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2-1

 

2023.09.13 🎤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2-1

커리큘럼

09.06 예술의 목적과 예술론의 학적 위치
09.13 플라톤의 미학
09.20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
10.04 mimēsis
10.11 신플라톤주의와 고전주의 예술론
10.18 maniera grande, cicerone
10.25 Baroque, Rococo
11.01 헤겔과 역사적 예술론
11.08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1):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조르조 바사리
11.15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2): 에르빈 파노프스키, 막스 드보르작

 

교재

강유원(지음), 《에로스를 찾아서 -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한 성찰


제2강 플라톤의 미학

일시: 2023. 9. 13.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345

 

 

《에로스를 찾아서》에 대해서 먼저 얘기를 한다. 이 책을 펴보자. 책 표지에 목차가 적혀 있다. 이것은 강의가 다 끝날 무렵에 설명을 하기로 하고, 이 책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 어떻게 구성이 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여기저기서 살짝 말한 적은 있지만 이 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을 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이 책의 73페이지를 보면 본문의 끝이다. 본문의 끝이 73페이지고 그다음에 74페이지부터 147페이지까지가 주해로 이루어져 있다. 이 책은 본문의 분량과 주해의 분량이 똑같다. 그건 본문과 주해가 형식적으로는 본문에 딸려 있는 것 같지만 주해도 본문과는 달리 독자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는 걸 말한다. 《숨은 신을 찾아서》도 그렇고 《에로스를 찾아서》도 그렇고 보면 성찰 시리즈로 되어 있다. 지금 함부로 말을 해서 나중에 성취하지 못할 까봐 걱정이긴 한데 '무엇을 찾아서'라는 성찰 시리즈의 책을 7권 쓰려고 계획을 세워놓은 게 있다. 두 번째인 책이 《에로스를 찾아서도》인데 이 시리즈를 쓰면서 독자들이 읽고 이해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제가 가지고 있는 책에 대한 생각 그리고 어떤 형식적인 것 내용적인 것 이런 것들을 많이 궁리해서 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하고 있는 방식 중 첫째가 《에로스를 찾아서》는 본문과 주해의 분량이 같다는 것이다. 본문 하나가 따로 있고 주해가 있는데 책을 읽어보면 본문부터 읽게 된다. 그렇게 읽으라고 하는 것이다. 본문을 먼저 쫙 읽고 주를 쫙 읽어도 무방하다. 그다음에 73페이지의 맨 마지막 문장을 보면 "네가 바라보는 미인과 내가 바라보는 미인은 네가 가진 방식과 내가 가진 방식에 얽매여 있다.  너의 아름다움과 나의 아름다움은 다르다. 아름다움은 내 것이요, 사랑은 내 곁에 있다." 

《에로스를 찾아서》 당신이 한 말은 모두 도리에 맞는 말이오!
네가 바라보는 미인과 내가 바라보는 미인은 네가 가진 방식과 내가 가진 방식에 얽매여 있다.  너의 아름다움과 나의 아름다움은 다르다. 아름다움은 내 것이요, 사랑은 내 곁에 있다. 

 

결론이 사랑은 내 곁에 있다는 얘기이다. 주관적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사랑스러우면 그만이고 내가 예쁘면 그만이고 내가 좋아하면 그만인 것이다. 사실 그게 주관적 아름다움이다. 본문의 주제는 주관적 아름다움에 대한 선언이다.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건 객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주해의 147페이지 보면 "고전기 아테나이에서 건축된 파르테논 신전은 그 앞에 서 있던 당대 사람들에게 세계의 의미를 열어주고 진리를 드러냈을 뿐 현대의 희랍인들에게는 관광자원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과거는 낯선 나라'인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타인도 낯선 나라이다. 모두 자신의 세계 안에 닫혀 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나에게 읊조리는 독백일지도 모른다. " 고전기 아테나이에서 건축된 파르테논 신전은 누구나 다 뭔가 아름다움의 영원한 기준이라고 생각한다. 있긴 있는 것 같은데 우리가 그걸 알아낼 수는 없다는 얘기이다. 닫혀 있는 것이고 낯선 나라이다.  그러니까 이 주해의 마지막 내용은 아름다움이 객관적으로 있기는 있는데 우리가 그것에 도달하는 건 참 어렵다는 얘기이다. 그러면 본문은 아름다움과 사랑은 나의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주해의 마지막은 객관적인 아름다움이 있는 것 같은데, 그 객관적인 아름다움의 사례가 가장 유명한 파르테논 신전이다. 있기는 있는 것 같은데 우리가 그것에 도달하는 건 어렵다는 얘기이다. 이것은 회의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 미가 있다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본문과 주해는 마지막에 주장하는 바가 다르다. 주해는 본문의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쓴 것 같지만 그것 자체로 독자적인 내용을 갖고 있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47
고전기 아테나이에서 건축된 파르테논 신전은 그 앞에 서 있던 당대 사람들에게 세계의 의미를 열어주고 진리를 드러냈을 뿐 현대의 희랍인들에게는 관광자원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과거는 낯선 나라'인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타인도 낯선 나라이다. 모두 자신의 세계 안에 닫혀 있다. 내가 그대를 사랑한다는 것은 내가 나에게 읊조리는 독백일지도 모른다.  

