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향연(3)

 

2023.08.07 📖 향연(3)

플라톤, ⟪향연⟫(Symposion)

- 아리스토파네스의 딸꾹질 185c4-e5이야기 순서를 바꾸는 역할, 육체의 부조화
- 에뤽시마코스의 연설 185e6-188e4영혼만이 아니라 몸의 조화를 이루어주는 에로스, 세상 사물 일반으로, 천문학으로, 신과 인간의 관계로까지 확장되는 에로스 — 우주적 에로스
- 웃음에 관한 공방 189a1-189c1희극 작가로서의 아리스토파네스와 우스갯 소리
-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 189c2-193e2인간의 본성, 애초의 자기 것을 찾아 온전함을 회복하고자 하는 욕망, 운명적 사랑의 괴로움, 인간의 원초적 비극성

III 막간, 아가톤의 연설- 소크라테스의 걱정 193e3-194e3지혜로운 소수 앞에서 부끄러워할 것인간, 아니면 다수 앞에서 부끄러워할 것인가
- 아가톤의 연설 194e4-197e8에로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방식에 대하여, 즉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에로스의 본성; 에로스가 주는 선물; 운율로써 에로스에 대한 찬양을 이어감
- 소크라테스의 계속되는 걱정 198a1-199c2앞서 연설한 이들의 “아름답고 현란한 이야기”를 찬양함; 진정한 찬미 방식. “찬미 대상 각각에 관해 진실을 말해야 하며… 그 찬미 대상에 가장 알맞게 제시해야 한다”; 아가톤에 대한 비아냥. “그 대상에게 가능한 한 가장 위대하고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봉헌… 그것들이 실제로 그렇든 안 그렇든 상관없이… 그것들이 거짓이라 해도 사실 문제될 건 전혀 없던 거지.”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을 지난번에 파우사니아스 이야기까지 했다. 파우사니아스 이야기 다음에 오늘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딸꾹질 에뤽시마코스의 연설, 웃음에 관한 공방 그런 다음에 다시 아리스토파네스의 연설 그렇게 해서 두 번째 파트가 끝나고, 두 번째 파트가 끝나고 나면 제가 막간이라고 설정한 부분에 아가톤의 연설이 들어간다. 그런데 아가톤의 연설 앞 뒤로 소크라테스가 걱정을 하는 부분이 있다.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다 중요한데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소크라테스 이야기니까 거기를 향해 가기 전에 대강에 어떤 내용이 있는가 그리고 읽으면서 어떤 부분을 짚어가면서 잘 읽어야 하는가 그것만 말하려고 한다.  


지금 아리스토파네스의 딸꾹질이 185c4-e5이다. 거기 보면 이제 파우사니아스가 이야기를 멈추었는데 그다음에 얘기할 사람이 바로 이제 아리스토파네스였다. 그런데 아리스토파네스가 과식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 때문인지 딸꾹질이 일어나서 이야기를 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왜 딸꾹질이 들어갔을까. 원래는 아리스토파네스 순서였는데 아리스토파네스가 이야기를 할 게 아니라 에뤽시마코스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적당하기 때문에 여기 딸꾹질을 집어넣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야기 순서를 바꾸게 되고 그다음에 이어지는 에뤽시마코스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논의의 순서가 정리가 된다. 게다가 아리스토파네스의 딸국질을 멈추는 몇 가지 방법 이런 것들을 알려주면서 에뤽시마코스가 의사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알려주게 된다. 그러면 딸꾹질의 효과, 역할을 하게 된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딸꾹질을 하게 되는 것은 일단 기본적으로 에뤽시마코스에게 연설 순서를 주기 위해서다. 그다음에 딸꾹질이라고 하는 것은 육체의 부조화라고 하는 상태에서 일어난다. 그러니까 육체의 부조화라고 하는 것이 지금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조화가 일어난 상태라면 에로스가 충만한 상태일 수 있는데 육체의 부조화가 일어나 있으므로 뭔가 이것도 에로스하고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정리하면 아리스토파네스의 딸꾹질이라는 것은 순서를 쉬어야 되니까 에뤽시마코스로 논의를 이어가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고 두 번째로는 육체의 부조화라고 하는 것이 일어났고 자연스럽게 에뤽시마코스로 하여금 에로스에 관한 논의를 그런 부분에 집중할 수 있도록 일종의 예고편처럼 알려주는 것이다. 에뤽시마코스는 그렇게 말한다. "파우사니아스가 이야기를 멋지게 시작해 놓고도 끝마무리를 만족스럽게 못했으니 별 수 없이 내가 그 이야기의 뒤끝을 머물러 주도록 시도해야 할 것으로 보이네." 그러니까 논의의 순서를 보면 파우사니아스 다음에 에뤽시마코스가 얘기하는 게 적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같은 얘기를 아리스토파네스가 하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물어볼 수도 있는데 그건 아니다. 왜냐하면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 작가니까 웃기는 얘기를 해야 한다. 여기에 등장한 사람들은 각자가 전공이 있다. 자기가 전공하고 있는 영역에서의 바라본 에로스를 얘기해야 된다는 것이다. 

