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인문고전 읽기의 실제 5-1

 

2023.07.26 🎤 인문고전 읽기의 실제 5-1

커리큘럼

5.31   호메로스, 오뒷세이아
6.14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6.28   플라톤, 국가·정체
7.12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 맥베스 / 오셀로
7.26   허먼 멜빌, 모비 딕

 

서지정보

호메로스 / 오뒷세이아 (알라딘 바로가기)

투퀴디데스 /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알라딘 바로가기)

플라톤 / 국가, 정체 (알라딘 바로가기)

셰익스피어 / 리처드 2세, 맥베스, 오셀로 (아침이슬 셰익스피어 전집 2, 4, 15)

허먼 멜벨 / 모비 딕 (페이퍼백)  (일러스트레이트 양장본)

 


5강. 허먼 멜빌, 모비 딕

일시: 2023. 7. 26. 오후 7시 30분-9시 30분

장소: 수원시글로벌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3172 

 

Matt Kish, Moby-Dick in Pictures: One Drawing for Every Page

 

이종인씨가 번역한 《모비딕》의 역자 해제를 보면 "거대한 주제를 다루는 거대한 소설"라고 되어 있다. 번역이 어떻다는 것은 관여할 문제도 아니고 얘기할 만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해제 부분을 꼼꼼하게 읽어봤다. 그리고 김석희씨가 번역한 것은 “옮긴이의 덧붙임”이라고 되어있다. 이종인씨는 영문학을 전공한 사람이고 셰익스피어 책도 몇 개 번역했다. 김석희, 이종인 둘 다 번역계에서 번역 못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이제 한번 책을 보자. 김석희씨 번역본이 있고 이종인씨 번역본이 있다. 이렇게 있는데 지금 과정이 인문 고전 읽기의 실제이다. 그러니까 책을 고를 때 아직 안 샀다면 어떠한 책을 살 것인가. 김석희씨 번역본을 추천했으니까 그냥 이것을 샀을 것이다. 번역본이 여러 개 있는지 몰랐을 수도 있다. 그런데 어쨌든 이것을 골라야 되는 상황이 있다고 하자. 책을 고를 때 무엇을 해야 되는가. 하나만 골라야 된다고 하면 그럴 때 기준이 있을 것이다. 두 사람 다 번역을 잘했네 못했네는 우리가 따져볼 수 있는 처지도 못 되고 능력도 안 된다. 그냥 업계에서 알아주는 두 사람이다.  그러면 이것은 꿀팁도 아니고 원칙이다. 첫째 어떤 출판사에서 책을 더 정성스럽게 만들었는가를 봐야 한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서점에 가서 봐야 한다. 김석희씨의 번역본 양장본을 보면 굉장히 공들여 만들었다. 그런 것을 먼저 사야한다. 출판사가 공들였으니까 그 공들인 것에 대한 독자의 마땅한 tribute이다. 현대지성사가 아무리 레이먼드의 그림을 실었네 이종인 번역이 끝내주네 한다 해도 일단 김석희씨의 책을 사주는 게 예의다.

