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표: 불교란 무엇인가 ━ 초심자가 던지는 질문


불교란 무엇인가 - 10점
이중표 지음/불광출판사


이 책을 읽는 분들께

제1장 삼귀의(三歸依)

제2장 부처님 당시의 인도사회

제3장 정견(正見)

제4장 중도(中道)와연기(緣起)

제5장 사성제(四聖諦)와 십이연기(十二緣起)

제6장 열반(涅槃)과 해탈(解脫)

제7장 육바라밀(六波羅蜜)

제8장 사홍서원(四弘誓願)




제1장 삼귀의(三歸依)

13 부처님(佛)이라는 피난처로 나는 갑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法)라는 피난처로 나는 갑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僧伽)라는 피난처로 나는 갑니다.


여기에서 '피난처로 간다'는 말을 '귀의(歸依)'로 번역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곤경에 처했을 때, 그 곤경을 피할 수 있는 곳이 피난처이고, 우리는 그 피난처에 가서 그 곳에 의지함으로써 곤겅을 피할 수 있으므로 '피난처로 간다'는 말은 '귀의'라는 말과 다름이 없는 말입니다.


17 이와 같이 삼귀의는 생사의 우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부처님[佛]과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진리[法]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승가[僧伽]를 피난처로 심아 의지하여 살아가겠다는 맹세입니

다. 부처님의 제자는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삼보(三寶)에 의지하여 살아기는사람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제자들은 모든 행사나 법회를 하기 전에 삼귀의를 합송함으로써 자신들이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삼보를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 부처님의 제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밝히는 것입니다.


28 불교의 교리와 수행은 결국 '부처가 무엇이냐?' 다시 말해서 '참 나가 어떤 것이냐?'를 밝히는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바로 '참 나'를 함께 찾는 일입니다. 따라서 성급하게 '참 나'가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지 마시고, 일단 부처님은 '참 나'를 의미한다는 정도만 알아둡시다. 그리고 '참 나'는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온 나와는 같지가 않다는 것만 알아둡시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생사는 뜬구름처럼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40 우리나라의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이 있습니다. 팔만대장경은 대장경을 나무에 판각한 것인데, 그 목판의 수가 팔만 여 장이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우리가 불경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부처님의 설법을 기록한 경장과 부처님께서 제정하신 계율을 기록한 율장과 후대에 부파불교시대에 여러 부파에서 경장과 율장을 주석하고 이론화한 논장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삼장이라고 부르며 삼장을 대장경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의 팔만대장경은 팔만여 장의 목판에 삼장을 모두 갖추고 있는 대장경이기 때문에 팔만대장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53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보는것은 안에 있는 나라고 생각하고, 보이는 것은 밖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진실을 알지 못하고 무명의 상태에서 보는 행동을 통해 사물을 인식할 때 인식되는 사물에 대하여 그것을 보고 있는 '안에 있는 나'라는 생각이 일어났을 때 '안에 있는 나라는 생각'이 내입처이고, 내가 보고 있는 대상이 밖에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어났을 때, '밖에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외입처입니다.


53 결국 십이입처는 나와 세계를 분별하는 망상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망상에서 중생의 세계인 삼계가 벌어진다는 것이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67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할 때 나무란 범어 'namo'를 소리나는 대로 음역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한자어 남무(南無)를 불교식으로는 '나무'라고 발음한디는 점입니다. 범어 'namo'의 원뜻은  '존경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나무아미티불,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하는 것은 아미타불을 신을 믿듯이 믿는다, 관세음보살을 예수 믿듯이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아미타불을 존경한다", "관세음보살을 존경한다"는 말입니다.


70 아미타불처럼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아름답고 행복한 세상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관세음보살님처럼 다른 사람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염불은 맹목적인 믿음이 아니라 염불하는 불보살의 원력을 본받아 행복한 세상에서 고통 없이 살아가기 위한 다짐인 것입니다.


