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3-1
- 강의노트/책담화冊談話 2021-25
- 2023. 9. 22.
강유원의 책담화冊談話(https://booklistalk.podbean.com)에서 제공하는 「강유원의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을 듣고 정리한다. 2023.09.06~2023.11.15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에서 진행되는 강의이다.
2023.09.20 🎤 미학, 예술학, 예술철학 3-1
커리큘럼
09.06 예술의 목적과 예술론의 학적 위치
09.13 플라톤의 미학
09.20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
10.04 mimēsis
10.11 신플라톤주의와 고전주의 예술론
10.18 maniera grande, cicerone
10.25 Baroque, Rococo
11.01 헤겔과 역사적 예술론
11.08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1):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조르조 바사리
11.15 미술사의 여러 갈래들(2): 에르빈 파노프스키, 막스 드보르작
교재
강유원(지음), 《에로스를 찾아서 -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한 성찰》
제3강.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
일시: 2023. 9. 20.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345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플라톤의 《향연》 얘기를 한다. 교재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부분을 가지고 계속 설명을 해 나간다. 주해 12번 플라톤 《향연》이다. 지난번에 《에로스를 찾아서》를 읽는 방법을 알려주었는데, 책 제목이 나오면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 거기서부터 92페이지 주해 14번 《티마이오스》 부분까지가 한 덩어리의 이야기이다.
주해 13번을 보면서 설명을 한다. 《향연》에는 에로스의 사다리라고 하는 부분 있다. 에로스의 사다리라고 하는 부분 말고 그 앞부분들은 어떻게 읽어야 되는가 하는 것은 지난 8월에 올려놓은 pdocast를 들으면 된다.
"플라톤의 미학은 초월적 미학으로 규정되곤 한다." 초월적이라고 하는 말은 지난번에 얘기한 것처럼, 초월적이라고 하는 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감각 세계와 아주 동떨어진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것으로 생각하면 초월적이라는 말은 영원히 그냥 거짓 세계로 남는다. 그러니까 지금 에로스의 사다리는 우리의 손끝에 닿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최상위에 있는 어떤 것까지 이르는 수직 계열화된 직선, 밑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다. 문제는 플라톤은 그 끝까지 올라가 봤다는 것이다. 그렇게 얘기하면 너만 그거 알고 다른 사람은 어쩌라고, 이게 말하자면 악용되면 엘리트주의가 된다. 엘리트주의의 위험이 있지만, 엘리트주의는 나쁜 건데 엘리트는 나쁜 게 아니다. 엘리트주의는 나빠도 엘리트는 중요하다. 엘리트라는 의식을 갖고 그것에 따라서 자기 내면을 수련하는 것은 중요하다. 엘리트는 끝없이 자기 자신의 내면을 갈고 닦고 초월적인 것을 향해 가고 좀 더 고귀한 것을 내가 향유하면서 살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엘리트이다. 초월적인 것을 초월적인 것을 내 안에 내재화시켜서 그렇게 내재화된 것들을 향유하면서 살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플라톤의 《국가》를 보면 플라톤의 국가를 보면 철학자들은 국가를 다스리는 일에 나서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들을 설득해서 나라를 다스리게 해야 된다 라는 얘기도 나온다.
