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그라네: 중국사유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2. 9.
![]() |
중국사유 - ![]() 마르셀 그라네 지음, 유병태 옮김/한길사 |
서론
제1부 사유의 표현
제2부 주개념
제3부 세계체계
제4부 교파와 학파
결론
그라네 당대의 중국학 주요 도서목록
그라네 사후의 중국학 주요 도서목록
참고문헌
찾아보기
41 고대의 앎은 교파와 학파들이 사유의 노력을 통해 도달했던 교조철학의 기조를 이룬다. 따라서 나는 중국인이 구상했던 세계체계는 제3부의 몫으로 했다. 더욱이 체계의 핵심사상을 끌어내는 일은 사전에 중국 사유의 주개념을 분석하여 체계의 기층을 천착함으로써 다소 무난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중국인의 우주관은 소우주론에 서 있으며, 이 이론은 중국사유가 시도한 최초의 분류체계와도 밀접하게 관계된다. 이 이론은 지극히 뿌리 깊은 믿음, 즉 인간과 자연은 분립된 두 세계의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단일한 사회를 형성한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이는 곧 인간의 태도를 조율하는 여러 기술들의 원리이기도 하다. 우주질서는 인간의 능동적인 참여와 문명화를 위한 여러 실행들을 통해 구현된다. 중국인은 세계의 지식탐구를 목적하는 과학 대신 총체적인 질서수립에 충분한, 삶의 효율적인 예법을 구상했던 것이다.
질서 또는 총체는 중국사유의 최고범주다. 기본적으로 이 범주는 구체적인 표상인 도(道)를 상징으로 삼는다. 나는 먼저 언어요소들을 검토하면서,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표상들에 일종의 현실적인 효율성, 즉 형상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이어 정신의 구체적인 범주들을 살펴보았다. 가장 종합적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몇몇 표상들은 우리로서는 총체성이란 이름으로 특징지을 수밖에 없을 어떤 생명력과 조직력을 보여준다. 중국사유가 이러한 표상들에 지고한 기능을 부여한다는 것은 곧 논리와 실제를 구분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이기도 하다. 중국사유는 외연논리와 수량물리가 기능하게 해주는 정신의 명석함에는 실로 무심했다. 중국사유는 수 · 공간 · 시간을 결코 추상적인 개념으로 다루지 않았기에 부류 · 실체 · 운동력 동 서구범주에 해당하는 추상적 범주들의 설정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도개념은 운동력과 실체의 개념을 넘어서며, 음양은 도와는 달리 운동력 · 실체 · 부류를 범주의 구별 없이 포괄한다. 왜냐하면 음양의 표상들은 우주질서의 상반된 양상들을 분류하고 활성화하기 때문이다. 즉 도와 음양은 세계의 삶과 정신활동을 관장하는 율동적 질서를 종합적으로 상기시키며 전체적으로 유발시킨다. 중국사유는 전직으로 질서 · 총체 · 율동 등의 상관개념들에 주도된다.
44 중국사회체제사의 두드러진 특징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는 연속성에 있다. 학파 여부를 떠나 모든 중국철학자는 오랜 지혜의 전통에서 비롯된 범국가적 상징체계는 필시 그 적합성과 효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철저히 믿었다. 상정체계에 대한 중국인의 믿음은 이성(理性)에 대한 서구인의 믿음에 비견된다.
이성은 중국개념들과는 완전히 다른, 일체의 중심개념들을 형성하는 틀과도 같다. 후술하겠지만, 중국개념들은 일종의 '원시적 분류'와 연관지어도 무방할 분류체계에 결부된다. 따라서 우리가 중국인들이 중시하는 상징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우, 그들의 정신은 '신비적'이고 '전 논리적'인 것으로 규정될 소지가 많다.
