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지 스님: 불교인문주의자의 경전읽기


불교인문주의자의 경전읽기 - 10점
일지 스님 지음/어의운하


궁극의 화두인 붓다 006

불교에서 길을 묻다 016

업業 026

인간人間 036

신앙信仰 046

병과 건강 056

경전經典 066

선禪 076

연기緣起 086

해탈解脫 096

무아無我 106

무량수경이 설하는 다섯 가지 대악大惡 116

회심回心 126

보리심菩提心 136

인욕忍辱 146

제법실상諸法實相 156

정진精進 166

보살菩薩 176

전법傳法 186

신구의 삼업三業 196

몸 206

마음의 평화 216

아소카의 법 226

정토淨土 236




9 불교는 붓다 석가모니라는 한 비범한 인간의 생애에서 성취된 정신과 윤리 성의 구체적인 통합에서 시작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한 인간으로서 붓다 개인의 삶에서 성취된 해탈의 사상과 숭고한 인류애는 불교의 변치 않는 종교적 척도를 나타내고 있으며, 불교는 그 분의 깨달음과 행동을 원천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부처님, 그 분은 과연 어떤 인간이었으며 어떤 삶을 추구 했는가?"라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야말로 우리 모두의 궁극의 화두이다.


11 부처님은 스스로 인간임을 선언한다. 불교는 신의 존재를 상정하거나 신의 존재를 논증하는 것을 철학적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불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이라고 말하지만, 이와 같은 규정은 어디까지나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유신론을 상대적으로 대비하는 기독교적 입장에서 생겨난 것일 뿐 "불교는 무신론이다"라는 언급 자체가 상당히 애매한 규정인 것이다. 물론 불교는 "사람은 신앙으로써 거센 흐름을 건너고 정진으로써 바다를 건넌다. 근면으로써 고통을 초월하고, 지혜로써 완전한 청정의 경지에 도달한다"라고 설할 만큼 신앙을 중시하며 부처님과 교법과 승가에 귀의하는 삼귀의를 기초적인 신앙 의례로 삼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적어도 불교도에 있어 종교의 의미는 타율적인 심판을 내리는 절대자에 대한 피조물로서의 예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인간 생활의 궁극적인 문제에 주목하고, 삶의 여 러 갈등과 문제들을 해결하는 고차적인 신앙과 수행의 체계라는 점이다. 불교도들에게 있어 신앙의 의미는 단순한 믿음만이 아니라 지혜의 증장에 필요한 덕목이며 마음의 청정을 증득하는 기본 전제이다.


33 매일 벌어지는 각 사건의 조각마다에는 인과가 담겨 있고, 그 사건의 조각들이 또 다른 업의 물결을 일으키면서 누구의 삶이든 삶의 모든 순간은 부메랑이 언제나 자신이 던진 지점으로 되돌아오듯dl, 인과응보의 부메랑처럼 다시 날아와 꽂히는 것이다. "업보의 그물에 묶여 저승의 장부에 악업만이 늘어나는구나"라는 한탄만으로는 부족하다. 모든 불교 경전에서 설해지는 업의 교리는 체념이 아니라 자기 책임과 자유의 원리이기에 깊은 통찰을 필요로 하는 삶의 지혜이다. 그러므로 선이 설하는 깨달음도, 화엄의 일체유심조도 모두 업의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말하자면 업의 사상 위에 건축된 지혜의 궁전인 것이다.


