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큉: 그리스도교 ━ 본질과 역사


그리스도교 - 10점
한스 큉 지음, 이종한 옮김/분도출판사



이 책의 목적 


ㄱ. 본질에 대한 물음 

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왜곡" 

갸. 논쟁 속의 "그리스도교" 


ㄴ. 중심 

나. 바탕인물과 근본동인 

냐. 핵심적 구성요소들 


ㄷ. 역사 

다. 원그리스도교의 유다계 묵시문학 패러다임 

댜. 고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헬레니즘 패러다임 

더. 중세의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 

뎌. 종교개혁의 개신교 복음 패러다임 

도. 이성과 진보에 정향된 근대 패러다임 


맺는말을 대신하여




ㄱ. 본질에 대한 물음

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왜곡"

29 종교는 다 비슷하다는 말은 어리석은 주장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모든 종교 특히 예언자적 종교 - 그리스도교든 유다교든 이슬람교든 - 에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이 매우 중요하다: 나의 종교를 다른 종교들과 구별 해주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러 저러한 종교의 특별한 점, 전형적인 것, 고유한 특성, "본질적인 것"아니 "속알"은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이 물음을 이미 유다교에 대해 제기했듯이, 그리스도교에 대해서도 던지고자 한다 - 보편적(일치운동적) 정신에 터하여, 다른 종교들에 대한 공격없이.


갸. 논쟁 속의 "그리스도교"

52 그리스도교 역사 안에 덕지덕지 쌓여온 것들을 치워놓는다면, 그리스도교의 원천에는 다름 아닌 한 인물이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오로지 이 인물에게서 그리스도교의 항구적 중심을 만날 수 있고, 오직 이 인물로부터 그리스도교의 본질 물음의 대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여기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의 집중이다. 이 집중은 그러나 그리스도 중심주의적 협소화와는 다르다! 


ㄴ. 중심

나. 바탕인물과 근본동인

55 이렇듯 다양한 신약성서 27권의 "책들" 함께 묶어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대답은 문서들 자체의 증언에 따르건대, 놀랄만큼 단순하다: 그것은 나자렛 예수라는 한 유다인의 이름이다. 추종자들은 그에게 유다인들이 인간에게 부여할 수있는 최고의 존칭을 드렸으니, 곧 마쉬아(히브리어), 메시아(아람어). 크리스토스(그리스어)가 그것인바, 하느님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또는 하느님이 파견하신 자라는 뜻이다. 하느님의 그리스도인 예수가 바로 신약성서의 모든 이야기, 비유, 서간, 공문들 그리고 또한 각양 각색의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들과 이방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들을 함께 묶어주는 바탕인물이다. 압축된 성서적 표현을 따르건대: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


냐. 핵심적 구성요소들

63 예언자적 종교는 인도의 신비주의 종교들이나 중국의 깨달음 종교들과 다르다. 구원 사건에서 결정적 주도권이 하느님께 있으며 인간은 본 성적으로 그분과 같을 수 없고 인간적 노력을 통해 같아질 수도 없다. 인간은 그분 "앞에서" 행동하며 믿음 안에서 그 분께 자신을 맡길 수 있다.


79 신약성서에 의하면 성령은 (종교사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하느님과는 별도의,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어떤 제3존재가 아니다. 활기찬 자연의 어떤 마술적·물질적·신비적·기적적 유동체 같은 것이 아니며, 물활론에서 말하는 무슨 마력적 존재도 아니다. 성령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다! 하느님이 인간과 세상에 가까이 계시는 만큼, 엄습하되 포착되지 않는 힘으로서, 생명을 창조하되 또한 심판하는 힘으로서, 선사하되 인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은총으로서 인간과 세상 깊은 곳에서 활동하시는 만큼, 성령은 하느님 자신이다. 성령은 하느님의 영으로서, 태양 광선이 태양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듯이, 하느님으로부터 분리 될 수 없다. 그러므로 볼 수 없고 붙잡을 수 없고 파악할 수 없는 하느님이 도대체 어떻게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고 현존하시냐고 묻는다면, 신약성서는 한 입으로 대답한다. 하느님은 영 안에서 우리 인간에게 가까이 계시다고.


84 왜, 어떻게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이 인간적이고 사회적이고 종교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인간성·사회성·종교성이 그리스도라는 척도와 그분 영의 이끄심을 따라. 형편이 좋건 나쁘건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내고자 노력하기 때문이다.


