 했었다.  

220a 우리가 함께 포티다이아로 출전하게 되어 거기서 공동 식사를 하게 된 것은 이 모든 일이 이미 일어난 이후의 일이었네.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앞서 강조했던 독특함에 대해서 얘기한 본문을 보자.  "어떤 독특함을 갖고 있는지를 말할 때 우리는 요즘 사람들 가운데서든 옛날 사람들 가운데서든 아무리 눈 씻고 찾아보아도 유래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네." 이 독특함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들 누구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독특함을 가지고 있어서 지성적이다 라고 얘기를 했다. 그러면 이 독특함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요 개성이다. 그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personality이다. 왜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하면 이게 바로 플라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여기서 알키비아데스의 입을 빌려 향연에서 소크라테스에 대해 설명을 함으로써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인간형을 드러내 보였다고 생각한다.  

221e 어떤 독특함을 갖고 있는지를 말할 때 우리는 요즘 사람들 가운데서든 옛날 사람들 가운데서든 아무리 눈 씻고 찾아보아도 유래를 찾기가 어려울 것이네. 


《국가》을 가지고 강의(《플라톤, 현실 국가를 캐묻다》)하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어서 나중에 「고급 철학 연습」 시간에 스토아주의를 얘기하면서 한번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철학사를 읽어보면 고대 소아시아의 이오니아 학파(자연 철학)가 있다. 콘퍼드가 《종교에서 철학으로》에서 말한 것처럼 종교에서 철학으로 라는 테제가 맞을 수도 있고, 사실 저는 그 테제가 적당치는 않다고 생각한다, 종교와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꼭 이렇게 구별되는 그런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  하여튼 보통 철학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을 고대 헬라스의 '미토스에서 로고스로' 개념으로 설명한다. 신화에서 이성으로. 논증할 수 없는 얘기들이 신화인데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면 신화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도 많이 있다. 그러니까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던 것이다. 이성(로고스)라고 하는 것, 로고스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성서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면서 로고스를 말하는데, 하느님의 말씀에다가 로고스를 써놓았다. 그런데 로고스는 인간이 하는 얘기이고 미토스는 신이 하는 얘기이다. 신에 관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신이 했다 라고 인간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성을 가지고 자연에 대해서 탐구하면, 일단 미토스가 아닌 로고스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하나의 방법론이다. 인간의 시선을 가지고 뭔가를 하는 것이다. 일단 처음에는 자연에다 시선을 둔다는 것이 자연철학이다. 그러다가 이제 희랍 철학사의 상투적인 설명인 소피스트들로부터 소피스트 운동이라고 하는 것, 즉 인간으로의 전회, 자연에서 시선을 인간으로 넘어가는데 이것은 반성하는 것이다. 자연에 대한 반성이고 이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는 것이다. 우리가 자연에 대해서 생각하는 게 제대로 된 걸까 하다가 인간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해서 생각을 했는데 모든 인간이 그 기준이더라 라고 말하면 프로타고라스의 얘기가 된다. 즉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하면 각각의 개인이 만물의 척도라는 뜻이다. 이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만물의 척도라는 데까지 왔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도 자기는 인간에 대해서 탐구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도 소피스트적인 방법에서 시작을 한 것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가만히 생각을 해본 것이다. 이게 소크라테스인지 플라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소피스트가 말하는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각각의 개인이니까, 그런데 개인을 이렇게 들여다보니까, 그냥 공동체의 질서에 얽매여 있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드러난 게 《국가》의 처음 부분인데 케팔로스와 폴레마르코스가 올바름의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케팔로스는 신들에게 경건하고 재물을 잘 바치면 되는 것이며, 관습적인 것들을 따라가더라는 것이다.  그다음에 폴레마르코스도 친구들한테 잘해주고 그런 얘기하지 않는가. 