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담화冊談話 | 옥스퍼드 세계사 5-2 ─ 제1부 제2장. 농업 이전의 예술과 사고(2)

 

2025.03.05 🎤 옥스퍼드 세계사 5-2

5강: 제1부 제2장. 농업 이전의 예술과 사고(2)
일시: 2025. 3. 05. 오후 7시 30분 - 9시 30분
장소: 수원시평생학습관
강의 안내: https://learning.suwon.go.kr/lmth/01_lecture01_view.asp?idx=4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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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적 설명방식(유기체적 설명방식) / 원자로적 설명방식
• 일체의 동시성, 공간적 접촉이 실재적인 인과성으로 간주
• '이것 후에, 따라서 이것 때문에' post(after) hoc, ergo propter hoc
• '이것에 인접해 있어서, 따라서 이것 때문에' juxta hoc(next to), ergo propter hoc
    ─ 형식 논리학에서 fallacy로 규정되는 것들

• 신화적 표상은 '포합적抱合的(polysynthetisch)' 특징을 가진다.
  단어는 문장에 귀속됨으로써 의미를 가진 단어가 된다.
  전체全體를 전제로 할 때에만 이해되는 부분部分
  전체상적全體像的(Vollbilder) 사유
   * 불교佛敎의 인연생기因緣生起

• 사물에 대한 감각적 분리와 병존은 '상호내재'(Ineinander) 형식 속에서 파악. 전체와 부분은 얽혀 잇으며, 이를테면 운명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분리를 주술적 직관을 통해 폐기하고 '근거'의 단순한 통일성으로 해소 ─ 실체들 사이의 무제한적 참여(Partizipation) 

예술에서 이념적인 것(the Ideal)과 실재적인 것(the Real)
• 예술의 '형성물'(Gebilde)은 조형造形이라는 창조적 과정의 소산이며 '생산적 상상력'의 순순한 창작으로서 추구되지 않았다. 자의식적 창작이나 순수한 예술작품의 의지가 개입되지 않은 것. 

mystērion (hidden)
  deiknymenon (what is shown, showed object)
  legomenon (what is said)
  drōmenon (what is performed, the thing done, action rites)
  제의祭儀. 실재적이며 현실적인 사태, 사건, 이것을 매개로 신의 본질과 활동이 드러나며, 인간과 신의 능동적 교류가 발생. 신화적 사유의 집약체 


98 페이지에 잔치와 권력, 99페이지에 지도부에는 "정치적 혁명이 일어나 권위를 부여하고 군장을 선택하는 방식이 다양해졌음을 보여준다"고 했는데, 이것은 추측에 불과하며 농경 시대에 들어와서 얘기이다. 지도부라든가 정치적인 어떤 혁명이라든가 이런 얘기는 농경 시대 이후의 얘기이니까 다음 번에 얘기를 할 것이고 100페이지에 샤먼이 있고, 101페이지를 예언자, 군주 그리고 교회는 빙하 시대에 있는 얘기가 아니라 농경 시대의 얘기이다. 빙하 시대는 정주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습 지도자 이런 것들도 농경 시대에 와서야 했던 얘기이니까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런 얘기들은 농경 시대에 하는 얘기로 그때 가서 다시 말하겠다.  

원래 인간은 세계 일반world in general을 들여다보면서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그 세계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가를 크게 나누면, 그러니까 정신학, 정신철학이라고 하는 영역이 있는데, 그 영역에서는 대체로 이렇게 얘기를 한다. 종교적 방식과 과학적 방식, 즉 신화적 사유와 원자론적 사유라고 얘기한다.  이 두 가지 방식으로 나눈다. 