85 그리스도교 신앙은 한낱 추상적 개인 신앙이 아니고 개인주의나 유아론도 아니며 신앙 공동체 안의 또는 신앙 공동체와 결부된 신앙인만큼, 공동체 내에서의 전달을 위해 말과 명제들로 이루어진 언어, 즉 가장 넓은 의미의 신앙 명제들에 의존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인들의 공동체는 매우 일찍부터 공통된 신앙 명제들을 정식화했으니. 바로 그리스도 신앙을 총괄·요약하는 신앙고백문들이다.


98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한 분 하느님을 그분의 마지막 예언자요 메시아를 통해 새로이 보았고, 이 메시아 자신도 갈수록 더욱 새로이 이해하게 되었다. 하느님의 모상, 말씀 그리고 아들로서, 이러한 의미에서, "하느님 중심성"이 "그리스도 중심성"에 의해 새로이 규정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의한 그리스도교의 중심에 대한 이러한 재규정은 그리스도계의 원 신앙고백들 안에 뚜렷하고 충실히 드러나 있다.


ㄷ. 역사

다. 원그리스도교의 유다계 묵시문학 패러다임

110 아람어를 사용하던 예루살렘 원 공동체의 정신적 지평 또는 "풍"토는 한마디로 특징 지을 수 있으니 곧 묵시 문학적·종말론적 지평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종말이 곧 닥치리라 믿고 있었다. 이 그리스도인 첫 세대는 저 "묵시" 운동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는데, 기원전 2세기 마카비오 시대 이래 유다교의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 갈수록 강력해진 이 운동은, 예언, 유언, 꿈, 환상 등의 방식을 통해 하느님의 비밀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래의 저울을 벗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122 "교회"를 간략히 정의하자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예수의 인격과 일에 몸 바치고, 그 인격과 일을 모든 인간의 희망으로 증언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봉사하고 그것을 관철하는 대신 그 일을 가로막을 때 교회는 자신의 본질을 거스르는 죄를 범하며 자신을 왜곡하는 괴물이 되어간다!


146 역사의 예수(함축적으로만 그리스도론을 대변했다)가 자신의 선재를 선포하지 않았고, 유다계 그리스도인 공동체(분명한 그리스도론을 내 세웠다)도 삼위일체론을 만들어 내지 않았는데, 그렇다면 삼위일체에 관한이 가르침은 도대체 어디서 생겨 났는가? 대답: 삼위일체론은 묵시문학적 원그리스도교 패러다임으로부터 헬레니즘적 고대교회 패러다임으로의 거대한 전환의 산물이다. 


147 유다인들이 또 다시 로마와 전쟁을 벌여, 135년 예루살렘은 철저히 파괴되었으며 모든 유다인들이 추방되고 예루살렘은 엘리아 카피톨리나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그와 함께 예루살렘의 유다계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그 공동체가 어린 그리스도교계에서 차지하고 있던 우뚝한 지위도 종말에 이르렸다. 그 공동체의 영광은 이제 이방계 그리스도인들에게로 넘어갔다. 오늘날의 교회사가들은 거리낌없이 유다계 그리스도교를 교회사의 "고생물학 시대"라고 폄하하여 지칭한다.


댜. 고대 그리스도교의 보편적 헬레니즘 패러다임

164 초창기 교회의 묵시 문학 패러다임을 로마제국 거의 전 지역에서 대체한 보편적 헬레니즘 패러다임역시 3~4 세기에 홀연히 "거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과 상황들을 통해 이미 1세기부터 준비·시작되었다. 거기서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은 두말할 것없이 사도 바울로였다. 


165 율법에 충성하던 바리사이 바울로가 바리사이적 신앙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 신앙으로 돌아선 것은 환상 중에 예수가 살아있음을 생생히 체험했기 때문인데, 바울로는 그리스도 발현을 원조 사도들의 부활 체험과 맞먹는 것으로 여겼다.


165 바울로의 회심 체험은 마침내 이스라엘의 메시아 예수를 유다인과 이방인을 아우르는 온 세상의 메시아로 선포해야할 소명의 자각으로 귀결되었다. 이제 바울로는 그 자신 유다계 그리스도인인데도 유다교 의식 율법 곧 할라카의 준수를 절대적 의무로 보지 않았다.


223 고대 교회 헬레니즘 패러다임에 뚜렷이 나타났고 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에서 더욱 확립된 남성 지배권은 신약성서에선 눈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저 금령이 없었다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니, 곧 성직자 결혼금지령이다. 


