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향연(8)

 

2023.08.22 📖 향연(8)

플라톤, ⟪향연⟫(Symposion)

VI 에필로그
- 향연의 파장罷場 223b1-223d8
‘갑자기’ 나타난 노니는 자들 때문에 모두가 술을 마시게 되고 잠들기도 하고, 집으로 가기도 함; 소크라테스는 아가톤과 아리스토파네스에게 “희극을 만들 줄 아는 것과 비극을 만들 줄 아는 것이 같은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 그리고 기술을 가지고 비극을 만드는 자는 기술을 가지고 희극을 만드는 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밀어붙이고 있었다는 것” 

- 소크라테스가 자리를 떠남 223d9-223d12
소크라테스는 “저들을 잠들게 한 후에 일어나 떠나갔”다는 것

 

 

오늘은 플라톤 대화편 《향연》 마지막을 읽는다. 지금까지 여덟 번째인데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을 못해서 조금 그렇긴 하지만 본래 《향연》을 소개한 이유가 수원시 글로벌 평생학습관에서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이라고 하는 것을 세 번째 시간에 강의를 하려고 하는데, 그 강의를 할 때는 전체를 읽는 게 아니라 에로스의 사다리와 아름다움 자체에 관한 얘기를 집중적으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 어쨌든 《향연》 설명하는 게 미흡하다고 여기고 있는데도 이 정도로 마치는 것은 이제 《향연》 전체가 처음 이걸 읽어보는 분들은 대체로 이런 정도로 되어 있다를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마지막 부분이 "향연의 파장"이다. 번역본을 보면 향연의 파장으로만 되어 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을 둘로 나눠서 향연의 파장 그리고 소크라테스가 자리를 떠남으로 나누었다. 이렇게 짧은 부분에서 223d9부터 "그러자 소크라테스 선생님은" 부분을 따로 떼어놨는데 그렇게 한 것은 나중에 얘기를 다시 하겠다. 

작품 안내를 보면 소크라테스의 의중에 부응하여 아가톤이 자리를 옮기려 하자 다시 '갑자기' 술꾼들이 이번엔 떼로 몰려와 북새통을 만들어 통제 불가능한 상태로 강제로 술을 마시는 자리가 되어버렸다고 아리스토데모스는 마지막 장면 보고를 시작한다.  여기서 역자는 설명한다. 이 '갑자기'는 이 대화편에서 네 번째로 등장하는 갑자기이자 이전에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한 갑자기에서 시작된 파장 분위기를 완전히 종결짓는 계기가 된다.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한 갑자기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찬양으로 넘어가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알키비아데스는 앞에서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을 듣지 못한 상태였죠. 그가 그런 얘기를 듣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 자리에 없었다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예를 들어서 《파이돈》의 마지막 장면에 플라톤이 그 자리에 있다가 없다는 얘기가 나왔다. 그것을 둘러싸고 해석들이 분분하다. 마지막에 플라톤이 없는 자리에서 소크라테스가 한 얘기는 영혼불멸에 관한 얘기인데 플라톤은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동의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자기가 그 자리에 없었다고 설정을 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게 정말 무한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얘기겠다. 레오 스트라우스의 제자들은 unwritten philosophy라고 하는 것에 근거해서 또 다른 얘기를 하기도 하고 한다. 한때는 그게 굉장히 신비적인 얘기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것에 매달려서 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나 텍스트에 그냥 있는 그대로, 플라톤이 그냥 별로 듣고 싶지 않은 얘기였겠지 그러니까 자기는 동의 못한다고 했겠지 그러니까 그 자리에서 자기를 빼어버린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자리에 알키비아데스는 없었다. 알키비아데스는 그런 얘기를 안 들을 만한 놈이니까 그 자리에 올라갈 놈이 아니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냥 그렇게 있는 그대로, 정말 어느 순간 뒷배경이 궁금하지 않은 순간이 온 것이다. 게을러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머리를 더 이상 쓰고 싶지 않아서 골치 아픈 얘기는 그만하고 싶어서 그런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술꾼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심포지온이라는 게 원래 술 마시는 자리인데 술을 안 마셨으니까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술 마시는 자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본래적인 의미에서 술을 마시게 되면 이 사람들이 주고받는 얘기는 무엇이겠는가. 그전까지는 아름다움에 관한 얘기, 약간 판타스틱한 이야기, 황홀한 이야기, 인간이 도대체가 올라가 볼 수 없는 그런 지점에 관한 얘기들이 있다가 이제는 술을 마시면서 얘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작품 안내에서 역자도 얘기했듯이 앞으로 '갑자기'는 사랑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갑자기' 보게 된 아름다운 그 자취에 취해 있는 향연 참석자들을 '갑자기' 현실의 바닥으로 내려오게 하는 것이라면, 뒤의 '갑자기'는 그렇게 현실 세계로 내려와서 인간의 평범한 생각을 가지고는 예상치 못한 자리에 '갑자기' 나타나는, 사랑의 화신 소크라테스에 대한 아픈 사랑 이야기에 웃고 울고 하는 향인 참석자들을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또 다른 진짜 현실의 바닥으로 내려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갑자기 사랑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러다 보니까 갑자기 아름다움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몽롱하게 있는데 알키비아데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소크라테스를 내가 사랑하는데 말이죠, 안 받아주니까 괴로워요 하는 그 얘기를 하다가 진짜 막판에 등장한 술꾼들의 갑자기는 이게 다 한여름밤의 꿈이었구나 라는 그런 생각을 하고 집으로 가야 한다. 그러면 지금까지 얘기는 까꿍하고 끝나는 거 아니겠는가.  