186a 파우사니아스가 이야기를 멋지게 시작해 놓고도 끝마무리를 만족스럽게 못했으니 별 수 없이 내가 그 이야기의 뒤끝을 머물러 주도록 시도해야 할 것으로 보이네.


파우사니아스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한번 보면 "에로스가 두 부류가 있다는 건 그가 멋지게 구분한 것으로 나는 생각하네. 하지만 에로스가 사람들의 영혼에만, 그리고 아름다운 자들에 대해서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다른 것들 속에도 있다는 것을 나는 우리 기술인 의술로부터 깨달았다고 생각하네. " 그러니까 에뤽시마코스는 의술을 중심으로 해서 에로스를 논의하겠다, 그런데 그게 정신, 영혼에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몸에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의술은 채움이나 비움과 관련하여 에로스가 몸 안에서 하는 일들에 관대한 앎이며, 이런 일들에서 아름다운 사랑과 추한 사랑을 분간하는 자가 있다면 이자야말로 가장 의사다운 자이네." 이렇게 얘기하면서 의술에서의 에로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건 바로 몸과 관련된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가에서는 조화나 리듬과 관련하여 에로스가 하는 일이 있고 적어도 육체에 있어서도 에로스가 조화와 관련해서 중요한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로스라고 하는 것은 파우사니아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의 영혼에 관련된 것만이 아니라 세상 사물 일반으로 그리고 심지어 신과 인간의 관계까지도 그 적용하는 영역이 확장된다. 다시 말해서 대립자들의 조화를 일구어 내는 것, 즉 에로스는 우주적인 것이다 라고 얘기한다. 예를 들어서 말할 때 "한 해의 계절들의 구성도 이 둘로 가득 차 있네." 즉 천문학에서 에로스 그다음에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에로스 그다음에 일체의 능력을 예로서 전체가 갖고 있다고 말한다. 가까운 곳에서 멀리 있는 것, 직접적인 것에서 간접적인 것으로, 그다음에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순서로 지금 에뤽시마코스가 논의를 했다. 처음에는 의술에 관해서 그다음에 천문학 그다음에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이렇게 된다. 그러면 파우니아스가 무엇에 대해서 논의를 빠뜨렸는지를 알 수 있다. 파우사니아스는 인간의 정신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만 얘기했는데 그게 아니라 에로스라고 하는 것은 우주적인 차원에까지 있는 것이다 라고 얘기를 한다.  

186a 에로스가 두 부류가 있다는 건 그가 멋지게 구분한 것으로 나는 생각하네. 하지만 에로스가 사람들의 영혼에만, 그리고 아름다운 자들에 대해서만 있는 게 아니라 다른 많은 것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다른 것들 속에도 있다는 것을 나는 우리 기술인 의술로부터 깨달았다고 생각하네. 

186d 의술은 채움이나 비움과 관련하여 에로스가 몸 안에서 하는 일들에 관대한 앎이며, 이런 일들에서 아름다운 사랑과 추한 사랑을 분간하는 자가 있다면 이자야말로 가장 의사다운 자이네. 


