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향연(4)

 

2023.08.08 📖 향연(4)

플라톤, ⟪향연⟫(Symposion)

IV 소크라테스의 이야기
- 소크라테스와 아가톤의 대화 199c3-201c9 [via purgativa]
via purgativa. 정화淨化(katharsis), 논박(elenkhos); “친애하는(phile) 아가톤”(199c)과 “사랑받는(philoumene) 아가톤”(201c)의 차이; “에로스가 어떤 자인지를 드러내고, 그 다음에 그 기능(ergon)을 다루어야”. ‘선물’(dosis)을 ‘기능’으로 바꾸어 말한 까닭; 에로스의 관계적·대상지향적 성격, “확실히 어떤 것에 대한 에로스입니다.”(199e), “욕망하는 것은 자기가 결여하고 있는 것을 욕망한다는 것, 혹은 결여하고 있지 않으면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연인지 숙고해 보게.”(200a); “에로스는 우선 어떤 것들에 대한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그에게 그것들에 대한 결여가 있다고 할 때의 바로 그것들에 대한 것 아닌가?”(200e); 아가톤의 무지 고백. “제가 앞서 말했던 것들 가운데 아무것도 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201b);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들을 결여하고 있는데 좋은 것들이 아름답다면 그는 좋은 것들을 결여하고 있는 걸 거네.”(201c)

 

 

《향연》 네 번째 시간이다. 지난번에 소크라테스가 아가톤의 연설을 가운데 놓고 앞뒤로 걱정을 했다. 워낙 이 사람들이 얘기를 잘 하고 있으니까 자기가 얘기하려는 것이 지나치게 모자란 건 아닐까. 그렇지만 소크라테스는 어쨌든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이야기하는 것이 본론으로 들어가게 되면 디오티마라고 하는 무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 에로스가 도대체 무엇인가, 에로스의 정체, 에로스의 기원과 본성, 그리고 에로스의 정의 그리고 에로스의 원인, 기능 이런 것들을 쭉 이야기한 다음에 마지막으로 그것을 다 집약해서 종합해서 '에로스의 사다리'라고 하는 것을 말하게 된다. 흔히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의 사다리'는 미학에서 아름다움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내는가에 관한 얘기로 많이 인용되고 있는 부분이다.  

그 부분은 이제 읽기로 하고 우선 소크라테스의 이야기에 들어가서 199c3부터 201c9까지가 소크라테스와 아가톤의 대화이다. 이 부분을 via purgativa라는 소제목을 붙였다. purgativa는 깨끗하게 한다는 말이고, via는 길이다. way of purification, katharsis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katharsis를 하는 것이라고 표현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건 흔히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에서 많이 거론되는 것이다. 다르게 얘기하면 이른바 논박elenkhos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elenkhos에 대해서는 《플라톤, 현실 국가를 캐묻다》를 가지고 있는 분은 한번 살펴보면 되는데 58페이지에 트라쉬마코스와 대화하기 전에, 항상 소크라테스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데, 지금 《향연》에서는 아가톤과 주로 대화를 한다. 그리고 나중에 갑자기 나타난 알키비아데스하고 대화를 하는데 알키비아데스와는 이런 방식으로 대화하지 않는다. 알키비아데스는 얼핏 보기에는 나대면서 마구 자기 얘기를 하니까 그렇다. elenkhos라고 하는 과정을 어쨌든 반드시 소크라테스는 거친다. "'논박'(elenkhos)이라 불리는 것으로 대화 상대자에게 '무지의 자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지적인 '공동탐구'(syzetesis)에 참여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라고 되어 있다. 일단 상대방이 어떤 주장을 하면 그 주장이 가지고 있는 내용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에서도 보존할 만한 것들은 있는가를 살펴보는 과정이다. 다시 말해서 via purgativa라고 하는 것은 전면적으로 깨끗하게 씻어서 없애는 게 아니라 기왕에 놓여 있는 주장들을 검토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의 조각을 보존하면서 허위의 측면을 폐기해 나간다. 이게 바로 독일 관념론에서 변증법을 전개해 나가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방식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elenkhos라고 하는 것도 변증법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변증법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어디에 써도 괜찮은 그런 얘기가 된다. 이런 식으로 어쨌든 규정적 부정이라고 하는 방식을 계속해 나가다 보면 부정적인 측면들은 제거되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귀결에 이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어떤 주장에서 진리에 해당하는 것만 남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가 잘못된 주장을 하고 있었구나 또는 잘못이 섞인 주장을 하고 있었구나 라는 것을 깨우친다면 그때부터는 참다운 앎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겠다. 그러면 그때부터가 바로 소크라테스의 산파술maieutike이 시작된다. 따라서 상대방의 무식함을 깨우쳐주는 부정적 단계 이게 바로 via purgativa, 정화, 카타르시스의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오늘 읽는 이 부분은 정화의 단계인데 먼저 번역자의 작품안내 부분부터 설명을 하고 본문을 차근차근 읽어보려고 한다. 