오늘 이것을 설명하려고 가져온 것이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그림들이다.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중에 왈츠라는 작품이 있다. 지금 일단 이 그림을 가지고 설명을 한 다음에 이론적인 얘기를 하겠다. 1980년에 만들어진 작품인데 이 왈츠라는 작품을 보면 그냥 이렇게 선을 몇 개 그려놓은 것에 불과하다. 사실은 호크니가 왈츠를 추고 있는 사람을 찍은 다음에 이렇게 조각 내서 콜라주처럼 해놓았다. 이것을 보고 추상화한 것이다. 어떤 그림을 그린다고 할 때 한 순간만 잘라서 그릴 수도 있고 시작부터 끝까지 했던 액션들을 다 모아서 한꺼번에 빡 그릴 수 있는데 호크니는 그렇게 그린 것이다. 그러니까 호크니가 이렇게 왈츠를 그린 것이 굉장히 창조적인 것 같은데, 이렇게 그려진 그림들이 이집트 벽화이다. 이집트 벽화를 보면 어떤 인간을 그릴 때 얼굴은 정면을 그리고 몸은 옆모습을 그리는 것이니까 해체를 한 다음에 다시 모아서 그린 것이다.  Pearblossom Highway 11번에서 18번까지는 고속도로 그림인데 이것도 마찬가지이다. 표지판이라든가 주변 풍경이라든가 이런 것들을 다 모아가지고 한 그림에다 때려 넣은 것이다.  이것도 어떤 방을 그린 것인데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방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다 모아서 그림 하나에다가 우겨 넣었다고 보면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잘못 그린 그림이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그러나 시계열로, 우리가 보통 볼 때는 공간적으로 앞에서부터 차곡차곡 뒤를 보거나, 이렇게 순서대로 보거나 하는데, 그렇게 보는 게 방식이 차곡차곡 공간과 시간을, 그러니까 선후를 잡아서 보는 것이 말하자면 원자론적 설명이고 그것을 과학적 설명이라고 한다. 원자론적 사유로 하려면 딱 고정된 점이 있어야 한다. 원자론적 그림에 있어 가장 대표적인 것이 원근법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 불변의 소실점으로 넘어가는 데가 있다. 그러니까 그 그림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불변의 한 점을 잡아서 거기서 보는 것이다. 원근법은 위계질서hierarchy가 있다. 즉 절대적 고정점이 있어야 되는데 이것을 갖다가 기원arkhē라고 한다. 조상을 누구인지 알려고 하는 것, 족보라는 것은 불변의 고정점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이 고정점으로부터 내려오는 위계질서hierarchy를 잡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엇이 먼저고 무엇이 나중이고, 뭔가가 원인이고 뭔가가 결과가 되는 것이 아귀가 맞아야 된다. 그러니까 호크니의 그림을 볼 때 뭔가 불안한 게 뭐냐 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과학적으로 선후가 명료한 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한꺼번에 때려 넣는 건 안된다. 각각의 재료는 부분의 일부일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선이 있고 후가 있는데 먼저 일어난 것이 반드시 나중에 일어난 것의 원인이 될 수는 없다. 어쩌다 보니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니까 먼저 일어난 것과 나중에 그것에 뒤따라오는 것이 인과관계로 연결되어 있는지 안 되어 있는지는 따져봐야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절대적인 고정점으로서의 기원하고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파악해 봐야 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원자론적 사유이고 과학적 사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려가야만 전체가 구축이 되는 것이고 그다음에 각각은 쪼개도 그것 자체로 살아 있는 기능을 한다. 다시 말해서 분해가 가능 한 것, 강한 힘을 주어서 물을 분해하면 수소 두 개와 산소 하나로 분리시켜낼 수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결합시키면 물이 된다.  그런데 그게 안 되는 물건들이 있다. 그런 것을 우리는 유기체라고 부른다. atom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a와 tom이 합해진 말인데, tom은 조깨다, divide라는 뜻이고, a는 반대로, 즉 쪼갤 수 없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원자라고 하는 건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최소의 단위, 지금 여기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고정점을 얘기했는데, 더 이상 쪼개지지 않는 최소의 단위로 인간을 쪼갤 수는 없다. 하나로 그냥 이렇게 붙어 있다. 그래서 이런 것은 유기체organ라고 부른다.  그러니까 이것은 신화적 사유라고 하기도 하고 유기체적 사유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우리가 쌈을 먹는데, 쌈은 어쨌든 한 입에 먹어야 한다. 한입에 딱 넣어서 입안에서 터지는 맛으로 먹는다. 그러니까 쌈을 싸기 전의 싸져 있는 것을 하나씩 순서대로 먹으면 안 된다. 그건 쌈을 먹는 게 아니라 쌈의 부분을 먹는 것이다. 쌈은 그러니까 유기체적 전체적인 것들이 있다.  그래서 호크니의 그림을 신화적 세계관을 표현한다고 얘기한다. 

