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표: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 책 밑줄긋기/책 2012-22
- 2019. 3. 22.
붓다가 깨달은 연기법 - 이중표 지음/전남대학교출판부 |
이 책을 읽는 분들께 5
제1장 붓다의 깨달음 13
제2장 중도 31
제3장 12입처 53
제4장 18계 119
제5장 5온 153
제6장 5온과 연기설의 관계 215
제7장 12연기 241
제8장 9차제정과 8해탈 313
제9장 9차제정과 12연기 345
제1장 붓다의 깨달음
28 4성제는 이러한 연기의 도리에 의해 밝혀진 진리입니다. 연기의 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나타나는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 고성제와 집성제이고, 연기의 도리를 깨달아 괴로움을 소멸하는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 멸성제와 도성제인 것입니다.
29 불교는 이와 같은 진리에 의지하여 괴로움을 극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사람들이 연기의 도리를 이해하여 4성제를 실천함으로써 연기의 도리를 스스로 깨닫고, 인류가 함께 괴로움에서 벗어나 행복한 세상을 이룩하도록 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이와 같이 연기법과 4성제는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불교의 진리이며, 붓다의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연기법과 4성제를 깨달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제2장 중도
33 12연기의 유전문은 무명無明이 있을 때 노사가 나타난다는 12지 연기를 의미하고, 환멸문은 무명이 사라지면 노사도 사라진다는 것으로서, 정견正見에서 시작되는 8정도가 곧 환멸문입니다. 그리고 12연기는 단상중도·일이중도·유무중도와 같은 이론적 중도이고, 8정도는 고락중도라고 하는 실천적 중도입니다.
33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은 한 마디로 중도中道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12연기의 구조로 살아가는 중생의 삶을 통해 3계三界라고 하는 생사의 세계가 나타나고 있음을 중도의 입장에서 깨달았고, 8정도라고 하는 중도의 실천을 통해 생사가 사라진 열반을 증득했던 것입니다.
41 우리는 일반적으로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기 위해 행하신 12연기의 역관이 노사에서 무명까지 아무 거침이 없이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사유는 식識에 이르러 일단 중단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41 부처님께서는 우리의 생사윤회가 식識과 명색名色이 서로 조건이 되어 연기하기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태어나서 늙고 죽으며, 죽은 다음에는 다른 세상으로 가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명색名色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식, 즉 명색을 조건으로 하고 있는 식에 의존하여 다시 명색이 나타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제3장 12입처
65 6입처는 6근이 아니라 중생들의 허망한 자아의식이기 때문에 12연기에서 무명이 사라지면 허망한 자아의식인 6입처가 사라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69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는 것을 자신의 내부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고,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고, 생각되는 것을 외부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보는 놈을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안입처라고 하고, 보이는 것을 밖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색입처라고 합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듣는 놈을 자아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이입처라 하고, 들리는 것을 밖에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마음을 성입처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는 놈에서 생각하는 놈까지를 나의 몸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고 있는 마음이 내6입처이고, 보이는 것에서 생각되는 것까지를 나의 몸 밖에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는 마음이 외6입처입니다.
73 부처님은 업보는 인정했지만 업을 지어서 그 결과를 받는 자아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불교의 무아사상입니다.
74 몸 안에 자아가 있어서 그것이 세상을 보고 있다는 생각이나, 그 자아에게 보이는 것이 몸 밖에 존재하고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는, 이러한 허망하고 거짓된 생각을 없애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허망한 생각을 버리고 세상을 보면, 보는 놈과 보이는 것은 별개의 사물이 아니라, 보는 전재와 보이는 존재로서의 작자作者는 없지만, 보는 업을 통해 그 보로서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함께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82 부처님은 외도의 사견에 침묵하면서, 자신은 항상 4성제를 이야기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불교의 모든 교리는 4성제의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2입처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처님은 세간은 괴롭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세간은 바로 12입처를 의미한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와 같이 12입처가 곧 고성제입니다. 이 12입처는 허망한 생각이 욕탐에 의해 집기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이 집성제를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12입처가 사라진 것이 멸성제이고, 이러한 12입처의 집과 멸을 바르게 알아, 욕탐을 없애는 바른 길, 즉 8 정도가 도성제입니다. 우리가 불교 교리를 공부할 때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부처님의 모든 교리는 이렇게 4성제의 구조라는 점입니다.