그리고 나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이제 그 얘기가 끝나니까 딸꾹질을 멈췄다고 얘기를 하면서 순서를 이어받는다. 그러면서 그런 얘기를 한다. "몸의 질서가 재채기 같은 그런 소음과 간지럼 태우기를 욕망한다는 것에 말일세." 그러니까 "혹여 뭔가 우스갯소리를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아니니까 말일세." 그러니까 아리스토파네스가 얘기하는데 바로 이제 그 유명한 에로스에 관한 얘기를 한다. 아리스토파네스 연설은 많은 사람들이 이제 《향연》하면 떠올리는 원초 인간 얘기이다. 원래 인간은 성은 남녀 둘만이 아니라 남녀추니를 합해서 셋이었는데, 인간 둘이 붙어 둥근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남, 여여, 남녀 이렇게 세 조합이 있었는데 이들이 이제 남자 한 사람만 있어도 잘난 척을 할 수 있는데, 남남이다, 여자 한 사람만 있어도 잘난 척할 수 있는데, 여여이다, 남녀로 이렇게 붙어 있으면 얼마나 잘난 척을 하겠는가. 그래서 이제 신들을 공격할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그래서 제우스가 절반으로 쪼개놓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제 자기의 반쪽들을 찾아가서 애초에 자기 것, 온전함을 회복하고자 하는 그런 욕망이 바로 에로스라는 얘기이다. 그러면 이제 그걸 찾아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자기의 반쪽을 찾기 전에는 행복한 과정이 이룰 수가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계속해서 그걸 찾으러 다니니까 운명적 사랑의 괴로움을 얘기하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또 아이러니이다.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 작가인데 운명적 사랑의 괴로움 그다음에 온전함을 얻지 못하는 것에 대한 괴로움을 얘기 한다. 그래서 여기서 중요한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자기가 완전자가 되고자 하는 그런 것들이 곧 에로스라고 얘기한다. 현재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비극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셈이다. 희극 작가가 비극적인 이야기를 한다.  번역자가 작품 안내에 썼듯이 희극 작가의 우스운 이야기 속에 인간의 원초적 비극성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을 집중해가면서 읽으면 괜찮겠다. 그리고 나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이렇게 말한다. "에뤽시마코스, 이게 에로스에 관한 내 이야기네.  자네 것과는 다른 유의 이야기지. 그러니 내가 자네에게 부탁했던 것처럼, 그걸 우스운 이야기로 치부하지 말게." 사실은 인간의 비극이 가지고 있는 원초성에 대해서 얘기한 셈이다. 그래서 그것을 우스운 이야기로 치부하지 말아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이어서 계속 말을 한다. "그래야 우리가 나머지 사람들에게서도 들어볼 수 있을 테니까. 그들 각자가 무슨 말을 할지를 말일세.  아니, 오히려 두 사람 각각이라고 해야겠네. 아가톤과 소크라테스 선생님만 남아 있으니 말일세." 이 부분을 보면 번역자가 밑에 각주를 달아놓았다. "아리스토파네스에서는 표현을 정확하게 바꾸면서까지 연사가 둘 남았다고 애써 강조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우리가 나머지 사람들에게서도 들어볼 수 있을 테니까 라고 그래놓고 아니 오히려 두 사람 각각이라고 해야겠네 하고 자기가 한 말을 고치고 곧바로 아예 이름까지 댄다. 아가톤과 소크라테스 선생님만 남아 있다. 그런데 원래는 거기 역자가 각주에서 써놓은 것처럼 에뤽시마코스 옆에는 아리스토데모스가 앉아 있었다. 그러니 에뤽시마코스가 얘기를 한 다음에 아리스토파네스가 했으면 순서가 맞다. 아리스토파네스, 에뤽시마코스, 아리스토데모스 이 순서로 앉아 있었는데 아리스토파네스가 딸꾹질을 하는 바람에 에뤽시마코스가 먼저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아리스토파네스가 했다. 그러면 앉아있는 순서대로 얘기를 한다고 하면 아리스토데모스가 얘기를 해야 되는데, 아리스토데모스는 여기서 에로스에 관해서 얘기를 하지 않고 자기가 들은 걸 전해주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니 플라톤은 의도적으로 이렇게 그을 연사에서 제외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말해서 아리스토파네스에게 남은 사람이 누군지를 일부러 말하게 한 것이다.  

189a 몸의 질서가 재채기 같은 그런 소음과 간지럼 태우기를 욕망한다는 것에 말일세.

192e 그 온전함에 대한 욕망과 추구에 붙여진 이름이 사랑(에로스)이지.

193d 에뤽시마코스, 이게 에로스에 관한 내 이야기네.  자네 것과는 다른 유의 이야기지. 그러니 내가 자네에게 부탁했던 것처럼, 그걸 우스운 이야기로 치부하지 말게.  그래야 우리가 나머지 사람들에게서도 들어볼 수 있을 테니까. 그들 각자가 무슨 말을 할지를 말일세.  아니, 오히려 두 사람 각각이라고 해야겠네.  아가톤과 소크라테스 선생님만 남아 있으니 말일세. 