그러면 그것은 인간을 기준으로 삼는 건 맞는데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결국은 그냥 오래도록 사회에서 내려오는 자연적 질서에 얽매여 있는 인간이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시도 때도 없이 적용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연적 공동체에서 통용되던 공동체의 정신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한테 인계 받아서 뭘 한다는 것은 혈연 공동체에서 통용되는 올바름이다.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논박해 나간다. 다시 말해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이라고 하는 참다운 인간, 보편적 보편적 인간이라고 하는 것으로까지 가야만 진짜로 인간으로의 전환이라고 하는 것, 자연에서 돌아서서 인간을 탐구 대상으로 했다 할 때 참으로 인간이라고 하는 것, 보편적 인간,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성을 가진 인간이 된다. 그것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소크라테스는 생각한다. 그러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그 시대가 또는 그 시대의 자연적 공동체에 얽매여 있지 않은, 정말 말 그대로 코스모폴리스에 살아가는 인간이다. 폴리스가 아니라 우주적 공동체에 살아가는 인간, 추상적인 공동체에 살아가는 인간이다. 그래서 헤겔이 역사철학에서 진정한 자기의식의 탄생이다 라는 식의 얘기를 한다. 자연적 공동체를 파괴하고 보편적 자기 의식으로 이행해 간 것이다. 그리고 자율성이라고 하는 것 또는 영혼의 자족성이라고 하는 것을 가져야 한다. 케팔로스라든가 폴레마르코스는 공동체의 영혼에 얽매여 있다. 당대 아테나이 사람들은 거기다 더해서 돈독에 올라 있엇다. 그때부터 영원히 거기에 저당이 잡히는 것이다. 자족성Autarkie을 확보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게 바로 고대 아테나의 자연적 공동체에서 통용되고 있던 올바름의 기준을 넘어서버리는 것이다. 보편적인 인간으로서 올라서는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소크라테스이다. 지금 여기서 알키비아데스가 말한 독특성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동체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이성과 관습과 서로 커뮤니케이션하는 존재가 아니라 우주적 이성과 교류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이 아무리 어쩌니 저쩌니 해도 이제는 끄떡없이 우주적 이성을 관조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 바로 그런 사람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다. 어떻게 보면 전쟁터에 나가서 뭔 헛 생각이야 이렇게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스토아주의의 세계 이성, 코스모폴리타니즘을 선행하는 모범적인 인간이 바로 여기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이다. 여기에 스토아주의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그런데 스토아주의의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속에서 구체적인 이념을 실현하는 공동체는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냥 세상은 요지경인데 그들은 그 이념을 붙들고 공허하게 삶의 위안을 받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이념은 플라톤주의적인 이념이다.  그것이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고 그 이념에다가 본격적인 의미에서의 모든 자연적 공동체, 말 그대로 보편적인 공동체를 세우려던 사람이 예수일 것이다. 이른바 헬레니즘 세계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인 파울루스는 고린토인들에게 보낸 첫째 편지에서 "유다인이든 그리이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우리는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같은 성령을 받아 마셨읍니다"라고 얘기한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계급 차별이 없는 그런 한 몸이 되었다는 말이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에클레시아Ecclesia이다. 이제 그런 것들을 생각해 보면, 이건 좀 억지일 수도 있지만, 사도 바울의 플라톤주의다 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는데 그런 이념들은 헬라스 세계에서는 실현될 수 없었겠다. 그러니까 플라톤이 여기서 말하는 소크라테스라고 하는 존재는 독특하다 라는 것, 이 독특함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스토아주의라고 하는 것과의 상당히 대단히 재미있는 연결고리들을 우리가 발견할 수가 있다. 그래서 《향연》의 알키비아데스의 소크라테스 찬양이라고 하는 부분은 그런 맥락으로도 읽을 수도 있겠다. 


그다음에 소크라테스가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소크라테스의 답사와 자리에 대한 승강이가 있게 된다. 작품 안내를 보면 알키비아데스가 반격을 한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옆에 있으면 아름다운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다. "이 반격이 무슨 의미일지는 읽는 이의 혜안에 맡긴다." 이런 게 조금 불만이다. 이런 해설을 왜 읽겠는가. 혜안이 없으니까 좀 가르쳐주면 좋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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