223 그리스도교 사회에서 지도적 지위로의 진출은 반의무적 독신과 동일시되었다. 한 권력구조가 성의 포기 같은 매우 개인적인 행위를 토대로 하여 그렇게 빠른 속도로 그렇게 날카롭게 편을 가르며 확립되었다는 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229 오리게네스의 사상 체계에서 구원사의 핵심사건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하느님과 인간, 영과 물질, 로고스와 육 사이의 무한한 차이를 신인 그리스도를 통해, 역시 신약성서는 전혀 모르는 방법으로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 대가는 무엇이었던가? 이제 그리스도교 신학의 중심은 바울로, 마르코 아니 전체 신약성서에서처럼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이 아니었다. 새로 중심에 자리 잡은 것은 극히 사변적인 문제들이었다. 한 신성 안에서 세 위격이 어떻게 일치를 이루는가: 하나님 말씀의 육화 그리고 그것과 결부하여 플라톤주의에서 말하는 참되고 관념적인 천상계와 헛되고 물질적인 지상계의 균열의 극복을 어떻게 개념 할 것인가.


233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 있어서의 패러다임 전환이 가장 뚜렷이 드러나는 곳은, 바로 처음부터 주어져 있던 마태오 공동체 전승의 3중 세례 양식문에서와 같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에 대한 이 신앙이다. 바로 이 중심을 이미 초기 이방인 교회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해했고, 그로써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리스도론에서의이 패러다임 전환을 제대로 이해해야만 다음 사실들을 이해할 수 있다. 왜 메시아 신앙이 그리스도인들과 유다인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이방계 그리스도인들과 유다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서로 그렇게 달랐던가? 왜 그리스도 신앙이 동방의 헬레니즘적 이방계 그리스도 교회들 내에서도 교회 분열을 야기했던가?


233 하느님 아들의 선재에 관해 거의 아무것도 몰랐던 유다계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론은 예루살렘 멸망 이후 갈수록 쇠퇴한 반면 말씀의 선재와 육화에 관한 전술을 담고 있는 요한 복음서 머리말이 강력히 대두하여 말 그대로 역사를 만들어 나갔다. 곧 교의사 말이다.


240 콘스탄티누스는 곧 그리스도교에 여러 가지 혜택을 베풀었다. 315년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매우 언짢은 십자가 형이 폐지되었고, 321년에는 일요일을 법정 공휴일로 지정했으며, 교회에게 유언장 인수 집행 권한을 부여했다. 324년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보다 이교에 호의적이던 공동 황제 리키니우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다음 해에는 이미 유일한 지배자가 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 실제적으로 의미했던 것: 콘스탄티누스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교는 온 제국에 널리 퍼져 나갈 수 있었다.


242 아리우스에 따르면, 아들은 위대한 신적 중간 존재요 세계 창조의 도구이긴 하지만 바로 그 점에서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아들은 아버지와 한 본질이 아니며, 그 존재가 아버지와 다르다. 이러한 방식으로 아리우스는 유일신론을 격렬히 옹호하고자 했다. 그의 하느님은 접할 수 없는 초월적 실체, 낳아지지 않았고 시작 없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도무지 아들을 가질 수가 없다.


245 하느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의 한 부분만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고스란히 계시하셨다.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온전히 꿰뚫어 알고 계시며 그리스도 안에는 처음도 없고 창조되지 않은 영원하고 살아 계신 하느님 아버지 자신이 고스란히 현존하신다.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 곁의 제2의 하느님 혹은 반 하느님이 아니니, 그분을 통해 참 하느님 자신이 현존하신다: "하느님으로부터의 하느님. 빛으로부터의 빛, 참 하느님으로부터의 참 하느님이요 낳아지셨으나 창조되시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비롯하신다." 과연 그리스도 안에 계신 분은 바로 하느님 참 하느님이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 즉 신성과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의 참여 또한 그 그리스도의 실재를 통해 가능하다. 이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 아리우스의 여러 명제들이 단호히 단죄되었고, 아리우스 자신은 파문되었다.


248 이로써 테오도시우스는 그리스도교를 사실상 국가 종교로 만들었고 가톨릭 교회를 국가 교회로, 이단을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만들었다. 교회의 기억력이 그토록 형편 없을 줄이야! 박해받던 교회가 박해하는 교회로 변하는 데는 채 백 년도 걸리지 않았다!


251 테오도시우스 2세 때에는 유다교도 대놓고 공격했다. 유다교는 국가교회의 예외 법규에 의해 거룩한 제국에서 배제되었다. 그리고 제국 교회 성립 이후 유다인들이 역시 그리스도교적으로 채색된 제국 이데올로기도 시종일관 거부했기 때문에 제국 교회는 기존의 이교 특유의 반 유다주의까지 넘겨받아 그리스도교적 모티프들을 통해 크게 강화했다.