"초월적 미학"이라고 하면, 초월적인 것이라는 말은 지금 지난번에 여러 차례 강조해서 말했다시피 초월적인 것을 나와는 아무 관계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플라톤에서는 "인간의 감각 영역을 넘어선 초월적 영역의 아름다움 자체"가 있다. 이것을 다 외워야 한다. 이게 표준 definition이니까 이걸 외워서 기억하고 있어야 다른 사람이 이 쓴 거 보고 이거 아닌 것 같은데 하고 이렇게 참조를 해봐야 한다. "감각 영역을 넘어선"이라는 단어에 조심해야 한다. 넘어섰다는 건 감각 영역과는 무관하다는 뜻이 아니다. 감각 영역을 타고 넘어가는 것이다. 넘어선이라는 단어는 나중에 저기 mimesis 할 때 얘기할 것인데, 희랍어 metabasis가 있다. 넘어간다 라는 뜻이다. 메타라는 게 두 번째라는 뜻으로, 두 번째로 간다라는 뜻인데 넘어가다, 우리 말로 순수하게 옮기면 이행하다 라는 뜻이 있다. 가령 이번에 수원 글로벌 평생학습관에 이렇게 《에로스를 찾아서》를 교재로 수업을 들음으로써 아름다움과 예술에 대한 나의 안목이 한 단계 상위 단계로 이행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그 단계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그 단계를 이렇게 품고서 상위의 단계로, 말하자면 수준이 올라간 것을 말하게 된다. 사라지게 되면 metabasis가 아니다. 플라톤에서 초월이라고 하는 개념은 감각적인 것들이 딱 끊어져 내려가는 게 아니라 그 감각적인 것들이 위상전환phase shift, 질적으로 변환을 일으켜서 상위 단계로 올라가는 것을 metabasis라고 한다. 서양 철학에서 가장 규정하기 어렵지만 뻔한 말이 변증법인데, 변증법적 상승이라는 단어를 metabasis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플라톤에 있어서 "인간의 감각 영역을 넘어선 초월적 영역의 아름다움 자체가 있다"라는 말은 초월적 영역으로 이행해 간다는 말이다. 그 말을 다르게 말하면 인간의 감각이 초월적 영역으로 이행해 갔을 때 인간은 아름다움을 느끼거나 알 수 있다는 얘기이다. 느끼거나 아는 거나 같은 말이다. 느낀 다음에 아는 게 있는 것이다. 가령 누가 한우 1++을 먹었다고 하자. 이보다 더한 맛은 없을 것 같아 라고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이건 그냥 나의 느낌일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 느낌을 진리라고 엄폐하는 것일 뿐이다. 진리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이와 비슷한 맛을 놓고 객관적으로 이렇게 놔야 되는데, 최상위에 있는 것은 그게 진리인지 아닌지를 식별할 수 있는 부호가 없다. 마찬가지이다. 이게 진리라는 것을 간주한다는 것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3
플라톤의 미학은 초월적 미학으로 규정되곤 한다. 이 규정에 따르면 인간의 감각 영역을 넘어선 초월적 영역의 아름다움 자체가 있으며, 이를 추구하는 행위가 에로스이며 이를 행하는 이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 즉 에로티코스erōtikos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감각 영역을 넘어선 초월적 영역의 아름다움 자체가 있으며, 그런데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냥 내가 있다고 그것이 참이라고 참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이건 굉장히 무서운 얘기인데 인식론은 영어 표현으로 in the final analysis라고 한다. 직역을 하면 마지막 분석, 최종적 분석이라고 한다. 이것을 숙어로 찾아보면 맥락에 따라 '결국에는'으로 해석을 한다. 무엇이 진리인가 라고 누가 뭔가를 물어보면, 결국에는 진리의 표준은 진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냥 자기가 참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진리일 수밖에 없다. 이게 인식론의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미학적인 것에도 마찬가지이다. 객관적으로 아름다움이 있다고 여겨서 그것이 어떠 어떠한 요소들로 구성돼 있는가를 따져 묻는 게 미학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여기 《티마이오스》에 나온 것처럼 미라고 하는 건 비례가 있어야 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보면 사람이 이렇게 서 있어서 비례를 맞추고 한다. 그런데 비례를 갖춘 것이 아름다움의 요소다 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정했다. 그것이 잘 정해졌다고 판단을 하려면 그보다 상위에 있는 상위에 진리가 있어야 한다. 고등학교 때 공부 잘했네 라는 말은 대학교에서 하는 것이고, 중학교 때 열심히 좀 했나 보다 라는 그 얘기는 고등학교 선생님들이 판단하는 것이다. 그러면 비례를 잘 갖춘 것이 아름답다 라고 말하려면 비례를 잘 갖춘 것이 아름답다 라는 것을 포함해서 그보다 더한 아름다움을 갖춘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그건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비례를 갖춘 것이 아름답다고 약속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비례를 갖춘 것이 아름답다 라고 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것의 속성이라고 하는데, 그래서 거기서 미학이 성립하는데, 그것을 궁극적으로 밀고 가면 그것이 진리라고 간주되는 것일 뿐이다 라고 되니까 결국에는 객관적인 미의 기준이 in the final analysis로 가면 주관적인 것으로 빠져버린다. 간주가 된다는 말이다. 거기에서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사이에 전도가 일어난다.