그러면 이제 그다음 얘기는 소크라테스의 첫 번째 걱정이다. 소크라테스의 걱정은 여러분들이 다 짐작을 하겠지만 엄살 부리는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엄살를 부린다. "자네 자신이야 겨루기를 훌륭하게 해냈으니까 그렇지, 에뤽시마코스. 하지만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 자네가 처하게 된다면 자네는 아주 염려가 되어 지금 내가 그런 것처럼 매우 절망적이게 될 걸세."  그러니까 아가톤이 무슨 말씀이세요 라고 하니까 이제 소크라테스는 "자네 자신의 이야기들을 막 보여주려는 상황에서 배우들과 함께 단에 올라가서 그토록 많은 관중을 마주 쳐다보고도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던 자네의 용기와 큰 배포를 본 내가, 이제 우리같이 적은 수의 사람들 때문에 자네가 동요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난 건망증이 심한 자일세. " 이건 약간 비아냥 거리는 것이다. 아가톤 자네처럼 많은 대중 앞에서 얘기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지금 몇 몇 안 되는 사람 앞에서도 좀 떨린다고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가톤이 "제가 지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소수의 분별이 있는 사람들이 다수의 분별없는 사람들보다 더 무섭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그렇게 머릿속이 온통 극장으로 꽉 차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지요?"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이게 중요한 표현이다. 지성을 가진 사람이 보기에는 소수의 분별이 있는 사람들이 다수의 분별없는 사람들보다 더 무섭다. 그리고 나도 지성 있는 사람이니까 그 정도는 알고 있다. 그렇게 소크라테스에게 맞받아친다. 그러니까 이제 소크라테스는 "실인즉 우리도 거기에, 그 다수 가운데 속해 있었으니까."라고 말한다. 그러면 이건 소크라테스가 계속 자기가 어리석다는 걸 일부러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194a 자네 자신이야 겨루기를 훌륭하게 해냈으니까 그렇지, 에뤽시마코스. 하지만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상황에 자네가 처하게 된다면 자네는 아주 염려가 되어 지금 내가 그런 것처럼 매우 절망적이게 될 걸세.  

194b 자네 자신의 이야기들을 막 보여주려는 상황에서 배우들과 함께 단에 올라가서 그토록 많은 관중을 마주 쳐다보고도 조금도 주눅이 들지 않던 자네의 용기와 큰 배포를 본 내가, 이제 우리같이 적은 수의 사람들 때문에 자네가 동요할 거라고 생각한다면 난 건망증이 심한 자일세.  

194 b 제가 지성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소수의 분별이 있는 사람들이 다수의 분별없는 사람들보다 더 무섭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그렇게 머릿속이 온통 극장으로 꽉 차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시지요? 

194c 실인즉 우리도 거기에, 그 다수 가운데 속해 있었으니까.