신화적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은 마술적이고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유기체적 전체를 한 번에 보려는 어떤 그런 거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유기적 전체를 전체상적全體像的(Vollbilder)이다라고 얘기한다. 일단 다 봐야 알 수 있는 그림, 이미지 전체를 가득 채워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Vollbilder의 대표적인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 그래서 부처님이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니 그것을 알려고 하지 말아라, 알려고 하는 것이 집착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것은 인因과 연緣에 의해서 생겨나고 인因이라는 게 직접 원인이고 연緣이라는 게 간접 배경이다. 사태는 인연因緣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인데, 그 직접 원인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보면 atomistic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은 추적해 낼 수가 없다. 여러 가지 간접적인 배경 조건을 다 알아야 완결된 설명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부처님은 알려고 매달리면 그게 집착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atomistic한 것이든 organic한 것이든 간에 알려고 덤비는 것 자체를 불교는 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직접 원인과 간접 배경을 알 수가 없다. 그러면 계속 이것을 알려고 매달리는 것을 무명無明이라고 한다. 앎이라고 하는 것에다가 매달리면 안 된다는 것으로, 매달리지 않는 태도가 명明이다. 불교에서 조심해야 되는 게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이 모든 인연을 깨달은 게 아니라 깨달으려고 하는 것 자체를 안 하는 것이 아는 태도이다. 그러니까 이 영역으로 들어가면 선과 악이 없어진다.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도 집集이다. 고집멸도苦集滅道란 말이 매달리면 안 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불교의 얘기이고 우리는 어쨌든 원인과 결과를 따져 물어서 각각의 부분들을 개별적인 최후의 고정점을 찾아내고 그 고정점으로부터 궁극적 정지점에서 출발해서 구축해 나가는 것, 이것들이 원자론적 설명이라면, 신화적 설명 또는 유기체적 설명은 그렇지 않고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보는 것이다. 부분과 전체를 동시에 보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어떤 일이 일어난 다음에, 논리학에서는 post hoc, ergo propter hoc(이것 후에, 따라서 이것 때문에)라고 하는데, post는 after를 말하는데, 어떤 일이 일어났고 그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이것 때문에 이것이 일어났다 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그것은 어쩌다 보니 이렇게 일어났을 뿐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논리학에서 post hoc의 오류, 우연한 발생의 오류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 따져보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니까 juxta hoc, ergo propter hoc(이것에 인접해 있어서, 따라서 이것 때문에), juxta는 next to를 말하는데, 우연히 곁에 여기 나란히 있었는데,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 옆에 있는 게 원인이 아닐까 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다. 인접해 있던 것들이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데, 이런 것들이 사실 논리학적으로는 오류인데 그게 원인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있다. 그런 점들을 생각을 해보면 신화적 사유라고 하는 것과 원자론적 사유는 사태를 설명하는 다른 방식일 뿐이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 신자들이라면 다 아는 삼위일체 교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하나다 라는 얘기가 있다.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 논쟁이라는 게 있었다. 아리우스는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으니까 아들과 아버지는 별개이지 어떻게 하나인가 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원자론적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설명이 잘 안 되는, 논리적으로 설명한다는 결국 atomistic한 설명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겅것이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서 우리가 늘 생각을 해 봐야 된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다 라고 할 육신이 하나인 건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공유하고 있는 하나의 정신이 있다면 하나라고 상징적으로 말할 수는 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으로 하나가 된다 라고 하면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란 말인가 라고 atomistic하게 생각을 하면 연결이 안 될 것이다. 그런 것들을 신화적 설명이라고 하는데, 신화라는 말을 쓰지말고, 유기체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다. 쌈을 먹듯이 이해를 해야 한다. 

여기에 지금 나와 있는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가 쓴 책으로는 《생각의 역사》이 있고, 케임브리지 세계사에도 이 사람이 쓴 글이 있다. 원서로도 번역본으로도 읽어봤는데 이 부분은 이 사람이 학생 시절에 배운 얘기를 그대로 하고 있다. 요즘에는 신화학이라든가 이런 것을 가지고 이렇게 설명하지 않는다. 정신철학이 충분히 발전을 해서 철학에서도 이렇게 설명을 하지 않는다. 예술은 신화적 사유라고 하지 않고 유기체적 사유를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종류의 사유를 선택해서 사물을 설명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떤 것이 더 우월하고 어떤 것이 더 열등한가에 대한 설명은 구별은 없다. 우와 열은 그 사유 방식 안에서 따져 묻겠는 것이다. 