허블 망원경보다 더한 제임스 웹 망원경이 있다. 안드로메다 은하에 관한 새로운 정보들이 막 쏟아져 들어온다. 허블 망원경으로 찍은 것이 안드로메다의 참다운 모습이라고 우리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허블 망원경보다 더한 제임스 웹이 딱 떠버리니까 허블 망원경이 거짓이 되었다. 마찬가지이다. 인간의 감각 영역을 넘어선 초월적 영역의 아름다움 자체가 있다고 하는데, 감각 영역을 넘어선 초월적 영역보다도 더 상위의 것이 뭔가 있어버리면 이게 아름다움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게 된다. 현재로서는 초월적 영역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그런데 제임스 웹이 보내온 안드로메다 은하의 사진이라고 하는 것이 그게 진짜로 안드로메다 은하의 참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없다. 잠정적으로만 그게 참 모습이라고 믿고 있을 뿐이다. 참 모습이라고 확정된 게 아니라 믿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참이라고 간주하고 있을 뿐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진리는 진리라고 확정된 것이 아니라 참된 것으로 간주된 것일 뿐이다. 2 곱하기 2는 4라고 하는 것이 참된 것으로 간주되어 있는 것이지 그것이 참이라고 확정되는 것은 그냥 약속하는 것이다. 2 곱하기 2가 4가 아니면 지금까지 우리가 약정에 따라서 이루왔던 모든 것을 무너뜨려야 된다. 그러니까 초월적인 것이라고 하는 게 우리 인간의 감각으로부터 시작해서 감각을 타고 넘어가서 뭔가 최상위의 것으로까지 올라가 있는데 그런 점에서는 우리의 감각을 벗어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의 감각을 타고 넘어가서 우리가 더 이상 그 위로 도달아갈 수 없는 final analysis 단계에 있는 것이다 라고 여겨야만 그것을 우리가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 플라톤이 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게 그것이다. "이를 추구하는 행위가 에로스이며 이를 행하는 이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 즉 에로티코스erōtikos"이다.
그다음에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앎의 것들과 함께 있으면서 빛을 발하네"라고 말한다. 함께 있다 라는 말에서 앎이라고 하는 것 옆에 있다는, 같은 차원에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앎이라고 하는 것은 참다운 진리로서 여겨지는 것들을 말한다. 《필레보스》에서는 "내가 말하고 있는 건, 이것들은 다른 것들처럼 무엇인가와 비교해서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라", 무엇인가와 비교해서 아름다운 것은 우리는 상대적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언제나 그 자체로 본성상 아름다운 것들이며", 본성상 아름다운 것은 절대적 아름다움이다, "뭔가 특유한 즐거움을 지니고 있어서", 특유하다는 것은 다른 것과 나누어 가질 수 없는 그러니까 절대적인 것이고, "간지러워 긁는 것과는 어떤 점에서도 같은 점들이 없다는 것일세." 여기서 간지러워 긁는다는 것은 피상적인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빛깔들도 아름다운 것들은 이런 특성과 즐거움들 또한 갖추고 있네." 그 다음에 넘겨보면 "아름다운 것들은 절대적으로 존재하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쾌락을 준다." 거기서 이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순정한pure 향유를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랑에 민감한 사람 또는 진리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 불린다." 플라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erōtikos라고 부르고 진리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 그 진리는 alētheia라고 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 사랑에 민감한 사람인 동시에 진리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이 절대적인 만족을 줌과 동시에 진리와도 같은 것임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윤리적 규준에도 합당한 것임을 함축할 것이다." 이건 플라톤의 고유한 주장이다. 아름다움이 곧 진리이고 그것이 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이다 라고 하는 게 플라톤 고유의 특유의 주장이다. 우리는 동의 못하는 부분이다.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것이고 진리는 진리고 윤리는 윤리이다. 플라톤은 왜 이렇게 얘기했을까. 플라톤의 제일 관심사는 윤리적으로 올바른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 플라톤의 관심사가 10개다 라고 하면 한 7개 정도는 윤리적으로 올바른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진리라든가 아름다움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윤리적으로 올바른, 궁극적인 선(올바름)과 동일시함으로써 사람들을 부패해서 방지할 수 있다. 일종의 실천적인 목적이 있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3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앎의 것들[여타의 이데아들]과 함께 있으면서 빛을 발하네"(250d~250e). 이 언명에 따르면 아름다움은 앎 자체와 같은 차원에 있는 것이다. 《필레보스》에서는 아름다움 자체에 대해 더욱 확고하게 말한다. "내가 말하고 있는 건, 이것들은 다른 것들처럼 무엇인가와 비교해서 아름다운 것들이 아니라, 언제나 그 자체로 본성상 아름다운 것들이며, 뭔가 특유한 즐거움을 지니고 있어서, 간지러워 긁는 것과는 어떤 점에서도 같은 점들이 없다는 것일세. 그리고 빛깔들도 아름다운 것들은 이런 특성과 즐거움들 또한 갖추고 있네"(51d). 아름다운 것들은 절대적으로 존재하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쾌락을 준다. 이러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랑에 민감한 사람(애정이 강한: erōtikos)"(《국가》, 474d) 또는 "진리(alētheia)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475e)이라 불린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 사랑에 민감한 사람인 동시에 진리를 구경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아름다움이 절대적인 만족을 줌과 동시에 진리와도 같은 것임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윤리적 규준에도 합당한 것임을 함축할 것이다.