 

그다음 이건 형식적인 부분인데 이 책에서 어떤 내용을 인용할 때는 내용을 가령 "강유원, 《에로스를 찾아서》 9페이지" 이렇게 인용을 하는 게 아니라 9페이지에 보면 "하늘 한구석의 미인을 바라본다."로 되어 있다. 그 챕터 제목이 계속 붙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인용할 때는 이제 선생님에게 배운 사람은 인용할 때 페이지로 인용하지 않고 에로스를 찾아서, 하늘 한구석의 미인을 바라본다 이렇게 한다.  그다음 주해에 있는 것을 인용할 때는 페이지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주해 7, 주해 9 이런 식으로 인용을 하면 된다. 이제 절대 번호이다. 《숨은 신을 찾아서》를 가지고 계신 분은 짐작하겠지만 제가 쓴 《숨은 신을 찾아서》와 《에로스을 찾아서》는 페이지 부호가 아니라 절대 부호를 사용한다. 말하자면 절대 인덱스를 사용한다. 플라톤의 책은 스테파누스 넘버를 쓴다. 《향연》을 처음에 읽는 사람이 이제이북스에서 나온 향연 115페이지입니다 라고 말하면 우리 아 무식하구나를 금방 알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 그런 걸 우리가 스테파누스 넘버라고 그러듯이 절대 인덱스를 사용한다. 찾아서 시리즈에서 뭔가를 인용한다고 할 때는 주해 몇 번, 그다음에 앞에 나오는 챕터 제목을 달면 되겠다. 

그다음 이건 이제 이 책을 쓴 사람만이 얘기해 줄 수 있는데, 이 책은 본문을 다 쓰고 나서 거기에다가 주해를 붙인 것이 아니다. 주해부터 썼다. 주해를 쫙 써놓은 다음에 그 주해를 보면서 본문을 쓴 거라고 할 수 있다. 주해가 이론적인 것이다.  주해에 들어있는 내용은, 제가 책을 읽으면서 인용해야 되는 것들을 인용한 것으로 제가 다 독서 카드로 써놓은 것이다. 그 독서 카드를 놓고 목차를 구상한 것이다. 