여기서 이제 약간 응용해서 얘기를 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atomistic한 세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공 영역은 atomistic한 세계이다. 그래서 그것을 절차적 세계procedural world라고 부른다. 아까 고정점이 있고 이 고정점으로부터 하나 하나씩 차곡차곡 나간다고 했다. 문명국가의 법 체계는 절차적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17세기 이후로, 17세기는 뉴턴의 과학혁명의 시대이다, 17세기 과학혁명과 18세기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문명이라고 하는 것에 하나의 표준이 만들어지는데 과학적 절차에 따라서 행하는 것을 문명이라고 해왔다. 그리고 그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법률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가 공공 영역에서 살고 있을 때는 객관적으로 크로스 체크가 되는 증거들을 가지고 절차를 따라서 따져 묻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atomistic한 세계에 arkhē가 있고 procedural 이런 것들이 옳아 보이기는 한다. 철두철미하게 진리처럼 보이기는 한다. 그리고 헌법이 최상위에 있는 법이니까hierarchy가 있다.  이게 바로 17세기 과학혁명 이후로 서구 사회에서 문명 세계의 스탠다드를 만들어 온 방법이다. 그래서 이것이 무조건 옳아 보이기는 한데, 그러다 보니까 유기체적 사유라고 하는 것은 야만적인 것이고 비문명적인 것으로 간주되기가 쉽다. 그것을 감안해야 된다. 그러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절차적인 문명 질서를 지키지 않으면 유지가 안 된다. 지금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organic한 세계, 옛날에는 신화적 세계라고 하는 것들이 다 private한 공간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철저하게 지켜지는 나라가 프랑스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무슬림들에게 히잡을 쓰지 못하게 하는데 이는 종교 탄압이 아니라 너희들의 종교적 관습은 사적인 것이니까 공공영역에서는 드러내지 말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을 무슬림들은 종교 탄압으로 본다. 그것은 1789년 프랑스혁명 이후로 프랑스에서 만들어진 관습으로 프랑스에서는 laïcité, 공공 영역에서 자기의 종교적인 신념을 드러내 보이면 안 된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것을 사적인 공간으로 밀어 넣으라는 얘기를 하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당겨서 하는 이유는 앞으로 《옥스퍼드 세계사》를 읽는 동안에 혹시라도 신화라든가 이런 얘기 나오면 오늘 들은 얘기를 기억해 두었다가 그 얘기는 약간 오바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다음에 다른 얘기 하나 더 하겠다. 예술작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얘기가 나왔는데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될 것 같아서 그 얘기를 하겠다. 예술 작품을 해석하는 문제는 굉장히 복잡해 보이지만 기본 원칙이 있으니까 그 기본 원칙을 꼭 알아두기만 하면 된다. 형성물Gebilde이라고 하는 게 있다. 그러니까 만들어진 것이다. 형성물들에게 어떤 의미가 여기에 부여되어 있는가 하는 것은 사실 만든 사람만이 알고 우리는 알 수 없다. 이런 것들의 의미라고 하는 것은, 어떤 미적인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 이런 것들은 관람자는 영원히 알 수 없다. 형성물이 만들어졌다고 했는데 이 형성물이라고 하는 것은, 한자로 쓰면 상像인데, 이 상像에다가 어떤 의미를 부여한다 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뭔가 눈에 보이는 게 있어야 그것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라는 생각이 그 뒤에 놓여 있다. 감각적 상이라는 것이 있고, 형성물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적 상도 있지만 예를 들어서 꼭 돌로 새긴 조각만이 형성물이 아니라 말, 글자, 부호 이런 것도 형상물이다. 그러면 감각적 상이라고 하는 것도 특정한 생각을 반영을 하는 것이고 말, 글자, 부호 이런 것들도 특정한 생각을 반영을 하는 것이겠다.   