그런데 두 개 다 비슷하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뒤에 붙어 있는 역자 해제를 봐야한다. 중요한 포인트이다. 역자 해제라는 것만큼 쓰기 어려운 게 없다. 역자는 영원히 역자다. 역자가 역자 해제를 쓸 때 해야 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겸손함이다. 어쨌든 자기가 쓴 건 아니다. 내가 지금 번역한 이 책에 대한 그리고 번역한 저자에 대한 칭송을 적당한 선에서 해야 한다. 지나치진 않을지 언정 헌사가 있어야 한다. 즉 겸손한 헌사가 있어야 한다. 그걸 쓸 줄 아는 사람은 그걸 보고 배우는 것이다. 이영미 씨가 번역한 책 중에 이마미치 도모노부의 《단테 신곡 강의》가 있다. 제가 권해서 번역을 했다. 이 책을 번역할 때 제가 처음에 역자후기를 잘 써야 된다고 얘기를 했다. 《옥스퍼드 세계사》도 보면 역자후기를 잘 썼다. 이재만 군이 《역사와 역사가들》을 저와 공역하면서 번역일을 시작했는데, 역자 후기를 잘 쓰는 게 자기가 번역하는 데 공을 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자로서 해야 될 굉장히 중요한 미덕이 겸손의 미덕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다음에 말이 되는 문장을 써야 한다. 번역은 잘했는데 역자후기가 말이 되는 문장이 안 된다고 하면 이 양반은 남이 쓴 문장을 옮기기는 하는데 자기 문장은 못 쓰는 사람이구나 하게 된다. 그러면 신뢰가 확 떨어지게 되어 있다. 그다음에 역자 후기에서 자기 나름의 해석을 시도하면 안 된다. 물론 그렇게 할 수는 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번역을 했었다.  책 자체는 얇은데 돌아가신 이론과실천의 김태경 대표께서 저한테 역자후기를 써주세요 라고 했었다. 저는 그걸 전공한 사람이다. 그것은 뭘 말하냐 하면 저한테 역자 후기를 써 달라고 하는 것은 이 책은 참 좋은 책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독자 여러분들이 많이 읽기를 바란다.  이걸 쓰기를 원하는 건 아닐 것이다. 공산당 선언이라고 하는 텍스트를 읽는 하나의 인터프리테이션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 번역이 어렵지 않다. 공산당 선언의 독일어 번역은 오역이 있을 수 없는 번역이다. 공산당 선언 번역은 너무나 많이 번역이 되어 있기 때문에 누가 번역을 더 잘했네 그런 걸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모비딕하고 비슷한 것이다. 

제가 번역을 했기 때문에 역자 후기에 공산당 선언은 어떤 의의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읽어야 한다는 것을 독자적인 시각으로 인터프리테이션을 가져다 붙이는 게 역자 후기이다. 그러나 전업 번역가는 그걸 쓰면 안된다. 아주 자신 있는 경우, 누구와 붙어도 자기가 뭐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자신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안된다. 그래서 김석희씨는 번역을 할 때 그냥 고만고만한 얘기들을 가져다가 역자후기를 써놓았다. 그러니까 그냥 “옮긴이의 덧붙임”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이종인씨의 “거대한 주제를 다루는 거대한 소설”이라는 레토릭은 어떤가. 역자가 붙인 것이다. 제목부터 실패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자기가 쓴 글을 검사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간단히 말하면 글을 못 쓰는 사람이 쓴 제목이다.  그러니까 거대한 주제를 다루는 거대한 소설이라고 하는 제목을 밀고 간다고 하면 그 제목하고 딱 맞아떨어지는 얘기가 첫 문장에 있어야 한다. 잘 쓰여진 글과 글을 잘 쓰는 것이 연결되는 지점이 이것이다. 그다음에 이런 책은 기독교 출판사에서 나온 문헌이 아니면 이런 공식적인 텍스트에서 성서를 인용할 때는 공동번역 성서 개정판에서 인용하게 되어 있다. 두 번째 하나님이라고 쓰지 않고 하느님이라고 쓰게 되어 있다. 그게 원칙이다. 

오늘 허먼 멜빌의 《모비딕》 얘기를 한다.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인데 제가 이 얘기를 하는 이유는 번역자처럼 많이 읽은 사람도 드물 것이고 번역을 많이 해본 사람도 드문데 막상 자기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다.  다상량 다독서, 생각을 많이 하고 그다음에 많이 읽으면 글을 잘 쓸 수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오늘 이 얘기를 듣고 글을 잘 쓰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첨삭을 받는 것이다. 완화해서 표현하면 첨삭을 받는다는 것이고, 조금 정확하게 표현하면 선생님한테 배우는 것이다.  