《플라톤, 현실 국가를 캐묻다》 58 '논박'(elenkhos)이라 불리는 것으로 대화 상대자에게 '무지의 자각'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지적인 '공동탐구'(syzetesis)에 참여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어떤 주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주장이 가진 진리의 조각을 보존하면서 허위의 측면을 폐기해 나가는 '규정적 부정'이다. 


“소크라테스는 먼저 아가톤의 메타-이야기의 공감을 표명하면서 에로스가 어떤 자인지 이야기한 후에 에로스의 기능을 다뤄야 한다는 말로 그 이야기를 재정리한다.” 여기 재정리한다고 했는데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하면서 하는 일 중에 아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상대방의 이야기를 재정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국가》에서도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폴레마르코스나 케팔로스가 하는 얘기를 듣고 소크라테스가 재정리를 한 다음에 다시 묻는다. 그런데 재정리를 할 때 자기가 필요한 것만 정리를 한다는 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의 일종의 전략이다. 자신이 필요한 것 그리고 논의를 전진시키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만한 것들만 추려서 정리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일부러 의도적으로 간과를 한다. 그런 걸 이의도적 간과라고 한다. 자기 필요한 것만 골라서 하는 것이니까 나쁜 행동일 수도 있다. 여기서 먼저 소크라테스가 하는 것은 아가톤이 한 이야기에 공감을 했다는 것이다. 공감을 표명하면서 그래 나도 아가톤과 같은 방식으로 이야기하겠다고 한다. 에로스는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에로스의 기능ergon을 다루겠다고 했는데, 아가톤은 에로스가 주는 '선물dosis'이라고 얘기를 했다. 그런데 이것을 ergon으로 바꿨다. 소크라테스는 기능ergon이라는 말로 바꿔서 얘기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의 말을 정리한다고 하면서 있는 그대로 아가톤의 술어를 가져다가 정리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사용하고 있는 술어를 여기다 슬쩍 끼워넣는다. dosis를 ergon으로 바꾼다. 이런 차이가 있는데 여기 한번 볼 필요가 있다. 그다음 “아가톤과의 문답은 먼저 에로스의 관계적 내지 지향적 본성을 확립하는 데로 향한다.” 그러니까 에로스의 관계적 지향적 분석이라는 말은 에로스는 그것 자체로 독자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에로스라는 것이 있다. 즉 어떤 것을 지향하면서 에로스는 성립하는 것이다는 얘기이다. 우리 인간도 그렇다.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그것 자체로 독자적으로 뭔가가 있지 않다. 인간 존재가 독자적으로 뭔가 있다 라고 생각하는 것 즉 그것 자체로 완결되어 있는 하나의 개체다 라고 하는 것은 그냥 망상일 뿐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항상 어떤 관계 속에서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어떤 관계를 맺는 게 인간이지 않은가. 가족이라고 하는 관계 속에서 또 살아가면서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따라서 인간 존재라고 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어떤 관계에 들어가 있는가. 다시 말해서 어떤 상황 속에 들어가 있는가에 따라서 인간은 존재의 본질적인 측면까지는 아닐지라도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변화한다. 즉 관계적이다 라고 하는 것은 특정한 존재가 가지고 있는 유동적인 측면, 상황 속에서의 변화되는 측면 이런 것들을 고려하는 것을 관계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게 일반론이고 에로스를 관계적 내지 지향적 본성 속에서 살펴본다면 에로스는 'OO의 에로스'이다.  또는 'OO에 대한 에로스'이다.  에로스는 미지수 X에 대한 에로스다 라는 말이다. X에 대한 에로스, 에로스라는 말 앞에 X라는 뭔가를 하나 집어넣어 보자. 돈에 대한 에로스, 이를 물욕이라고 한다. 돈, 물건에 대한 욕심 그리고 저 사람 물욕이 많은 사람이야 라고 하면 그 사람은 물욕이 많은 사람이다. 물욕에 대한 에로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그가 X에 대한 에로스라는 것을 갖고 있다 라고 하면 X를 욕망한다는 것이다. 왜 욕망하는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욕망하는 거 아닌가 하는 얘기이다. 다시 말해서 에로스는 자기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면 앞서 예를 들었던 물에 대한 에로스는 내가 물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요구하는 것 아니겠는가. 돈에 대한 에로스. 돈이 없기 때문에 돈에 대한 에로스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 번 여기서 잠깐 다른 생각을 해보면 누가 봐도 저 사람 돈이 많은 사람이야.  그런데 저 사람은 물욕이 끝이 없다고 하면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돈이 없기 때문에 돈에 대한 에로스를 가지는 것인가. 