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카시러: 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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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철학에서의 개체와 우주 - ![]() E.카시러/민음사 |
1. 니콜라우스쿠자누스
2. 쿠자누스와 이탈리아
3. 르네상스철학에서의 자유와 필연
4. 르네상스철학에서의 주관과 대상의 문제
9 르네상스 철학을 하나의 체계적인 통일체로 파악하려면 우선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를 이해하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콰트로첸토의 제철학적 조류나 경향 중에 오로지 그의 논조만이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 광선들이 수렴하는 <단일 초점>을 제시함으로써 위에서 언급한 헤겔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때문이다. 쿠자누스는 당시 사상가로서는 유일하게 문제 전체를 단일한 방법적 원리에 입각하여 파악하고 해결하였다. 그의 사상은 중세적인 총체성의 이념에 걸맞게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전 우주를 포괄하는 것으로서 실로 전 분야를 망라한 것이었다.
25 플로티누스와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 사상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통합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조직적 측면에서 볼 때 그것은 단지 이 두 사상의 절충주의적인 혼합만을 달성하였다. 신플라톤적 체계는 예지계와 감각계 사이의 절대적인 대립, 즉 플라톤의 <초월 Transzendenz> 사상에 근간을 두고 있다. 신플라톤주의의 그와 같은 경향은 고스란히 플라톤적인 어투나 문체로 서술되어 있으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 표현에 있어 더 과격할 정도이다. 그러나 신플라톤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발전 개념 역시 도입, 차용함으로써 플라톤 체계 내에서는 지양 불가능했던 변증법적 긴장을 해소하였다. 즉 초월이라는 플라톤적 범주와 발전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적 범주를 통해 <유출 Emanation>이라는 파생 개념을 창조해 내게 된 것이다. 절대자는 유한자를 초월하여 초일자로서, 초존재로서 자신 내에 머문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거기로부터 내재된 잉여의 힘이 나와 무정형의 물질, 즉 비존재자의 가장 바깥쪽 경계에까지 이르는 세계의 다양성을 생성한다. 우리는 위 디오니소스의 저서를 통해 어떻게 기독교적 중세가 그와 같은 전제를 수용하여 자신의 것으로 소화하였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 중세는 신플라톤주의에서 단계적 매개라는 근본 범주를 수용하였다. 이 근본 범주는 신적인 초월성을 성립하게 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개념의 계서, 정신적 힘의 계서라는 사상을 통해 그것을 이론적, 실천적으로 극복한다. 이제 초월성은 교회의 구원 질서와 삶의 질서라는 기적을 통해 인정받는 동시에 극복되기에 이르렀다. 이 기적을 통해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게 되고, 파악 불가능하던 것이 파악 가능케 된 것이다.
57 쿠자누스는 인류의 그와 같은 정신적 보편 성분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유한함과 무한함을 하나로 묶는 진정한 <매개 속성 natura media>이다. 이 통합은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결코 자체로 나누어진 것이 그저 실제적인 <결합>을 통해 맺어진 것이 아니라, 두 대립 계기의 원천적이며 필연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요청되는 <매개 속성>은 높은 것과 낮은 것을 자신의 전체성 속에 포함해야 하며, 낮은 세계의 최고이자 높은 세계의 최저치로서 그 어떤 형태를 막론하고 전 우주를 감싸며 ─ 쿠자누스의 표현대로 라면 ─ 그것을 자기 안에서 <복합화하는> 방식을 띠어야만 한다. 이로써 그 속성은 모든 것을 결합하는 <세계의 열쇠>가 된다. 그리스도가 전체 인간성을 표현하며 그것의 간단한 이념이자 본질을 이룬다면, 인간은 본질상 만물을 내포한다. 즉 소우주Mikrokosmos로서의 인간성 안에서 대우주Makrokosmos의 모든 궤도가 함께 진행된다.
58 우리는 여기서 쿠자누스에 의해 명백히 고대적 발상이라고 규명된 소우주 개념이 어떻게 기독교의 종교적 이념과 절묘한 방식으로 결합되는지 목격하게 된다. 중세적 사유에 의하면 구원의 개념은 본질적으로 세계로부터의 탈출, 즉 낮은 감각적 지상적 존재를 뛰어넘는 인간의 고양을 의미한다. 그러나 쿠자누스에게서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이와 같은 분리는 더 이상 성립할 수 없다. 인간은 소우주로서 만물의 속성을 내포하므로 인간의 구원이나 신적인 고양은 마땅히 만물의 고양도 내포한다. 그러므로 종교적 구원 과정에서는 일탈한 개별자나 분리된 것, 추방된 것 따위는 존재치 않는다. 그리스도에 의해 하느님에게로 오르는 것은 인간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그 속에서 그에 힘입어 모든 것이 상승하게 되는 것이다. <축복의 영역 regnum gratiae>과 <자연의 영역 regnum naturae>은 더 이상 서로 낯설고 적대적인 관계를 맺치 않는다. 이제 두 영역은 나란히 동일한 신적 목표에 연관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신과 인간 사이뿐만 아니라 신과 피조물 사이의 화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창조의 원리와 창조된 것, 즉 신과 피조물 사이에 인간성의 정신, 즉 후마니타스 Humanitas가 창조자인 동시에 피조물로서 등장함으로써 둘 사이의 거리가 메워지게 된 것이다.
80 신비적 사유 방식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신과 세계를 연결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즉 모든 개별자들에게서 <신의 흔적>이 발견되며 신은 유한한 것을 통해 드러난다. 쿠자누스는 이러한 점에서 신비주의와 일치하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와 같은 변화를 새로운 보편적 연관으로 확립시켰다. 그에게 있어 자연이란 단지 신적 존재와 신적 능력의 반영일 뿐 아니라 신이 직접 쓴 책을 의미한다. 이것은 여전히 종교적 전제를 띤 발상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 셀링을 인용 하자면 ─ 객관적 학문의 자유로운 장을 여는 계기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자연이라는 책의 의미는 단지 주관적 정서나 신비적 예감으로는 알아낼 수 없으며, 단지 연구되고 ─ 낱말 하나하나에서 철자 하나하나에 이르기까지 파헤쳐져야만 ─ 그 해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더 이상 단순한 신적 상형문자나 성스런 기호로서 우리 앞에 머물 수 없으며, 설명과 체계적 해석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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