제2장 부처님 당시의 인도사회

81 니간타 나따쁫따는 고행주의자입니다. 그는 자이나교의 창시자로서 부처님과 같이 왕족 출신입니다. 그는 부처님처럼 혼란한 사회를 구원할 생각으로 출가하여 스스로 진리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에 의하면 전생의 업에 의해 현생에 받을 괴로움이 결정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현생에서 받을 괴로움을 미리 받아버리고 새로운 업을 짓지 않으면 생사의 윤회에서 저절로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그래서 그는 무조건 고행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이렇게 다양한사상이 나타나 대립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의 사상적 입장인 중도는 이러한 외도들의 사상을 비판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들이 모순대립하고 있는 입장을 그 어느 것도 취하지 않고 모두 버렸으며 이것이 중도(中道)입니다.


124 부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바라볼 때, 비로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육입처가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의미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것을 깨달아야만 육입처가 없어진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가 될 때, 부처님께서 가르쳐주신 수행을 통해 육입처를 멸할 수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수행을 선정이라고 합니다. 선정은 지관이라고도 하는데, 지는 밖으로 향해있는 산란한 마음을 안으로 모아 고요하게 하는 것이고, 관은 자신의 마음을 살펴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속에서 관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제3장 정견(正見)

125 사념처는신(身)·수(受)·심(心)·법(法)을 관하는 수행법입니다. 근래에 남방불교의 영향으로 '위빠사나'라는 수행법이 소개되고 있는데 위빠사나가 바로 사념처 수행입니다.


139 중도는 모순대립하는 두 주장은 허망한 생각에서 비롯된 사견이므로, 이 사견을 버리는것입니다. 이렇게 사견을 떠나있는 입장을 중도라고 하며 부처님의 무기, 즉 침묵은 이러한 중도의 입장에서 취해

진 것입니다. 따라서 무기의 의의를 알게 되면 중도를 이해할수 있습니다.


제4장 중도(中道)와연기(緣起)

149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상반된 가치관을 모두 배척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이들의 가치관을 배척했다는 것은 부처님께서는 이들과는 다른 세계관과 인생관이 있었다는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중도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팔정도는 부처님의 세계관과 인생관 그리고 가치관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팔정도는 정견에서 시작되어 정정에서 끝이 납니다. 이것은 팔정도의 다른 부분은 바른 선정에 들기 위한 수행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즉 부처님께서 추구한 일반이라는 최고의 가치는 바른 선정을 통해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고락중도는 일종의 수정주의, 다시 말해서 선정을 통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56 당시의 외도들이 발견하고자 한 진리는 인간과 세계의 근본이 되는 본질적인 존재였습니다. 세계와 인간은 어떤 존재로 되어있는가?를 그들은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파니샤드의 브라만과 아트만, 유물론의 4대와 같은 요소, 자이나교의 지바와 물질적 실체들은 모두 이러한 문제의 해답으로 제시된 것들입니다. 이와같이 외도들은 전변설과 적취설이라는 서로 상반된 주장으로 대립하고 있지만, 세계와 인간이 어떤 존재로 되어있는가를 문제 삼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연기설에서는 진리를 어떤 근본이 되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종교나 사상에서 태초에 어떤존재가 있어서 세상을 만들었다거나, 세상에는 불변의 실체가 있어서 이들이 모여서 세상을 이루고 있다고 하지만, 불경의 어디를 보아도 이런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158 불교의 연기설에서는 전변설이나 적취설처럼 "인간과 세계를 이루고 있는 본질적 존재는 무엇인가?"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이런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인간과 세계가 우리의 마음[십이입처]에 연기한 것인 줄을 모르고 사견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괴로움은 이러한 사견에 빠져있을때 생깁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을 누가 만드는가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그런 무의미한 논의를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 침묵했고, 그러한 무의미한 논쟁, 즉 사견에 빠져 있을 때 괴로움이 생긴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연기법을 설하신 것입니다.