그건 우리 생각이다. 우리 기준으로 봤을 때 돈이 아무리 많아도 그 사람 기준으로는 돈이 많지 않은 것이다. 돈이 없어서 돈에 대한 에로스를 갖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이 책을 샀다고 해보자. 그 책을 왜 샀는가. 그 사람은 책에 대한 에로스가 있다. 그러면 책이 없다고 생각하는 거 아닌가. 그럼 누가 봐서 책이 많은데 또 샀어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아직도 책이 모자라, 책을 더 읽어야 되겠어 라고 말할 수 있다. 책에 대한 에로스라고 하는 것은 책이 없다는 판단에서, 책을 결여해서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책의 결여라고 하는 차원에서만 얘기를 한다면 이렇게 책이 많은데도 모자란다고 생각하냐고 하면 이 사람은 책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책을 사는 것은 지식에 대한 에로스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책이 모자라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모자라기 때문에 그 지식을 더 늘리고 싶어서 지식에 대한 에로스가 발동해서 지식을 늘리는 도구로써 책을 산 것입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그런 대로 받아들일 만하다. 그것도 물욕이다. 그런데 누군가 이제 책을 샀다. 누군가 옆에서 너는 무엇에 대한 에로스로 책을 사는가 라고 물어보는 것이 그 상황 속에서 정상적인 대화이다. 그러면 그 두 사람은 어느 정도까지는 대화를 할 수 있다. 책이라는 게 그렇게 지식을 늘리는데 큰 도움이 안 되는 모양이구나 이렇게 말할 수도 있고 그렇게 많은 책을 읽었는데 여전히 지식이 모자란다고 읽긴 읽었는데 건성으로 읽은 건 아닌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책에 대한 얘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같은 차원에서 있어야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책을 샀는데 그 아무 짝에 쓸모 없이 돈만 버리네 라고 말하면 이것은 다른 차원이 거기에 삽입되어 들어오는 것이다. 그것을 말한 사람은 돈에 대한 에로스가 지나치게, 그 사람은 정상이겠지만 우리가 보기엔 지나치게 강력해서, 돈에 대한 에로스가 굉장히 강력해서 그 어떤 것도 돈을 사용하고 돈이 없어지는 것 즉 돈의 결여가 발생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책을 사건 아니면 고급스러워 보이는 만년필을 사건 무엇을 사는지는 관계가 없다. 돈의 결여 상태가 되었다 라는 것에만 관계가 있다. 그러면 그 경우에는 돈이라고 하는 게 굉장히 많은 것을 아우르는 그런 물건이 된다.  책도 돈을 없애고 만년필도 돈을 없애고 그다음에 공책도 돈 없앤다. 공부하겠다고 어디 가서 수강료 내고 배우러 다니는 것도 돈이 없어진다. 그러니까 돈이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많은 것을 혼내 줄 수 있는, 돈의 결여를 유발하는 세상의 모든 것을 혼내 줄 수 있는 굉장히 강력한 만능 도구이다. 따라서 돈의 결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사람 즉 돈에 대한 에로스가 가득 찬 사람은 웬만한 걸로는 이겨낼 도리가 없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이겨내는 딱 한 가지 방법은 그 사람보다 돈이 많은 것 밖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에 대한 결여, 책에 대한 결여, 만년필에 대한 결려 이것 때문에 지식에 대한 에로스 그다음에 만년필에 대한 에로스를 가진 사람들은 누가 자기에게 돈의 결여를 발생시키는 그런 행위를 질타하면 돈을 많이 벌어 놓는 수밖에 없다. 공부하는 건 다른 것과는 공존할 수 있다.  가령 어디 가서 아르바이트하는 것도 책에 대한 결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써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할 수 있다. 그런데 돈벌이를 하는 것, 돈에 대한 결여에서 자기의 어떤 행동이 생겨나는 것은 공부와는 공존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이제 적극적인 얘기로 돌아와서 아가톤은 연설 중에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것임을 공공연하게 표방했다. 그러면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결여한 것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품 안내에도 역자가 그런 얘기 해놓았다. “이 꼭지의 논의는 따로 떼어 놓으면 초기 대화편들 가운데 넣어놓아도 크게 티 나지 않을 만한 논박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결국 아가톤의 무지 고백을 받아낸다.” 논박elenkhos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아가톤은 트라쉬마코스처럼 화를 내지 않고 무지를 고백했으니까 아가톤은 그래도 기본은 갖춘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다. 그런데 이제 거기다가 소크라테스 그래도 아름다운 말이긴 했다고 덧붙였다고 하는데, 이것도 이제 하나, 앞에서 선물을 기능으로 바꾸면 바꿨다는 지점과 그다음에 아가톤에게 당신이 무지 고백을 했는데 그래도 당신이 한 얘기는 아름답긴 했어 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다음에 이제 좋은 것도 아름다운 것 아니가 하면서 좋은 것과 아름다움이 같은 것이다 라고 하는 논의까지도 진전을 시킨다. 이제 본문으로 가보자.  


