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가키 료스케: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새로알기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새로알기 - 10점
이나가키 료스케 지음, 조규상 옮김, 박승찬 감수/가톨릭출판사


머리말 ≪신학대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_ 7


제1장 도전의 책, ≪신학대전≫ _ 21

제2장 신에 대한 문제 -‘다섯 가지 길’의 의미 _ 43

제3장 ‘친교, 즉 존재’ - 위격의 패러독스 _ 61

제4장 창조와 우주론 _ 87

제5장 ‘악’에 대한 문제 _ 113

제6장 모든 사람이 행복을 원하고 있는가? _ 147

제7장 토마스의 정치 철학 -‘공동선’의 복권 _ 177


맺음말 ‘토마스주의자’가 아닌 토마스 _ 211


쓰고 나서 ≪신학대전≫은 지금 읽어야 할 책 _ 217

옮기고 나서 ≪신학대전≫의 권위자, 이나가키 교수 _ 220


주석 및 참고 문헌 _ 222

색인 _ 234




머리말 ≪신학대전≫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11 《신학 대전》은 토마스의 주 저서로 여겨지고 있고 실제로도 그렇지만 '주 저서'라고 불리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점도 몇 가지 있다. 첫째, 이 작품은 저자가 서문에서 명시하고 있듯이 초심자를 위한 입문서다, 그것도 대학의 신학부에서 학문으로 신학을 공부하려는 학자가 아니라 전문적 교육, 연구와는 거리가 먼 일반 수도사들을위한 입문서로 쓰인 것이다. 둘째, 이 작품은 미완성작이다. 토마스는 죽기 3 개월 전에 갑자기 "나는 더 이상 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는 구술 필기를 중단하였는데, 그것은 그가 피로했기 때문이 아니라, 새로 체험한 현시에 비하면 그때까지 써 내려온 것이 지푸라기처럼 느껴져 글을 계속 쓰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즉 《신학 대전》은 단지 미완성일뿐만 아니라 저자의 눈에는 완전히 미숙한 것으로 보였다는 뜻이다. 셋째, 《신학 대전》은 512가지 문제를 포함하고 있는데 토마스가 책 이름에서 표시하고 있듯, 이 작품의 주제는 신이지만 인간에 대하여 고찰하는 제2부에 303문제가 배당되어 있어 (남아있는 사본의 수로 봐도 이 부분이 가장 널리 읽힌 것 같다) 외견상으로도 균형을 잃은 것 같은 인상을 준다.


제1장 도전의 책, ≪신학대전≫

29 신학은 저자인 신의 의도를 충실하게 파악하며 성경을 읽기 위한 공부이며 탐구이다. 토마스는 '성경뿐 sola scriptura '이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성경을 참으로 성스러운 서적으로 읽기 위해서는 '거룩한 가르침'이라는 배움과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29 다시 말하면, 성경이나 '거룩한 가르침'에서 이야기하며 가르치는 것이 가르치는 신인 이상, 넓은 의미에서 신학이다. 단지 성경에서는 신이 주로 말하며 가르치나, '거룩한 가르침'의 학문인 신학에서는 인간이 가르치는 신에 귀를 기울인다. 말하자면이 가르침을 충분히 받아들이기 위하여 가르치는 신을 조금이라도 가까이하며, 가능하면 가르침의 근원인 신 안으로 들어가도록 시도하는 것이다.


37 토마스의 탐구가 우리에게 내미는 도전은 앞서 언급한 《신학 대전》 제1부 제1문제 제1절에서 담담하게 주장되고 있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서는,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만 가능한 탐구의 범위를 넘어 신의 계시에 의해 신앙의 빛으로 인도되어 지혜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2장 신에 대한 문제 -‘다섯 가지 길’의 의미 

49 결론을 말하자면, 신의 존재에 대한 토마스의 독자적인 논증이라는 통설로 설명되고 있는 다섯 가지 길은, 그의 머릿속에 있었으나 그 자신은 시도하지 않았던 신의 존재에 대한 진실한 논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다섯 가지 길은 엄밀한 의미에서 신학의 주제인 신이 존재하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본래 토마스는 신의 존재에 대한 완전한 논증은 인간의 인식 조건으로 보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우리가 '신은 무엇인가?'를 알고 있었다면 신은 존재한다는 것은 뻔한 명제였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 우리는 신을 보고 있기 때문에 신이 존재하는 것을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알 수 있어, 논증과 같은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 토마스의 입장이다.