그렇지만 인간사유의 산물들을 마치 기이하고 특이한 것으로 다루는 것은 모든 실증적 탐구의 원천과 인문정신을 버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러한 편견의 부당성은 주개념들이 분석되면서 확연히 드러난다. 왜냐하면 사유의 이러한 영속적인 틀은, 장기간 지속된 것만으로 족히 그 가치를 입증 받는 사회체제의 틀을 그대로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유와 행동의 규칙들은 사물의 본질에 부응해야 했다. 물론 중국의 지혜가 스스로 순수교조철학으로 변질되는 것을 방치했던 것도 사실이다. 진 제국 창건 이레 정통유가의 지배가 지속됨에 따라 현학적 사유의 주된 관심사는 옛 앎을 암기위주로 분류하는 데 있었다. 그로부터 실험정신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비록 교리적이긴 하나 이러한 앎은 제반 체험에서 유래한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체험에서 분류개념이 비롯할 뿐만 아니라, 모든 체제는 그 효율성을 입증함으로써 가치를 지닌다는 생각 또한 이 체험들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산물이 그러하듯, 정신안배의 전거가 되었던 사회안배도 다소 임의적이기는 하나 이 체험들을 실천적으로 적용하기 위한 끈질긴 노력에 의한다. 모든 중국범주들은 체험을 조직화하기 위한 장기간에 걸친 시도의 산물이다. 따라서 중국범주들이 모든 점에서 잘못 설정되었다는 선입견은 경솔한 태도의 소치다 그 범주들이 서구 고유의 중심개념들과는 상반되게 보일 뿐만 아니라 모든 추상화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서구인들은 놀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구체적인 상징들을 선호하는 그들의 취향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위계논리와 효능논리를 끌어낼 줄 알았다. 그리고 비록 중국인들이 시간과 공간과 수에 추상적인 실체성을 부여하기를 거부하면서 수량물리를 기피하는 반면, 순간적인 것이나 기이한 것의 추구에 머물고 있다 할지라도(유익한 결과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 자연 가운데 오직 인간만이 신비의 세계를 이룬다는 어떠한 신학적 편견이 없었던 ─ 그들은 실증정신에 입각하여 모든 지혜를 세우는 데 특별한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중국사유의 주된 원칙이 되는 여러 개념들에 대한 믿음은 이런저런 가르침의 유행에서가 아니라 장기간 체험된 사회실행체계의 효능성에서 나온다. 이러한 인식이야말로 중국사유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더욱 공정하게 해줄 것이다
589 자유로운 명상을 도와주는 제재들, 중국인이 그들의 현지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지 이러한 제재들이었을 뿐 사상도 아니었으며 교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중국인이 자신들에게 사유의 놀이를 일깨워준 고대의 대가들을 도가나 유가로 분류하는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정신해방의 기틀이 되는 제반교습의 목적이 절대독자로서 자아추구였건 인간 존엄성의 환기였건 이 또한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도가와 유가는 수련의 진정한 목적이나 방법론에서 서로 아무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나 도가와 유가의 관건이 된 것은 존재의 전인격적 훈육이었다. 이 훈육이 지향하는 것이 선의 경지이건 지혜이건, 또는 선경의 열락을 통해 행해지든 인격을 고양하는 예의 실천을 통해 행해지든 간에, 출발점은 언제나 해방을 염원하는 마음이었다. 이러한 염원은 자유로운 정신을 추구하면서 완성되었다.
590 수련 목적이 마음의 순화든, 인격의 고결화든 중요한 것은 욕구의 예속을 벗어나려는 내면적이고 총체적인 노력이다. 욕구를 인위적인 것으로 간주하든 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하든, 아니면 자연으로의 회귀를 시도하든 자연으로부터의 초월을 시도하든, 아니면 자연을 신성화하든 문명을 찬양하든, 아니면 도가의 자연주의를 표방하든 유가의 인문주의를 표방하든, 오직 중요한 것은 순수권능을 향한 자유로운 노력이다. 중국인은 매우 진지하면서도 순수한 놀이를 통해 선의 경지나 지혜에 도달하는 지고한 해방을 기대했다. 이 해방은 단순한 교리상의 구속이나 어떤 외적인 구속으로도 얻어질 수 없다.
