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철학의 위안 - 10점
보에티우스 지음, 정의채 옮김/바오로딸(성바오로딸)

옮긴이의 글

제1서
제2서
제3서
제4서
제5서

 


제5서 산문6

224 신이 영원하다는 것은 이성을 부여받고 생활하는 모든 존재의 공통된 판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영원이란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의 영원성을 아는 것은 신의 본질과 그 지식을 우리에게 명백히 알게 하여 줄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성이란 끝없는 생명의 전체적이고 동시적이며 완전한 소유를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시간적인 사물과 비교해 볼 때 더 명확해지니 시간 안에 살고 있는 현재적 존재는 그 어느 것이든 과거에서 미래로 진행하여 나간다. 곧 시간 안에 존재하는 것은 그 어느 것이든 자기 생명의 전폭을 동시에 포괄할 수 없는 것으로서, 내일은 아직 차지하지 못한 것이며 어제는 벌써 잃어버린 것이다. 또한 오늘의 생명에 있어서도 지나가는 한 순간을 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시간이라는 조건에 제약된 사물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우주에 대해서 고찰한 바와 같이 그 존재가 비록 시간이 없고 끝이 없으며 또 그 생명이 시간의 무한성과 같이 무한한 지속을 지향한다 할지라도 이런 것을 가지고서는 아직 영원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에 무한한 생명을 산다고 할 수는 있을지라도 그 생명 전체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지는 못하니 아직 지나가지 않은 미래는 차지하지 못한 때문이다. 

영원이라 하는 것은 무한한 생명의 전 충만성을 동시에 내포하고 소유하며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과거로 흘러 사라지는 것 또한 아무것도 없는 것을 가리켜 말한다. 이런 영원이란 필연적으로 자주적이며 또한 필연적으로 항상 자기에게 현존으로 존재하며, 또 필연적으로 그것에 지나가는 시간의 무한성도 현재이다. 그러므로 이 우주는 시간적인 시작도 없고 또 끝도 없으리라는 플라톤의 견해를 따라, 창조된 것도 창조자와 마찬가지로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틀렸다. 왜냐하면 플라톤이 이 우주에 대하여 말한 바 무한히 생명을 계속하는 것과, 신의 정신에만 고유한 무한한 생명의 현재성을 전체적으로 또 동시적으로 내포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이 창조물보다 선재한다는 것은 시간의 양의 문제가 아니라 신에게 고유한 본질의 단순성에 관한 문제다. 

그런데 이 항상 현재인 생명의 부동적 상태를 시간적 사물들의 무한한 운동이 모방한다. 그러나 그 상태를 그대로 표현할 수도 없고 또 그것과 동등하게 될 수도 없으므로 부동성의 결여에서 운동으로, 현존의 단순성의 결여에서 미래와 과거의 양적인 연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또한 시간적 사물은 자기 생명의 전 충만 성을 동시에 소유할 수 없으므로 존재를 그치지 않고 계속하는 방법으로써 자기가 충족시킬 수도 없고 표현할 수도 없는 것을 어느 정도 모방하는 것처럼 보인다. 곧 자기를 이 짧고도 빨리 지나가는 각 순간의 현재성에 붙들어 맴으로써 그것을 모방하려는 것 말이다. 이런 현재는 영구한 현재의 어떤 영상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런 순간적인 현재를 감각하는 사람에게는 그 누구에게나 그것이 영구한 현재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런 현재는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무한히 긴 과정을 취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영원히 머물러 있으면서 그 충만성을 동시에 내포할 수 없는 생명을 지나감으로써 여전히 계속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물에다 알맞은 이름을 붙이고자 한다면 플라톤의 말대로 ‘신은 영원하고 우주는 무한히 계속한다 라고 할 것이다. 

