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3)

 

2023.11.01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3)

📖 경험공간과 기대지평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지나간 미래⟫(Vergangene Zukunft: Zur Semantik geschichtlicher Zeiten, 1979) 

- 경험과 기대관계의 역사적 변화
“나의 테제는 근대에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는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해서 기대들이 그때까지의 경험들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근대가 새로운 시대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 진보개념
“진보개념은 18세기말경에야 비로소 지나간 3세기의 충만한 새로운 경험들을 결집시키며 만들어졌다… ‘진보’는 동일한 시간적 변화계수를 가졌던 경험과 기대를 묶어냈다.” 
“미래는 과거와 다를 것이며, 더 나을 것이다… 이 원칙은 그때까지의 모든 역사적 예언형식들을 뒤집는 것이다... 역사 전체가 일회적이라면 미래는 과거와 달라야만 한다. 계몽주의의 결과이자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향인 이러한 역사철학적 원칙은 역사 일반과 진보개념을 기초짓는다. 양자 모두 개념형성과 더불어 역사철학적 충만함에 도달했던 개념이며, 더이상 어떠한 기대도 그때까지의 경험에서 도출될 수 없다는 실상을 가리킨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경험공간과 기대지평 이 논문의 세 번째 섹션은 경험과 기대관계의 역사적 변화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어제까지 설명했던 것은 기대 지평과 경험 공간이라고 하는 것의 간격이, 특정한 시대 속에서 사람의 경험이 차츰 누적되고, 그 누적된 것들로부터 뭔가 기대가 생겨나는데 그 경험과 기대가 그렇게 큰 차이가 없을 때는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의 긴장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즉 자신의 경험으로부터 예측이라고 하는 것이 가능할 때는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것이, 진보라고 하는 것 또는 지금까지 도대체 겪어보지 못했던 그런 사태들을 기대한다는 것 이것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얘기였다. 

코젤렉의 논문을 있는 그대로 좀 읽어가면서 설명을 해보겠다. 코젤렉에 따르면 "근대에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는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해서 기대들이 그때까지의 경험들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근대가 새로운 시대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근대라고 하는 것은 대개 modern age로 표현되는데 도이치어로는 Neuzeit이다. 새로운 시대. 무엇이 새로운가. 지금까지 겪어보지 않았던 것들이 나타나면 새로운 시대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나간 미래》 399 나의 테제는 근대에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는 것이고, 더 정확히 말해서 기대들이 그때까지의 경험들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근대가 새로운 시대로 파악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객관적 자료를 거론하면서 얘기하는 것을 보면 "이백 년 전에 유럽의 대다수 지역에서 인구의 80%는 농민이었고, 이러한 세계는 자연의 순환과 더불어 살았다." 굉장히 중요한 사태다. 그렇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자연의 순환 속에서 경험했던 것 그것을 그대로 앞날로 투사하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일상은 자연이 제공하는 것에 의해 만들어졌다. 수확은 태양, 바람, 기후에 달려 있었고, 습득된 숙련성은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되었다. 기술적 혁신이 있긴 했지만 너무 느린 것이어서 생활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의 경험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할 수 있었다." 이게 굉장히 중요한 표현이다. 기술적 혁신이 있다고는 해도 그 혁신이 굉장히 느린 것이니까 생활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그런 경험을 유지하면서도 그렇게 아주 느린 기술적 혁신이라고 하는 것에도 적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농민적이고 수공업자적인 세계에서 제기되었던 기대들, 앞날은 이럴 것이다 하는 것들이 사람들마다 다를 수도 없고, 거의 다 공유되었고, 동시에 그것은 "전적으로 선조의 경험에 의지했고, 이 경험들이 다시 후손들의 경험이 되었다." 그리고 "너무도 느리고 장기적인 것이어서 그때까지의 경험과 새로운 기대 사이의 간격이 전래된 생활세계를 파괴하지는 못했다." 우리는 이것을 중세적이다 라는 식으로 표현을 하는데 반드시 중세적인 것만은 아니다. 즉 특정한 시대라 할지라도 급격하게 급격한 변화를 불러온 사회에서는 이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것이 굉장히 쫙 늘어난다. 

