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카시 후지타니: 화려한 군주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4. 10. 16.
화려한 군주 - 다카시 후지타니 지음, 한석정 옮김/이산 |
한국어판 서문
서문과 감사의 말
1장 서론: 발명하기, 망각하기, 기억하기
1부 국가적 미장센
2장 행재소에서 제국의 수도로
2부 근대 천황의 패전트
개관
3장 환실의례 꾸며내기
4장 일본의 근대성과 천황제
3부 국민
5장 군중과 황실 패전트
6장 에필로그: 현재의 역사를 향하여
지은이 주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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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 사이에 지배자와 피지배자를 막론하고 일본인 모두가 근대의 천황숭배와 국가숭배가 발명된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감쪽같이 망각하게 되었을까 하는 점에 관해서는 좀더 깊이 있는 천착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에르 부르디외가 "기원의 기억상실"이라고 명명한 중세를 대대적으로 갑자기 겪었음에 틀림없다. 역사는 어떻든지 간에 역사의 망각을 산출해 왔고 아주 최근에 만들어진 것까지도 부지불식간에 자연적이고 자명한 것인 양 꾸며내는 잠재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도쿠가와 시대까지는 역사학자들도 대체로 동의하듯이 일반인은 천황의 존재를 거의 혹은 전혀 몰랐지만 매이지 시대 이후로는 시간의 흐름이나 정치공간의 구성 나아가 일본 문화까지도 모두 천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흔해졌다.
36 근대 일본의 국가의례 중에서 가장 장관이었던 것은 천황과 그 가족, 그리고 천황정권의 문무관들을 대중 앞에 직접 보이는 대규모 황실패전트(pageant)였다. 이것이 이 책의 주요 관심사이다. 1880년 대 말까지 지배적인 형태의 공적인 황실 패전트는 순행으로서, 천황기 지방 구석구석을 순회하고 '일본인'이 될 사람들이 그를 구경하는 의례의 한 양식이었다. 최초의 순행은 1868년 봄 교토에서 오사카까지 간 것이었고, 같은 해에 교토에서 도쿄까지 한 번 더 순행이 이루어졌다. 이 대규모 순행은 메이지 초기 20년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천황은 북쪽으로는 홋카이도까지, 남쪽으로는 규슈 남단까지 방문했다.
38 내 몸속에 일본인의 뜨거운 피가 흐르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사상으로서는 '자유사상가'이지만. 혼으로 말하면 역시 대일본주의의 일원이다.
39 일본에서 근대적인 국가의례의 발명은 19세기 말과 20 세기 초 국내외의 특정 정치세력들에 대한 대용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그 전에는 일본인이 천황의 쾌유를 빌기 위해 몰려들었던 황거 앞 광장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황거는 황폐한 고성에 불과했다. 지금도 일본인이 버스를 몇 대씩 대절해 순례하는 일본의 가장 강력한 국가적 상징 중의 하나가 된 니주바시는 그저 오래된 다리였을 뿐이다. 일본인에게는 아직 국기도 국가(國歌)도 없었다. 대다수의 일반 민중은 천황을 일본 국민의 중심적 상징으로 인식하지도 않았고, 국가적 정체성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요컨대 국기적 상징이나 황실 패전트, 강력한 국민의식, 그리고 군주에 대한 애정과 흠모로 기독 찬 다야마 가타이의 기억은 근대의 지배 엘리트가 정력적으로 수행한 내셔널리즘 문화의 창조를 체험했던 한 일본인의 기억이었다고 할 수 있다.
51 메이지 시대의 모든 황실 패전트─과거라고 주장하는 시대의 고풍스런 의례를 본뜬 순행이 새로운 국가적 의례 작풍을 채택한 메이지 후기의 스펙터클이든─는 천황과 일본국민 사이에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시선 또는 가시성의 관계를 수립하는 데 기여했다.
55 천황을 근대의 원형감시적 국가의 중심에 재배치한다면, 국가와 천황에 대한 숭배가 비교적 근대에 창안된 것이라는 점, 아울러 천황제가 결코 '봉건성'을 그 특질로 하지 않으며 오히려 일본의 근대성을 창출하는 데 중심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5 순행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찬란함·색깔·금빛·장엄함을 통해 천황이 사회의 중심에 있음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순행은 무엇보다도 공간 통합의 의례였다. 영토를 가로질러 국경까지 다다름으로써, 순행은 군주라는 상징을 중심으로 영토가 공간적 일치를 이루었음을 뜻했다.
142 차등적으로 혜택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적 정치공동체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근대의 주체/신민을 창조하는데 제국 정부가 성공하느냐 여부는 대부분 종요하고 종종 상반되는 관념─도쿠가와 시대의 평민 같았으면 대부분 괴상하고 웃기는 일이라 여겼을 관념─을 믿도록 만드는 데 달려 있었다. 국가와 황통의 영속성, (다양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추구한) 일본인의 통합성,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는 천황의 능력, 정치를 초월하면서도 거기에 깊숙이 관여하는 천황의 위상, 정부와 정치활동에서 여성을 자연스럽게 배제시키는 것과 같은 그런 신념은 그 자체로 입증될 수 없는 것이었다.
147 공식 석상에서 행위의 중심인 메이지 천황은 유럽 군주의 것을 본뜬 마차를 타고 늘 서양식 군복을 입었다. 유럽에서 유행하는 최신 복장을 한 문무관들이 천황의 행렬을 뒤따랐다. 그리고 거대한 규모의 육해군과 무기들이 국가의 군사력을 나타냈다. 이 공개행사를 통해 제국정부는 국가의 복리를 책임진다는 것, 근대 세계의 선두에 서 있다는 것, 그래서 그 통치가 정당하다는 것을 과시했다. 요컨대 이 의식들은 우부카타 도시로가 말한 것처럼 일본이 "문명에 진입하고" 모든 면에서 나날이 다달이 부유해진다"는 인상을 심어주었다.
189 1912년 7월 국가의 안녕과 국가공동체의 항구성의 상징인 천황이 병석에 누었다. 근대 천황의 이미지를 만든 사람들은 이제 쇠약해져 죽어가는 천황을 불멸의 천황위로부터 분리시키는 의례를 치밀하게 준비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천황의 두 가지 측면 또는 두 ‘신체’를 확실히 떼어내야만 새롭게 꾸며낸 정치적 중심에 생명을 초월하는 영원성이 부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219 그러나 근대 일본에서 천황상─비록 국가의 과거 및 영속성의 상징이지만─ 은 그의 '두 신체' 중 적어도 하나는 남성으로 성별화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메이지 천황은 당시 유럽의 남성 군주들의 이미지를 모방했기 때문에 군복·훈장·수염으로 남성화되었다. 이 모방은 국제적인 상징 경쟁 분야에서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군주의 이미지를 통해서 그들의 국민·국가·민중을 유약하거나 종속적이거나 여성적이지 않고 힘 있고 성숙하다고 단언했다. 알레고리를 통해 그들은 서양 열강에 굴복하지 않는 일본의 독립권과 심지어 아시아 지배의 정당성까지 주장했다.
241 역사상에서 확실히 번영해 가는 국가공동체의 세속적인 면을 나타내며 남성화된 인간의 육체로서 천황의 신체가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초월성·불변성 또는 천황의 신성을 나타내는 별개의 신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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