59 우리는 사상사의 어느 전환점에서 토마스가 지적 탐구를 지탱해주는 원동력이자 근거로서 이해하고 있던 신의 개념을 상실했을 것이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나 토마스가 이 지상의 삶에서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한 '신에 대한 직관'이라는 사상이 근대에 와서는 거의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으로도 헤아릴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신 개념의 상실과 망각에 따라 우리의 지적 탐구도 원칙적으로 신의 문제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망각되어 왔다고는 하지만 지적 탐구의 근거로서의 신은 지적 탐구에 종지부를 찍는 신에 의해 왜소해진 것이 아니라 적어도 서로 경합 할 수 있는 선택지의 위치에 있다. 그것을 알아차릴 때 신의 문제를 둘러싼 토마스의 논의는 우리에게 하나의 중대한 도전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제3장 ‘친교, 즉 존재’ - 위격의 패러독스

64 토마스가 성부, 성자, 성령으로 불리는 신의 위격이 '자립하는 관계'를 의미한다고 할 때 그는 신의 위격에서의 "친교, 즉 존재"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는 이 통찰에 의해 최고이자 하나인 신에 있어 세 위격이 실재적으로 구별된다는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는 새로운 신학적 길이 열린다고 생각한 것이다.


70 신 안에 위격의 구별을 인정하는 것은 창조주인 신이 지혜와 사랑이 넘치는 친교의 신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인하여 만물의 창조는 자연(본성)의 필연성에 의한 유출이 아니라 지혜와 사랑의 신의 조화임이 드러난 것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신에 의한 천지창조를 근본적으로 구원의 역사의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80 그는 성경이 유일한 신에 대하여 성부, 성자, 성령로 따로 따로 부르는 것의 확인부터 출발하여 이것을 어디까지나 신앙의 신비로 받아들이면서 신학자로서 인간적 언어 능력의 한계를 다해 표현하고자 한 결과, 마지막으로 신의 위격은 '자립하는 것으로서의 관계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제4장 창조와 우주론

93 토마스의 신학대전에서의 창조론 제1단계는 제1원인으로서의 신이 제1원인으로서 행사하는 인과성을 정확히 알아내는 시도다. 


93 제1원인이란 여러 원인의 계열 속에서 '제1'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원인의 계열 전체의 근거가 되며 그것을 초월한다는 의미로 '제1'인 것이다.


106 창조의 가르침에 따라 나에게 다가온 창조주와의 의존 관계를 떠나서는 완전한 허무라는 존재론적 지위의 자각은 나 자신의 삶의 방법·사고 방식에 관하여 근본적 결단을 촉구할 정도의 무게를 안고 있다. 창조에 대한 우리의 관심이 이 세계의 시작에 관한 단순한 지적 호기심일 수 없다고 앞서 말한 것은 이러한 의미에서였다.


109 창조는 신의 조화로서 존재 그 자체인 신이 스스로의 존재를 나누어 그 존재와 생명의 풍부함으로의 참여를 인간에게 허락한 것이며 거기에서 구원사업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사랑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신은 자신과의 친밀한 벗으로서 친교를 나눌 자로 삼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자 토마스의 신학적인 창조 개념이었다.


110 토마스가 그의 창조론에서 이야기하고자 한 첫 번째는 창조란 무엇인가의 문제는 철학자들의 여러 가지 어려움과 실패를 거치며 탐구를 통하여 서서히 명확해졌다는 것과 우리 또한 창조의 문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전체적·보편적인 인식을 향하여 철저한 지적 탐구를 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창조란 철학적·형이상학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떠한 것의 관계로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우리가 창조에 대해 지적으로 인식하며 이성으로 서 논증 할 수 있는 것은 '신의 창조 작용은 무엇이 아닐까?'를 표현하는 것으로만 제한된다는 것이다. 


111 셋째로, 창조는 구원 사업과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인 신의 지혜와 사랑에 의한 조화이며 인간은 거기서 자신의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알아내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제5장 ‘악’에 대한 문제

125 '신은 악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관해서는 최고선인 신은 그 존재와 행위에 있어 최고의 완전성을 소유하므로 우유적으로 악의 원인일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신의 행위의 결함에 의해서가 아니다. 다만 신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자 할 때 그에 따른 귀결로서 어떤 것이 손상되거나 파괴되든 경우 악의 원인이라고 말한다고 토마스는 설명한다.