모든 판단은 판단하는 정선의 본성을 따라 그에게 주어진 사물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은 항상 영원하고 현존적 상태이며, 그의 지식도 모든 시간적 운동을 초월하고 현재 자기의 단순성 안에 머무르며, 미래와 과거의 무한한 영역을 동시에 내포하며 모든 것이 마치 현재에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자기의 단순한 인식 안에서 고찰한다. 그러므로 네가 신이 그것으로써 모든 것을 인식하는 현재를 이해하려면 그 현재라는 것을 마치 미래 사건에 대한 예지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결코 핍진하지 않는 현재의 지식으로서 더 올바르게 고찰할 것이다. 이런 지식은 예견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래 단계에 속하는 일체의 사물들 위에 위치하여 마치 사물의 가장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과 같으니 차라리 관조라고 부를 것이다. 

그런데 너는 이렇게 선의 빛에 비춰진 것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겠느냐? 사람들도 보는 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생각지는 않는데 말이다. 그리고 또 네가 분별하는 사물에다 네 통찰이 어떤 필연성을 가하는 것일까?" 
"결코 그럴 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만일 신의 현재와 인간의 현재를 정당하게 비교하여 본다면 너희들이 시간적 현재 안의 사물을 보듯이 신은 당신의 영원한 현재 안에 모든 것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이런 신의 예지는 사물의 본성이나 고유성을 변케 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이루어질 것들을 그런 것들로서 자기의 현재에 바라본다. 이리하여 신은 사물의 판단에 있어서 혼란되지도 않으며 다만 정신의 일별로써 미래에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것과 필연성을 띠지 않고 이루어질 것을 식별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너희들이 땅에서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과 태양이 하늘에 뜨는 것을 동시에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때 너희는 이 두 전망을 구별하여, 사람이 걸어 다니는 것은 자유의지에 속하는 것이며 태양이 뜨는 것은 필연적인 것으로 판단한다. 이와 같이 신의 직관은 만물을 보기는 하나 절대로 사물의 성질을 혼란시키지는 않는다. 그리고 신에게 있어서는 그 사물들은 현재의 것들이지만 시간적 조건하에서는 미래의 것들이다. 이것은 한 의견이 아니라 진리에 입각한 인식이다. 왜냐하면 신의 직관은 필연성을 결여한 그 어떤 것이 장차 존재할 것인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기서 네가 만일 신이 보고 있는 미래에 일어날 어떤 것은 안 될 수 없는 것이요, 또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면, 그리고 이때 네가 나에게 이런 ‘필연’이란 말을 강요하려 한다면 나는 그것은 물론 진실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신에 관한 진지한 탐구자가 아니면 이 문제에 접근하기도, 또 이해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오직 나는 같은 미래의 사정이라도 그것이 신의 인식과 관련될 때는 필연이고 그것이 사물의 자기 본질 안에서 고찰될 때는 구속이 없이 온전히 자유로운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그리고 필연성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단순 필연성으로, 예를 들면 ‘모든 인간이 가사적이란 것은 필연적이다라는 경우와, 다른 것은 조건적 필연성이니 '만일 네가 어떤 사람이 걷고 있는 것을 안다면 그가 걷는 것은 필연적이다'라는 경우다. 어떤 사람이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은 그 알려진 것과 다를 수 없다. 그렇다고 이런 조건적 필연성이 저 단순 필연성을 이끌어 들이는 것은 결코 아니다. 조건적 필연성은 사물의 본질이 이루어 놓은 것이 아니라 조건의 첨가가 이루어 주는 것이다. 자기 자유의지로 걷고 있는 사람은 어떤 필연성도 강제로 걷게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가 걸을 때에 그가 행진하는 것은 필연적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와 같이 만일 섭리가 어떤 것을 현재의 것으로 본다면 그것이 비록 그 본질상 존재하기에 하등의 필연성도 갖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의지로 말미암아 일어날 미래 사정들도 신은 현재로 보고 있으며 또 이런 사정들을 신의 직관과 관련하여 고찰한다면 그런 것들은 신의 인식조건에서는 필연적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정들이 그 자체로서 고찰될 때 자기 본성의 절대적 자유를 버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이 예지하고 있는 모든 것은 의심 없이 이루어질 것이나 그들 중 어떤 것은 자유의지에서 발생되며, 이런 자유의지에 의한 것들이 현실화된다 할지라도 그로 말미암아 그 고유한 본질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렇게 되기 전에 이미 그같이 현실화되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로운 사정들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모든 점에 있어서 신의 지식에 의한 제약 때문에 필연적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라면 필연적이 아닌 것은 도대체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이것은 얼마 전에 들었던 예지만, 떠오르는 태양과 걷는 사람의 예와 같은 것이니 그것들이 이미 이루어졌을 때에는 이제 다시 취소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들 중 하나(태양)는 그와 같이 현실화되기 전에라도 그렇게 존재할 것은 필연적이나 한편 다른 하나(보행)는 결코 그렇지 않다. 곧 신이 현재 것으로 알고 있는 사물들은 의심없이 존재하지만 전자는 사물들의 필연성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후자는 그것을 행하는 존재들의 권능 - 자유의지 - 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런 사물들을 신의 인식과 관련시켜 고찰한다면 필연적인 것들이고 사물 자체에서 고찰한다면 필연성의 제약에서 풀려 자유로운 것이다. 이것은 마치 모든 감각의 대상이 이성과 관련되면 보편적인 것이 되고 감각 자체와 관련하여 개체적인 것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너는 아직도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곧 ‘만일 내 계획을 변경하는 것이 내 권한에 속한다면 나는 섭리가 예지하는 바 사정들을 아마 변경할 수 있을 것이니 섭리를 파괴할 것이다’라고. 거기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응답하련다. 네가 물론 네 계획을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섭리의 현재적 진리는 네가 그것을 할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을 할 것인지 또 어떻게 바꿀 것인지를 다 직관하고 있기 때문에 너는 신의 예지를 피할 수 없다고. 이것은 마치 네가 네 자유의지로 여러 가지 행동을 취할 수 있을지라도 거기 현존하는 눈의 직관을 피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너는 또 무엇을 말하겠는가? 그래도 너는 또 네 마음먹기에 따라 산의 지식도 변경된다고 생각하느냐? 곧 어떤 때에는 이것을, 또 어떤 때에는 저것을 내가 원하게 될 때 신의 지식도 그때마다 변경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하느냐 말이다. 

