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셰크 코와코프스키: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2 ─ 황금시대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2 - 10점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지음, 변상출 옮김/유로서적

제1장 마르크스주의와 제2 인터내셔널
제2장 독일 정통파: 칼 카우츠키
제3장 로자 룩셈부르크와 혁명적 좌파
제4장 베른슈타인과 수정주의
제5장 장 조레스: 구원론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제6장 폴 라파르그: 한 쾌락주의자의 마르크스주의
제7장 조르주 소렐: 한 쟝센주의자의 마르크스주의
제8장 안토니오 라브리올라: 열린 정통주의의 모색
제9장 루드빅 크르치비치: 사회학의 도구로서 마르크스주의
제10장 카치미르츠 켈레스-크라우츠: 정통주의의 폴란드 대표
제11장 스타니슬로브 브르조조프스키: 역사적 주관주의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제12장 마르크스주의운동에서 칸트주의자들: 오스트로-마르크스주의?윤리학적 사회주의
제13장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시작
제14장 플레하노프와 마르크스주의의 성문화
제15장 볼셰비즘의 부상 이전의 러시아 마르크스주의
제16장 레닌주의의 등장
제17장 볼셰비키운동의 철학과 정치학
제18장 레닌주의의 운명: 국가 이론에서 국가 이데올로기로

참고문헌 

 


제16장 레닌주의의 등장

567 마르크스 교의의 전유라는 레닌주의의 성격은 오래 동안 논쟁의 주제가 되어왔다. 특히 문제는 레닌주의가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수정주의' 이데올로기인가, 아니면 반대로 마르크스주의의 일반 원리를 새로운 정치상황에 충실하게 응용한 것인가의 논쟁이었다. 이 논쟁의 정치적 결과는 분명하다. 이 논쟁과 관련하여 공산주의운동 내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스탈린주의 정통파는 당연히 후자의 관점을 취한다. 스탈린은 레닌이 전수된 교의에 더한 것도 뺀 것도 없으며, 마르크스주의 원리를 오차 없이 러시아의 조건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는 전 세계의 상황에도 응용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레닌주의는 마르크스주의를 특별히 러시아에 응용한 것이 아니고 러시아의 조건에 제한적으로 응용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발전의 '새로운 시대', 즉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의 시대를 위한 전략과 전술의 보편타당한 체계라고 한다. 또 한편 일부 볼셰비키들은 레닌주의를 러시아 혁명의 좀 더 특수한 도구로 간주하는 반면에, 비-레닌주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레닌이 여러 가지 본질적인 지점에서 마르크스의 교의에 불성실했다고 주장한다. 

568 이처럼 이데올로기로 형식화된 이 같은 문제는 사실 해결하기 어렵다. 그것은 원전에 충실할 것을 내부적으로 요구하는 종교적 분파들이나 정치운동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문제들이다. 운동의 창립자들 다음의 세대들이 기존의 경전에서 명확히 예단할 수 없는 문제들을 직면하고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할 때,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며 불가피한 일이다. 이런 면모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는 기독교의 역사를 닮아있다. 결과는 대개 다양한 방식으로 교의와 실천적 필요 간의 화해로 나타난다. 분열의 새로운 노선과 정치적 구성형태를 둘러싼 갈등은 사건들의 직접적 압박에 의해 그 형태를 취하게 되며, 경험적으로 볼 때 각 사건들이 지지를 받을 때도 완전히 통합되지 않은 모순된 형태를 드러낸다. 베른슈타인은 마르크스주의 사회철학의 특징들을 노골적으로 거부하고, 마르크스의 유산 일체를 고스란히 수취한 사람이라고 고백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말 그대로 수정주의자였다. 반면에 레닌은 자신의 모든 실천과 이론을 기존 이데올로기의 적확한 응용일 뿐이라고 밝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끌었던 운동의 실제적 효과보다 마르크스의 텍스트에 대한 충실성을 선호한다는 의미에서의 교조주의자는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로, 그는 폭넓은 실천적 감각을 지니고서 이론에서든 전술에서든 모든 문제를 러시아 및 세계 혁명의 단일 목표에 복속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 일반 이론의 모든 문제들은 이미 마르크스주의에 의해 정립되었으며, 특수한 상황의 올바른 해결책을 찾기 위해 교의의 틀에 지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이 점에서 그는 스스로를 마르크스주의 경전의 충실한 집행관으로 간주할 뿐만 아니라 특히 독일사회민주당이 모범을 보인 유럽 사회민주주의의 실천과 전술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레닌은 1914년까지 독일사회민주주의를 하나의 민주적 패턴으로 간주하고, 카우츠키를 이론 문제에서 가장 위대한 살아있는 권위자로 생각했다. 