그다음에 "플라톤에서 아름다움 자체가 존재하는 방식은 일관적이지 않다. 플라톤은 그것의 현상 세계의 사물들과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은 지난번에 관여와 결합이라는 말을 했었다. 이렇게 관여와 결합 얘기를 해버리면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더러운 어떤 것이 있다 할 때 이 더러운 것에도 아름다움이 조금이라도 묻어 있나요'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면 '있겠죠'라고 말하면 사람들이 잘 안 믿을 것 같다. 그런 경우에 분리되어 있다 라고 말하지만 플라톤이 생각하는 가장 기본적인 입장은 현상 세계의 사물들과 아름다움 자체는 서로 결합되어 있고 관여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임을 생각해 두면 되겠다. "《향연》에서 이야기하는, 갑자기 직관하게 되는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것이 그것이다." 아무리 여기서 플라톤은 그것이 분리되어 존재에 있다 라고 말은 하지만 그래도 플라톤의 기본 입장은 관여와 결합이다 라고 얘기를 했다. 관여와 결합이라고 하면 그것을 우리가 온전히 가질 수 있는가. 문제는 이것이다. 감각적인 것이 여기 있는데 metabasis을 해서 이제 초월적인 것으로 갔다. 그러면 지금 여기 나오는 것처럼 초월적인 것을 어느 날 갑자기 문득 알게 되었다. 분명히 이것은 우리가 아는 것이다. 또는 진리로서 아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안다고 말했는데 그러면 우리가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이것을 알 수 있을까. 그 문제가 지금 여기서 제기된다. 적당치는 않지만 쉬운 예를 하나 들어보면 최근에 오뚜기 진라면 순한 맛을 먹을 때마다 제가 최상의 맛을 찾기 위해서 다양한 조리 방법을 시험해 본다. 그랬는데 지난번에 언젠가 한번 조리했을 때 그 방법이 생각나서 그대로 해보려고 그러니까 그 맛이 안 나온다. 그러면 그 맛은 내가 안 했던 것일까. 지금 내가 뭔가를 하는데 이건 예전에 했던 것과 비슷하긴 한데, 내가 막연히 기억하고 있는 어떤 그 맛을 계속 지향점으로 놓고, 그것을 이 초월적인 것이라고 하는 지향점으로 놓고 계속해서 이것을 접근해가려고 계속 한다. 그러니까 이제 한 번 했는데, 지난번과 비슷하긴 한데 그것은 아니네 라고 하는 사례들이 무수히 생기게 된다.
플라톤이 지금 그 얘기를 하는 중이다. 그래서 접근을 해서 자기가 한 번 정도는 알았던 뭔가가 있는데, 한 번 정도는 알았던 그 뭔가에 다시 도달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접근을 해갔는데, 그렇게 계속해서 접근을 했던 시도들이 계속 흩어져 나와서 비슷한 것들이 무수히 이렇게 쌓였다. 그러면 이 비슷한 것들은 초월적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초월적인 것을 지향해서 나온 그것을 향해서 추구했던 것의 산물이다. 그래서 초월적인 것을 비슷하게 해서 지향해서 했던 이것들을 모방mimēsis이라고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어차피 초월적인 것은 내가 한 번은 알았다. 그래서 이제 접근을 해서 비슷한 것들을 계속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러면 어차피 한 번 내가 알았던 초월적인 것을 하지 못할 바에는 비슷한 것들도 안 하고 그냥 대충 여기로 안 가고 근처에서 깔짝깔짝하면서 살겠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게 그냥 이론적인 게 아니라 플라톤을 읽을 때 이 부분이 좀 어려우니까 사람들이 이 지점을 못 찾아내는데, 플라톤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냥 초월적인 것이 있다. 그리고 그것에 우리는 접근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비슷한 것들만 만들고 이건 mimēsis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가 가능하려면 아까 말한 것처럼 감각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관여koinōnia되어 있어야 한다. mimēsis가 가능하다고 하려면 관여해야 한다. 초월적인 것이 감각적인 것에 관여를 해야 된다는 말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3
플라톤에서 아름다움 자체가 존재하는 방식은 일관적이지 않다. 플라톤은 그것의 현상 세계의 사물들과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향연》에서 이야기하는, 갑자기 직관하게 되는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것"(210e)이 그것이다. 이는 현전하는 사물들과 자신을 조금도 나누어 갖지 않는, 분리되어 존재하는 실재이며, 그런 까닭에 얼핏이라도 이것을 보았다 해도 인간은 이 실재를 완전하게 재현할 수 없고, 이 실재를 본으로 삼아 모방할 수 있을 뿐이다.