253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하느님 안의 단 하나인 실체가 핵심 주제였던 반면,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출발점은 성부·성자·성령 세 실체였다. 교의사가들은 한 실체 신학으로부터 세 실체 신학으로의 이행은 단지 용어가 변한 것뿐인가 아니면 표상 틀의 실질적 변화도 내포하는가를 놓고 무수히 토론해왔다.


257 그리스도교계가 훗날 고전적인 것이 된 칼케돈 공의회의 그리스도론 정식을 갖게 된 것은 근본적으로 그들 덕이다. "동일한"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 있어서도 완전하시고 인성에 있어서도 완전하시며, 참 하느님이요 참 인간이시다." 동일한 그분은 "신성을 따라서는 성부와 본질이 같으시고, 인성을 따라서는 우리와 본질이 같으시다." 그러므로 "동일한 그리스도는… 두 본성 안에서 뒤섞이지도 뒤바뀌지도 나누어지지도 갈라지지도 않고 존재 하신다." 이 유명한 네 수식어는 알렉산드리아 급진파와 네스토리우스 다함께 겨냥하고 있었다.


259 결국 제국 교회는 해체되었다. 오늘날도 유서깊고 중요한 여러 그리스도 교회는 지나치게 서방 신학에 의해 꼴지어진 칼케돈 공의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칼케돈을 부인하는 교회들은 지금도 동방의 비잔틴 정교회뿐 아니라 서방의 로마 교회와도 분리되어 있다. ① 단성설을 따르는 이집트의 콥트교회 ② 시리아의 네스토리우스 교회. ③ 아르메니아 교회와 게오르그 교회. 이들은 훗날 단성설을 받아 들였다.


315 슬라브 세계는 비잔틴 교회와 로마 교회 사이에서 그리스 비잔틴적으로 꼴 지어진 문화와 게르만 로마적으로 꼴 지어진 문화 사이에서 분할되었던 바 여기서 두 개의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 뚜렷이 대조를 이루었으니, 곧 고대 교회 헬레니즘 패러다임과 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이 그 것이다.


316 예전에 불가리아인들의 세례가 그러했듯, 러시아인들의 세례 역시 심사숙고를 거친 국사였으니, 그 목적은 러시아를 문명화된 세계의 그리스도교 전통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러시아에서도 그리스도교는 아래로부터 자라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위로부터 강요된 것이었다고 하겠다.


335 정교 신앙 그리고 라틴 그리스도교와는 매우 다른 동방 그리스도교는 이슬람 세력이 지배했던 그 후의 "암흑기"에 그리스인들과 남·동 슬라브인들을 결합시켰고, 이슬람교 속으로 용해되지 않도록 지켜 주었다. 그렇다. 헬레니즘 고대 교회 패러다임은 자신의 정치적·종교적 전통들과 함께 새로운 제국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그것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러시아 제국이었으니 이 제국은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특히 발칸 지역 정교 신앙의 거대한 수호 세력으로 발전했다. 정교 신앙은 거기서 러시아 역사의 둘째 시기인 모스크바 시대에 자신의 생명력을 다시금 새로이 입증 할 터였다.


더. 중세의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

372 아우구스티누스는 어떤 신학자와도 달리 서방 신학과 신심을 꼴 지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세적 패러다임의 신학적 아버지가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서방 교부로는 거의 유일하게, 동방에 의해 배척당했다. 이 사실은 그리스도교 세계 안에서 고대 교회 헬레니즘 패러다임으로부터 라틴 중세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사실상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시작되었음을 말해주는 또 하나의 증거다. 


377 금욕고행자요 박식한 도덕가이며 아리우스파를 철저히 반대한 펠라기우스는 400-411년 로마에서 주로 평신도 사이에 활동했다. 그는 마니교와 아직도 널리 퍼져 있던 부도덕한 이교에 맞서 열정적으로 싸웠는데, 부유한 로마 사회의 이름뿐인 이완된 그리스도교도 못지 않게 격렬히 비난했다. 그런데 오리게네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펠라기우스는, 악을 무찌르기 위해 인간의 의지와 자유에 큰 비중을 두었다. 그가 중시한 것은 인간의 자기 책임과 실천적 행위였다. 물론 펠라기우스도 모든 인간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은총을 어떤 외적인 것으로, 아무튼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인간 내면에서 작용하는 점으로 이해하지 않고 일종의 연료 비슷하게 이해했다. 은총은 펠라기우스에게는 죄의 용서였는데, 이것은 그에게도 인간이 공로없이 얻는 하느님의 선물이었다. 