90 외도들의 전변설이나 적취설은 객관적인 외부의 존재를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것으로 보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이러한 객관적인 존재들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자연대상은 우리와 무관하게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연기설은 우리의 마음을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것으로 보는 사상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것으로 보는 연기설의 입장에서는, 자연세계를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인식된 것으로 봅니다. 뿐만 아니라 자
연대상과 함께 그 속에 존재하고 있는 자아도 존재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인식하는 것으로 봅니다. 12입처의 외입처와 내입처는 바로 이러한 연기설의 입장에서 본 세계와 자아의 모습입니다.
100 부처님께서 깨달은 것은 바로 이렇게 세계와 자아가 우리에게 무상하고 괴롭고, 변화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이 세간이며, 이것을 부처님은 5온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5온이 바로 세간이며, 세간법입니다. 이렇게 모든 존재는 우리에게 인식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인식된 것을 부처님께서는 법法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존재라고 부르는 것을 부처님은 법이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101 6근은 우리의 인식활동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6경은 우리의 인식활동을 통해 인식되는 대상을 의미합니다. 6근 가운데 안·이·비·설·신, 5근은 우리의 지각활동입니다.
116 6근은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는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러한 삶은 멸진정을 성취하여 무명이 사라졌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고 들으며 살아가는 가운데, 중생들은 보고 들어서 보이고 들리는 것이 있으면, 보는 듣는 것은 몸 안에 있는 자아이고, 보이고 들리는 것은 몸 밖에 있는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몸 안에 있는 자아라고 생각하는 허망한 생각이 내6입처이고, 몸 밖에 있는 세계라고 생각하는 허망한 생각이 외6입처입니다. 따라서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무아의 도리를 깨달은 사람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사라집니다. 멸진정에서 6근은 사라지지 않으나 6입처는 사라지며, 12연기의 환멸문에서 무명이 사라지면 6입처는 사라지지만, 6근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제4장 18계
122 불교의 무아설은 업보를 부정하는 사상이 아니라, 업보만을 인정하는 사상입니다.
124 사물을 분별하는 의식은 우리의 몸 속에 존재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봄으로써 생기고, 들음으로써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각각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고 부르며, 이것을 6식六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멸진정에서 멸한다고 하는 지각과 사유는 이렇게 12입처를 인연으로 해서 생기는 6식과 같은 허망한 의식입니다.
133 12입처가 6근·6경이 아니듯이, 18계도 6근·6경·6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내6입처·외6입처·6식을 18계라고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왜냐하면 계는 입처와 의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134 그렇다면 12입처에서 6식이 발생한 마음을 부처님은 왜 18계라고 하는 것일까요? 12입처는 욕탐에 의해 장차 자아와 세계로 취해질 허망한 마음입니다. 내6입처와 외6입처는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는 가운데 일어난 생각들이 사라지지 않고 욕탐에 묶여서 모여 있는 상태로서, 아직은 자아와 세계로 취해진 것이 아닙니다. 12입처가 자아와 세계로 취해지기 위해서는 먼저 이들이 분별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12입처가 있기 때문에, 이것을 분변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마음에 6식이라는 분별심이 생기면, 12입처와 6식은 이 분별심, 즉 식에 의해서 각기 다른 것으로 분별됩니다. 분별심이 12입처와 새로 발생한 6식 사이에 경계선을 그어 18 종류로 구분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6식의 발생에 의해 12입처의 상태인 우리의 마음이 18계역으로 구분된 상태가 18계입니다.
제5장 5온
168 촉을 인연으로 연기한 허망한 생각들이 모여서 5온으로 형성됩니다.