 199c에서 보면 처음에는 "친애하는 아가톤"으로 시작을 했다. 아가톤과의 대화 거기에 끝날 무렵인 201c에서는 "사랑받는 아가톤"으로 말한다. 왜 그랬을까. 사랑받는(philoumene)이 사실 맞는 것 같은데, 이런 것까지 좀 조잔하게 따져가면서 읽어야 되는가. 그렇다. 이런 것까지 조잔하게 따져가면서 읽어야 하는 것이 맞다.  소크라테스가 얘기할 때는 간단치 않다. 지금 199c에서는 친애하는phile이라고 되어있다.  그런데 번역자가 논의가 끝날 무렵인 201c에서는 "아니, 오히려 자네가 반론 못 하는 것 진실에 대해서 일세. 친애하는 아가톤. 소크라테스에게 반론하는 것 쯤이야 전혀 어려운 게 아니겠지만 말일세." 그래서 이 묶음의 대화가 친애하는, 친애하는 아가톤으로 끝난 걸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박종현 교수의 번역을 보면 뒷부분은 "사랑받는 아가톤"으로 되어 있다. 희랍어 원문도 다르다고 한다. via purgativa 부분의 대화 끝날 때는 아가톤을 다시 한 번 부르는데 "사랑받는 아가톤"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사랑받는 아가톤은 친애하는 아가톤과는 다르다. 박종현 교수의 각주를 보면 “파우사니아스와의 관계를 염두에 두고서 하는 말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파우사니아스와 아가튼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이다. 파우사니아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얘기겠다.  그런데 앞에서 했던 아가톤의 발언이 무색하게 된 것에 대한 위로 겸 체면을 살리기 위한 인사치레로 비극 작가로서의 그 인기와 미모를 연상케 하기 위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  비극 작가니까 인기가 있었겠는데 아가톤의 이름이 심상치 않다 했더니 미모도 한 미모했던 모양이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식으로 먹인다. 그다음 다시 앞으로 와서 "즉 에로스가 어떤 자인지를 드러내고, 그다음에 그의 기능들을 다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자네는 실로 이야기를 아름답게 시작한 것으로 내게 보였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선물dosis이라고 얘기를 했는데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이걸 기능ergon이라고 말했다. 여기다가 번역자는 각주를 달아놓았다. ergon라고 하는 희랍어는 정말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일단 1번 뜻은 기능이다. "지금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의 논의를 추스르면서 그가 말한 둘째 논의 대상을 간명한 개념으로 적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에로스의 정체 내지 본질과 대비되는 또 다른 논의 대상을 에로스의 '에르곤'으로 부르고 있다."  그래서 "촘촘하게 정비된 논의의 맥락을 반영하면서 주의를 환기하는 개념으로 새기는 게 것이 더 좋다고 보아 '기능'으로 옮기기로 한다." 그런데 왜 기능으로 옮기는가. 왜 소크라테스가 이것을 기능으로 옮겼을까. 그것에 대해서 앞에 작품 안내에서 그것을 한번 생각해 보자고 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박종현 교수는 이것을 기능이라고 하지 않고 '일'이라고 번역을 했다. 일이라고 하든 기능이라고 하든 큰 차이는 없는데 제가 그래서 한번 생각을 해봤다. 선물dosis이다라고 하는 것과 기능ergon이다 라고 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가를 한번 생각을 해봤는데, 기능이라고 하는 건 적극적으로 하는 일이고 선물은 그냥 주는 것이다.  