377 펠라기우스 역시 세례를 통해 인간의 의인이 인간의 업적과 공로없이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자유 의지라는 칼을 들고 자신의 행위를 통해 구원에의 길을 헤쳐나가야 한다. 구약성서의 계명들과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이것이 펠라기우스의 근본 관심사였다. 그리고 이것은 그야말로 합리적인 신학이 아니었던가?


378 아우구스티누스가 로마서의 이 구절에서 읽어 낸 것은 무엇이었던가? 그는 아담의 최초의 죄만이 아니라 원죄를 읽어냈다.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지니고 나온다는 말하자면 유전으로 물려받는다는 죄 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바로 여기에 모든 인간의, 비록 갓난 아기일지라도, 육신과 영혼이 손상되어있는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은 만일 세례를 받지 않으면 영원한 죽음에 떨어질 것이다.


379 아우구스티누스의 확신: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의 자유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인간의 의지가 하느님의 은총에 의해 비로소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은총은 인간의 힘으로 얻어 낼 수 없으며, 다만 선사된다. 


379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하느님은 천사들의 타죄로 인해 생겨난 균열을 다른 이성적 존재들로 다시 채우시기 위해, 처음부터 "영벌을 받을 큰 무리"와는 달리, 비교적 소수의 굳게 서 있는 사람들만 지복에로 예정하셨다. 그러나 이러한 교설이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긍정과 양립할 수 있는가? 전적으로! 왜냐하면: 어떠한 요구도하지 않고 영원한 지복을 선사하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인간의 구원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380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인생 체험과 바울로에 대한 깊은 연 구에 터해 은총을 바로 서방 신학의 중심 주제로 만들었고 또한 이 분야에서 이해하기 쉬운 간결한 라틴어 정식들을 매우 많이 고안했다. 고대 라틴 교회에 널리 퍼진 도덕주의에 맞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밝혔다. "그대가 가진 것으로서,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그러므로 행업과 율법의 종교가 아니라 은총의 종교로 드러나야 한다.


403 전체 동방 그리스도교계와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티누스에게도 교회 안의 최고 권위는 로마 주교가 아니라 보편공의회였거니와, 그는 이 공의회에 조차 무류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로마교회의 주장들을 특히 동방에서는 거의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제2 로마에서 누가 멸망한 옛 제국 수도에 관심이 있었으랴? 황제 외의 최고 권위는 교황이 아니라 보편 공의회였거니와, 이 공의회는 황제만이 소집 할 수 있었고 로마 주교는 당연히 이 공의회에 종속되어야 했다.


476 동·서방 교회의 분열은 사실 매우 복잡한 상호소외 과정 속에서 이미 오래 전부터 쌓여온 것이 뚜렷이 드러난 것에 불과했다. 즉 새로운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은 헬레니즘 고대 교회 패러다임과 조화 될 수 없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로마 수위권의 부상은 고대 교회의 주교 중심 시노드 구조들의 희생을 대가로 했으니, 과연 이 구조들은 서방에서 거의 다 파괴되었다. 도대체 옛 로마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선포되었지만 새 로마에서는 전혀 심각하게 여기지 않던 로마 교황의 지배 수위권, 이제 11세기에 교황 자신과 그의 사절들에 의해 서방 그리스도교계의 중심지들 어디서나 노골적으로 선전되고 있던 그 수위권을, 자신의 천 년 전통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던 동방 그리스도교계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었겠는가?


525 그러니까 "신학"은 대학교수인 토마스에게나 주교였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나 다를 것이 없었으니, 바로 하느님께 대한 책임있는 언설이었다. 플랑드르 출신의 도미니코회 수도자 스힐레벡스가 적확히 표현한 것처럼, 토마스는 신학적 인생 설계를 지니고 있었다. 토마스의 삶 전체는 "반성과 심사숙고를 거친 시대에 걸 맞고 책임있는 형식의 말씀에 대한 사제적 봉사"로 이해할 수 있다.


580 교황의 무류성에 관한 교설은 점진적으로 생성 발전된 것이 아니라, 13세기 말 갑작스레 만들어진 것이다. 이단 혐의로 고발된 한 프란치스코회 수사에 의해. 그리고 그 후에도 오직 프란치스코회의 별종들만이, 요한 22세가 이단자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그 교설을 옹호했다. 아무튼 그후 둘 혹은 세 명의 교황이 병립하던 교황직 분열시기 그리고 종교개혁 시대에는 더구나 그러한 교설이 교회 안에서 관철될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636 이 모든 것은 로마가 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과 더불어 철저히 방어적 노선을 취했음을 극명하게 입증한다. 어쨌든 근대 세계는 전반적으로 로마와 관계없이, 아니 로마에 반대하여 생겨났고, 몽매에도 중세를 그리워하는 교회 국가 관료들의 종교개혁 아니 모든 개혁 자체에 적대적인 반동 유토피아에 거의 영향받지 않고 자신의 길을 계속 걸었다. 로마는 포이어바흐, 쇼펜하우어, 마르크스, 니체 같은 인물들과 함께 정점으로 치닫던 근대 무신론과 비판적, 건설적 대결을 하지 않았다. 반동으로 나아가던 교회와 신학은 로마 게토에 들어 앉아 자기 주변 세계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를 도무지 깨닫지 못했다.


