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디 그린버그: 바이마르의 세기

 

바이마르의 세기 - 10점
우디 그린버그 지음, 이재욱 옮김/회화나무

한국어판 서문

서론 독일 재건이라는 “기적”
1장 “책임감 있는 엘리트”에 대한 추구 : 카를 J. 프리드리히와 고등교육 개혁
2장 사회주의적 개혁, 법의 지배, 노동 지원 활동 : 에른스트 프렝켈과 “집단적 민주주의” 개념
3장 보수적 가톨릭 신앙과 미국의 자선 활동 : 발데마르 구리안, “인격주의적” 민주주의, 반공주의
4장 개인적 자유와 “전투적 민주주의” : 카를 뢰벤슈타인과 공격적 자유주의
5장 국제연맹에서 베트남까지 : 한스 모겐소와 국제관계의 현실주의적 개혁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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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서문
4 내가 『바이마르의 세기』를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이야기가 나를 한국으로 이끌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나의 의도는 나치즘의 부상을 목격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로 귀국하여 놀라운 재건과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기여했던 독일 사상가들의 궤적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양한 아카이브에서 작업을 하면서 나는 나의 이야기가 내가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전 세계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놀랍게도 나는 내가 그 이야기를 추적했던 독일 망명자들이 점령 당국의 조언자, 영향력 있는 미국 재단들의 임원, 미국 대학들의 고위 관리자로서 미국의 힘에 중요한 대리인들이 되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 초기, 세계 문제들에 대한 미국의 개입이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독일 망명자들이 예상치 못했던 곳에 자리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독일로 돌아가기 전에 그들은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와 동아시아에서의 정책을 입안하는 데 기여했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뛰어난 정치이론가인 에른스트 프렝켈을 남한으로 이끌었던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가 전후 독일에서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가 되기 전에 그는 한국에 주둔하던 미 점령 당국의 고위 인사로 복무했으며, 남한의 독립을 이끌었던 협상들 헌법 초안 작성 과정,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전 미국의 경제 정책들에 참여했다. 그러므로 『바이마르의 세기』 한국어판 출간은 특별히 흥미로운 일이다. 이는 좋든 싫든 이 망명자들에게서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역사를 가진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접할 수 있게 해준다. 


서론

23 독일 망명자들이 바이마르의 민주주의 언어와 이론의 주요 전달자들었다는 점은 우연이 아니었다. 1945 년 이전 나치는 대안적인 문화와 지적 전통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거나 포섭했다. 나치 정권에 의해 "유대인"이거나 "비독일적"이라고 규정된 30여만 명의 독일인들이 나치 혁명이 일어난 1933년과 전쟁이 발발한 1939년 이 6년 사이에 중부유럽을 탈출하거나 쫓겨났다. 그러나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도망친 망명자들은 제3제국이 도달할 수 없었던 민주주의 언어와 제도적 프레임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이 망명자들 가운데 채 1만5000명도 안되는 소규모 일파가 1945년 이후 유럽으로 돌아와 독일 재건에 참여했다. 이 숫자는 지극히 직아 보이지만, 귀국한 망명자들은 국가적 부활의 원천으로 독일 민주주의에 관한 초기 이론들을 환기시키면서 불명예스러운 나치 이데올로기에 대한 지적 대안들을 개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들이 망명 기간 동안 문화, 음악, 저널리즘, 의학, 예술에 기여한 바를 다루는 학자들의 수많은 연구들이 있었지만, 역사학자들이 유럽의 전후 재건에서 이들 개인이 수행한 결정적 역할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들의 행위를 통해 바이마르 시대의 아이디어들은 독일로 복귀했으며, 이는 정치적 안정화를 이룩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들을 제공했다. 

34 독일로 귀국하면서 이 망명자들은 동시에 민주주의와 반공주의 사이의 밀접하고 오래된 관계들을 들여왔다. 이러한 관계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에 쏟아진 엄청난 기대뿐만 아니라 독일 전후 재건의 한계와 아이러니들을 설명해준다. 유럽이 이데올로기적 노선에 따라 갈수록 분열되어가는 것에 맞서 이 세대는 대단히 호전적이고 이분법적인 민주주의 정치 개념을 전후 시대에 다시 도입했다. 누구든 민주주의의 친구이거나 아니면 민주주의에 치명적인 적군이었다. 그래서 이 책의 중심에 있는 인물들은 초조해하면서 자신들의 견해에 도전하는 아이디어들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억누르려 애썼다. 그들은 서독이 공산주의지들을 탄압해야 할지 또는 서구 냉전 동맹에 가입해야 할지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누구든 반민주주의적 행위자로 간주해 정당한 민주주의적 참여 권리를 박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엄청난 경직성은 민주주의에 대한 바이마르의 아이디어들이 전후 정치적 상상을 가능하게 했던 것만큼이나 이를 제약하기도 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들의 해방효과는 자신들의 경직성에 의해 대단히 약화되었다. 