주해 1번부터 보자. 소식의 《적벽부》 전체를 번역해 놓았다. 이것도 제가 다른 사람들이 번역한 것들을 참조하고 제가 알고 있는 것을 해서 번역을 했다. 그다음에 주해를 보면 76페이지에 "손님이 기뻐하여 웃고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따르니 안주와 과일을 이미 다하였고 술잔과 소반이 낭비하였다. 서로 배 가운데 베고 깔고 누워서 동쪽이 이미 환하게 밝음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되어있다. 소동파의 적벽부는 "임술년 가을 7월 16일 소자가 손님들과 함께 배를 띄우고 적벽 아래에서 놀았다."로 되어있다.  놀았다. 소동파의 적벽부는 소동파가 적벽 아래에서 논 것에 관한 얘기이다. 그러면 놀이가 무엇인가. 주해 2번 "주관적 심성이 객관에 작용함으로써 일종의 의미체를 일회적으로 형성해내는 활동을 '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주해 1번, 2번이 따로 되어 있는 게 아니라 이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문과는 무관한 것이다. 이렇게 놀았다. 《호모 루덴스》를 참조하라 그 다음에 주해3번 "동파가 적벽 앞에서 손님과 함께 배를 띄우고 부른 노래는 《초사》, <구가>, '상군편'에 나온 구절에서··” 이렇게 해서 주해 3번까지가 소동파 얘기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
손님이 기뻐하여 웃고 잔을 씻어 다시 술을 따르니 안주와 과일을 이미 다하였고 술잔과 소반이 낭비하였다. 서로 배 가운데 베고 깔고 누워서 동쪽이 이미 환하게 밝음을 알지 못하였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
임술년 가을 7월 16일 소자가 손님들과 함께 배를 띄우고 적벽 아래에서 놀았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2
주관적 심성이 객관에 작용함으로써 일종의 의미체를 일회적으로 형성해내는 활동을 '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딱 끊어지고 주해4번 가니까 헤시오도스 《신들의 계보》 이렇게 서지사항만 나와있다. 그러면 여기서부터는 헤시오도스 얘기라는 것이다. 서지사항만 나오니까 얼마나 깔끔하게 끊어주는가. 이렇게 되어있으니 주해에 딱딱딱 읽을 수 있다.  그래서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가 있고 제우스 얘기가 있는데, 82페이지 보면 호메로스 《오뒷세이아》로 되어있다. 여기서부터는 《오뒷세이아》 얘기이다.  굳이 여기서부터 호메로스 얘기입니다, 여기서부터 헤시오도스 얘기입니다 라고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서지사항으로 이것을 나누어 놓았다.  그렇게 해서 쭉 썼는데 아까 읽은 것처럼 주해 47번만,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하고 나서 주해47번만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느닷없는 얘기가 하나 들어가 있다. 이게 결론이다. 그렇게 형식을 만들어 놨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책을 읽을 때 어떻게 읽기를 추천하는가 하면 주해부터 읽으면 된다. 주해를 읽어서 잘 이해가 안 된다 하면 본문 읽어도 죽어도 안 되는 것이다. 주해를 읽고 어느 정도 감이 와야 한다. 저자가 주해를 써놓고 그 주해에 대해서 뭔가 에세이처럼 본문을 썼기 때문에 본문을 읽어봐야 이해가 안된다. 다시 말해서 소동파의 적벽부가 있다. 그런데 지금 여기 나온 것처럼 소동파의 적벽부는 이미 소동파가 뭔가 들은 이야기를 적벽 아래서 불렀다. 그러니까 적벽부도 매개된 이차적 저작이다. 그런데 이 적벽부를 보고 지금 제가 뭐라고 뭐라고 쓴 게 주해에 있는데 이 주제를 놓고 다시 본문을 쓴 것이다. 그러니까 이 본문에 있는 내용은 상당히 많이 거쳐 나온 얘기이다. 따라서 주해부터 읽는 것이 순서에 맞다.  주해를 먼저 읽을 것을 추천한다. 이렇게 쓴 이유는 어차피 이 책을 읽는 사람들 중에 에로스를 찾아서가 포르노 해설서인가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차피 자신의 지적 경험을 넓히고 깊게 하기 위해서 읽는 사람일 테고, 어쨌든 이 책을 잡은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리라고 보고 최대한 말을 고급스럽게 다듬고 형식을 정교하게 만들어서 현대 21세기 2020년대 한국에서 한국어 네이티브 스피커가 할 수 있는 가장 정교한 한국어를 구사해보고자 생각했다. 학술적으로는 주해에서 그리고 고급 에세이로는 본문에서 그것을 구사해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읽어보면 느낌이 올 것이다. 