뎌. 종교개혁의 개신교 복음 패러다임

652 11세기 그레고리우스 개혁과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의 대두 이후, 루터의 종교개혁만큼 서방 그리스도 교계에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중대 사건은 없었다. 마르틴 루터는 16세기에 새 시대의 개막을 선포했다. 교회와 신학, 아니 그리스도교 전체의 또 하나의 패러다임 전환, 중세 로마 가톨릭 패러다임을 버리고 종교개혁의 복음 패러다임으로의 전환 말이다.


667 루터는, 그의 엄청난 정치적 폭발력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죄 예속성에 대한 실존적 고뇌 때문에 하느님의 은총을 붙들고 필사적으로 씨름한 믿음의 인간이요 신학자로 남아있다. 루터의 근본 관심사는 단지 교회의 이루 말할 수 없는 폐해 특히 대사 장사에 맞선 투쟁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교황권으로부터의 해방이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피상적인 이해다. 루터 자신의 종교개혁적 열정과 엄청난 역사적 폭발력은 어디까지나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로 돌아가게 하고자 한 데에서 비롯했거니와, 그는 그 당위성을 성서 특히 바울로 서간에서 생생히 깨달았다.


667 영혼의 구원을 얻기 위한 교회가 규정한 온갖 경건한 종교적 보험 행위와 인간적 노력을 거슬러, 루터는 은총과 신앙의 수위권을 천명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무조건적 신뢰와 "신앙으로만" 인간은 구원 될 수 있다.


712 모든 종교 개혁가가 하느님의 절대 주권,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그리스도의 유일성, 다른 모든 규범을 규정하는 규범인 하느님 말씀을 강조한다. 그런데 칼뱅은 1539년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완전히 수정, 보완된 강해 2판을 출간하면서부터, 한 가지 결정적 문제에서 다른 종교 개혁가들과 뚜렷이 구별되는데, 바로 모든 인간이 영원으로부터 구원 혹은 파멸에로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루터가 극히 위협적인 예정 문제를 믿음직한 의인 신앙 안에 흡수하여 뇌관을 제거했고, 그의 출중한 제자 멜란히톤은 예정 문제를 루터파 신앙의 바탕이 되는 아욱스부르크 신앙고백(1530)에 의도적으로 포함시키지 않았던 반면, 칼뱅에게서는 예정 문제가, 적수들과의 논쟁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극히 첨예하게 부각·강조되었다.


713 인류는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로 갈라져 있음이 확실하다. 어떤 사람들은 믿고 어떤 사람들은 믿지 않는다. 왜 그럴까? 칼뱅은 답을 성서에서 찾았다. 예컨대 에페소서: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뽑으셨다"(1.4). 믿는 자들을 선택하셨다. 다른 사람들은 선택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인류가 역사를 통해 신앙인과 비신앙인으로 갈라진 것은 영원하신 하느님 자신의 결정에서 비롯된 일이다.


736 헨리 8세 후 150년이 지나 영국 교회는 완전히 자리를 잡고 근본 구조를 확립했는데, 이것은 추후 수백 년간 영국뿐 아니라 미국 성공회 그리고 19세기 영국인들의 새로 획득한 식민지로의 이주와 영국교회 선교사업이 비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거둔 성공을 통해 형성된 전세계 영국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그대로 존속되었다. 영국 교회는 처음부터 독창적 방식으로 중세 가톨릭 패러다임의 요소들과 종교개혁 개신교 패러다임의 요소들을 통합했는데, 이 점이 영국 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의 계 3의 길임을 결정적으로 입증한다.


759 신앙고백의 기능은 무엇이었던가? 두 가지였다. 신앙고백은 내부적으로는 일치의 표지였으니, 의식·제도·규율에까지 자신의 낙인을 찍어 주었다. 외부적으로는 다른 진영들과의 구별의 표지 있으니 그것들에 맞서 튼튼한 보루를 쌓아 자신을 지켰다. 그 결과 종파화 과정을 통해서 서방 그리스도교의 균열은 심화·고착화되었다. 17세기 중엽까지 큰 종파들은 안정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는데, 그 결과에 전과 같은 교회의 일치로 돌아가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게 보였다.