이렇게 정리를 하면 이제 이론적으로 준비가 됐다. 그러면 그다음에는 누군가의 안내를 받아서, 예를 들면 《향연》에 나오는 소크라테스가 디오티마의 얘기를 듣고 안내를 받아서 자기가 그걸 맛보았다. 그게 1번이다. 안내를 받아서 사다리를 이용하여 metabasis를 해야 한다. 일단은 이걸 한 번 해야 된다. 이를테면 이런 이론을 플라톤이 마련을 해놓고, 지금 에로스의 사다리 얘기는 그냥 이런 이론이 있어요 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런 이론을 마련해 놓고 연습을 해야 된다. 그러니까 플라톤의 《향연》이라는 대화편의 주제는 크게 보면 연습이다. 연습이라는 단어로 시작을 한다. 굉장히 중요하다. 《향연》이라는 대화 편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플라톤의 《향연》이라는 대화편은 뭘로 시작을 하는가를 봐야 한다. 처음에 아폴로도르스의 "나는 자네들이 묻고 있는 일에 대해서 이야기할 준비가 꽤 되어 있다고 생각하네"(172a)가 첫 문장인데, 희랍어 원문을 보면 연습을 안 거친 상태가 아니네, 연습을 꽤 했다는 말이다. 연습meletē가 《향연》의 첫 번째 단어이다. "연습을 꽤 안 거친 상태가 아니네. 자네들이 묻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로 되어있다. 그러면 metabasis를 수행한다는 것이 meletē이다. 지금 《향연》이라고 하는 텍스트로 올라오는 사다리를 이렇게 마련해서 주니까 그걸 이용해서 《향연》이 이런 내용이구나 하는 것을 《향연》의 깊은 뜻으로 이르러 가는 metabasis를 연습meletē하그러니까 한 번 그 연습을 거쳐서, 여기 있는 것처럼 초월적인 것을 안 사람은 이제는 다시는 못 내려간다. 그러니까 2번은 안 내려가기 위해서, 소극적으로는 안 내려가기 위해서고 적극적으로는 지속적으로 초월적인 것을 향유Genuss하기 위해서이다. Genuss하기 위해서 계속 연습meletē을 해야 한다. 그러면 이 초월적인 것을 안 다음에 그것에 접근해서 비슷한 것을 계속 mimēsis한 것들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 meletē이다. 계속 만들어내는 사람은 erōtikos이다. 그러니까 단박에 깨우치는 돈오돈수(頓悟頓修)라는 건 없는 것이다. 그냥 점오점수(漸悟漸修)이다. 날마다 도을 닦아서 깨우치고 그다음에 계속 도를 닦아야 한다. 《향연》에서 안내를 받아서 metabasis를 못하는 사람이 알키비아데스이다. 알키비아데스는 영원히 욕 먹는다.
플라톤에서는 진리와 아름다움과 올바름이 결국 이 자리에 같이 있다. 가는 방법을 말해주면서 동시에 이것을 이용해서 올라가고 계속해서 이 초월적인 것을 계속 유사한 것이라도 낳아놓고 산출해내는 것이 진리를 창출하고 아름다움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말을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게 공부이다. 그래서 공부란 초월적인 것을 익혀서 연습을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향연》이 단순히 미학, 예술론 그런 게 아니라 진리와 아름다운 것은 초월적인 것인데 그 초월적인 것을 전면적으로, 우리의 실존에 있어서의 전면적으로 그것을 수행하고 알아차리고 그것을 내 몸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계속 연습하는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그런 것이다. 예술론의 전범으로서의 《향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진리론의 전범이기도 한 것이고 올바른 삶의 전범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한다.