이제 본문 문체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주해 82페이지를 보자. 오늘 플라톤의 미학은 당연히 주해에 있는 내용을 설명을 한다. 플라톤의 미학은 미감적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될 제일 중요한 시작이다. 플라톤의 미학은 미감적 삶을 위한 이론적인 토대로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그다음에 관객theatēs들의 쾌락hēdonē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배운 바이다. 그러면 예술학을 위해서는 우리가 다음 주에 《향연》을 할 것이고 그다음에는 미메시스mimēsis를 하는데 미메시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에 나오는 얘기니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만 4번을 하는 것이다. 미학과 예술학의 기본이다. "플라톤이 《국가》에서 시와 시인을 추방하고자 한 것은 예술에 대한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의 경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시인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이 부분 중요하다.  플라톤은 시에 대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시와 시인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굉장히 강하다. 그리고 거기서 말하는 시는 드라마를 말하는데 드라마의 영향력이 크니까 드라마를 자꾸 보다 보면 사람들이 이성적인 사유를 하지 않으니까 그게 문제가 될 것 같아서 이성적 사유를 해야만 민주적 국가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 터인데 그러지 않을까 봐 걱정되어서 시인을 추방해야 된다 라고까지 말을 했던 것이다. 《플라톤, 현실국가를 캐묻다》는 작년에 출간한 책인데 그 부분에 해당하는 것을 보면 이 책의 뒷부분을 참조하면 된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1
플라톤이 《국가》에서 시와 시인을 추방하고자 한 것은 예술에 대한 적대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헤시오도스와 호메로스의 경우에서 분명히 알 수 있듯이 시인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국가》에 보면 "만약에 자네가 서정시에서든 서사시에서든 즐겁게 하는 시가를 받아들인다면, 자네 나라에서는 법과 모두가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여기는 이성 대신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왕 노릇을 하게 될 걸세." 즉 인생을 살면서 시가 즉 드라마나 노래 이런 것만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이성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과 괴로움 즉 인간의 파토스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라는 얘기이다. 그게 걱정이더라 그런 말이다. 그게 바로 이제 플라톤은 시라고 하는 것은 이성적인 국가,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이성적인 국가를 위해서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국가》에서 아주 명료하게 얘기를 한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1
만약에 자네가 서정시에서든 서사시에서든 즐겁게 하는 시가를 받아들인다면, 자네 나라에서는 법과 모두가 언제나 최선의 것으로 여기는 이성 대신에 즐거움과 괴로움이 왕 노릇을 하게 될 걸세. (《국가》, 606e~607a) 

 

그런데 여기서 이제 의문이 생기는 것이 있다. 플라톤은 시와 시인을 추방까지는 아니어도 이성적 국가를 통치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장애물이라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왜 플라톤의 미학이라는 것이 성립되었는가. 플라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미학을 이야기한 사람이 아닌데, 왜 플라톤의 미학이라고 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얘기하고 있는가. 첫 번째 답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자기가 그것을 추방해야겠다고 생각을 한 나머지 굉장히 열심히 연구를 한 것이다. 그런 그런 측면이 굉장히 강하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니까 진정한 아름다움과 진리 이런 것에 대해서 어느덧 자기가 굉장히 연구를 많이 해버린 것이다. 그래서 85페이지를 보면 "이처럼 플라톤은 자신이 살았던 현실의 아테나이에 대한 반성에 위에서 설계한 정치 체제에서 시와 시인을 용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으며, 아름다움과 운문에 대한 철저한 배척을 주장하였으므로 그의 대화편들에서 미에 관한 어떤 이론들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이론은 그 어느 철학자들의 그것보다도 더 오랫동안 미학과 예술이론의 근거가 되어왔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1
이처럼 플라톤은 자신이 살았던 현실의 아테나이에 대한 반성에 위에서 설계한 정치 체제에서 시와 시인을 용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으며, 아름다움과 운문에 대한 철저한 배척을 주장하였으므로 그의 대화편들에서 미에 관한 어떤 이론들을 찾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지만 플라톤의 이론은 그 어느 철학자들의 그것보다도 더 오랫동안 미학과 예술이론의 근거가 되어왔다. 