《지나간 미래》 400 이백 년 전에 유럽의 대다수 지역에서 인구의 80%는 농민이었고, 이러한 세계는 자연의 순환과 더불어 살았다. 사회제도, 판매량의 동요, 특히 농업생산물의 수출과 수입, 화폐의 동요를 도외시한다면, 일상은 자연이 제공하는 것에 의해 만들어졌다. 수확은 태양, 바람, 기후에 달려 있었고, 습득된 숙련성은 세대에서 세대로 대물림되었다. 기술적 혁신이 있긴 했지만 너무 느린 것이어서 생활을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그때까지의 경험을 유지하면서 사람들은 그것에 적응할 수 있었다. 

《지나간 미래》 400 농민적 · 수공업자적 세계에서 제기되었던 기대들은 전적으로 선조의 경험에 의지했고, 이 경험들이 다시 후손들의 경험이 되었다.  

《지나간 미래》 400 너무도 느리고 장기적인 것이어서 그때까지의 경험과 새로운 기대 사이의 간격이 전래된 생활세계를 파괴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한반도의 역사를 1800년부터 지금까지를 한번 생각을 해보면, 압축적 근대화라는 말을 쓰는데, 그것을 가지고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라는 용어를 가지고 써보면, 지난 200년 동안에 한국인들은 경험을 누적시킬 틈도 없이 곧바로 새로운 경험들이 그런 경험 위로 또 쌓이고 또 그다음에 뭔가를 기대하기도 전에 새로운 것들이 쌓이고 그러다 보니까 아주 급속도로 적응하기가 어려운 그런 시대를 살아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 세대 안에서도 급격하게 경험 공간이 파괴되고 그러다 보니까 한국 사람들은 '빨리빨리'라는 문화가 있다. 지금 이전에 그러니까 한 세대 안에서 또는 한 생애 안에서, 세대도 아니고 한 생애 안에서, 저의 개인적인 경험에 근거해서 말하는 것이라 보편성은 좀 없는 것 같기는 한데, 당장 저만 해도 지난 한 30년의 시기를 한번 조망을 해보면 굉장히 빠른 시간 안에 새로운 경험들을 겪게 된다. 휴대폰을 처음 사용한 게 2천년을 전후한 시기이다. 그러다가 모토로라 휴대폰을 쓰다가 지금은 이렇게 손목에서 뭔가를 녹음하는 이런 식으로 경험, 경험치 자체가 제 인생에서 한 3분의 1 정도 안에서 이렇게 급속도로 스마트한 어떤 기기들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게 지금 경험공간이 파괴되는데, 경험공간이 파괴되다 보니까 기대지평 자체가 생겨나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바뀌어 나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코젤렉은 유럽의 근대라고 하는 것이 형성되어 나올 때는 종교적인 종말론이라고 하는 것이 급속도로 사라지게 된 과정을 먼저 얘기한다. 세대들을 거치며 한 번 종말에 대한 예언이 나왔는데, 종말에 대한 기대가 환멸로 이제 끝나게 되고, 그렇다 할지라도 시대가 워낙에 천천히 바뀌다 보니까 종말에 대한 예언을 다시 또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또 받아들이게 되고 이렇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말론은 세계의 경험공간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계속 재생산될 수 있었다.  어떤 종말론이 나와서 앞으로 한 10년 후에 종말이 올 것이다 라고 했는데 이제 그게 종말이 오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지금 자기네들이 살고 있는 세계의 경험 공간이 그렇게 급속도로 변하지 않았다면 그런 종말론이 또 다시 나온다 할지라도 그 종말론을 그렇게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라는 것이 코젤렉의 논변이다.  

