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틸리히: 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 책 밑줄긋기/책 2023-25
- 2025.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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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세기 프로테스탄트 사상사 - ![]() 폴 틸리히 지음, 송기득 옮김/대한기독교서회 |
옮긴이의 머리말
책머리에:문제와 방법
첫째 마당-정통주의, 경건주의, 합리주의 안에서 유동하는 강조점
둘째 마당-계몽주의와 그 문제
셋째 마당-계몽주의에 대한 고전주의적ㆍ로망주의적 반동
넷째 마당-보편적 종합의 파탄
다섯째 마당-새로운 조정의 길
인명색인
내용색인
39 합리주의가 신비주의의 반대는 아니며, 합리주의는 신비주의의 딸이라는 사실이다. 신비주의의 반대는 밖에서 오는 권위의 자리에 대신 서는 말씀의 신학(theology of Word) 이다. 우리는 교리를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도덕적 명령을 실행하는 것으로서 이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신비적'(mystical)이라는 말의 왜곡을 피해야 한다. 보기를 들어, 정신 상태가 안개 낀 듯이 다소 몽롱해 있을 때 어느 정도 '신비적'이라고 일컬어진다. 이것은 '신비적'이라는 말의 진지한 구사가 아니다. 신비주의는 내면성, 곧 내적 경험을 통한 궁극적 실재에의 참여를 의미한다. 어떤 신비가는 금욕주의나 탈아(脫我)의 훈련 그리고 이와 비슷한 것에 의해서 그와 같은 참여를 이루려고 한다. 그러나 신비주의를 그러한 훈련과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41 합리주의와 신비주의의 일치를 파악할 수 있는 하나의 말은 '내면의 빛'(inner light)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중세신학의 아우구스티누스적-프란체스코적 전통에서 유래한다. 그것이 종교개혁 시대의 소종파 운동에 의해서 갱신되었고, 미국에서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많은 부분의 기초가 되었다. '내면의 빛'은 모든 사람이 신에게 속하기 때문에 자기 안에 가지는 빛이며, 또한 그것에 의해서 모든 사람은 신의 말씀이 내려질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46 모든 종교적 권위는 타율적이 될 수 있다. 물론 타율은 신율(theonomy, 신적인 법)로 변형되는 순간에 사라진다. 신율이란 성서나 교회에 관해서 증언하는, 우리 안에 임재한 신적인 영(Spirit)의 현존에 관해서 우리 자신이 가지는 개인적 경험을 의미한다. 아주 흥미 있는 것은, 칼빈의 많은 말에서 몹시 타율적인 권위주의의 소리가 나는데도 성서는 신적인 영이 이 것을 증언할 때만 우리에게 권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내적 증언이 결여되어 있는 곳에서는, 성서의 권위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성서의 권위에의 복종은 단순한 외적 복종이지, 개인적인 내적 경험이 되지 못할 것이다. 자율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존재 안에 심어진 신의 자연법을 따른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성서에서나 교회에서 이 자연법의 진리를 경험한다면, 그때 우리는 아직도 자율적이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 신율적인 차원을 함께 가지는 것이 된다 만일 우리가 이런 경험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때 우리는 미성숙의 사람으로서, 형벌과 위험에 대한 불안을 피함으로써 얻어지는 안전을 구하는 권위주의적(타율적)인 복종을 따르게 될 것이다. 자신의 신적 근거를 알고 있는 자율이 곧 신율이다 신율적인 차원이 없는 자율은 단순한 휴머니즘에 떨어진다.
119 먼저 강조해야 할 첫 번째 것은 로망주의에 두 시기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 사실을 쉘링의 연구를 통해서 아주 일찍이 배웠다. 쉘링 자신의 사상적 발전은 이 두 계열의 원형을 의미한다. 쉴라이에르마허와 초기 쉘링은 전적으로 첫째 부분에 속해 있다. 그러나 다음으로 후기 쉘링과 키에르케고르는 둘째 부분에 속해 있다. 아마도 19세기의 20년대에서 첫째 부분에서 둘째 부분으로 나아가는 이행이 일어났다고 말할 수 있겠다. 로망주의의 제1기는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 안에 현존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쉴라이에르마허의 발전에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다음에 보게 될 것이다. 두 번째 시기에는 딴 일이 일어났다. 깊이의 차원의 발견이 그것이다. 무한한 것이 신적인 것의 차원으로 높여지기도 하고, 마성적인 것의 차원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이 사실온 로망주의적 시인이나 철학자들에 의해서 발견되었는데, 이것은 우리의 상황에 대해 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로망주의의 이 두 번째 시기에서 20세기의 실존주의의 거의 모든 사상이 미리 형성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134 쉴라이에르마허가 최초로 제시한 철저하고도 근본적인 변증적 진술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신과의 일치, 신에게의 참여는 죽은 뒤의 불멸의 생명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늘의 입법자를 용인하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그것은 영원한 생명에의 현재적 참여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결정적인 것이다. 여기에 그는 제4복음서를 따른다. 독일 고전철학자들은 이 복음서를 참된 복음서라 불렀다. 그것은 이들이, 이 복음서가 역사적으로 말해서 예수에 관한 믿을 만한 보고를 간직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 이들은 그 뒤에 곧 그것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배웠다. ─ 요한복음이 합리주의와 초자연주의 사이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원리를 표현하는 데 가장 가까웠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은 사후의 생명의 연속이 아니고, 지금, 여기에 있다는 이 사상은 그가 강조했던 중요한 점의 하나다. 그것은 시간 이전에, 시간 안에, 그리고 시간 이후에 영원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시간을 넘어서는 것을 의미한다.