그것은 절대 그럴 수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신의 직관은 어떠한 미래 사정보다도 선행하며 모든 것을 자기 고유한 인식의 현재에다 환기시킨다. 그래서 네가 생각하듯이 신의 직관은 예지를 어떤 때는 이렇게 또 어떤 때는 저렇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는 변함없이 머무르면서 네 변화를 선행하여 일별함으로써 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니라. 

선은 모든 것을 동시에 파악하고 또 관조하는 현재성을 미래 사물들의 실현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고유한 단순성에서 가진다. 이로써 네가 앞서 제기한 의문, 곧 우리의 미래 사정들이 신의 지식의 원인이라고 한다면 이는 매우 부당하다고 한 너의 이의는 해소된다. 신의 이러한 지식의 능력은 현재적 인식으로 모든 것을 내포하여 모든 사물에 그 존재양식을 제정하여 주었으나 그러나 신 자신은 미래에 생길 사물들에게서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것이다. 

사리가 이러하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손상되지 않는 자유의지가 있다. 그러므로 모든 필연성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의지에 상과 벌을 제시하는 법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다. 신은 위로부터 만물을 내려다보시는 예지의 관찰자요, 그 관조는 항상 현재적인 영원성을 가지고 있어 우리 미래 행동들의 성질과 보조를 같이하니 선인들에게는 상을, 악인들에게는 벌을 내리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께 둔 희망과 신께 바친 기도는 헛된 것이 아니다. 또 이런 희망과 기도가 바른 것일 때 그런 것들은 효과가 없을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는 악행에 항거하고 덕행을 닦으라. 올바른 희망에 마음을 들어 올려라. 하늘로 겸손된 기도를 올리라. 

너희가 스스로를 속이고자 하지 않는다면 너희는 바르게 살아야 할 크나큰 필연성을 지니고 있으니 곧 너희는 모든 것을 투시하는 재판관의 눈앞에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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