중국인은 그들의 풍속과 기예, 문자, 지혜를 통해 극동 전역을 정복했다. 오늘날 극동 전역에 걸쳐, 약소국이든 신흥강국이든 중국문명과 단절을 기도할 수 있는 민족은 없을 것이다. 서구문명이 실용과학으로 영광을 누린다 할지언정, 중국문명의 위상은 여전히 높다. 르네상스를 기점으로 중국이 서구에 대한 기술적 우위를 잃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문명의 위상이 손상된 것은 아니다. 예전에 중국이 여타 극동국가들에 대해 막대한 기술적 우위를 점하기는 했어도, 그와 같은 우위나 제국으로서 국력이 중국의 위상을 설명해준 것은 아니다. 중국의 위상을 지속적으로 지켜주는 원천은 다른 데에 기반한다. 극동국가들이 중국문명에서 차용하고 지켜내려던 것은 삶에 대한 조예, 즉 지혜였다. 중국이 정신적 권위를 확립한 시기는 하나의 제국으로 통합되어 영향력을 원격화하면서부터다.
592 우리는 흔히 중국인에게는 종교가 없었으며, 신화조차 거의 부재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중국에서 종교는 더 이상 법이 아니며, 나아가 사회활동과 차별화된 어떤 기능도 아니다. 우리가 다른 문명들에 적용되는 틀에 여러 사실들을 집어넣지 않고 중국문명을 고찰한다면, 종교를 위해 별도 항목을 설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성함에 대한 생각은 중국인의 생활 속에서 지대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숭배 대상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신들이 아니다. 정치적 함의를 지닌 신화가 빚어낸 현학적 산물인 상제(上帝)는 문학적 존재로서의 면모에 불과하다. 뭇 궁중시인들이 노래한 왕조의 수호신 상제는, 묵자의 신정론적 포교활동이 실패로 끝났다는 사실이 어느정도 입증하는 것처럼, '소인들' 사이에서는 결코 널리 신봉되지 못했다. 유가나 도가는 상제에게 어떠한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다. 유가에서는 현지들이, 도가에서는 신선들이 신성시된 유일한 존재였다. 그리고 일반민중이 신성시한 존재는 여러 도사들과 시조들과 군주들이었다. 중국의 신화들은 영웅들의 신화였다. 사가들이 상고시대 전설적 영웅들을 별다른 제약없이 단순한 위인들로 소개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영웅들이 어떤 존엄성에 따른 고립된 존재인 신이 아니었다는 점에 기인한다.
593 신들에게도 초월성은 없었다. 신들은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특이했기 때문에 지고한 인격체로 군림하지 못했다. 어떠한 현자도 영혼주의적 성향이나 인격주의적 성향을 보이지 않는다. 현학적 사유 속에 잔존하는 신비적 사실주의 요소들은 쉽게 불가지론이나 실증주의로 바뀔 수 있다. 기적이나 경이로운 존재들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것들에 대한 언급 자체를 기피하는 자라면 그것들이 발생하리라는 생각마저 이내 그의 머리 속에서 사라지게 되리라. 중국인은 (신성함을 그들의 생각에서 의도적으로 제거하기보다는) 평온하고도 친근한 태도로 신성함을 대했으며, 신성을 내재적인 ─ 일시적이고 비영속적이긴 하지만 심층으로 파고드는 ─ 것으로 느꼈다. 이렇듯 일시적인 느낌에 의한 신성함의 내재성은 ─ 미신적 풍속의 예술적 (또는 정치적) 활용을 용이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 신비주의를 조성하는 데도 분명히 기여한다. 공자는 이따금 어떤 친숙한 신령의 방문을 받았다고 하며, 또 도가의 인물들에게는 간혹 도의 내밀함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이 찾아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도를 어떤 초월적인 실재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공자에게 친숙한 신령 또한 역사적 한 인물에 불과했다.