35 불교는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과 번뇌를 정화하고 안심을 체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업과 번뇌는 마음을 어지럽히는 격정이며, 우리는 아집과 격정 때문에 외부에서 주어지는 데이터를 잘못 해석하고 행동한다. 출력의 오류 때문에 우리는 고통받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의 깨달음을 근원적으로 장애하는 무명이다. 무명이란 환상, 자기기만에 사로 잡혀 살아가는 상태이며 이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규모의 심리적 물리적 자원을 헛되게 소비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고통받는 원인이다. 이 무명이 전 인류적인 탐욕과 증오를 야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47 우리는 고해 속의 물고기인 것이다. 고해 속의 물고기와 같은 삶은 몹시도 괴롭다.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는 이 고해에서 표류하는 중생들은 역설적으로 깨어 있으면 깨어 있을수록 삶은 더욱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저 옛 인도의 사문들은 세간을 거부하는 옷을 입고, 머리를 깎고 출가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욱 자명한 사실은 불교가 인간 찬미의 종교 만이 아니라 인간의 어두운 이면을 너무 깊이 아는 가르침이며, 인간의 끝없는 악업을 고발하는 경전의 행간 속에 담겨있는 인간의 어둠을 음미하면 몸서리쳐지는 전율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69 경전은 불교의 표상이며 불교가 전해진 광대한 지역 모든 시대의 문화적 성과와 지혜의 보고다. 또한 경전은 불교가 전망하는 인간의 삶과 그 의미, 인간의 운명과 고통, 해탈에 관한 진리의 말씀을 담고 있다. 저 심원한 불교교리도 불상도, 절도, 탑도, 불교의식도 모두 경전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태지의는 보살계의소에서 "경전은 바로 불모이니 마땅히 공양하지 않으면 죄를 범한다"라고 설한다. 경전을 읽지 않는, 수지독송하지 않는 불교란 부처님의 말씀이 없는 불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현대 한국의 불교는 경전을 읽지 않아도 되는 기형적인 신앙 체계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마음만 깨달으면 되지 경전에는 별 것이 없다는 오만은 그 자신의 비극이기도 하지만 불교의 비극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읽고 자신의 인생과 신앙을 성찰하며, 현실을 전망하는 불교도로서의 혼이 없다면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혼의 죽음으로 인한 사상의 퇴행은 바로 언어의 죽음이다. 죽은 언어의 바다에서 불교의 가르침은 생동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욱이 이미 죽어 버린 언어로써 살아있는 포교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보다 더한 노고를 바쳐 경전을 읽고 대중들이 수지 할 수 있는 불교의 사상과 신앙, 문화와 의례를 생성하고 조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을 읽는다는 것은 불법의 빛이 번져간 불교 원래의 무늬를 복원하는 작업인 것이다.


111 삼독의 사슬에 묶여있는 나의 자아는 슬프다. 번뇌에 오염된 아집에 사로잡혀 덧없는 존재들을 영원하다고 생각하고 집착하며 소유하고자 하는 끝없는 욕망에 시달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집착과 소유욕이 강해질수록 거기에 다시 자신의 탐욕을 합리화시키는 문자 언구로 욕망을 치장하지만 삶의 고통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의 강도는 더욱 높아져 간다. 그러므로 초기 불교 이래 불교의 현인들은 인간의 무한정한 탐욕과 무지가 결국 인간으로서의 의식과 자유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켜 나가며 심신의 이중고를 불러 온다는 것을 지적해 왔으며, 불교가 설하는 무아의 교리는 이 지구상의 어떤 종교와 사상보다도 가장 직접적으로 오염된 자아와 그 결과에 대한 성찰을 요청하는 가르침이다. 나는 이 가르침을 해탈의 길이라고 믿는다.


129 제5대악은 술에 탐닉하고 자신은 미식을 쫓으며, 가족과 스승, 이웃을 돌보지 않는 것이다. 불교의 출발점은 언제나 인간의 구체적인 실존에서 시작하며 윤회의 원인인 업과 번뇌를 초극하는 수행이다. 업과 번뇌, 무명에 현혹되어 있는 우리는 불건강한 탐욕과 분노의 노예가 되어 막대한 규모의 심리적, 물질적 자원을 과도하게 소모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이 고통받는 이유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자연에 대한 인간의 탐욕과 투쟁을 가속화 시키고 있다. 불교는 인간이 삶의 환상을 깨닫고 아집을 탈각시켜 버림으로써 우리의 인간적 능력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147 우리는 가끔 스스로 삶을 내면으로부터 성찰하고 인간의 무력함과 이기심과 욕망의 추한 면들을 스스로 깨닫고 진실한 삶의 길을 구하려는 노력을 결심하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젊은 날 세웠던 수 없는 결심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무뎌져 가더라도 역시 이 결심은 쉽게 버릴 수 없는 중요한 자각이다. 즉 우리가 아무리 욕망과 이기심의 유혹 앞에 쉽게 굴복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과 이기심의 집착에서부터 벗어나려고 강렬하게 희구한다. 그 결심이 서는 자리에서 바로 불교는 시작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욕망과 청정, 이기심과 애타심이 서로 원초적으로 교차하는 삶의 번뇌에 시달리고 있더라도 그 의식의 깊은 곳에는 불성이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불성의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는 일이 바로 대승 보살의 수행이다.