34 히틀러와 그 추종자들의 맹렬한 반유대주의는 유대인들이 전 세계 "유대-볼세비키" 혁명의 교활한 전위라는 뻐뚤어진 확신에 의해 부분적으로 고취되었다. 망명자들의 반공주의적 공포증은 근본적으로 다른 세 계관에서 기인했다. 이는 제3제국 이전의 세계관이었고, 인종주의와도 단절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반공주의적 열정을 이용해 민주주위에 복무하고자 했던 이 망명자들은 이러한 나치의 강박관념을 보존하고 영속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므로 바이마르에서 유래한 아이디어들은 민주주의 혁명을 가능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 반공주의로 인해 전후 민주주의를 제약하기도 했다. 망명자들이 촉발시키는 데 기여했던 민주주의 혁명은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것이었고, 동시에 영웅적이면서 비극적인 것이었다. 

40 망명자들의 아이디어가 특히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 계기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뒤이어 유럽과 아시아에서 일어난 재건 활동 그리고 냉전의 시작이었다. 그들의 저작은 모두 어떻게 민주주의와 반공주의적 동원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상호 보완적인 과정이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국내와 국외에서 미국 지도자들과 외교관들이 그들로부터 조언을 구했고 그들에게 상당한 권위를 부여했다. 

41 독일 망명자들과 그들의 이론에 쏟아진 열렬한 관심은 미국의 외교관, 학자, 자선 사업가, 정치 지도자들이 민주주의가 자국과 국제적인 반공주의 성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역사학자 제니퍼 M. 밀러가 보여준 바와 같이 그들은 반공주의적 동원이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활기찬 사회의 자발적 동의가 필요하며, 이는 독재자의 강압적 권위만으로는 달성될 수 없다고 믿었다. 자기식의 민주주의 규범을 서서히 주입시키려는 미국의 이러한 적극적 노력이 박애에서 비롯되지 않았다는 점은 틀림없다. 민주주의에 대한 미국 지도자들의 구상이 평등한 사회를 건설한다거나 또는 기층의 인민들에게 권력을 부여하고자 하는 열망이라고 해석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망명지들의 이원론적 아이디어에 기반을 둔 민주주의에 대한 이들의 전망은 경직되고, 안정에 집착하며, 비참할 정도로 편집증적이었다.

42 독일 망명자들은 미국의 권력을 키우고 전 세계로 확장시키는 활동들을 하면서 동시에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 그들의 의제를 시행하고 널리 알렸다. 독일 망명자들은 자신들의 초기 저작들에 기초해 미국의 전 세계적 임무를 위한 언어와 아이디어들을 제공했다. 미국인들이 수용했던 반소련적 "전체주의 이론"과 "전투적 민주주의" 이론 그리고 지배적이었던 다수의 다른 냉전 개념들은 소련과의 전 세계적 대립이 시작되기 몇 해 전에 독일인들에 의해 주조된 것들이었다. 서독에 민주화라는 언어를 제공한 주체들은 본질적으로 반공주의적 동원이라는 언어를 만들어내는 데 있어서도 중요했다. 그들의 저작을 통해 이 두 지적 프로젝트는 상호 불가분하며 근본적으로 서로 연결되었다. 독일 시상과 미국 권력의 공생이 전후 독일의 재건을 구현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의 제도들, 언어, 자기이해를 만들어내는 데에도 기여했다. 

43 이 책은 부분적으로 "미국의 세기"의 심장부에 가해진 외부의 자극들과 그들이 1945년 이후 미국의 세계 권력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 제도적 윤곽을 그려내는 데 수행했던 역할에 관한 것이다. 독일 망명자들의 이야기가 전후 시대 미국의 대외 활동을 형성했던 모든 또는 가장 중요한 힘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이러한 전 세계적 대립에서의 국제적 경험, 국가, 민주주의의 역할을 보다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것들은 어떻게 냉전이 자신들만의 계획과 목표를 가졌던 비미국인들에게 예상치 못한 기회를 제공했는지 보여준다. 미국의 권력 기관들을 통해 그들은 냉전에 선행했고 미국의 지정학적 고려 사항들과는 별개인 지적 프로젝트를 추구했다. 독일 망명자들은 언제나 미국 기관의 종복이었다. 고국과 해외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미국 상관들의 동의에 좌우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냉전에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주입함으로써 그들 자신의 미국의 세기를 만들어냈다. 요컨대 그들은 이를 "바이마르의 세기"로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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