169 6계는 이렇게 사람들이 존재를 구성하는 요소로 생각하고 있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6계는 18계에서 촉이 발생하여 18계를 존재로 느낌으로써 우리가 갖게 된 존재의 세계입니다. 18계가 의식의 세계라면, 6계는 존재의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촉은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18계라는 의식의 세계를 6계라는 존재의 세계로 드러내는 우리의 마음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촉을 통해 이렇게 의식의 세계가 존재의 세계로 느껴지면, 그 존재에 대하여 고락을 느끼게 되고, 그 존재에 대하여 사유하게 되고, 그 존재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을 부처님은 촉을 연하여 수, 상, 사가 함께 생긴다고 하신 것입니다.
174 우리가 나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색, 수, 상, 행 식, 즉 5온입니다. 우리는 육체, 감정, 이성, 의지, 의식, 다섯 가지를 나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다섯 가지 자신의 존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5온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촉에서 생긴 6계와 수, 상, 사를 우리가 끊임없이 취하여 자신의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는 망상덩어리입니다. 우리가 몸을 변함없이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음식물을 계속 섭취하기 때문입니다. 감정이나 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촉에서 생긴 수, 상, 사를 계속하여 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자선의 존재라고 인식하게 된 것입니다.
179 식이 머물면서 자라날 때 명색이 나타난다는 말은, 식이 머물면서 자라나기 때문에, 중생들이 이름과 형태로 된 허망한 존재의 세계로 빠져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신의 존재나 세계의 존재와 같은 존재의 세계를 허구적으로 만드는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식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5온은 식에 의해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179 5온은 이렇게 식에 의해 실재하는 대상으로 인식된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입니다. 식은 이렇게 촉을 통해 형성된 의식을 대상으로 인식하면서, 인식하는 자신까지 대상화합니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하는 의식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식이 대상을 인식하면서, 대상을 인식하는 식 자신도 대상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203 나의 존재와 나의 세계는 나의 삶의 자취인 셈입니다. 이렇게 삶의 자취가 모여 존재화한 것을 유의라 하고, 존재화하기 이전의 본래적인 삶을 무위라고 합니다.
제6장 5온과 연기설의 관계
222 12연기의 무명과 행은 과거의 5온에 의한 삶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5온에 의한 삶을 통해 식이 증장하면, 새로운 5온이 형성됩니다. 이것이 12연기의 식과 명색입니다. 따라서 12연기의 식과 명색은 현재의 5온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새롭게 형성된 식과 명색에 바탕을 두고, 보고, 듣고, 만지고 생각하면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을 나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12연기의 6 입처입니다. 6입처가 나타나면 촉이 나타나고, 촉을 통해 외부에 존재한다고 느껴진 사물에 대하여 느끼고, 느낀 것 가운데 애착하는 것을 취하여 새로운 미래의 5온을 구성하는 것이 12연기의 촉, 수, 애, 취입니다.
226 식은 그 속에 5온으로 구성될 요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요인은 중생의 삶을 통해 형성된 것입니다. 중생의 삶을 통해 형성된 경험의 내용들은 5온으로 구성될 요인이 되어 식 속에 종자로 간직됩니다. 그러다가 인연을 만나면, 식 속의 종자가 새로운 5온으로 구성됩니다. 이것이 유식사상의 핵심이론인 종자설의 원형입니다. 아뢰야식 속에는 종자들이 들어있는데, 그 종자들은 현실적인 삶을 통해서 형성되고, 이렇게 삶에 의해 형성되어 아뢰야식 속에 간직된 종자는 인연을 만나면 현실적인 삶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유식사상의 종자설입니다.
235 5온은 12입처를 인연으로 발생하고, 인연에 의해 발생한 5온은 무명의 상태에서 사라지지 않고, 그 5온에 의지하여 새로운 5온이 연기합니다. 이와 같이 인연은 5온의 발생을 설명하는 말이고, 연기는 5온의 중장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239 부처님께서 5온에 욕탐이 있는 것이 5취온이라고 하신 것은 이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5취온은 5온 가운데 중생이 자아로 취한 온을 의미하며, 연기설에서의 유有가 곧 5취온입니다. 결론적으로, 5취온은 중생을 의미하고 5온은 중생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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