Moby-Dick; or The Whale
The는 정관사이기 때문에 고래 일반을 가리키는 말이다. a Whale는 고래 하나를 가리키는데 The Whale이라고 하면 고래 일반일 수 있다.  그 고래 딱 하나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고래 일반. 그러면 모비딕이라고 하는 것은 그 고래 이름인데 제목을 보면 세미 콜론이 있다. 세미콜론이 있으면 일단 내용은 끊어진다. The Whale이기 때문에 고래 일반이다. 그러면 이 책은 모비딕이라고 하는 하나의 고래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고래에 관한 일반적인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얘기다. 제목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여기 이 책을 보다 보면 고래학 사전이 나오고 고래 얘기가 잔뜩 나온다. 그래서 그런 것이다. 그러면 이건 무엇인가. 멜빌이 생각하기에 모비딕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해를, 모비딕을 알려면 일단 고래 일반에 대해서 알아야 된다 라는 얘기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즉 보편 개념으로부터 모비딕이라고 하는 특수한 사례로 내려오는 것이 반드시 요구된다는 얘기이다. 그런데 이제 가운데 or가 붙어 있다. or는 “또는”이다. or 앞에 있는 단어와 or 뒤에 있는 단어를 서로 호환해서 쓸 수 있을 때 또는 이라는 말을 쓴다. 모비딕이 사실은 거래 일반을 대표하는 놈이다 라는 뜻도 된다. 모름지기 해제를 쓰려면 이런 얘기부터 쓰는 것이다. 자기가 역자 해제라고 제목을 붙여서 쓰려면 제목 분석부터 하는 것이다. 

강의자료에서 모비딕의 시대라고 쓰여 있는 부분을 한번 보자. 앎에 대한 파우스트적 욕구, 백과사전적 탐색, 감각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의 대비와 통일, 진리의 전체성, 겪는 이이면서 동시에 서술하는 이로서의 이슈메일 이렇게 되어 있는데, Moby-Dick; or, The Whale 이것은 지금 여기에 격는 이이면서 동시에 서술하는 이로서의 이슈메일을 빼고, 앎에 대한 파우스트적 욕구, 백과사전적 탐색, 감각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의 대비와 통일, 진리의 전체성 이 4개 중에 어떤 것에 해당하겠는가. 바로 진리의 전체성이다. 제목은 진리의 전체성을 반영한다. 모비딕 하나를 알려면 고래 일반을 알아야 된다. 그리고 고래 일반에 대한 앎이 모비딕 안에 들어가 있다.  진리의 전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냥 에이헤브가 모비딕 쫓아다니다가 모비딕을 죽이고 자신도 죽은 얘기라고 하면 그냥 추접스럽게 읽는 것이다. 모비딕을 읽다 보면 고래에 대한 얘기가 잔뜩 나온다. 그게 왜 필요한가. 모비딕에 대한 이해를 하려면 The Whale를 알아야 되니까, 고래 일반을 알아야 하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면 진리라고 하는 것은 전체를 알아야 한다. 유가 있고 종이 있는데, 희랍어로 유가 genos이고, 종이 eidos이다. genos를 알아야 eidos를 아는 것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이성을 가진 생물. 인간은 생물에 속한다.  이성이라고 하는 건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점을 들어서 인간이 속해 있는 genos를 말하는 것이 definition이다. 그러니까 이성을 가진 생물 이렇게 말한 것처럼 모비딕은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고래인가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냥 눈 앞에 놓여 있는 모비딕에 대해서 이렇게 저렇게 쓰면 되지 않나요 라고 말하면 될 텐데 굳이 고래 일반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하는 것은 백화사전적 탐색일테고 백과사전적 탐색을 하려면 앎에 대한 파우스트적 욕구가 있어야 한다. 지금 여기서 파우스트적 욕구라고 말했는데 파우스트는 경건한 크리스찬인가 아니면은 그냥 닥치는 대로 모든 지식을 쫓아다니는 양아치 같은 pagan인가. 파우스트는 이교도라 할지라도 그 이교도를 크리스찬으로 transformation 시키려는 시도가 파우스트에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앎에 대한 파우스트적 욕구라는 말이 나왔는데 파우스트적 욕구가 앎에 대한 욕구라고 하는 것은 널리 사용되는 클리셰, 상투적인 표현에 가깝다. 그런데 그걸 쓸 때 파우스트의 성격 규정을 스스로 자각적으로 한 다음에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라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경건한 크리스찬이든 아니면 진리에 대한 탐구욕이 넘쳐 흐르는 그런 사람이든 간에 자신의 생명을 걸고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이게 앎에 대한 파우스트적 욕구라고 하는 말은 굉장히 무서운 말이다. 진리에 헌신하려는 그런 파토스가 있어야 이 욕구라는 것이 유지가 되는 것이다. 진리에 헌신하려는 파토스는 물욕보다도 더 강하다. 물욕은 어느 정도 선에 가면 해소가 되기도 하는데 앎에 대한 파우스트적인 욕구는 해소가 잘 안 되는 것 같다. 그래서 플라톤이 철학자는 에로티코스erōtikos라고 한 것이다. 사랑을 갈구하는 자라고 해서 에로스라고 얘기한 것이다. 