《지나간 미래》 402 종말론은 이 세계의 경험공간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면 계속 재생산될 수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기대지평이 열리자 이러한 상황은 진보개념에 의해 마침내 변하게 되었다." 즉 이제 그들의 경험공간 자체가 근본적으로 변하게 되면서 기독교적 종말론이라고 하는 것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시대가 되자 이제 근대라고 하는 사회는 진보라는 개념에 의해서 기대지평을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경험공간이라고 하는 것이 변하고 그런 진보 개념들은 18세기 말경이 되면서, 1500년대, 1600년대, 1700년대 이렇게 300년 정도의 시기를 거치면서 새로운 경험들이 결집되고 그렇게 결집된 경험들이 바로 이제 18세기 말에 되면서부터 폭발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서 진보개념이 확고하게 세계를 규정하는 그런 개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 더 이상 과거에 그들이 의존했던 종교적인 미래 예측, 즉 예언에 의존하지 않고 과학적 진보라고 하는 것것이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하나의 기대지평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이제 계몽주의이다. 《하버드-C.H.베크 세계사 : 1750~1870》 3부 세계적 변화의 문화사의 챕터 2인 계몽주의의 세계사라를 보면 이 계몽운동이라고 하는 것이야말로 이제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나간, 유럽 자체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에 걸쳐서 이런 새로운 기대 지평들을 만들어 나간 운동이라고 연결지어서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험공간 자체가 바뀌고 그것에 의해서 기대지평도 또한 그런 경험공간에 대해서 새로운 압력을 가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미래는 과거와는 다를 것이며 더 나을 것이다 라고 하는 생각을 사람들이 갖게 된다. 그래서 그때까지 기독교적인 예언 형식들을 뒤집어 엎고, 순환론적인 역사관이라고 하는 것이 완전히 부정되면서 역사 전체가 일회적이고 미래 또한 과거의 되풀이는 아닐 것이라고 하는 그런 생각들을 사람들이 가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계몽주의의 결과이자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향인 이러한 역사철학적 원칙은 역사 일반과 진보개념을 기초짓는다." 그러니까 역사 일반과 진보개념 모두 근대가 만들어 내놓은 아주 굉장히 중요한 사태 파악의 원칙이라고 볼 수 있겠다. 

《지나간 미래》 398 새로운 기대지평이 열리자 이러한 상황은 진보개념에 의해 마침내 변하게 되었다. 

《지나간 미래》 403 진보개념은 18세기말경에야 비로소 지나간 3세기의 충만한 새로운 경험들을 결집시키며 만들어졌다.

《지나간 미래》 404 미래는 과거와 다를 것이며, 더 나을 것이다.

《지나간 미래》 404 이 원칙은 그때까지의 모든 역사적 예언형식들을 뒤집는 것이다

《지나간 미래》 405 역사 전체가 일회적이라면 미래는 과거와 달라야만 한다. 계몽주의의 결과이자 프랑스혁명에 대한 반향인 이러한 역사철학적 원칙은 역사 일반과 진보개념을 기초짓는다. 양자 모두 개념형성과 더불어 역사철학적 충만함에 도달했던 개념이며, 더이상 어떠한 기대도 그때까지의 경험에서 도출될 수 없다는 실상을 가리킨다. 


경험공간과 기대지평이라고 하는 말은 반드시 학술적으로만 사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원칙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에 이것은 늘 의식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좋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든다. 물론 지난번에도 얘기했듯이 사람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경험이 있고 그리고 그렇게 감당할 수 있는 경험이 있을 때에만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심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 살 수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인간은 굉장히 불행해지고 그에 따라서 자기를 둘러싼 어떤 변화라든가 이런 것들을 완전히 거부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거부하면서 퇴행적으로, 즉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나는 편안하게 자연인처럼 살고 싶다 라는 사람들도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는 것이 과연 인간의 삶에 있어서 더 나은 삶인가 그리고 그런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한 삶에 이를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는 세계 속에서 오히려 사람들은 그런 변화를 거부하고, 나쁘게 말하면 낡은, 좋게 말하면 과거에 그 편안했던 세계관에 의존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을 준다고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도 상당수가 늘어나게 되는 것 같다. 과거를 그리워하면서 더 행복했던 과거들에 대한, 그런 그런 것들이 가져다준 안온함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훨씬 많지 않겠나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날마다 변화하고 그것을 따라잡고 그리고 그것에 근거해서 예측할 수 없는 어떤 기대들을 가진다는 것, 그것이 굉장히 핍진적인 삶은 아닐까 하는 그런 의문을 가져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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