144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교를 상대화한 것처럼 보이는 종교 개념을 지양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교를 특정 종교로 높임으로써가 아니라 모든 종교에 대해서 그리스도를 대치함으로써, 그리고 모든 종교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심판을 계시하는 신을 대치시킴으로써 종교 개념을 지양하지 않으면 안된다.
145 종교란 본질적으로 사고도 아니고 행위도 아니다. 그 적극적 측면을 보면, 종교란 무조건적 의존 감정이며,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무조건적인 것의 직접 의식이며, 반성의 행위에 선행한 직접적인 실존 관계이며, 우리의 의식 안에 있는 무조건적인 것에의 의식의 직접성이다. 이 모든 낱말들은 다 같이 종교적 경험의 실재를 가리킨다. 지식과 행위는 그 결과다. 종교적 지식과 종교적 행위는 무조건적인 것에 대한 직접 의식에서 생겨나지만 그것은 종교의 본질이 아니다. 무조건적 의존의 직접 의식은 우리가 세계와의 관계에서 가지는 부분적 자유와 부분적 의존의 혼합 감정을 초월한다. 자유와 의존이 뒤섞인 이 감정은 세계와 타자와의 관계에서 성립한다. 우리의 생명력이 강할 경우에는 현실과의 교섭에서 많은 자유를 느낀다. 이 자유감이 감소될 때 우리는 타자나 모든 종류의 유한한 것들에게 의존감을 가진다. 그런데 유한한 것에 대한 경험의 전 영역은 무조건적인 것의 직접지에서 초월된다. 우리가 신에 대하여 말한다고 하면 그것은 신이란 무조건적 의존의 근원에 대한 명칭이라고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신은 또 하나의 은하계처럼 객관적으로 주어진 실재로서 생각되지 않는다. 신은 모든 유한한 관계를 초월하며, 그 모든 유한한 것들의 바탕이 된다. 이것들은 모두 무조건적으로 신에게 의존한다.
161 헤겔은 신을 만물의 본질적 구조의 담지자로 본다. 이것은 헤겔을 본질주의 철학의 위대한 대표자이게 한다. 이때의 본질주의 철학이란, 만물의 본질을 시간과 공간에서 나타나는 신적 자기 현현의 표현으로서 이해하려고 하는 철학을 의미한다. 뒤에 생겨난 실존주의 철학은 다만 이 본질주의 철학에 대한 반동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현대 실존주의는 헤겔의 본질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서 생겨났다. 그러므로 실존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만물의 본질을 신적 생명의 현현으로 보는 헤겔의 본질주의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종류의 식물이나 동물의 본질, 원자나 별의 본질, 인간의 본성 ─ 이 본성에서 인간의 가장 깊은 중심이 나타난다. ─ 이들 만물의 본질적 구조가 신 안에 들어 있다. 이것들 모두는 시간과 공간에서 나타나는 신적 생명의 현현인 것이다.
164 헤겔이 자연이란 소외된 정신이라고 말할 때, 소외되었다는 것은 섬멸되었다든가, 변경되었다든가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계 과정 전체를 신의 자기 소외의 과정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 자기 소외는, 그리스도교 신학에 따르면, 신이 인간의 타락의 가능성을 포함해서 세계를 창조했을 때 신이 저지른 모험을 상기시킨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는 흔히, 신은 세계의 소외와 타락을 예견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칼빈신학에서는 신이 타락을 결정했다고까지 말한다. 어쨌든, 이것은 자연에 있는 신적 영의 소외에 대해서 헤겔이 논리적으로 주장한 종교적 실체다.
176 신과 인간은 현실적으로 분리되어 있고 적대 관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것이 이 한 사람의 인간, 예수에게서 구현되어 있다. 그러기에 예수는 로고스라고 불리는 것이다. 헤겔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에 의해서 확립된, 유한과 무한의 상호 내속성의 원리에 따라서 그리스도론을 전개했다. 무한한 그리스도인 예수라는 유한 안에서 완전히 구현된다. 무한의 중심, 바로 그것이 이 유한한 인간 예수의 중심에 현존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보편적인 것을 표현했다. 다시 말해서 가능성에서나 본질성에서 모든 사람에게, 어떤 면에서는 모든 존재에까지 타당한 것을 표현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는 절대 정신의 자기 현현이다. 그 후 유럽에서 일어났던 신앙부흥적 또는 경건주의적 신학은 이 사상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왜냐하면 이 신학에서는, 유일무이한 개체성과 이 개체성에 대한 인격적 관계만이 그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다.