그다음에 감각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의 대비와 통일이라고 했는데, 이념적인 것은 관념적인 것이다 라고 말해도 괜찮다. 대비와 통일인데 통일이라는 말의 포인트가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감성적인 것, 이성적인 것 이렇게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인데 저는 감성과 이성의 대비와 통일이라는 말보다는 감각적인 것과 이념적인 것 또는 관념적인 것의 대비와 통일 이렇게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한 표현이라고 생각을 한다. 우리가 아무리 그것이 이념적인 것이라 해도 우리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는 body를 가지고 있어요. 물로서의 육체를 가지고 있다. 물로서의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이데아,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감각적인 것에서 시작이 된다. 어느 선에서 끊어지지 않고 연속체 속에 들어가 있다. 감각이 있어야 그 감각으로부터 계속 추상화해서 이념이 형성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궁금하다라는 단어가 있다. 궁금하다 라는 단어는 아주 대표적으로 두 가지 의미로 쓴다. 뭐가 먹고 싶어서 입이 심심하다는 뜻도 되지만 모르는 게 있어서 궁금하다 라는 뜻으로도 쓰인다. 그러면 하나는 physical한 영역에 쓰이고 다른 하나는 spiritual한 영역에서 사용된다. 그런 것처럼 그것은 continuum의 관계 속에 들어 있다. 그걸 생각하면 그건 대립이 아니라 대비라고 되어 있는 것처럼, 대비라고 하는 말과 대립이라고 하는 말은 다르다. 대립은 어떻게 보면 서로 선을 넘어가지 못하는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는 게 대립이다. 죽느냐 사느냐는 대립이다. 적당히 죽고 적당히 사는 건 그냥 우리 머릿속에서만 가능하다. 흰색과 까만색은 대비이다. 회색이 중간에 있을 수 있으니까. 즉 가운데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 건 대립인 것이고 가운데 뭔가가 그 중간 적당한 선이 있으면 대비인 것이다. 적당하게 가운데 뭐가 있으면 철학에서는 반대 명제라고 하고 중간에 아무것도 있을 수 없다고 하면 모순 명제라고 한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대다수가, 100개의 경우라면 99개의 경우가 죽고 사는 거 말고는 다 반대 명제로 이루어져 있다. 반대 명제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을 모순 명제인 것처럼 하는 것이 사람을 속이는 것이다. 선동하는 사람들이 그걸 한다. 