이 사람들은 향연의 파장에 맞이해서 갑자기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또 다른 진짜 현실의 바닥으로 내려온다. 역자가 네 번의 갑자기를 얘기한다. 앞에 두 번은 올라가는 '갑자기'이고 뒤에 두 번은 그 아름다운 것 자체에 취해 있던 상황에서 내려오는 것이다.  그러니 플라톤의 대화편은 상승과 하강이라고 하는 모티브를 아주 충실하게 사용하고 있다.  이런 것들은 변증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마지막 '갑자기'에 의해 맞게 된 상황에 대한 등장 인물들의 다음 행보도 작품의 마지막 부분 한 줄 한 줄까지도 주의 깊게 읽도록 읽는 이를 이끈다. 에뤽시마코스와 파이드로스는 몇몇 사람과 함께 떠났고 아리스토데모스는 자신이 잠들었는데 깨어보니 두 시인과 소크라테스가 여전히 술판을 벌이고 있는데 희극을 만드는 기술이 비극을 만드는 기술과 한데 묶인다는 이야기로 소크라테스가 두 시인을 밀어붙이고 있더라 라는 이야기. 이것은 굉장히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는 얘기이다. 조금 이따 설명해보겠다.  결국 아리스토파네스, 아가톤의 순서로 잠이 들고, 그 두 시인이 이제 그 사람이다, 소크라테스만 쌩쌩한 채 다들 잠재우고 떠나 뤼케이온에서 여느 날처럼 하루 종일을 보내고 저녁 때 귀가했다 라는 향연 이야기로 향연 이야기가 끝난다.  그런데 작품 안내에서도 잘 지적하고 있듯이 얼른 보아도 이상한 것은 왜 알키비아데스에 대한 보고가 빠졌을까, 알키비아데스는 갑자기 나타나서 소크라테스 사랑해요 하더니 그 사람이 어떻게 되는 얘기는 없다. 에뤽시마코스나 파이드로스는 몇몇과 함께 떠났다고 했으니 아가톤과 아리스토파네스를 제외한 나머지는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알키비아데스는 왜 사라졌을까.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궁금해할 필요 없다는 이야기일까. 그런데 역자는 또 이런 얘기를 한다. 마지막 화두로 보고된 희극과 비극 이야기가 이 대화편 전체의 주제나 음조, 이야기들의 배치와 발전 등을 이해하는데 어떤 단서가 될 수 있을지 따져보는 것도 읽는 재미와 의미를 더해줄 것이다. 맞는 말이다. 중요한 부분이다.  