594 중국인이 추상적 상징을 추구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들은 시간과 공간을 오직 기회와 위치로만 파악한다. 우주의 질서를 형성하는 것은 상호의존과 연대성이다 중국인은 인간이 자연에서 별도 세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여기지 않으며 정신이 물질과 구별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도 인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대립관계로, 나아가 이 둘의 관계를 자연적인 것과 규정된 것의 대립관계로 보지 않았다. 자연으로 회귀를 권장하는 도가사상 속에는 문명이 거짓된 편견에 의해 아직 변질되지 않은 진정한 인간질서와 행복한 사회에 상반되는 것으로서의 공격된다. 그렇다고 도가의 개인주의가 자연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철저히 대립시키는 그러한 개인주의는 아니다. 그리고 우애로운 교분이나 역할분담의 이점을 선양하는 유가사상에서, 사회생활이 자기향상을 도모한다는 생각도 사회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의 철저한 대립관계를 설정하는 것으로 귀착되지 않는다. 전술했듯이, 선의 경지를 이상으로 하는 도가와 인격의 고결화를 이상으로 하는 유가의 차이는 표면적일 뿐이다.
596 서구인들은 중국인의 군집본능을 즐겨 거론하면서 그들의 무질서한 성향을 부각하려 한다. 사실 중국인의 집체의식과 개인주의는 촌부들의 자질이다. 그들의 질서관은 화합에 대한 건실하고도 토속적인 생각의 발로다. 법가는 실패했으나 도가와 유가는 함께 발전했다는 점은 이를 입증한다. ─ 행정적 간섭, 강압적 평등주의, 추상적 규약과 제도에 의해 파손되는 ─ 이러한 화합에 대한 생각은 (아마도 개인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대체로 거의 대동소이한) 일종의 독립의지, 그리고 이 의지에 못지않게 열정적인 동지애와 우애를 향한 욕구에 의거한다. 국가와 교리와 법은 질서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596 중국인은 질서를, 추상적 명령체계나 추상적 추론체계에 의해 확립될 수 없는 크나큰 평화의 양상으로 생각한다. 이 평화가 도처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범절, 자발적인 연대감, 자유로운 위계질서에 대한 첨예한 의식을 요구하는 상호수용의 추구가 필수적이다. 중국의 논리는 엄격한 종속논리가 아니라 유연한 위계질서의 논리다. 중국인은 질서개념에 이 개념의 출원지인 여러 형상들과 감정들이 구체적으로 포함하는 모든 것들을 보지하려 했다. 중국인이 질서개념에 도를 상징으로 부여하여 도를 모든 독립성과 일체 조화의 원리로 간주하든, 또는 질서개념에 이(理)를 상징으로 부여하여 이를 공평한 모든 위계질서나 분배의 원리로 간주하든지 간에, 질서개념에는 이해와 화합이야말로 자신의 내면과 주위의 평화를 구현하는 길이라는 생각 ─ 물론 아주 치밀하면서도 그 토대인 향촌생활에 밀접하게 닿아 있는 생각 ─ 이 담겨 있다. 중국의 모든 지혜는 이 생각에서 비롯한다. 그들의 지혜가 다소 신비주의적 색조를 띠는지 또는 실증주의적 색조를 띠는지, 아니면 다소 자연주의적 영감의 발로인지 또는 인문주의적 영감의 발로인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중국의 모든 학파를 통해 우주화합의 원리가 보편적 가지성의 원리와 동일하다는 사상을, ─ 구체성과 그에 따른 효능성만을 간직한 상징들로 표현된 사상을 ─ 찾아볼 수 있다. 모든 앎 모든 권능은 이(理)나 도(道)에서 비롯한다. 모든 군주는 성인이나 현자여야 한다. 모든 권위의 토대는 이성(理性)이다.
'책 밑줄긋기 > 책 2023-25'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픽션들 ─ 보르헤스 전집 2 (0) | 2025.02.09 |
---|---|
뤼시앵 페브르: [원서발췌] 16세기의 무신앙 문제 - 라블레의 종교 (0) | 2025.02.09 |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 시대의 일상사 (1) | 2025.02.02 |
보에티우스: 철학의 위안 (0) | 2025.02.02 |
앨린 시프턴: 비주얼 재즈 (0) | 2025.02.02 |
움베르토 에코, 리카르도 페드리가: 움베르토 에코의 경이로운 철학의 역사 3 - 현대 편 (0) | 2025.01.27 |
토마스 힐란드 에릭센: 인생의 의미 (0) | 2025.01.27 |
가지 노부유끼: 유교란 무엇인가 (0) | 2025.0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