199c 친애하는 아가톤, 우선은 그 자신을, 즉 에로스가 어떤 자인지를 드러내고, 그다음에 그의 기능들을 다뤄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자네는 실로 이야기를 아름답게 시작한 것으로 내게 보였네.  

201c 아니, 오히려 자네가 반론 못 하는 것 진실에 대해서 일세. 친애하는 아가톤. 소크라테스에게 반론하는 것쯤이야 전혀 어려운 게 아니겠지만 말일세. 


에로스가 주는 선물이 무엇인가와 에로스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는 다르다. 에로스의 기능은 무엇인가 라고 물으면 에로스가 우리에게 뭔가 작용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에로스가 우리에게 작용한다고 하면 그것의 결과로 우리는 어떤 변형이 일어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앞에 작품안내를 보면 “'선물'(dosis)을 '기능'(ergon)으로 바꾸면 달라질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일은 읽는 이의 몫이다”라고 했는데 읽는 이들이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번역한 분이 좀 알려주는 것이 좋겠다. 사실 뭐 굳이 번역자의 설명까지 우리가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에로스의 기능에 관한 논문들이 엄청 많으니 보면 되는데 《향연》을 처음 읽는 사람들이 그것까지 찾아볼 수 없으니까 알려주면 좋다. 하여튼 기능이라는 것은 결여를 자극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식에 대한 에로스가 있는 것은 무지의 자각이다. 내가 무식하네 라고 생각하면 이제 확 불타오른다. 그래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무지를 더 깨닫게 되고 그래서 공부를 더 하게 되고 책을 또 사게 되고 그래서 돈의 결여에만 신경 쓰는 사람한테 욕을 먹게 되는 것이다.  

공부의 결여를 자각하지 못한 사람은 공부를 안 한다. 공부를 안 하고 있는 사람은 공부에 대한 결여가 없는 사람이다. 왜 결여가 없는가. 공부가 돼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지금 저 사람은 공부를 한다.  왜 공부를 하는가. 공부에 대한 결여를 느끼고 있고 공부가 모자라기 때문이다. 그러면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누가 더 유식한 사람인가. 공부를 안 하는 사람이 더 유식한 사람이다. 유식한 사람은 공부의 결여를 느끼고 있는 무식한 사람을 만날 이유가 없다. 그러니까 공부를 안 하는 사람은 공부하는 사람을 안 만난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공부 안 하는 사람은 유식하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무식하고 그래서 유식한 사람이 무식한 사람을 만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은 만나기가 어렵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유식한 사람이 무식한 사람을 멀리한다. 무식이 옮겨올까 봐 걱정돼서 그렇다. 에로스를 가지고 이렇게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에로스는 어떤 것에 대한 에로스라고 할 만한 그런 자인가, 아니면 그 어느 것에 대한 에로스도 아니라고 할 만한 자인가?" 여기서 이제 관계 속에서 어떤 것에 대한, 이게 지향성이다. 이제 중요한 포인트 포인트이다. 우선 첫 번째 에로스가 어떤 자인지를 드러내고 그의 기능을 다룬다. 아가톤 당신이 다루는 거 메타 이야기 좋았으니 나도 따라가겠어. 그러면 이제 한 번 따져보자.  그래서 에로스는 어떤 것에 대한 에로스다. 지향적 관계 속에서 물어보는 것이다. "에로스는 그 어느 것에 대한 에로스도 아닌가, 아니면 어떤 것에 대한 에로스인가?" 라고 물어보니까 아가톤이 "확실히 어떤 것에 대한 에로스입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니까 에로스는 우리가 지금까지 계속 얘기한 것처럼 어떤 것에 대한 에로스이다. 거기까지 갔다. 어떤 것에 대한 에로스, 아주 근원적으로 물어보는 것이다. 책을 사는 것은 지식에 대한 에로스. 책을 사지 않는 것은 지식에 대한 에로스가 없는 것이다. "결여하고 있지 않으면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연인지 숙고해 보게. 아가톤, 나한테는 놀라우리만큼 분명하게 그게 필연이라고 생각되네만, 자네에게는 어떤가?" 즉 OO에 대한 에로스다. “욕망하는 것은 자기가 결여하고 있는 것을 욕망한다는 것, 혹은 결여하고 있지 않으면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연이고 분명하게 필연이다”라고 얘기를 한다. 욕망하는 것은 자기가 결여하고 있는 것을 욕망하는 것이다.  책을 사는 건 지식을 욕망하는 것이다. 지식이 결여되어 있으니 그렇다. 결여하고 있지 않으니까 지식을 결의하고 있지 않으니까 욕망하지 않고 그러니까 책을 안 사는 것이다. "선생, 당신은 부와 건강과 힘을 이미 소유하고 있으니, 당신이 바라는 건 나중에도 이것들을 소유하게 되는 거요.  당신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적어도 지금 당장에는 이것들을 갖고 있으니까 말이오."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렇다면 바로 이것은, 아직 그에게 갖추어져 있지 않고 그가 갖고 있지도 않은 것을, 즉 이것들이 나중에도 그에게 계속 보존되고 늘 곁에 있기를 사랑하는 것 아니겠는가?"  늘 갖고 싶은 것은 여기서 지속적으로 갖고 싶은 것이다. 그것을 사랑하게 된다. 