그렇게 걱정을 하던 차에 어쨌든 아가톤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아가톤의 얘기는 먼저 에로스에 대해서 얘기를 하기에 앞서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된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 역자가 말한 것처럼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을 읽으면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끊임없이 뭔가를 얘기한다.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우선 말하고 나서 그다음에 말하고 싶네." 안다고 자기가 자부하는 자이다. 그러니까 이제 아가톤은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우선 말하고 나서 그다음에 말하고 싶다고 한다. 이것은 메타 인지에 해당하는 것이고, 메타 이야기이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한다, 반성적 사유를 할 줄 안다는 것이다. 왜 이걸 얘기하는가 하면 지금 앞에서 사람들이 얘기한 것이 틀렸다는 것이다. 아가톤은 잘난 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우선 그 자신이 어떤 자인지를 찬양하고", 즉 에로스를 찬양할 때는 에로스의 본성에 대해서 먼저 얘기한 다음에 에로스로부터 우리가 무엇을 선물을 받을 것인가 얘기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파이드로스는 오래된 신이라고 얘기를 했는데 그것은 에로스가 어떤 신인지에 대해서 얘기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바로 우리에게 덕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용기를 준다는 것, 즉 에로스로부터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 이것은 이제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얘기와 마찬가지이다. 그것 자체로 좋은 것 결과로도 좋은 것 그렇게 얘기할 때 아가톤은 에로스 자체에 대해서, 에로스의 본성에 대해서 먼저 얘기를 하고 그다음에는 에로스로부터 우리가 어떤 혜택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을 얘기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파우사니아스는 뭐라고 말했는가. 파우사니아스는 에로스가 있으면 뭐가 좋다, 사랑이 된다 라는 얘기를 했다. 오히려 아리스토파네스가 한 얘기가 에로스의 기원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어떠했다 라는, 일종의 역사적 고찰이다, 그런 것을 한 것이 훨씬 더 아가톤이 말한 것처럼 에로스의 본성을 가장 잘 얘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에로스의 본성을 말하는데 에로스는 가장 젊다 그 다음에 젊고 또 젊을 뿐만 아니라 두 번째로는 여리고 가냘프다, 형태가 유연하기도 하다 그런 다음에 에로스의 덕을 얘기하는데 신에게든 인간에게든 불의를 행하지 않고 그다음에 올바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풍부한 절제를 가지고 있으며 용기에 관해서도 아레스조차도 맞서지 못할 정도로 용기 있고 지혜가 있다. 그다음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얘기가 있다. "이 신이 태어나고부터는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함으로 인해 모든 좋은 것들이 신들과 인간들에게 생겨났다네." 그러니까 말하자면 에로스에 관한 한 최상의 찬양이다.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사랑이 생겨나서 모든 좋은 것들이 신들과 인간들에게서 태어났다. 그리고 나서 이제 아가톤은 말한다. "에로스 자신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하기에, 그 다음의 것으로 그가 남들에게 있는 이 비슷한 다른 것들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네." 아름다움과 훌륭함의 원인이 된다. 거기까지 하고 끝냈으면 좋은데 아가톤의 문제가 뭐냐하면, "그런데 막 뭔가 운율을 넣어 말해보겠다는 생각이 내게 들었네"하고 인간들 사이에는 이런 식으로 시를 하나 짓는다. 이 부분은 과잉이다. 아가톤의 과시가 과잉되는 상태를 보여준다. 이제 재미있는 것은 앞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희극 작가인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비극적인 원초성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비극 작가인 아가톤은 에로스를 굉장히 아름답고 현란하게 얘기를 한다. 작품 안내를 보면 "가장 용기 있는 아레스도 사로잡으니 정말 용기 있는 자라는 것, 누구든 시인으로 만들기에 그 자신도 지혜로운 시인이라는 것 등 근거를 확보한다."  그런데 사실은 아가톤의 논변이라는 게 오류가 있는 부분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얘기를 한다. 번역자는 "오류임이 비교적 쉽게 드러나는 논변들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면 좀 자제도 하련만, 주인공 아가톤은 제대로 필을 받아 내친 김에 에로스의 선물 이야기는 아예 운문으로 하겠다고 나선다. 에로스의 찬송은 이렇게 운율이 들어간 제대로 된 찬송으로 해야 한다는 듯이, 아니 에로스가 지혜로운 시인이듯 아름다운 시를 만드는 자신이 마치 에로스의 화신이라도 된다는 듯이 말이다." 다시 말해서 아가톤이 이야기를 하다가 완전히 흥분한 상태가 되어서 자신이 에로스처럼 굴었다는 것이다.  제가 이 작품 안내를 읽으면서 좀 뭐라고 한마디 하고 싶은 게 작품 안내에 번역자가 "주인공 아가톤은 제대로 필을 받아 내친 김에"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이렇게 필을 받았다라는 말, 이런 건 상스러운 말이다. 그냥 강의할 때 남에게 설명할 때 우스갯소리로 집어넣을 수 있는 그런 말이긴 한데 이렇게 활자로 인쇄되는 책에다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은, 플라톤의 《향연》이라는 대화편은 아주 고급스러운 텍스트이다. 그리고 이 《향연》이라는 대화편을 번역한 사람이라면 굉장한 지식인이다. 그런데 그런 지식인이 해설에다가 필 받았네 이런 말을 천박하게 쓰는 것은 좋지 않다. 혹시라도 여러분들이 작품안내를 읽을 때 뭐 그냥 희랍철학 전공한 박사도 "필을 받아 내 친김에" 이런 거 쓰는데 나도 써봐야지 이런 생각 혹시라도 할까봐 걱정되어 말한다. 말로 할 때는 제가 이것을 녹음할 때는 상스러운 말 많이 하고, 욕도 한다. 그런데 글을 쓸 때는 이렇게 쓰면 안 된다. '필을 받아' 이렇게 쓰고 싶으면 거기다 싱글코테이션이라도 달아두는 게 올바른 태도이다.  

195a 나는 내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를 우선 말하고 나서 그다음에 말하고 싶네.

195a 우선 그 자신이 어떤 자인지를 찬양하고, 그 다음에 그가 준 선물들을 찬양해야 마땅하네.