159 남을 미워하거나 분노나 증오에 쉽게 사로잡히는 것은 인간의 질긴 숙업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에 분노의 화살이 박혀있는 동안은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될 수 없으며 수행에 필요한 바른 지견을 갖출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움·분노·증오의 실체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 인욕이라고 해서 단순히 참는다는 것은 아니다. 인욕에는 여러 차원이 있어서 유식론에서는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타인의 악행을 참고 용서하는 인욕인 '내원해인'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꺼이 함께 하는 대수고의 인욕인 '안수고인', 모든 일에 대해 기뻐하거나 노여워함도 없이 진리의 본성이 본래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깨닫는 인욕인 '제찰법인'을 설한다. 이 제찰법인이야말로 무생법인인 것이다.


217 초기 불교의 비구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은 자신작증하려는 신념이 매우 강한 분들이었다. 그들은 그다지 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에 자신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세속을 나온 이 반항자들은 온몸을 흙투성이, 피투성이가 되어 헐벗고 굶주리며 햇볕에 그을리면서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하는 일념으로 인도의 산과 강, 황무지와 거리를 떠돌았다. 당연히 목숨을 건 고행도 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여러 불교 문헌에 등장하는 붓다의 우수한 제자들을 단순히 초기 불교 교단의 일원으로서뿐만 아니라 붓다(기원전 624-544)와 동시대의 인도에 나타나 철학자로서 수도자로서 살아갔던 인간으로 파악하고 싶다. 그들은 동시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보다 훨씬 치열하고 준엄하게 철학의 길을 걸어 갔으며 수도자로서의 삶을 산 인간들이다.


242 불교도들은 누구나 아미타 부처님의 정토를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 「무량수경」 「관무량수경」 「아미타경」과 같은 정토 경전은 세상의 오염과 미혹이 존재하지 않는 아미타불의 정토를 설한다. 정토란 온갖 행원과 불법의 광명으로 장엄된 부처님의 나라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불교 역사의 어디에나 모든 방면에 정토에 대한 열망이 숨 쉬고 있듯이 우리나라의 불교는 현세의 지복과 깨달음을 추구하면서도 정토에 대한 열망을 아주 깊은 정서로 다듬어 해탈의 사상으로 승화시켜 왔다. 현대의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 정토 불교의 깊은 정신성과 신앙을 망각한지 이미 오래이다. 정토신앙의 본질은 구원이다. 정토 신앙은 예토의 오염을 반성하고 자신의 나약함을 진솔하게 인정한다. 결국은 소멸 할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로서 아미타 부처님의 대자비와 본원제에 귀의하여 정토를 희구한다. 정토신앙은 나약한 인간이 절대자의 힘을 빌리는 연약한 신앙일까. 아니다. 숙업의 올가미에 묶여있는 연약한 인간, 인간이 추구하는 욕망의 어두운 나락을 응시하여 스스로의 죄업을 참회하고 탐욕과 무지, 항상 죽음의 그늘에 덮여 있는 유한한 예토에서 정도를 구현하려는 신앙이다. 인간 스스로의 나약함과 유한함을 진솔하게 인정한다는 것은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이 작은 깨달음이야말로 정토 신앙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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