780 개신교의 이 각성 운동들의 근본 관심사는 종교 개혁적 패러다임 자체에서와 마찬가지로 복음정신을 되찾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사실상 종교개혁의 전형적 열망이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신앙으로 말미암은 의인과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남, 여기서는 한편으로는 하느님 은총에 사로잡힘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죄스러운 인간의 믿음 안에서의 신뢰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각성"은 삶 전체를 규정지어야 마땅한 신앙의 근본 체험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물론 그 뒷면도 유념해야 한다. 각성 운동에서는 설교가 흔히 공포와 전율을 불러 일으키는 주제들을 극히 의식적으로 그리고 종종 일방적으로 부각·강조했다. 영혼 구원에 대한 묵시록적 불안과, 그로 말미암은 곧 오실 세계 심판자 앞에서의 극적인 죄의 고백, 그러나 어쨌든 각성운동이 복음의 빛에 비추어 영적 쇄신을 위해 참으로 진지하게 노력했음은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없다.


783 보수적인 개신교 신자 모두가 근본주의자는 아니다. 또한 모든 경건주의자나 영국교회 신자가 근본주의자여야 할 까닭도 없다. 많은 보수적 개신교인들, 경건주의자들, 영국국교도들이 자신들의 보수적인 종교적 근본입장과 현대의 사회·정신·종교적 관심사에의 개방성을 온전히 결합 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이들은 현대주의자들은 아니지 어쨌든 현대적 개신교인들이다. 그러면 누가 근본주의자인가? 대답: 근본주의자는 성서의 축자영감과 그 것에 터한 절대적 무류성을 고백하는 사람이다.


785 루터에 따르면 개개의 성서 구절들은 그 자체가 하느님의 말씀은 아니며, 그것들이 살이 되신 하느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고, 또 그렇게 신앙 안에 받아들여지는 한에서만,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근본주의자들은 루터 역시 자신들의 정당성의 근거로 끌어댈 수 없다.


786 이 본격적 의미의 근본주의자들에게 이제 교회사적으로 정말 중대한 사건은, 더이상 루터의 사건이 아니라, 갈릴레이 사건 그리고 다윈 사건이었다. 대대로 물려받은 "조상들의 신앙"을 고수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새로운 위협을 더 이상 모르는 체 할 수 없었다. 근·현대 자연과학과 철학의 세계상이 여러모로 성서의 세계상과 대립하고 있었다.


786 성서의 세계상을 공박하는 것은 자연과학과 철학만이 아니다. 계몽주의 이래 역사 비판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믿지 않는" 성서학이 생겨났거니와 이것은 엄청난 연구 성과에 터해, 예컨대 창세기와 모세 오경 전체의 형성사, 이사야서와 다니엘서의 역사, 나아가 공관복음서 그리고 요한 복음서의 형성사도 뚜렷이 밝혀 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790 예언자적·유일신 종교들은 다른 종교들에 비해 근본주의에 빠지기 쉽다. 전일성을 추구하는 인도의 신비주의적 종교들은 어느 쪽인가 하면 다른 종교들을 흡수하고, 전 단계의 것으로서 상대화하고, 유일무이한 진리의 여러 측면으로서 포괄하려 시도한다. 그에 반해 예언자적 종교들인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는 거의 본능적으로 다른 종교들은 처음부터 배척하고 개종시키고, 경우에 따라서는 분쇄하려는 경향이 있다. 상호이해와 친교 대신 분리와 정복, 유일신에의 각별한 전념은, 흔히 다른 종교들과의 대결뿐 아니라 자기 내부의 이단자 배척, 더 나아가 끝내는 믿음 다른 자들의 박멸로 귀결된다. 유일신교는, 특히 세계 멸망의 환상들과 결합할 때 광신주의가 된다.


도. 이성과 진보에 정향된 근대 패러다임

828 칸트는 하느님 인식에 관한 문제에서, 이론적 이성이 아니라, 인간의 행동으로 표현되는 "실천적" 이성에 호소한다: 관건이 되는 것은 순수한 과학적 인식과 비판적 숙고가 아니라 인간의 도덕적 행위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다. 칸트는 도덕적이고 책임지는 존재인 인간의 자기 이해로부터 논증을 시작한다. 관건이 되는 것은 그저 존재가 아니라 당위이며, 과학이 아니라 도덕이다.