208 여기에서 로마 교회는, 가령 오늘날 생물학에 의해서 전제되어 있는 진화 과정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생물학적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한 점이 아직도 있다는 생각에 집착했다. 다시 말해서 설명할 수 없는 한 점이란, 진화 과정이 진행되는 어느 시점에서 신이 인간이라는 고동동물에게 불멸의 영혼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에 대한 최후의 방어였으며, 지금도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이 최후의 방어마저 지킬 수가 없게 되었다. 그것은 육체에서 분리된 형상이라고 하는 하나의 실체, 곧 영혼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미에서 보면 영혼은 육체의 형상으로서 이들을 분리할 수가 없다. 더욱이 영원한 생명의 개념은 인간의 육체에 잠시 머무는 불멸의 영혼이라는 이원론적 구조와는 관계가 없다. 이 마지막 방어가 포기되었을 때, 과학은 모든 변증적인 입장을 정복했다. 이것은 잘된 일이었다. 이럴 때 상황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달리 볼 수 있어야 한다. 과학은 종교와 다른 차원에서 살며, 활동한다. 그러므로 과학은 창조, 성취, 용서, 성육이라는 종교적 상징에 간섭할 수가 없게 된다. 그리고 종교는 과학적 주장에 간섭할 수가 없다. 생물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또는 최초의 세포는 큰 미립자에서 어떻게 발달했는가에 관한 과학적 주장은 신학과 직접 관계를 가지지 않는다. 물론 간접적으로는 모든 것이 신학의 관심 대상이 된다. 왜냐하면 생물이 구성되고 발달하는 방식을 과학이 기술할 때, 간접적으로 그것은 신, 곧 삶의 창조적 근거에 대해서 무엇인가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223 신은 개인에게서 역설적인 현존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밖에 현존한다. 누구도 그리스도의 도래를 인간의 상황에서 끌어 낼 수는 없다. 이것은 또 하나의 비약, 다시 말해서 신이 그의 아들을 보냄으로써 시간 안으로 들어오는 비약이다. 이것은 인간에게서 끌어낼 수는 없고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를 인간의 구주가 되게 한다. 소크라테스는 위대한 실존적 스승이지만, 예수는 스승인 동시에 인간을 변혁시키는 구주인 것이다.
223 이처럼 종교적 단계는 그 자체 안에 긴장을 내포하고 있다. 헤겔의 그리스도 해석은 플라톤주의의 계열에 섰다. 헤겔에게서 신과 인간의 통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방식으로 표현어 있지만, 그것은 또한 모든 개인 안에서 현존한다. 키에르케고르에게서 신은 밖에서 또는 위에서 온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바로 칼 바르트의 출발점을 본다. 바르트에 따르면, 여러분은 인간에게서 출발할 수가 없다. 물음에서조차 출발할 수 없다. 인간에게로 오는 신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인간의 상황은 인간의 곤경에서 종교적 대답에 이를지도 모르는 물음을 발견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러한 확신에서 바르트는, 이상의 의미에서 보아, 비키에르케고르적이라 할 수 있는 나 자신의 조직신학을 비판한다. 전적으로 밖에서부터 인간에게 오는 신이라는 관념은 위대한 종교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
231 키에르케고르가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근본적으로 구별한 것은 옳습니다. 우리는 종교성 A 와 종교성 B에 관해서 논한 바 있습니다. 종교성 A는 신적인 것이 모든 인간에게 직접적으로 현존하며, 그것이 인간 존재의 깊이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보는 종교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신이 우리 안에 있다는, 무한한 것이 유한한 것 안에 있다는 신비주의적 형태의 종교 경험입니다. 근대 사상의 모든 발전이 어떻게 이 원리에 의존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 원리는 모든 유한한 것 안에서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이 일치하는 원리로서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에 의해 가장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한편, 종교성 B에서 기본적인 점은 분리와 소외에 있습니다. 이것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 사이에 틈이 있어서 이미 우리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 밖으로 끌어내는 소크라테스와 같은 산파역 이상의 것을 인간이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로운 것이 밖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구주 또는 그리스도가 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와 예수가 다른 점입니다. 예수는 소크라테스처럼 실존적인 스승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는 또한 신과 인간 사이의 틈을 극복하는 구주이기도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내 자신의 강의에서 이들 두 원리의 변증법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동일성의 원리, 모든 인간 안에서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이 하나가 되는 일치의 원리와, 밖에서 오는 계시적인 전달의 원리 ─ 이것은 계시적인 것이면서 동시에 구원적, 변혁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 사이의 변증법입니다. 키에르케고르가 뜻하는 계시는 신에 '관한' 이론이나 지식의 전달이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방향으로 왜곡된 계시 개념입니다. 이와는 달리 계시는 인간에 대한 신의 자기 현현이며, 인간을 변혁시키는 힘을 가진 것입니다. 계시 경험에서 생기는 상징적 진술이나 교리적 진술은 모두 이차적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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