《향연》의 파장 부분과 소크라테스의 떠남 부분을 나눴다. 소크라테스가 자리를 떠난 부분부터가 그냥 한 문단이다. "그러자 소크라테스 선생님은 저들을 잠들게 한 후에 일어나 떠나갔고", 다른 사람들을 잠들게 하고 자기는 일어났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혼자만 멀쩡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소크라테스는 깨어 있는 사람이라는 얘기이다. 그게 굉장히 중요한 얘기이다. 앞에서 소크라테스의 독특함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독특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사람 역시 술을 마시고 하더라도, 술을 마시는 건 현실 세계와 이렇게 맞물려 있는 사람인데, 그렇게 마시고 있으면서도 깨어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제정신을 차리고 있는 것이 참 어렵다.  

223d 그러자 소크라테스 선생님은 저들을 잠들게 한 후에 일어나 떠나갔고 (자기도 여느 때처럼 따라갔다고 했네. ) 뤼케이온으로 가서 씻은 후에 다른 때처럼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보내다가, 그렇게 날을 보내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가서 쉬었다고 하네. 

 

그런 다음에 "뤼케이온으로 가서 씻은 후에 다른 때처럼 하루의 나머지 시간을 보내다가, 그렇게 날을 보내고 저녁이 되어서야 집에 가서 쉬었다고 하네." 이제 일상처럼 살아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저들을 잠들게 한 후에 일어났다.  그 앞에 파장이 일어난 다음에 수탉이 울고 있을 때 잠에서 깨었다고 아리스토데모스가 말한다. 그런데 아가톤과 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 선생님이 술을 마시고 있다.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희극을 만들 줄 아는 것과 비극을 만들 줄 아는 것이 같은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 그리고 기술을 가지고 비극을 만드는 자는 기술을 가지고 희극을 만드는 자이기도 하다는 것" 이게 이제 중요한 지점이다. 그러니까 해석이 분분한 대목이긴 한데 각주에는 "진실을 말하는 능력 혹은 성향과 거짓을 말하는 능력 혹은 성향이 한 사람에게 속한다는 역설을 다루고 있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이것을 그냥 좀 상식적인 차원에서 얘기를 해보면 진실을 만드는 것, 거짓을 만드는 것, 비극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희극을 만들 줄도 만드는 자이기도 하다. 비극을 만드는 자는 희극을 만드는 자이기도 하다. 그런데 저는 이걸 이렇게 생각한다. 코미디 작가가 트레지디 작가인가는 특기의 문제이고 전문성의 문제인데, 뭔가를 만드는 사람, 창작 예술을 하는 사람, 소크라테스가 얘기하는 건 진정한 기술(테크네)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으로 뭔가를 만든다고 하는 것은 마땅히 두 가지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것들인 그 두 가지를 다 할 줄 알아야 한다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을 보이기 위해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이 부분은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연결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극과 비극은 전혀 반대되는 것이어서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양극단에 놓여 있는 모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두 개를 다 아우르면서, 희극과 비극 두 개를 아우르는 '극'이라고 하는 것으로 올라가는 자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만드는 기술을 가진 자들이다 라고 이해를 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223d 소크라테스 선생님이 희극을 만들 줄 아는 것과 비극을 만들 줄 아는 것이 같은 사람에게 속한다는 것, 그리고 기술을 가지고 비극을 만드는 자는 기술을 가지고 희극을 만드는 자이기도 하다는 것을 그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밀어붙이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했네. 

지금까지 8번에 걸쳐서 《향연》에 대해서 말했는데 대강의 안내, 정말 안내도 이렇게 허술한 안내가 없다 라는 느낌이 들 정도의 대강의 안내를 제시했을 뿐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최소한 한 번 정도는, 어느 부분이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들었으니까, 한 번 정도는 통독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 생각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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