그다음에 겪는 이이면서도 동시에 서술하는 이로서의 이슈메일. 제가 모비딕의 시대에 있는 이 부분을 자세하게 지금 먼저 말하자면 이게 바로 허먼 멜빌의 모비딕라고 하는 텍스트가 서사시 전통epic tradition에 있다고 하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특히 겪는 이이면서 동시에 서술하는 이로서의 이슈메일이라고 하는 이 부분은 되게 중요하다. 겪는 이이면서 동시에 서술하는 이로서의 이슈메일이라는 자리에 쓸 수 있는 사람 이름이 꽤 많다. 단테가 있다. 《신곡》의 주인공이 단테이고, 《신곡》을 쓴 사람은 단테이다. 그러니까 그 안에서 베르길리우스와 길을 따라가는 사람도 단테이고, 그다음에 그 따라가고 있는 단테를 서술하는 사람도 단테이고, 심지어 이 모비딕에서 말하자면 저자가 이슈메일이었으면 3단 콤보가 될 뻔했다. 단테는 그걸 성취한 사람이다. 그러니까 단테가 단테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거울상으로서의 자아가 등장하는 것인데 그런 것들이 바로 사실은 서사적 자아들이 있는 것이다. 서사적 자아라고 하는 건 인간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서사적 자아이다. 서사적 자아가 안 되는 사람들이 메타 인지가 안 되는 사람들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의 특징은 지금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스스로 모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조금 어렵게 말하면 서사적 자아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가 자기에 대해서 서술하는 것. 일기를 많이 써본다고 해서 서사적 자아의 능력이 늘어나는 것 같지는 않다. 호메노스의 서사시 《일리아스》는 "분노를 노래하소서. 시의 여신이여"라고 시작한다. 아킬레우스의 분노에 대해서 무사 여신이 얘기를 해주니까 시인이 그것을 듣고 청중에게 전해주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건 무사 여신이 시인의 입을 빌려서 얘기하는 것이다. 시인의 창작물이 아닌 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격는 이는 아킬레우스인데, 아킬레우스가 말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신이 신의 입장에서 그걸 이렇게 들여다보고 아킬레우스의 겪음을 신이 한 번쯤 reflection을 한 것이다. 돌이켜서 생각해보고 그걸 다시 시인한테 야 이거 좀 사람들한테 전해줘 하고 말을 한다. 그렇게 말한 것들, 그러니까 여러 번 여러 사람의 입을 거쳐 온 것을 서사적이라고 말한다. 쉽게 이야기를 하자면 서사적이라는 그런 걸 말한다.  

또다른 예를 들면 《향연》을 보면 처음에 아폴로도로스가 나는 자네들에게 그날 소크라테스가 거기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를 잘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연습을 많이 했다네 라고 얘기를 한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말인가. 《향연》이 대화편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서사적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사람들이 파티에 모여서 뭐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이것을 구경한 누군가가 뭐라고 떠들었다. 그런데 떠든 것을 아폴로도로스가 들었다. 지금 두 다리를 건너온 것이다. 아폴로도로스가 이 얘기를 또 누군가에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각색의 각색을 거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향연》 이런 것들도 서사적 자아 라고 말한다. 서사적 자아가 작동하고 있다.  《오뒷세우스》도 마찬가지이다. 이 모비딕은 이슈메일은, 여기서 이제 핵심적인 문학 비평적인 문제가 하나 나오는데 이슈메일이 멜빌인가, 멜빌이 이슈메일이라고 하는 주인공인지 아니면 구경꾼인지 알 수 없다, 이 사람에게 자기를 투영시키고 있는가 아닌가 라는 문제가 문학비평에 계속 등장하게 된다. 그래서 이종인씨가 쓴 해제를 보면 몇 가지 얘기가 있다. 문학비평에서 등장하는 이슈메일은 어떤 사람인가, 에이에브는 어떤 사람인가, 요나는 어떤 사람인가, 흰고래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나를 이슈메일이라고 불러다오 하는데 이슈메일은 어떤 성격을 가진 사람이가. 여기서 이슈메일은 어떤 사람인가 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문학의 역사 속에서 서사시의 역사 속에서 가장 오래된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셈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각각의 개인이 처해 있는 상황에 대한 아주 오래된 문제이다. 지난주 수요일에 제주도에서 제가 강의를 했는데 가령 누가 지난주 강의는 어땠어요 라고 물으면 지금 그날의 저에 대해서 제가 얘기해야 된다. 이슈메일인 것이다. 그날의 주동자이고 가담자인데 말을 할 때는 그날을 구경한 사람처럼 얘기해야 한다. 그러니까 겪은 이이면서 동시에 서술하는 이인데 서술을 하려면 옆에서 봐야 한다. 그런데 사실 옆에서 보지 않았다.  그날 그냥 멀쩡하게 제가 떠들었다. 그러니까 아주 아이러니한 게 그날 그 강의에서 제가 열심히 몰두해서 나를 잊을 정도로 몰두를 했다면 남에게 얘기해 줄 수가 없는 것이다. 딴청 부리고 강의를 대충 했으면 이랬어요 저랬어요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데, 그런 경우 그날 강의하면서 내가 딴 짓을 했어야 되는 것이다. 열심히 하면서도 구경꾼일 수 있을까. 밥을 열심히 먹으면서도 음식 비평가일 수 있을까. 인생을 열심히 살면서도 남의 인생 살 듯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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