197b 이 신이 태어나고부터는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함으로 인해 모든 좋은 것들이 신들과 인간들에게 생겨났다네.

197c 에로스 자신이 가장 아름답고 가장 훌륭하기에, 그 다음의 것으로 그가 남들에게 있는 이 비슷한 다른 것들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하네. 


그런데 이제 소크라테스가 계속해서 걱정을 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모두가 환호하고 있고, 아가톤이 놀라울 정도로 말을 잘할 것이라고, 나는 막막해하리라고 생각했으니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그것을 이제 199c까지 계속 그런 얘기를 한다. 그런데 이렇게 계속되는 걱정을 하면서도 소크라테스는 살짝 아가톤을 비아냥거린다. 첫째는 "이렇게 아름답고 현란한 이야기가 끝난 후에 이야기를 하려 하면서 나든 다른 어느 누구든 어찌 막막해하지 않겠는가." 일단 아가톤을 굉장히 칭찬한다. 그런 다음에 198c에 보면 이렇게 말을 한다. "실로 그의 이야기는 내게 고르기아스를 생각나게까지 했고", 이건 비아냥거리는 말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아가톤의 연설을 들으면서 고르기아스가 생각난다고 했으면 비아냥 거리는 것이다. 고르기아스는 소크라테스가 비웃는 자들의 부류이다.  그런 다음에 "그리고 나는 그때 나는 깨달았네.  하, 내가 참 우스운 자로구나." 소크라테스 스스로가 아가톤이 저렇게 휘황찬란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그걸 들으면서 이렇게 내가 우스운 자로구나 라고 말했으면 사실은 아가톤에게 돌려주는 말이다.  그다음에 "나는 아둔해서 찬미 대상 각각에 관해 진실을 말해야 하며, 또 이게 기반이 되고, 바로 이것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골라내어 가능한 한 그 찬미 대상에 가장 알맞게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이것이 소라테스가 생각하는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앞에서 아가톤은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그것에 대해서 사실은 소크라테스가 논박을 하는 것이다. 아가톤 당신이 이야기하는 방식은 어떻게 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를 해놓고 정작 본인은 그 방식대로 하지 않은 것 같아.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런 방식으로 얘기를 해야 된다. 그렇게 얘기를 한 다음에 그다음에 바로 이렇게 이야기한다. "어떤 것을 아름답게 찬양한다는 것이 이게 아니었던 것 같네. 오히려 그 대상에게 가능한 한 가장 위대하고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봉헌하는 일이었던 것 같네." 지금 읽은 198e에 있는 것인 "그 대상에게 가능한 한 가장 위대하고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봉헌하는 일"이라고 했는데 번역자의 각주를 보면 봉헌한다는 것을 '갖다 붙인다'고 했다. 그것은 아가톤이 에로스를 찬미하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아가톤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것처럼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냥 좋다고 하는 것은 몽땅 다 가져다가 에로스에다가 그냥 덧붙여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아가톤을 비꼬아서 한 말이다. 그리고 나서 "어쨌거나 자네들의 찬양은 아름답고 인상적이네" 라고 말했다. 완전히 앞에 한 사람들 얘기를 칭찬하면서 먹이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소크라테스는 그러니까 계속되는 걱정이지만 이 걱정 안에는 사실은 너네들이 걱정이야 하는 것의 내용이 들어있다고 봐도 크게 잘못된 이해는 아닌 것 같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소크라테스는 이제 이야기를 자신이 디오티마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하기 직전까지 하게 되었다. 

198b 이렇게 아름답고 현란한 이야기가 끝난 후에 이야기를 하려 하면서 나든 다른 어느 누구든 어찌 막막해 하지 않겠는가

198c 실로 그의 이야기는 내게 고르기아스를 생각나게까지 했고, 그래서 나는 그야말로 호메로스가 말한 것과 같은 경험을 했네.

198c 그리고 나는 그때 나는 깨달았네.  하, 내가 참 우스운 자로구나.

198d 나는 아둔해서 찬미 대상 각각에 관해 진실을 말해야 하며, 또 이게 기반이 되고, 바로 이것으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골라내어 가능한 한 그 찬미 대상에 가장 알맞게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198e 어떤 것을 아름답게 찬양한다는 것이 이게 아니었던 것 같네. 오히려 그 대상에게 가능한 한 가장 위대하고 가능한 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을 봉헌하는 일이었던 것 같네. 

 



199a 어쨌거나 자네들의 찬양은 아름답고 인상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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