 

그다음에 "카시러(Ernst Cassirer)는 이러한 역설적 상황을 지적한다." 제가 여기서 인용한 에른스트 카시러의 책 《괴테와 플라톤》, 이 책에서 인용한 사람들은 일단 업계에서 최고급의 학자들이다. 아니면 인용하지 않는다. 저는 카시러는 인용하지만 카시러보다 아랫사람들은 인용하지 않는다. 에른스트 카시러라는 이름을 오늘 처음 들어본 분도 있을 것이다. 도대체 세상에 그동안 어디에서 살았던 것인가, 어둠 속에서 살았던 것이다. 학의 세계는 밝고 명랑한 세계이다. 카시러가 있는 세계이다. 《괴테와 플라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근본적으로 이제까지 철학사에 나타난 모든 체계적 미학이 플라톤주의였고 플라톤주의로 존재해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지나친 주장이 아니다." 체계적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에 있다. 이것은 새삼스럽게 논증할 필요가 없는 그런 얘기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1
근본적으로 이제까지 철학사에 나타난 모든 체계적 미학이 플라톤주의였고 플라톤주의로 존재해 왔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결코 지나친 주장이 아니다(《괴테와 플라톤》, '에이도스와 에이돌론', 부북스, 2016). 

 

그다음 문단은 제가 첫 시간에 말한 것처럼 미학이란 무엇인가를 다루고 있다. 여러분들은 가령 어디서 미학이란 무엇인가 라고 할 때는 여기 86페이지에 있는 마지막 문단을 인용을 하면 된다. "미란 무엇인가, 무엇을 미로 규정할 것인가, 미라는 속성을 가진 대상이 자체로 있는가━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객관적 이해에 대한 탐구가 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수행하는 학문분과가 미학이다." 깔끔하다. 내용은 몰라도 어쨌든 이렇게 깔끔하게, 알기 쉽게 설명돼 있다기보다는 깔끔하게 정리를 해놓았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1
미란 무엇인가, 무엇을 미로 규정할 것인가, 미라는 속성을 가진 대상이 자체로 있는가━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을 객관적 이해에 대한 탐구가 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 수행하는 학문분과가 미학이다." 

 

그다음에 주해 13번을 보자. "플라톤의 미학은 초월적 미학으로 규정되곤 한다. 이 규정에 따르면 인간의 감각 영역을 넘어선 초월적 영역의 아름다움 자체가 있으며, 이를 추구하는 행위가 에로스이며 이를 행하는 이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 즉 에로티코스erōtikos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거기서 중요한 말은 감각 영역을 넘어선 초월적 영역의 아름다움 자체가 있다. 그게 초월적 미학이라는 말의 핵심이다.  그러면 감각 영역으로 알 수 없는 것, 그게 그냥 아는 것이 초월적인 것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3
플라톤의 미학은 초월적 미학으로 규정되곤 한다. 이 규정에 따르면 인간의 감각 영역을 넘어선 초월적 영역의 아름다움 자체가 있으며, 이를 추구하는 행위가 에로스이며 이를 행하는 이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 즉 에로티코스erōtikos라는 것이다." 

 

지난번에 얘기했는데 초월적이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 지나치게 무겁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초월적이라고 하는 말은 황당하고 멀리 동떨어져 있고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감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아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많이 있다. 그냥 알겠더라니까, 촉이 왔어 이런 것들. 여러 사람의 촉이 동시에 오면 그것은 객관적으로 촉으로 인정할 수 있다.  이런 것들도 조금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초월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초월적이라고 하는 말을 지나치게 무겁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 초월적인 것은 감성적인 것, 감각적인 것하고 별개로 있는 게 아니다. 그것으로부터 나오지만 질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초월적인 것에 대해서 오해를 하면 안 된다. 느닷없이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인간이 창출해내는 것이다. 지금 플라톤이 얘기하고 싶은 게 이런 것이다. 그러니까 플라톤의 에이도스eidos는 초월적인 것인데 사람들이 서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게 해주는 도구라고 얘기를 한다. 왜 그런 거 있잖아 라고 말해봐야 소용이 없다. 정확하게 언어로서 표현이 되면 그게 의사소통이 된다. 의사소통이 된다는 건 그 단어 아래로 묶이는 그 모든 것들이 함께 전달된다는 걸 의미한다. 이것을 우리가 그런 의미에서 에이도스eidos를 초월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초월적이라는 단어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이건 core knowledge에 해당하니까 외워 놔야 한다. 플라톤에서 초월적인 것에 대한 개념을 외워 놓으면 이후에 철학 책에 나오는 모든 초월적인 것의 기준이 된다. 플라톤의 초월적인 것에 대한 플라톤의 개념 규정을 알고 있어야 의사소통이 된다. 