164 연기법은 무아의 도리를 일깨우는 진리입니다. 삼귀의를 살펴보면서 이미 생사가 본래 없는 우리의 참모습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연기법의 도리에서 보면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나 아닌 것이 없습니다. 나와 세계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인연의 끈으로 한 몸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나와 세계, 나와 남을 분별하지 않을 때 온 우주는 그대로 ‘참된 나’입니다. 이렇게 보면 나는 태어나서 죽는 것이 아니라 생사가 없이 인연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나는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무아이지만, 인연 따라 항상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9 우리의 참모습을 살펴보면서 이야기했듯이 우리는 모두가 본래 청정한 비로자니불입니다. 다만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무명에서 갖가지 분별심을 일으켜 허망한 생사의 세계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수행은 허망한 생사의 세계를 일으키고 있는 무명과 분별심을 소멸하여 자신이 본래 생사가 없는 부처임을 자각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조 스님은 중생과 부처를 분별하고 앉아서 부처가 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회양 선사는 이것을 깨우쳐 바른 수행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기왓장을 숫돌에 갈았던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본래성불'은 이러한 의미입니다.


176 세상의 일반적인 사람들은 모두 상주 불멸하는 영혼과 같은 '자아'가 있다는 생각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거나, 그런 것은 없고, 죽으면  그만이다는 생각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자기가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모르는 채, 그 생각을 집착하여 고집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까닭은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가운데,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생각한 것, 이런 것들을 부처님께서는 경계(境界)라고 부르는데 이들 경계  가운데서 자기의 마음에 드는 것을 취해서 저마다 달리 '거짓된 나'라는 것을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 사람들은 '참된  나'의 실상을 모르는 무명 속에서 거짓된 나를 꾸며놓고 그 거짓된 나가 상주 불멸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경계를 취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이런 경계에 끌리지 않을 뿐 아니라 거짓된 나를  꾸미지도 않기 때문에 거짓된 나로 인해서 생기는 과정과 생사의 괴로움이 생기는 과정과 없어지는 과정을 아무 의혹 없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라는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을 정견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쳤으며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제5장 사성제(四聖諦)와 십이연기(十二緣起)

194 부처님께서는 실존, 즉 고성제를 자각하고 이를 극복했습니다. 그 내용이 사성제입니다. 따라서 사성제는 고성제에서 실존을, 집성제에서 실존의 원인을, 멸성제에서 실존의 초월을, 도성제에서 실존에서 초월하는 길을 보여주는 진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3 부처님께서는 십이연기의 역관에서 지각하는 존재가 있다는 결론으로 비약하지 않고, 과정을 성찰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지각하는 자아, 즉 육입은 본래 존재하는 우리의 자아가 아니라, 어떤 이름과 형태를 지닌 것을 지각할 때만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십이연기에서 명색(名色)에 의지하여 육입이 있다고 한 것은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209 집이라는 개념은 온이라는개념과 상관된 개념입니다. 온은 덩어리틀 의미하고 집은 그 덩어리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즉, 오취온이라는 덩어리는 망념이 모여서 이루어진 괴로움 덩어리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집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오취온이라는 고성제는 이렇게 집이라고 하는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오취온이 모이는 과정을 집성제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221 팔정도는 열반을 추구하는 수행자에게만 적용되는 삶의 방식이 아니라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바른 삶의 방식이라는 것을 이  경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세상사람들 가운데는 착한 일을 한다고 복을 받고 악한 일을 한다고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돈만 많이 벌고 출세만 하면 행복해진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세만을 인정하고 전생이나 내세는 부정합니다. 부모나 형제에게 해야 할 도리도 알지 못하고 수행을 통해 생사를 초월한 수행지들이 있다는 것도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알고 있는 것이 사견입니다. 


221 우리가 비록 번뇌를 끊지 못하고 나를 집착하여 내세에 좋은 세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며 살아간다고 해도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사견을 버리고 인과를 믿고, 내세를 믿으며, 부모에게 도리를 다하고, 생사를 초월한 수행자가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세간의 정견입니다. 출세간의 정견은 사성제를 바르게 사유하여 무아의 도리를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224 근본경전에서 열반을 구하는수행으로 삼십칠조도품을 설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사념처, 사정단,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입니다. 이들 37가지의 수행이 열반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조도품이라고합니다. 이들은 각기 분리되어 있는 독립된 수행법이 아니라 연속적인 수행법입니다.