이 두 가지를 철학에서는 실재적인 것the Real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안에 이것으로써 나타내지는 것, 언어학에서는 시니피에signifié라고 하는 것, 이것을 이념적인 것the Ideal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글이라고 하는 글자를 사용해서 한국말을 이야기하는데 글자만으로는 온전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 뉘앙스라는 게 있다. 이것도 형성물이다. 커뮤니케이션이 온전하게 일어나려면 글자만 가지고 안 된다. 그러니까 이념적인 것은 아주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관념 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것들이 감각적 상으로 표현될 수도 있고 말이나 글자나 부호로 표현될 수도 있다. 예술이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회화나 조각이나 이런 것들로만 표현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고, 형성물 일반을 만들어내는 것을 인간이 하고 있는 예술 활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고대 동굴에서 발견되는 조각상이나 이런 것들을 숭배했다고 해서, 감각적 상을 숭배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굉장히 고도의 종교적인 뭔가를 가지고 있었다 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아까 단순한 모방일 수도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니까 종교적인 숭배라고 하는 것은 지금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ideal한 영역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이 종교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섣불리 아 뭔가를 믿었겠구나 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의미를 부여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빙하 시대 동굴 속에서 발견된 조각상들이 어떤 종교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말이나 글자나 부호로 이렇게 넘어오는 것, 감각적 상을 숭배하다가 이것을 넘어오는 단계, 전 시간에서 사자인간, 새머리 인간을 얘기했는데, 현대의 종교학적인 통찰에 따르면 감각적 상에 대한 숭배나 이런 것들로부터 말이나 글자나 부호로 넘어오는 과정이 고등 종교가 생겨나는 과정이다. 고등 종교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예전에 사용하던 용어로 신화적 사유, 신화적 사유를 벗어날 수가 없다. 우리가 디폴트로 갖고 있는 것이다. 공공생활의 영역에서는 당연히 절차적 사유를 해야 된다. 안 그러면 가르치는 선생이 어디있고 배우는 학생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분명히 종교적인 세계가 있다. 종교는 그 위아래가 없는가. 있다. 고등 종교가 있다. 고등 종교로 알려진 종교, 예를 들어서 프로테스탄트, 프로테스탄트가 가톨릭보다도 훨씬 더 고등 종교이다. 종교에도 등급이 있다. 가톨릭 교회가 우상숭배를 한다고 해서 때려 엎자고 나온 게 프로테스탄트이다. 종교라고 하는 것이 결코 폐기되어서는 안 되는 영역이 있다. 그 영역에서 프로테스탄트는 최고로 상을 배제하는 영역이다. 구약성서 〈욥기〉를 읽어 보면 누가 봐도 옳은 얘기를 하는 이들을 모두 내치고 욥에게 복을 준다. 이는 믿음을 가져라 라는 뜻이 아니라 종교적인 설명은 atomistic한 설명과는 다른 영역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다. 구약성서를 보면 너희는 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리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하는데, 이 얘기는 감각적 상을 없애라는 얘기이다. 야훼가 I am who I am, 나는 있는 자다 라고 말하는 것은 이 존재는 술어가 없이 끝나는, 덧붙일 게 없는, 그 자체로 완결되어 있는 자체 완결적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나를 닮은 것, 일체의 감각적 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다. 이 얘기는 이 상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신과의 관계가 가까워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고등 종교이다. 가장 고등 종교는 이슬람으로 기독교는 그래도 십자가라도 있는데 이슬람은 없다.  나중에 나와서 더욱 더 감각적인 것들을 배제하는 연구를 했다. 그래서 이슬람은 기화학적 무늬밖에 없고 사제 계급도 원래 없다. 궁극적인 종교는 철학이다.  

그 어떤 것이든 간에 감각적 상들은 자연주의적naturalistic이라고 얘기를 할 수 있고, 말, 글자, 부호 이쪽으로 가면 갈수록 spiritual이다. 기독교에서는 spiritual을 영성이라고 말한다. 불교는 문자마저도 세우지 않는다. 문자를 세운다는 것은 뭔가에 대해서 규정을 해보겠다는 것이다. 규정을 한다는 것은 구별을 한다는 것, 독일어로 Unterschied이다. 가령 I'm a boy라고 하면 이는 규정이다. 다르게 말하면 나는 보이가 아닌 것들이 아니다 이다. 다시 말해서 I'm not not a boy이다. 규정은 부정이다. 이건 굉장히 중요한 공식이다.  규정은 어떤 것을 규정함으로 해서 그 이후의 것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을 말한다. 굉장히 폭력적인 것이다. 우리가 이것은 무엇이다 라고 해서 말과 글자로서 규정하면 그 순간 규정되지 않은 것들을 다 배제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언젠가는 인과 연에 의해서 그 규정으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이다. 사람 일은 모르니 섣불리 말할 수 없다 라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시계열로 보면 언젠가는 지금 내가 내놓은 규정이 틀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얘기이다. 그게 불교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생각이다. 불교의 불립문자라고 하는 것은 규정을 하지 않겠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 규정은 내가 하는 것으로. 내가 뭔가 규정하겠다라고 하는 것은 자아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가 작동하고 있는 한 끝없이 규정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이 자아마저도 없다고 여겨야만 진정으로 도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 중도中道라고 하는 것이다. 중도라는 것은 규정도 하지 않고 규정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다.  스토아주의에는 판단 중지epoche라는 게 있다. 아무 생각을 안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섣불리 규정하지 않는다 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 불교의 이 영역까지 오면, 불교는 고등 종교의 영역이 아니라 그냥 우주의 끝을 봐 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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