여기있는 사람은 다 우리 한국어 네이티브 스피커이다. 그러니까 '갬성적'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딱 안다. 갬성이라는 한국어를 가지고 굉장히 많은 것을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그럴 때 이 갬성이라는 단어가 초월적 메타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초월적 은유metaphor로서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플라톤은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다 동의할 수 있는 누구나 다 그걸 보면 아름답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아름다움이 있다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말해버리면 안 된다. 

초월적인 것이 철학의 기본 개념이다. 이 개념을 알고 있어야 미학도 되는 것이고 언어학도 되는 것이고 학문이 되는 것이다. 고상한 학문이라는 말이 여기 있다. 고상한 학문을 우리가 본 적이 없다. 고상한 학문은 감각으로 알 수 없다. 이삭토스트의 '갬성적' 느낌은 이삭토스트를 먹어봤으니까 알 수 있다. 그런데 그건 이삭토스트에서 시작이 되었지만 이삭토스트 바깥으로 나와서 사실은 이삭토스트 위에 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초월적인 것이다. 초월이라고 하는 게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라진 게 아니다. 그 사물 위에 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거울을 볼 때 거울에 비친 나라고 하는 모습이 있기는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나는 나를 벗어나 있다. 그런 것도 우리는 나를 초월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자기초월적인 판단인 것이다. 거울을 보면서 그런대로 괜찮네 라고 말하는 건 자기초월적 판단이다. 그러면 그런대로 괜찮네 라는 판단이 나에서 시작이 되었는데 나를 벗어나 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우리는 다 초월이라고 말한다. 

 

고상한 학문이라고 하는 것도 어떤 학문 한 조각에서 시작이 되었다. 그런 것들이 이렇게 모여서 고상한 학문이라고 하는 에이도스eidos 개념을 만들었다. 그러면 고상한 학문이라고 하는 conception이 만들어졌다. conception은 새로운 것이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conception의 과정을 거쳐서 고상한 학문이라는 concept가 만들어졌다. 그러면 그 고상한 학문은 특수한 학문 조각들로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형성이 되었는데 그게 이제 다른 것으로 적용이 돼서 이게 고상한지 아닌지를 판별해보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랬을 때 그 고상함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그러면 우리가 이 책이 굉장히 소중해 라고 지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고상한 학문을 할 자유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고상한 학문을 할 자유를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건 굉장히 추상적이다. 그리고 그 얘기를 듣고 공감할 수 있고 정말 심각한 문제구나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고상한 학문 쪼가리에서 추상화 단계를 거쳐서 이 학문의 개념에 이르렀고 이것이 어디에나 적용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성적 사유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것이 이념 전쟁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이어트 적은 이삭토스트 이렇게 말해도 되지만 그렇다면 그런 달달한 감성을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식 일반이 다이어트의 적인가 라고 추상화해서 말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구체적인 사례를 들지 않으면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추상화 능력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플라톤의 초월적 미학이라고 하는 것은 추상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에로티코스erōtikos라고 하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 하게 될 에로스의 사다리는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화 단계로 올라간다. 즉 미학이라고 하는 학문은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아름다움에서 시작해서 구체적인 것에 들어있는 아름다움을 끄집어내서 아름다움의 결정체를, 아름다움이 모여서 수정처럼 크리스탈라이즈된 어떤 것을 찾아내는 작업이 플라톤의 초월적 미학이라고 하는 것에 구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월적인 것하고 이 감성적인 것의 연결고리를 항상 생각을 해야 한다. 

《필레보스》를 인용한 것을 잠깐 보자. "내가 말하고 있는 건, 이것들은 다른 것들처럼 무엇인가와 비교해서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라, 언제나 그 자체로 본성상 아름다운 것이며", 본성상 아름답다라고 하는 말은 일단 모든 아름다운 것들로부터, 구체적인 사물들로부터 이끌어내서 추상에서 결정체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그것을 이 플라톤은 본성상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본성상 아름답다는 게 나면서부터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 이제 아름다움 아닌 것은 더 이상 그 안에 끼어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 말이다. 이 사람의 얘기를 그렇게 이해해야 한다. "뭔가 특유한 즐거움을 지니고 있어서, 간지러워서 긁는 것과는 어떤 점에서도 같은 점들이 없다는 것일세." 간지러워서 긁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그런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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