199c 에로스는 어떤 것에 대한 에로스라고 할 만한 그런 자인가, 아니면 그 어느 것에 대한 에로스도 아니라고 할 만한 자인가? 

199e 에로스는 그 어느 것에 대한 에로스도 아닌가, 아니면 어떤 것에 대한 에로스인가?

199e 확실히 어떤 것에 대한 에로스입니다. 

200b 결여하고 있지 않으면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이 필연인지 숙고해 보게. 아가톤, 나한테는 놀라우리만큼 분명하게 그게 필연이라고 생각되네만, 자네에게는 어떤가? 

200c 선생, 당신은 부와 건강과 힘을 이미 소유하고 있으니, 당신이 바라는 건 나중에도 이것들을 소유하게 되는 거요.  당신이 바라든 바라지 않든 적어도 지금 당장에는 이것들을 갖고 있으니까 말이오. 

200d 그렇다면 바로 이것은, 아직 그에게 갖추어져 있지 않고 그가 갖고 있지도 않은 것을, 즉 이것들이 나중에도 그에게 계속 보존되고 늘 곁에 있기를 사랑하는 것 아니겠는가? 


"자 이제, 이야기된 것들을 간추려 보세. 다름 아니라 에로스는 우선 어떤 것들에 대한 것이고, 그”그다음에로는 그에게 그것들에 대한 결여가 있다고 할 때의 바로 그것들에 대한 것 아닌가?" 이게 이제 에로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규정이다. 우선 어떤 것들에 대한 것인데 왜 그 어떤 것들을 욕망하는가. 그에게 그것들에 대한 결여가 있다고 할 때의 바로 그것들에 대한 것 그렇게 얘기가 정리가 된다.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럼 에로스는 결여하고 있고 갖고 있지 않은 것, 아름다움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네 이렇게 물어볼 수 있다. 그런데 앞서서 아가톤은 에로스는 아름다움이고 세상에 좋은 것은 다 에로스에다 갖다 붙였다고 했다. 그러면 그것은 에로스에 대한 규정이 틀린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아가톤에게 그게 틀린 게 아닌가 하니까 아가톤은 "제가 앞서 말했던 것들 가운데 아무것도 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서 소크라테스는 덧붙인다. "작은 질문 하나에 대해 더 답해 주게. 좋은 것들이 아름답기도 하다고 자네는 생각하지 않은가?" 여기서 이제 좋은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이 같은 것이지 않은가라고 물어보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들을 결여하고 있는데 좋은 것들이 아름답다면 그는 좋은 것들을 결여하고 있는 걸 거네." 그래서 에로스는 아름다움을 결의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은 좋은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에로스는 아름다움 또는 좋은 것, 또는 이란 말은 그 둘은 서로 바꿨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라고 소크라테스 논의를 일단 via purgativa에서 정리한다. 여기서는 아가톤을 논박elenkhos을 한다. elenkhos를 하고 있는 지점이라고 하겠다. 

200e 자 이제, 이야기된 것들을 간추려 보세. 다름 아니라 에로스는 우선 어떤 것들에 대한 것이고, 그다음에로는 그에게 그것들에 대한 결여가 있다고 할 때의 바로 그것들에 대한 것 아닌가? 

201b 제가 앞서 말했던 것들 가운데 아무것도 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201c 작은 질문 하나에 대해 더 답해 주게. 좋은 것들이 아름답기도 하다고 자네는 생각하지 않은가?

201c 그렇다면 에로스가 아름다운 것들을 결여하고 있는데 좋은 것들이 아름답다면 그는 좋은 것들을 결여하고 있는 걸 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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