569 레닌이 '수정주의자' 인가하는 문제는 그의 글들을 마르크스의 글들과 비교함으로써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마르크스가 제기했거나 이런저런 상황에서 말했던 것에 미루어 그가 대답할 수 없는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그렇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분명 마르크스의 이론은 여러 가지 점에서 불완전하고 모호하지만, 그 원칙들을 명확히 위반하지 않고서도 여러 모순적 문제들에 응용될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간의 연속성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단순히 '충실성'이라는 용어에 의존할 수 없고, 이론의 영역에서 마르크스의 유산을 '응용' 하거나 보충하고자 하는 레닌의 일반적 경향을 검토해야한다.  

569 앞서 말했듯이, 레닌의 경우 모든 이론적 문제들은 단일한 목표, 즉 혁명의 단순한 도구에 불과하다. 요컨대 인간의 모든 사건, 이념, 제도와 가치의 의미는 계급투쟁에서 오직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결과에 달려있을 뿐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술에서 이런 태도를 지지하는 대목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계급사회에서 인간 생활의 온갖 면모들이 맺는 연관성과 일시성을 이론의 차원에서도 강조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특수한 분석은 '수정주의'의 공식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덜 단순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훨씬 더 세분화되어 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혁명에 이로운가 아니면 해로운가"의 문제로 한정된 것보다 훨씬 더 넓은 지평을 가지고 있다. 반면, 레닌의 경우 이 문제는 어떤 사건이 무엇보다 중요한가, 중요하다면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와 관련하여 충분한 기준이 된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문명의 연속성이라는 개념을 두고 있었지만, 과학·예술·도덕·사회제도를 포함한 인간의 모든 가치가 계급 이해관계의 단순한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역사유물론과 관련하여 제시했던 일반 공식은 레닌이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레닌에게 철학적 문제들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고, 정치투쟁의 무기일 뿐이다. 예술과 문학 · 법과 제도· 민주적 가치와 종교적 이념들도 그랬다. 이런 점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탈선했다고 비난할 수 없을뿐더러 오히려 역사유물론의 원리들을 마르크스보다 더 철저하게 활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법이 계급투쟁의 무기에 '불과하다'면 법칙과 임의적 독재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이다. 정치적 자유가 자기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부르주아에 의해 이용되는 도구에 '불과하다' 면,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여러 민주적 가치들을 지지할 의무를 느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주 정당한 것처럼 보이게 된다. 과학과 철학, 예술이 계급투쟁의 기관일 뿐이기 때문에 철학논문을 쓰는 것과 화기를 사용하는 것 사이에는 '질적'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이 둘은 상이한 상황에 쓰이는 상이한 무기일 뿐이고, 다만 그것이 동지에 의해 사용되는가 아니면 적에 의해 사용되는가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닌의 이런 원칙들은 볼셰비키가 권력을 잡은 후에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지만, 사실 이런 면모는 그의 초기 저작들에서 이미 표현되고 있었다. 레닌이 여러 다른 견해를 가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논쟁을 할 때 종종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레이 그들과 공유했던 원리들을 누구보다 더 단순하고 일관성 있게 활용했기 때문이다. 레닌의 옹호자들이 레닌은 마르크스가 실제로 했던 주장-예컨대 '독재'는 법의 통제를 받지 않는 전제정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과 충돌한다는 점을 지적할 때도 그들은 레닌의 비정통성보다 마르크스의 비일관성을 입증하려 했던 것이다. 

571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닌이 러시아 혁명운동에 도입했던 혁신적 조처는 마르크스주의 전통에 대한 그의 충실성을 고려해볼 때 한 두 가지 본질적인 지점에서 상당한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첫째, 초기의 레닌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간의 동맹을 '부르주아 혁명'의 기본 전략으로서 옹호했다. 이때 그의 적대자들은 이런 경우에서 부르주아와의 동맹은 마르크스주의 교의와 좀 더 일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둘째, 레닌은 민족문제를 단순히 곤란한 장애물로서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그들의 운동을 좀 더 용이하게 추진할 수 있게 하는 잠재력으로 간주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셋째, 레닌은 당이 노동자들의 자발적 폭동을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과 관련한 조직적 규칙을 공식화했다. 이 모든 지점은 수정주의자들과 멘셰비키뿐만 아니라 로자 룩셈부르크와 같은 중진 정통파에 의해서도 비판을 받았다. 이 세 지점 모두에서 그의 원칙은 지나치게 실용적이며, 조심스럽게 말한다면 그의 정책은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에 필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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