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르크 프라이: 요한복음과 만나다

 

요한복음과 만나다 - 10점
외르크 프라이 지음, 김경민 옮김/비아

들어가며

1. 요한복음 입문
시작
세계 문학과 교회에서의 요한복음 수용
요한복음의 특징
저자와 자료에 대한 질문
저작 연대와 장소
요한복음의 지적, 종교적 환경
복음서의 목적

2. 요한 신학의 다양한 측면
‘신학자’ 요한, 그리스도의 신성과 성육신의 도전
예수의 죽음
부활 사건들과 부활 신앙
예수는 정녕 어떤 분이신가? - 요한의 그리스도론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신앙과 불신앙
사랑의 윤리

3. 현대인을 위한 요한복음 읽기
19세기와 20세기 학문이 던진 문제들
요한복음에 대한 최근의 관점들
요한복음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요한복음을 세 가지 차원에서 읽기

옮긴이의 말
더 읽을거리
찾아보기

 


17 그렇다면 왜 요한복음일까요?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이 복음서를 높이 평가했을까요? 루터의 경우에는 예수가 이룬 기적, 예수의 행적보다는 예수가 남긴 말을 더 많이 보도하고 있다는 이유로 이 복음서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루터는 과거 예수의 행적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는 반면, 그가 남긴 말에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요한복음은 생명과 구원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압축된 형태로 선포하고 있다고 보았고, 바로 이 때문에 다른 세 복음서보다 요한복음이 "훨씬, 훨씬 더 탁월한" 복음서라 생각한 것입니다. 

후대 해석자들과 사상가들은 다른 이유로 요한복음을 높게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공관복음과 견주었을 때 요한복음이 빛과 진리, 영생을 더 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한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헤겔, 피히테, 셸링과 같은 독일 관념론 철학자들은 하느님을 "영"(요한 4:24)이라고 부르고, 요한복음이 예수의 담화를 보다 철학적인 방식으로 설계했다는 점, 또한 팔레스타인에서 실었던 예수의 이야기를 보다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으로 격상시켰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는 유대인의 메시아일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구원자입니다(요한 4:42). 더는 특정 산에서만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도 말하지요(요한 4:23). 1800년경 헤르더, 피히테, 레싱, 슐라이어마허 등 '요한주의자'였던 철학자와 선학자들은 이러한 '영적인' 가르침에 매력을 느꼈습니다. 공관복음이 묘사하는 예수의 여러 측면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요한복음이 묘사하는 예수상은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32 몇몇 인물과의 대화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어떻게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서 나눈 대화의 내용을 알았는지 의문이 들게 하기도 합니다. 몇몇 대화는 별다른 목격자나 청취자를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이런 대화에서는 당연히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서는 안됩니다. 니고데모와 밤 중에 나눈 대화,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과 나눈 대화,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공관 뒤편에서 예수를 홀로 심문하며 나눈 대화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이 장면들에는 대화를 청취하거나 기록할 수 있는 제자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가 후에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대화의 세부 내용을 알려 주었다는 주장은 어리석고 터무니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복음이 목격자 혹은 청문자의 정확한 진술을 담고 있는 기록물이 아닌 일종의 문학작품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33 성서를 읽는 많은 독자는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역사 지식이 적고 역사비평을 알거나 익히지 못한 독자 중에도 이 같은 문제를 두고 질문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교 신자나 교회 구성원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비판적인 질문을 회피한다면 이는 어리석은 일일 것입니다. 그러한 회피는 정직하지 못한 변증을 낳을 뿐이며 우리의 신앙과 이해에 별다른 도움을 줄 수도 없습니다. 역사에 관한 물음, 비판적인 질문을 회피하는 선생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교가 사회의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정직하게 허용하고,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 중 상당수는 실제 예수의 입에서 나온 말을 받아쓴 기록이라기보다는 복음서 저자가 자신의 신학 견해와 관심을 따라 제시한 글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80 마지막으로 강력한 논거는 요한복음의 고그리스도론입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를 단순히 메시아나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요한1:1,18, 20:28) 이라고까지 부릅니다. 유일신론을 믿는 유대교라는 배경 아래서 이러한 대담한 언어가 나오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신약성서 중 초기 저작들을 썼던 바울이나 마르코, 심지어 마태오와 루가도 이러한 표현을 쓰지 않았고, 비슷한 진술은 신약성서 중 상대적으로 후기 저작들 가령 계시록이나 목회 서신, 베드로의 둘째 편지(베드로후서) 등에서만 나타납니다. 신약성서와 초기 그리스도교 문헌을 포괄한다면 이그나티우스의 서신에서 비슷한 표현이 등장하지요. 흥미롭게도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20:28)이라는 표현은 도미티아누스 황제가 자기 신하들에게 듣기 원했던 호칭과 일치합니다. 또한, 이는 트라야누스 시대까지 에페소에서 사도 요한이 살았다는 고대 전승의 정보와도 일치하지요. 

101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오늘날 동방 정교회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요한에게 '신학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이때 '신학'은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는 학문으로서의 신학, 즉, 그리스르 신앙과 실천 및 그 증언에 대한 이성적인 성찰을 뜻하지 않습니다. 요한이 그러한 칭호를 받은 이유는 그가 그리스도의 신성, 달리 말해,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이라고 가장 분명하게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를 메시아, 주님,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는 이전의 복음서들, 심지어 바울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102 예수가 "하느님"이라는 주제는 요한복음 서문을 감싸고 있으며, 더 나아가 복음서 전체를 구성하는 틀이 됩니다. 서문 첫 구절부터 요한은 태초에 계셨던 말씀이 "하느님이셨다"(요한1:1)고 명시적으로 밝힙니다. "하느님"을 뜻하는 그리스어 '테오스'는 정관사 없이 쓰였습니다. 즉, 말씀은 본질적으로 "하느님"God이지만, "한 하느님"a God이 아니며 "유일한 하느님 the(one and only) God"도 아닙니다. 이 미묘한 표현은 요한이 신과 관련된 용어를 사려 깊게 구분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로고스, 말씀은 단순히 "신적인 것"이 아니며, 성서에서 증언하는 하느님 자체도 아닙니다. 말씀은 유일하신 한 분 하느님에 매우 가까우며 피조물이 아닙니다. 말씀은 유일선인 하느님과 구별되면서도 그분에게 속해 있습니다. 

249 이 이야기에서 도마는 제자들이 모인 곳에 늦게 도착했고, 그래서 다른 이들이 부활한 주님을 만났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부활한 예수는 도마를 따로 만나고, 그를 특별하게 대우합니다. 이 이야기는 사람은 자신이 보고 파악한 것만 믿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도마는 불가지론자가 아니며 전형적인 회의론자도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책망을 받지도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예수가 그의 의심을 알고, 그 의심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목적인 방식으로 반응하는 모습을 봅니다. 도마는 늦게 온 이들의 대표자, 시간이 흘러 더는 예수를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만, 여전히 믿기로 결심한 이들의 대표자입니다. 그리고 예수는 그를 축복합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 (요한 20:29)

이 말은 분명 후대의 독자들에게 건네는 말입니다. 이 복음서는 부활 이후의 시대, 즉 나중에 태어난 이들, 우리가 속한 시대의 사람들도 예수에 대한 믿음에 이를 수 있도록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는 행위를 통해 그 신앙은 전수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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