224 수행의 출발점은사념처입니다. 사념처는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몸은 더럽다고 생각하고, 느낌은 괴롭다고 생각하고, 마음은 무상하다고 생각하고, 법은 무아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념처입니다.


제6장 열반(涅槃)과 해탈(解脫)

239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무소득이란 열반이 수행의 종점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즉, 열반이란 팔정도를 수행하여 얻게 되는 팔정도와는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 팔정도가 빈틈없이 완벽하게 실천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견도는 어떻게 살 것인가를 추구한 결과 팔정도가 바른 삶의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의미하고, 수도는 그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을 의미하며, 무학도는 더 이상 애쓸 필요 없이 저절로 그렇게 살게 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242 오분법신은 계신·정신·혜신·해탈신·해탈지견신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팔정도는 계·정·혜 삼학의 구조를 갖습니다. 이러 한 삼학은 수도의 단계에 있을 때를 말합니다. 무학도의 단계가 되면 정해탈과 정지가 생깁니다. 이렇게 정해탈과 정지가 생긴  무학도의 삶을 사는 것을 오분법신이라고 부릅니다. 계·정·혜 삼학은 계신·정신·혜신이 되고 정해탈은 해탈신이 되며, 정지는 해탈지견신이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계·정·혜·해탈·해탈지견의 삶을 오분법신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오분법신이 우리의 참모습, 즉 무아이며 열반입니다.


255 보고, 느끼고, 사유하고, 의도하고, 인식하는 삶을 통해서 체험한 내용을 존재로 조작하고, 자기존재를 유지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취하는 삶의 방식이 오취온이라면 계율을 지키고, 마음을 고요하게 안정시켜, 지혜롭게 사유하고, 바른 행위를 선택하여 실천함으로써 본래 생사가 없는 자신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삶의 방식이 오분법신입니다. 이러한 오분법신으로 살아가는 삶을 열반이라고 부릅니다.


258 간단히 말하면 열반은 불교 수행의 궁극적 목적으로서 구해탈을 성취한 것을 말하고, 해탈은 수행을 통해 번뇌가 소멸될 때 번뇌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합니다.


제7장 육바라밀(六波羅蜜)

328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공(空)은 무아와 업보입니다. 만약 공에서 업보를 제외한다면 공은 허무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공을 업보로 이해하면 공은 끝없는 보살행의 바탕이 됩니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作者)는 없다"는 것이 공의 의미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그 목적이 자기 자신의 존재에 있는것이 아니라 행위 그자체와 그것이 가져다줄 결과에 있습니다. 


336 무소득이란 열반과 아누다라삼약삼보리[無上正等正覺]가 수행의 종점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보살은 열반을 성취하면 중생의 교화를 그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중생 교화의 삶을 살아가게 되고, 부처님께서는 아누다라삼약삼보리를 성취하면 일체중생을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불사를 그치지 않게 된다는 것을 무소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은 이렇게 끝없는 진리의 실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빈야바라밀의 성취를 통해 영원한 삶, 무량한 수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반야바라밀, 이것이 진정한 생사의 초월입니다.


제8장 사홍서원(四弘誓願)

346 불교의 모든 법회의식은 삼귀의에서 시작하여 사홍서원에서 끝납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삼귀의는 우리의 참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사홍서원은 해탈한 마음, 즉 세간을 벗어난 마음을 의미합니다. 삼귀의와 사홍서원은 허망한 세간에서 자신의 참모습을 잃고 살아가는 중생들이 자신의 참모습에 돌아가 생사의 고해에서 해탈하여 한없는 원력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홍서원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에 법회를 마치면서 지신의 삶의 방향을 확인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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