834 17 세기에 자의식을 지닌 정신적 엘리트들은 권위에 예속되지 않고 개방적이고 전진적으로 사유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를 거슬러 근대의 특징인 진보성 안에서 이 진보성이 바탕을 두고 있던 곳은 고대 르네상스 또는 성서가 아니라, 인간의 자주적 이성이었다.


835 근대의 또 하나의 근본 특징인 세속적 진보 이념도 마찬가지로 17세기에 비로소 뚜렷한 모습을 드러냈고, 18세기에는 삶의 영역 전체에 삼투했다는 사실은 매우 상징적이다. 진보 이념은 바야흐로 역사 전체의 시간적 해석 규범이 되었다. 전체 역사 과정은 이성적으로 진보하고 진보함으로써 이성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이제 "진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는데, "역사"라는 말을 사용할 때는 이 낱말이 동시에 떠오르게끔 되었다.


847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종교는 그래야만 하는가? 인간은 본바탕이 선하며, 윤리적 덕성이 개인 행복의 전제조건인가? 루터파의 죄의식에 반대하여, 이제 이 위대한 세기에는 낙관주의? 계시는 이성의 보완물이며, 그리스도교는 종교들 가운데 가장 유익한 종교? 그리스도교,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예수는 인류가 이미 언제나 의식하고 있던 것, 즉 이성에 맞갖은 자연스럽고 인간다운 삶을 새삼 분명히 깨닫게 해준 지혜로운 도덕스승? 사실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847 예수의 역사 또한 온갖 교의주의를 거슬러, 이성에 터해 설명되어야 했다. 논쟁의 초점은 16-17세기처럼 더이상 교회가 아니었다. 이 종교적 무관심의 세기에 논쟁의 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역사의 예수를 그리스도 가현설로 해체·증발시켜 버리던 고대와 중세 교회의 경향이 돌변했다.


892 프랑스 교회는 수백 년간 계속되어온 중세적인 개혁 기피와 무능의 값을 비싸게 치러야 했다. 교회가 혁명의 최대 희생자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892 어쨌든 이 교회는 이제 더 이상 1789년 이전처럼 살아갈 수 없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던 사회적 환경의 획기적 패러다임 전환은 교회 자체에게도 원하든 원치 않든 실로 깊은 영향을 끼쳤거니와, 이러한 사정은 자코뱅당의 공포정치가 종식된 후, 종교 문제에서 국가의 중립이 정식으로 선포되고 새로운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허용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931 콩트로부터 우리 세기의 베버에 이르는 많은 사회학자들은, 종교가 합리화와 탈마법화 과정의 강력한 힘에 의해 해체되리라 확신했다. 이 세계 안의 하느님 부재에 대한 의식이 끊임없이 그리고 더욱더 퍼져 나가지 않았던가? 갈수록 막강해져가던 근대적 동향들을 눈앞에 보면서도, 보수적 개신교는 축자적으로 이해된 성서에 몰두했으며, 한편 로마가톨릭교회는 이 또한 앞에서 살펴보았거니와, 자신의 체제와 구조들을 그때까지 유례없는 방식으로 중앙 집권화·관료주의화했을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신성화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양측 모두에서 흔히 열광성을 내포한 반근대적·방어적 신심이 발전될 수 있었다.


962 세계의 모든 국가에 경제 질서와 법질서가 있으며 어느 나라에서도 그 질서들이 일정한 윤리적 합의 없이 국민들의 윤리적 의지와 무관하게 기능하지 않는 바, 사실 민주적 법치국가는 그러한 합의와 의지에 터해 살아간다.


962 새로운 세계 질서가 존립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공동 가치, 척도, 근본 태도들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인류 전체를 위한 구속력과 결속력 있는 윤리, 곧 세계 윤리가 필요하다. 


962 이 윤리적 근본 합의는 모든 종교들이 "교리적" 상이점들에도 불구하고, 긍정할 수 있고,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함께 지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963 그리스도인인 나에게는 유다인, 무슬림 그리고 다른 종교인들에게도 마찬가지겠지만 오직 하나인 참 종교가 있을 뿐이다. 그것이 나에게는 그리스도교이니, 그리스도교는 내가 이 책 첫머리에 그리스도교의 본질로서 명시하려 시도했던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알려주신 한 분이신 참 하느님을 증언해준다. 하지만 이 단 하나인 참 종교가 다른 종교들 안에 있는 진리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 특히 윤리와 관련하여 그리스도교 신앙은 다른 종교들에서도 자신의 것과 유사한 근본 가치·척도·태도들을 발견하며, 따라서 세계 윤리와 상충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 터해 떠받치고 명확한 근거를 제공하며 구체화·심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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