그래서 88페이지에 "그런 까닭에 얼핏이라도 이것을 보았다 해도 인간은 이 실재를 완전하게 재현할 수 없고, 이 실재를 본으로 삼아 모방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일단 이 초월적인 것이 본paradeigma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또는 뭔가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먼저 해야 될 것은 이 분야에서 in the final analysis, 즉 하이엔드로 놓여 있는 게 무엇인가를 봐야 한다. 처음에 결국 객관적으로 아름답다 라고 하는 것은 주관적인 영역과 뒤섞여 있다고 얘기했다. 초월적인 것을 진리로서 알았다. 그것에 계속 접근해서 연습을 해서 mimēsis를 만들어보는 것이 바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게 되지 않으면 그것은 계속 낯선 진리이다. 참다움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다 그것에 이르려고 노력하는, 그 영역에서 하이엔드에 해당하는 것까지 가봐야 한다. 탐구를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는 그 영역에서 하이엔드까지 가봐야 되는 것, 그게 바로 이제 에로스의 사다리라고 할 수 있다.
89페이지를 보자. "형상은 현상과 분리되어 있으나 현상에 관여하고 물체와 결합하여 물체에 내재되기도 한다."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초월적인 것, 참다운 것을 말하고, 현상과 분리되어 있다고 플라톤은 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물체의 아름다움의 형상이 관여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아름다움 자체가 아님을 알아야만 지혜로운 사람이다." 즉 아름다움이 묻어 있는 것이다. 또는 그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일 뿐이다. "현상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건 그냥 저급한 듣기 저급한 구경을 말한다, "아름다운 소리나 빛깔 및 모양을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로 만들어진 온갖 걸 반길 뿐, 이들의 사고(마음상태)는 '아름다움(아름다운 것) 자체'의 본성을 알아볼 수도 반길 수도 없을 걸세" 마음 상태라고 말하는 것은 꼭 그 내면의 정신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아까 얘기한 것처럼 자기의 실존이 전면적으로 아름다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3
형상은 현상과 분리되어 있으나 현상에 관여하고 물체와 결합하여 물체에 내재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물체의 아름다움의 형상이 관여한다고 해도 그것은 여전히 아름다움 자체가 아님을 알아야만 지혜로운 사람이다. 현상에 만족하는 사람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듣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구경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소리나 빛깔 및 모양을 그리고 이와 같은 것들로 만들어진 온갖 걸 반길 뿐, 이들의 사고思考(마음상태: dianoia)는 '아름다움(아름다운 것) 자체'(auto to katon)의 본성(physis)을 [알아]볼(idein) 수도 반길 수도 없을 걸세(《국가》, 476b).
90페이지를 보면 "'디오티마의 사다리'라 불리는 부분은 에로스의 상승하는 힘과 각 단계를 에로스가 산출하는 것들에 대응시키면서 상세한 서술을 제시한다." 그것이 중요하다. 《향연》의 209e~212a이다. "좋음과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욕구를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 혼자 힘으로 이 상승의 단계를 올라갈 수는 없고 반드시 인도자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 이제 여기서부터 영원한 숙제가 생긴다. 그러면 인도자 없이 처음 알아낸 사람은 누구인지가 문제가 된다. 그런 것은 모르는 문제니까 우리가 그냥 지나간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3
'디오티마의 사다리'라 불리는 부분(209e~212a)은 에로스의 상승하는 힘과 각 단계를 에로스가 산출하는 것들에 대응시키면서 상세한 서술을 제시한다. 좋음과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욕구를 가졌다고 해서 누구나 혼자 힘으로 이 상승의 단계를 올라갈 수는 없고 반드시 인도자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
92페이지 주해 17번을 보면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관계는 사람을 진리와 아름다움으로 이끌어가는 인도와 인도자, 그리고 이끌려가는 이, 즉 '선생과 학생'이라는 주제 아래 논의할 수 있겠으나", 이 부분은 여러분들이 이제 읽어봐야 한다. 그것을 꼭 생각을 해봐야 한다.
《에로스를 찾아서》 주해 17번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관계는 사람을 진리와 아름다움으로 이끌어가는 인도와 인도자, 그리고 이끌려가는 이, 즉 '선생과 학생'이라는 주제 아래 논의할 수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인도의 과정에서 진리를 전수하는 방식에 관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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