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이치사다: 수양제

 

수양제 - 10점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전혜선 옮김/역사비평사

 

시작하며

1 남북조시대
2 무천진 군벌의 발전
3 수문제의 등장
4 수문제의 집안
5 강남 평정
6 황태자 폐위 음모
7 수양제의 즉위
8 대운하와 장성
9 해 뜨는 나라
10 수·고구려전쟁
11 양현감의 반란
12 양주로 도망친 수양제
13 수양제의 최후
14 새로운 기운

후기

[부록] 수나라 역사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隋代史雜考)
해설 : 도나미 마모루(礪波護)

 


18 중국의 긴 역사를 볼 때 남북조시대만큼 어리석고 우매하며 음탕한 천자가 많이 출현한 시대는 없었다. 지금까지 서술한 내용은 상당히 강도를 낮추고 적당히 참작하여 소개했을 뿐이며, 실제 이루어진 천자의 난폭하고 음란한 행동은 더 심각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이렇게 추악하고 괴이한 시대가 나타났을까. 

그 원인을 생각해보면 첫째로 남북조라는 시대는 일반 백성의 지위가 다우 낮아 아무런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국가는 백성을 계속 그러한 지위에 묶어두기 위해 영구적으로 항상 계엄령을 내린 시대였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상황은 남북조시대에 들어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후한 말 삼국시대부터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다가 남북조시대에 이르러 결국 극에 달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계엄령이 선포되었다고는 해도 일반적으로 유력자 집단은 항상 그로부터 제외되었고 특권도 인정되었다. 바로 고급 관료들이다. 특권은 계엄령이 삼엄해질수록 유효하고 그 가차도 상승한다. 보통 평민들은 가차 없이 군역으로 끌려가거나 무거운 군사 부가세를 낼 떄도 고급관료들만은 자신들의 특권을 앞세워 가혹한 세역을 면제받았다. 특권 계급은 자연스럽게 귀족의 지위를 차지하여 학문과문화를 독점하고 일반 평민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갔다. 남북조야말로 중국 귀족 제도의 이른바 황금시대였다.  

다만 귀족은 병권을 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권력에 한계가 있었다. 만약 그들이 군인이나 군대를 장악하고 있었다면 남북조는 당연히 유럽이나 일본의 중세와 같이 봉건제도가 출현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에서는 군대는 천자의 수중에 묶여 있었으므로 천자에 대립할 봉건 제후의 존재가 허용되지 않았다. 

49 남북조는 역성혁명의 시대였다. 북위가 화북을 통일한 뒤 분열되기까지 약 100년간 이어졌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길어봐야 송이 60년, 짧으면 남제의 24년처럼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다만 이같은 왕조의 찾은 교체가 유력자들 사이에서 정권을 넘겨주고 넘겨받는데 그쳤기 때문에 일반 백성에게는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이러한 혁명에는 일반 백성은 물론 대부분의 관료들까지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발언권도 없었으며, 동시에 그다지 큰 피해도 입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이 혁명으로 인해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은 가문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재위를 물려준 전 왕조 일가었다. 혁명이 일어나면 대체로 일가의 당주는 겁살이나 독살될 운명을 피할 수 없으며 남자 지손들은 전원 살해당했다. 왜 그런 잔인한 짓을 자행했어야만 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결국 새로운 왕조가 충분한 자신감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혁명으로 정권을 획득한 이들은 고대의 성왕들처럼 백성으로부터 추대를 받아 지위에 오른 것이 아나라 일시적 우연으로 발생한 유리한 형세를 타고 천하의 여론을 꾸며내어 제위를 빼앗은 것에 불과했다.  

214 수양재는 남북조시대의 혼란스러운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지만 낡고 고루한 천자였다.  최근 역사학의 경향에 따르면 남북조는 진나라의 멸망으로 끝나고 수나라는 다음에 이어지는 당나라와 함께 흔히 수·당이라고 묶여 일컬어지는데, 중국의 전통적인 견해로 보면 수나라는 남북조 속에 포함된다. 예를 들어 『북사』에는 수나라까지 포함되어 있다.

양쪽 견해 모두 일리가 있다. 수나라는 문제 시대에 남북을 통일한 필연적인 결과이기도 하지만, 각종 새로운 정책을 실시했고 그것들이 나중에 당으로 이어졌음은 확실하다. 그러나 새로운 제도가 시작되었음에도 나라를 운영한 인물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여전히 구태의연한 부분들이 있었다. 수양제는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낡은 방식으로 권력을 잡고, 낡은 방식으로 그 권력을 쥐고 흔들었으며, 마지막에는 낡은 방식으로 살해당했다. 

나중에 당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강남을 평정했을 때 고조 이연은 수양제의 사체를 천자다운 예식을 갖춰 이장했다(622). 양제라는 시호는 이때 정해졌다. 시호는 제왕이나 재상이 죽은 뒤 그 사람의 생전 업적을 평가해서 붙이는 이름이므로 대개는 좋은 의미를 담는다. 그러나 수양제의 경우에는 왕조가 바뀐 당나라 때가 굳이 아니더라도 그다지 좋은 시호는 붙여지지 못했을 것이다. '양'이라는 사호에는 색을 밝혀 예를 무시한 자, 예를 등지고 백성들로부터 미움 받은 자, 하늘을 거스르고 백성을 착취한 자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확실히 아는 수양자가 감수해야만 하는 이름이 틀림없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남조 진나라의 마지막 천자인 후주가 나라가 망한 뒤 수나라의 신하가 되어 죽었을 때, 수양재가 그에게 붙여준 시호가 바로 '양'이라는 글자였다는 점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잘 알면서도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찰 모른다. 다른 사람에게 '양'이라는 시호를 붙여준 자신이 나중에 죽은 뒤 똑같이 '양'의 시호가 붙여지리라고는 아마 수양제 본인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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