129 토마스에 의하면 인간은 틀림없이 자유의지를 가지기 때문에 스스로의 행위의 원인이며 주인이 나 스스로의 행위의 제1원인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잘못에 빠지기 쉬우며, 또한 자유롭다는 것이 스스로의 행위의 제1원인이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결국, 죄악은 자유로운 인간이 마치 자기 자유가 제1원인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142 토마스가 악의 본질을 선에 의거하여 탐구하며 철저하게 이해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은, 죄의 자각 또는 죄의 진정한 회개는 죄를 용서하는 신의 사랑, 즉 죄를 파괴하는 은총에 의해서 나온다는 그의 주장에서 잘 나타난다. 


143 첫째는 선에 의거하여 악의 본질을 이해하고자 한 토마스의 입장은 결국 우리에게 있는 심각한 죄악감의 현실에서 눈을 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143 둘째는 죄인이 인간인 한 은총의 활동은 죄인의 자유의지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은총을 받는 것을 통해 죄를 파괴한다는 것에 대한 보충설명이다.


제6장 모든 사람이 행복을 원하고 있는가?

164 토마스는 '신과 얼굴을 마주 본다'는 인간의 행복은 제1원인은 존재한다고 확립한 '신의 존재 논증(다섯 가지 길)'의 연장 선상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감각만을 통해서는 지성을 활용하지 못하는 현재의 삶에서 신앙의 빛에 의지하더라도 인간은 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며 단지 신은 무엇이 아닐까를 알 뿐이다. 그러나 토마스는 신의 본질을 보고 싶다는 본성적인 소망에 이끌려 오케스트라처럼 열심히 연습하여 리허설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신의 본질 직관'이라는 인간의 완전한 행복의 공연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174 '신의 본질 직관'은 '신을 보는 자' 속에 현존하는 신의 본질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신을 본다는 완전한 행복은 인간이 신성의 분유로서 신이 되는 것에 의거하지 않고서는 도달될 수 없다는 것이 토마스의 근본적인 입장이다. 도대체 누가 특히 현대의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174 오히려 그는 근본적으로 신앙만에 의해서, 이것을 긍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 신앙은 경험되고 실증될 수 있는 역사적 실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으로, 그 실재는 그가 '참 사람이며 참신'이라고 믿었던 예수 그리스도였다.


175 인간 본성에서 확정 될 수 있는 인간의 목적을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은 어렵지만 어떠한 어려움이 있어도 신앙의 빛에 의지 해서라도 시도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토마스는 확신했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내미는 토마스의 도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었는데, 토마스 자신은 '그리스도에게 내기를 걸어 봄'으로써 그의 행복설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7장 토마스의 정치 철학 -‘공동선’의 복권

196 공동선이란 어떤 공동체를 구성하는 구성원이 '공통적으로 communiter' 추구하는 선에 그치지 않고 구성원에 의해 '공유될 수 있는 communicable'선이다. 


196 공동선이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감각적 욕구대로 추구하는 선이 아니라 이성적 욕구인 의지에 의해 또는 의지에 합당한 방법으로 추구하는 선인 것이다.


201 토마스에 따르면 권리는 정의에 의거하며 정의의 덕으로서 성숙되어 완성되어야만 올바르게 확정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법률에 의하여 확정된 권리를 각자에게 동일하고 엄격하게 귀속 킴으로써 실현되는 정의는 법에 의거한 정의란 의미에서는 적법적 정의다. 하지만 토마스에 의하면 그것은 널리 알려진 정의며 정치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정의이긴 하나, 덕의 관점에서 봤을 때 정의의 가장 낮은 단계에 위치하고 있다.


202 분배 정의는 재화, 이익 혹은 부담 등을 정해진 기준에 따라 각자에게 분배하는 것과 관련된 정의로 오해 받고 있으나, 어떠한 기준에 의거하여 확정된 각자의 권리를 평등하고 엄격하게 분배하는 것은 오히려 교환 정의라고 불리는 적법적 정의다. 토마스에게 분배 정의는 사회 전체를 구성하는 구성원 각자에게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이 주어지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법을 사회 전체의 선을 고려해서 만들어내는 데 관여한다는 의미로, 각자에 귀속되어야 할 권리를 올바르게 확정하는 법의 창출에 관여하는 정의였다.


맺음말 ‘토마스주의자’가 아닌 토마스

214 토마스에게 인간은 인간을 초월하는 그것도 무한히 초월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인간을 무한히 초월함으로써만 인간이라는 것을 실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의 근본적인 전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여행하는 자이며, 신은 그런 사람이 최종적으로 더듬어 찾아가는 미지의 길이 자기쁨과 안식의 희망을 불러 일으켜 주는 목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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